|
죄와 벌 5부 4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가슴속에 그토록 큰 공포와 고통을 안고 있으면서도 루쥔에 대해서는 용감하도록 적극적인 소냐의 변호사였다. 그러나 이미 아침나절에 그토록 심한 고통을 겪은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쌓여버린 자기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뜻에서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을 오히려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냐를 변호하고 싶은 그의 노력에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면 문제로서 그의 머리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무서울 만큼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눈앞에 다다른 소냐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누가 리자베타를 살해했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무서운 고통을 예감하고, 그것을 털어버리려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그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집을 나서면서 ‘자, 이번엔 무슨 말을 하지, 소피야 세묘노브나?’라고 외쳤을 때는, 아직도 루쥔에 대한 승리감이 가시지 않은 채 그 어떤 용감하고 도전적인 흥분 상태에 휩싸여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카페르나우모프의 집에까지 이르자 그는 갑자기 힘이 빠지고 마음속에 공포를 느꼈다. 그는 ‘누가 리자베타를 살해했는지 꼭 말해야 할까?’하는 괴의한 의문을 품으면서, 망설이듯 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의문은 실로 기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동시에 그는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비록 일시적이나마 이 순간을 연장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불가능한 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필연성에 대해서 자기가 무력하다는 괴로운 의식에 그는 거의 압도될 지경이었다. 그는 더 생각하거나 고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급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지방에서 소냐를 보았다. 그녀는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 있다가, 라스콜니코프를 보자 후다닥 뛰어 일어나서 고대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맞으려고 걸어 나왔다.
“당신이 와 계시지 않아더라면 정말 난 어떻게 됐을까요?” 방 한가운데서 두 사람이 마주서자 그녀는 재빨리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분명히 이 말만은 한시바삐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를 기다린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탁자 옆으로 와서 방금 소냐가 일어선 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어제와 똑같이 그에게서 두 걸음쯤 앞에 와서 섰다.
“어떻소, 소냐?” 그는 말했으나, 문득 자기 음성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건 ‘사회환경과 거기 관련된 습관’에 뿌리박고 있는 거요. 당신은 아까 그걸 깨달았소?”
고뇌의 빛이 소냐의 얼굴에 나타났다. “제발 어제 같은 말은 말아주세요, 그렇잖아도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까요.....”
그녀는 이처럼 비난 비슷한 말을 하고, 혹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나 않았나 해서 급히 웃어 보였다.
“나는 바보라 거기서 그냥 뛰쳐나왔어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요? 나는 당장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었지만....어쩐지 곧 ....당신이 오실 것만 같아서.”
그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그들에게 집에서 나가달라고 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진실을 찾으려고’ 어디론지 뛰어나갔다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어머나, 이를 어쩌면 좋아!” 소냐는 외쳤다.
“그럼 빨리 가봐야죠.”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망토를 집어들었다.
“언제나 똑같은 말만 하는군요!”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초조하게 말햇다.
“당신 머릿속엔 그 사람들 생각밖에 없으니 말이오! 나하고도 좀 같이 있어줘요.”
“하지만....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런 식으로 집을 뛰쳐나간 이상 반드시 당신 생각을 할 거요. 이제 당신한테 들를 테니 보시오. 그때 당신이 여기 없으면 도리어 나쁘지 않겠어요........”
소냐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마룻바닥만 내려다보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사실 이번에는 루쥔이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하고 그는 소냐 쪽은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만일 그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런 타산으로 당신을 친 것이라면 당신은 감옥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나하고 레베쟈트니코프가 그 자리에 없어더라면 말이오! 그렇잖소?”
“그래요.”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불안한 듯이 방심한 어조로 이렇게 되풀이했다.
“사실 말이지 나는 거기 없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오! 더욱이 레베쟈트니코프가 거기 나타난 건 정말 우연이었으니까.”
소냐는 잠자코 있었다.
“만일 감옥에라도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시오. 어제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소?”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잠시 기다렸다.
“나는 당신이 또 ‘아아,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만두세요!’라고 외칠 줄 알았는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웃기 시작했으나, 어딘지 어색하게 보였다. “왜 또 말이 없습니까?” 잠시 후 그는 또 물었다.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할 게 아니오? 나는 레베쟈트니코프가 말하는 하나의 ‘문제’를 당신이 어떻게 해결할지, 그걸 무척 알고 싶은 거요(그는 머리가 혼란해지는 모양이었다). 보시오, 당신이 루쥔의 계획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때문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아이들도, 그리고 덤으로 당신까지도 함께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덤이라는 거요- 파멸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즉 그런 흉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소. 폴렌카도 마찬가지죠...그 애도 역시 같은 길을 밟게 될 테니까. 자, 여기서 말이오, 만일 이때 모든 것이 당신 결심 하나에 달려 있다면, 즉 이 세상에서 루쥔과 그 아이들 중 어느 쪽이 살아야 하느냐? 루쥔이 살아서 추잡한 일을 할 것이냐? 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죽어야 하느냐? 이렇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결하겠소? 둘 중 어느 쪽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걸 묻고 싶은 거요.”
소냐는 불안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간접적인, 멀리서 슬며시 접근해 들어오는 듯한 말 가운데 무언가 특수한 것이 숨어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전부터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시리라는 예감이 들었어요“하고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좋군요. 하여튼 그렇다 치고, 당신은 어떻게 해결하겠소?“
”왜 그런 있을 수도 없는 일에 대해 물으시는 거죠?“ 혐오의 빛을 디면서 소냐는 물었다.
”그럼 루쥔이 살아서 추잡한 짓을 계속하는 게 좋다는 말이군요! 당신은 그것조차 해결할 용기가 없소?“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왜 물어선 안 될 말을 물으시죠?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세요? 그런 일이 내 결단에 달려 있다는 건 말도 죄지 않는 소리예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살아선 안 된다는 그런 심판의 권리를 대체 누가 나한테 주었어요!“
”하느님 뜻을 거기 개입시킨다면 말하나 마나겠지.“ 라스콜니코프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보다도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하고 소냐는 괴로운 표정으로 외쳤다. ”당신은 또 엉뚱한 데로 이야기를 끌어가려 하는군요. 당신은 다만 나를 괴롭히기 위해 여기 오셨나요!“
그녀는 더 참지를 못하고 갑자기 세차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우울한 우수에 잠긴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5분쯤 지났다.
”하긴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몰라, 소냐.“ 이윽고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안간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고의적인 뻔뻔스러움도, 허세로밖엔 보이지 않는 도전적인 태도도 사라져버렸다. 음성까지 갑자기 약해졌다. ”어제 나는 오늘 용서를 빌러 오진 않겠다고 말했지. 그러나 지금은 거의 용서를 비는 듯한 말로 얘기를 시작했어....내가 루쥔과 하느님의 뜻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나는 용서를 빈 거야, 소냐.“
그는 빙긋이 웃으려고 했지만, 그 창백한 미소에는 무언가 끝을 맺지 못한 맥없음이 서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이상한 감정이, 소냐에 대한 그 어떤 날카로운 증오감이 그의 마음을 스쳐 갔다. 그는 스스로 자기 감정에 놀라며 머리를 번쩍 쳐들고 뚫어질 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유심히 보고 있는, 불안에 찬 괴로울 만큼 애처로운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거기엔 사랑이 어려 있었다. 그의 증오감은 환영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한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다만 그 순간이 왔음을 뜻했다.
그는 다시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별안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냐를 흘긋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그녀의 침대로 옮겨 앉았다.
이 순간은 라스콜니코프의 감각 속에서, 그때 그가 노파 뒤에 서서 도끼를 고리 끈에서 빼 들고 이젠 ‘한순간도 주저할 수 없다’고 느끼던 순간과 무섭게도 흡사했다.
”왜 그러세요?“ 소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그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도대체 지금 자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 자신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침대 위에 나란히 걸터앉고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는 심장이 심하게 고동쳐서 금방 마비될 것만 같았다.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여자에게로 돌렸다. 그 입술은 무슨 말을 하려고 애쓰면서 힘없이 일그러졌다. 공포감이 그녀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아니, 왜 그러세요?“ 그녀는 흠칫 몸을 도사리면서 이렇게 되풀이했다.
”소냐, 아무것도 아니야. 놀랄 건 없어, 아무것도 아니야. 잘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의식을 잃은 열병 환자처럼 이렇게 중얼댔다.
”왜 나는 여기 와서 당신만을 괴롭히는 걸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는 불쑥 덧붙였다.
”대체 왜 그럴까? 나는 아까부터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어, 소냐......“
그는 사실 15분 전엔 이 질문을 자신에게 했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온몸에 계속적인 전율을 느끼면서 완전한 허탈 상태에 빠진 채 거의 정신을 잃고 이 말을 하고 있었다.
”아아, 당신은 무척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괴로운 듯이 그녀는 말햇다.
”모든 게 다 바보 같은 짓이야!.....그런데 소냐(그는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파리하고 힘없는 표정으로 한 2초 동안 비시시 웃어 보였다)....어제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하겠다고 했는지 기억하나?“
소냐는 불안한 얼굴로 기다렸다.
”나는 어제 돌아갈 때 어쩌면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내일 또 오게 되면 당신한테....누가 리자베타를 죽였는지 알려주겠다고 했어.“
그녀는 갑자기 온몸을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그걸 말해주려고 온 거야.“
”그럼 당신은 어제 정말....“소냐는 간신히 소곤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아시죠?“ 퍼뜩 정신이 드는 듯 그녀는 빠른 어조로 물었다.
소냐는 괴롭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알고 있어.“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찾아내셨나요, 그 사나이를?“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니, 찾아낸 건 아냐.“
”그럼 어떻게 그걸 아세요?“ 다시 1분쯤 잠자코 있다가ㅏ 이번엔 드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여자 쪽으로 몸을 돌려 뚫어지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 맞혀봐.“ 조금 전처럼 맥없이 일그러진 미소를 디며 그는 이렇게 말햇다.
소냐는 온몸에 경련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아아, 당신은.....나를....왜 당신을 나를 그렇게.....놀라게 하세요?“ 어린애처럼 애처롭게 웃어보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나는 그 사나이와 막역한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겠지....내가 그를 알고 있는 이상.“ 라스콜니코프가 이제는 눈을 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응시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 사나이는 리자베타를....죽이려 했던 건 아냐....그는 그 여자를....우연히 죽이게 되었을 뿐이야. 그는 노파만을 죽이려 했어...노파가 혼자 있을 때....그런 생각으로 갔던 거야....그런데 거기 리자베타가 들어왔어....그래서 그만 그 여자까지 죽여버리고 말았지.....“
다시 무서운 1분이 흘러갔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래도 알아맞히지 못하겠나?: 높다란 종류에서 껑충 뛰어내리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냐는 거의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생각해봐.”
이렇게 말하자 예전에 경험했던 그 낯익은 감각이 또다시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그는 소냐를 바라보는 순간 그 얼굴에서 리자베타의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도끼를 들고 다가갔을 때 리자베타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그는 선명히 상기했다. 그녀는 얼굴에 어린애 같은 경악의 빛을 띠고 한 손을 앞에 내밀고는, 그가 다가감에 따라 벽쪽으로 뒷걸음질을 쳤었다. 그것은 갑자기 무엇에 놀란 어린애가 자기를 놀라게 한 상대방을 불안스레 바라보면서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조그만 손을 앞으로 내밀고 비슬비슬 뒷걸음질을 치는 것과 똑같았다. 지금 소냐에게도 거의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와 똑같은 허탈한 표정으로 똑같은 경악의 빛을 띠면서, 그녀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끝으로 가볍게 그의 가슴을 떼밀고는 조금씩 몸을 뒤로 빼면서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몸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갔으나, 그 얼굴로 쏠린 그녀의 시선은 점점 더 굳어져갈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공포는 갑자기 그에게로 옮겨졌다. 똑같은 모양으로 그도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거의 똑같은 어린애 같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이젠 알았겠지?” 마침내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아아!” 그녀의 가슴에서 무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맥없이 침대에 쓰러지며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그러나 이내 곧 몸을 일으키더니 재발리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두 손을 잡고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으스러지게 꼭 그러쥐면서 또다시 못 박힌 듯 꼼짝도 않고 그의 얼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 최후의 절망적인 눈초리로 그녀는 무언가 한 가닥 희망이나마 발견하여 잡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없었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한참 뒤에 이때 일을 회상했을 때도 그녀는 언제나 이상하고 신기한 느낌이 들었는데, 도대체 그녀는 무슨 근거에서 이미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대뜸 단정해버렸을까? 예를 들어 그녀가 그런 종류의 것을 예감했다고는 차마 그녀로서도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그가 그 정도의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을 확실히 전부터 예감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만둬, 소냐!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아줘!” 그는 괴로운 듯이 애원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고백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벌덕 일어나더니 두 손을 맞비비면서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갔으나, 몸을 돌려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와 거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무엇에 찔린 듯이 몸을 부르르 떨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저도 모르게 그의 앞에 몸을 던져 무릎을 꿇었다.
“아, 어쩌자고, 어쩌자고 당신은 그런 짓을 하셨어요!”하고 그녀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 몸을 던지며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라스콜니코프는 흠칫 몸을 비키고는 서글프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여자야, 소냐.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도 그런 나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다니. 당신은 아마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아녜요, 아녜요, 이 넓은 세상에서 지금 당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그녀는 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정신없이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갑자기 히스테리라도 일으킨 듯이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햇다.
이미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감정이 그의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들어 대번에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도 그 감정에는 반항라려 하지 않았다. 눈물 두 방울이 눈에서 흘러나와 속눈썹에 맺혔다.
“그럼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는 거지, 소냐?” 한 가닥 희망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그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 네,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어디든 따라가겠어요! 아아, 하느님!....나는 얼마나 불행한 여잘까요! 왜, 왜 좀 더 빨리 당신을 알지 못했을까요! 왜 당신은 좀 더 빨리 나한테 와주지 않으셨어요! 아아!”
“그래서 이렇게 오지 않았느냐 말이야.”
“지금 오시다니! 지금 와서 무얼 해요! ....함께....우리 함께!”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듯이 다시 그를 끌어안으면서 되풀이했다.
”당신과 함께라면 징역이라도 가겠어요!“
그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킨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입술에는 아까처럼 증오에 찬, 거의 오만스럽기까지 한 미소가 또다시 퍼졌다.
”난 말이야, 소냐, 아직 징역 갈 생각은 없는 지도 몰라“하고 그는 말했다.
불행한 사나이에 대한 최초의 감성적인 괴로운 동정이 가라앉자, 다시금 살인자라는 끔찍스런 관념이 그녀의 가슴을 때렸다. 돌변한 그의 어조에서 그녀는 문득 살인자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움찔하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어찌하여, 무엇을 위해서 이런 사건이 저질러졌는지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의문들이 일시에 그녀의 의식 속에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정말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살인자라니! 그럴 수가 있을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지금 어디 서 있는 걸까!“ 그녀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듯 깊은 의혹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자고 당신은, 어쩌자고 당신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건가요? 정말로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저 돈을 빼앗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이젠 그만둬줘, 소냐!“ 그는 피곤한 듯이 짜증 섞인 어조로 대꾸했다.
소냐는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먹을 것이 없었군요! 당신은....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그렇죠?“
”아냐, 소냐, 그게 아냐“ 그는 외면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난 그렇게까지 굶주리지 않았어....물론 어머니를 돕고 싶었지. 하지만....그것도 완전한 이유는 못 돼.....나를 더 괴롭히지 말아줘, 소냐!“
소냐는 손뼉을 탁 쳤다.
”그럼 모든 게 사실이란 말인가요! 아아, 그게 어떻게 사실일 수 있어요!....누가 그런 걸 사실로 믿겠어요? 자기 돈을 털어서 남을 도와 주는 사람이 돈을 빼앗으려고 살인을 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아아!“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그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주신 돈도....그 돈도...아아, 그 돈도 역시......“
”그건 아니야, 소냐.“ 그는 급히 말을 막았다. ”그 돈은 그렇지 ㅇ낳아, 안심해! 그건 어머니가 어느 상인을 통해서 나한테 보내준 돈이야. 나는 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그 돈을 받았지만, 그날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한테 준 거야. 라주미힌이 봐서 알고 있어....그 사내가 나 대신에 받았으니까....그건 내 돈이야, 틀림없는 내 돈이야.“
소냐는 의아스러운 듯이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돈 말인데....나는 거기 돈이 있었는지 그것조차 몰라.“ 그는 생각에 잠기는 듯 나직한 음성으로 말햇다. ”나는 그때 노파가 목에 걸고 있던 지갑을 빼앗었어. 속이 가득찬 양가죽 지갑이었지....그러나 나는 지갑 속을 열어보지도 않았어. 아마 지갑을 열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겠지....그리고 물건은 주로 커프스단추나 장식줄 따위 뿐이었는데 나는 이틑날 아침에 그런 걸 모두 지갑과 함께 거리의 어느 빈터 돌 밑에다 감춰버렸어....지금도 그대로 거기 파묻혀 있을 거야.....“
”그럼 왜 ....돈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어요. 자기는 하다도 갖지 않았으면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그녀는 성급히 물었다.
”모르겠어....나는 아직 결심이 서 있지 않았던 거야. 그 돈을 갖느냐, 안 갖느냐.“ 그는 또 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으나,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싱긋 맥없이 웃어 보였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릴 하고 있지, 안 그래?“
소냐의 머리에는 순간적으로 ’정신이상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아니, 무슨 다른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것 봐, 소냐.“ 그는 갑자기 어떤 영감에 사로잡힌 듯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좀 들어줘, 만약에 내가 굶주림 대문에 사람을 죽였다면”하고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면서 수수께끼라도 내듯이, 그러나 진지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엇다.
“만약에 그랬다면 나도....지금 행복했을 거야! 제발 그것을 알아줘!”
“그러나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이야!” 잠시 후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외쳤으나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절망적인 느낌마저 엿보였다.
“지금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참회한댔자 그게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야! 아아, 소냐, 난 그런 것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냐!”
소냐는 다시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침묵을 지켰다.
“어제 내가 당신더러 함께 가달라고 청한 건, 내게 남은 거라곤 당신뿐이기 때문이야.”
“어디로 가는데요?”하고 소냐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도둑질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줘.” 그는 빈정거리듯이 히죽 웃었다.
“우린 서로 다른 세계의 인간이니까....그런데 소냐, 나는 지금 이 순간에야 비로소 어제 당신을 어디로 데려 가려고 했는지를 분명히 알겠어! 어제 그런 말을 할 때는 나 자신도 어딘지 몰랐던 거야. 내가 함께 가달라고 청한 것도, 오늘 여기 온 것도 목적은 단 하나야. 소냐, 날 버리지 말아줘, 버리지 않겠지, 소냐?”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까, 무엇 때문에 죄다 고백했느냐 말이야!” 잠시 후 그는 한없는 고뇌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절망적으로 외쳤다. “지금 당신은 내 설명을 기다리고 있어, 소냐. 당신은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나도 그걸 알아. 하지만 난 당신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어차피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고, 그저 그 때문에 더 고민하게 될 테니 말이야....바로 나 때문에! 저런, 당신은 울면서 또 나를 포옹하는군.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포옹하는 거야? 내가 혼자 견딜 수가 없어서 ’너도 함께 괴로워해라, 그럼 나도 좀 편해질 테니까!‘하고 자기 고통을 남한테 떠넘기려고 찾아왔기 때문인가? 아니, 이런 비열한 사내라도 당ㅇ신은 사랑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당신 역시 고민하고 계시잖아요?“하고 소냐는 외쳤다.
또다시 그의 가슴엔 아까와 같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한순간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소냐, 내 마음은 악독해. 그걸 알아야 해. 모든 건 그것으로 설명이 되니까. 나는 악독한 인간이기 때문에 여기 온 거야. 개중에는 오지 않는 자도 있지. 그러나 나는 겁쟁이야....비열한이야! 하지만.....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야....지금 그걸 말해야겠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는군.......“
그는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 우린 서로 인간이 달라!“ 그는 다시 외쳤다. ”아무래도 합쳐질 순 없어!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여길 왔을까? 이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아녜요, 아녜요, 오시길 잘했어요!“하고 소냐는 외쳤다. ”내가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마음을 결정한듯이 그는 말했다.
”그건 이렇게 된 거야. 나는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사람을 죽인 거야.....자, 이젠 알겠지?“
”아, 아니요.“ 소냐는 순진하게도 겁에 질린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지만...제발 말씀해주세요! 난 알 수 있을 거예요, 마음속으로 모든 걸 다 알 수 있을 거예요!“
”알 수 있을 거라고? 좋아, 그럼 말해보지!“ 그는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생각을 가다듬었다.
”실은 이런 거야. 언젠가 나는 이런 문제를 내 자신에게 제기해본 적이 있었지. 예를 들어 나폴레온이 내 위치에 놓였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의 진로를 개척하는 마당에 툴롱도, 이집트도, 몽블랑 정복도 없고, 그런 아름다보고 위대한 것 대신에 오직 괴상망측한 14등관 과부 할멈뿐이고, 더구나 그 노파의 트렁크에서 돈을 꺼내기 위해서는 -출세의 길을 열기 위해서야, 알겠지? -노파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면, 그것밖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면 그는 어떤 태도로 나왔을까? 그것이 너무나 속악한 짓이고 또 너무나 ....죄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주저했을까? 자, 그래서 말이야, 난 이 ’문제‘로 무척 오랫동안 고민했어. 그러다가 겨우 어쩌다 문득 나폴레옹 같으면 그런 걸 주저하기는커녕 그것이 속악한 짓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테고....오히려 그런 걸 주저해야 할 이유도 몰랐을 것이다.....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어. 만약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물론 우물쭈물 생각에 잠길 것도 없이 단숨에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생각하는 것을 집어치우고....단숨에 해치운 거야. 위인의 예에 따라서 말이야. 바로 이렇게 해서 일어났던 거야! 소냐, 당신한테는 우습게 보일 테지? 그러나 소냐, 여기서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이 사건이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는 그 점일지도 모르지......“
소냐는 조금도 우습지가 않았다.
”좀 더 솔직히 말씀해주세요....그렇게 비유만 하지 말고“ 그녀는 더욱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는 소냐 쪽으로 몸을 돌려 처량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래 , 이번에도 당신 말이 옳아, 소냐. 이건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야. 무의미한 군소리에 지나지 않아! 실은 우리 어머니가 거의 무일푼의 가난한 노파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 누이동생은 어쩌다 우연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남의 집 가정교사 노릇이나 하며 돌아다녀야 할 신세지. 그러니까 두 사람의 희망은 오직 나 하나에 달려 있었던 거야.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대학을 계속 다닐 수가 없어서 학업을 잠시 중단해야 햇어 설사 그대로 공부를 계속했다 하더라도 10년이나 12년 후에, 그것도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야만 기껏 어디 교사나 관리가 되어 1년에 천 루블 정도의 봉급을 받는 게 고작이었겠지...(그는 암송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어머니는 고생과 슬픔 때문에 말라버리실 거야. 그러니 나는 어차피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릴 수 없었던 거지. 그리고 누이동생....누이동생에겐 더 나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아니, 도대체 뭐가 좋아서 한평생 모든 걸 방관만 하고, 모든 것을 외면하고, 어머니를 잊고, 예를 들어 누이동생의 치욕을 얌전히 참아야 하느냐 말이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매장하고 그 대신 새로운 것, 아내와 자식을 얻은 다음 그들 역시 돈 한 푼 없고 빵 한조각 없는 처지로 남겨두기 위해선가? 그래서...그래서 나는 결심한 거야. 노파의 돈을 손에 넣으면 처음 몇 해 동안의 비용을 충당하고, 어머니의 고생도 덜어드리고, 마음 놓고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대학을 나온 이후 사회생할의 첫걸음에서 밑천으로 삼자...그리고 모든 걸 크게 철저히 해치워서, 완전히 새로운 출세의 길을 열고 새로운 독립된 길에 들어서자!....그래서 ...아니, 이게 다야. 그야 물론 노파를 죽인 건, 내가 나빴겠지....자, 이젠 그만해둬!”
힘없는 어조로 간신히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아아, 그건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소냐는 처절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나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진실을!”
“그게 무슨 진실이에요! 오오, 하느님!”
“나는 다만 이 한 마리를 죽였을 뿐이야, 소냐, 백해무익한 더러운 이를.”
“어머나, 사람을 이라고요!”
“그야 나도 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대답했다.
”하긴 나는 지금 거짓말을 늘어놓는거야, 소냐”하고 그는 덧붙였다.
“아까부터 거짓말만 하고 있었어...여태까지 말한 건 죄다 엉터리야. 사실은 당신 말이 옳아. 여기엔 전혀, 별개의 원인이 있어!....나는 벌써 오랫동안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거든. 소냐...아아, 나는 지금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아.“
그의 눈은 열병 환자처럼 불타올랐다. 그는 거의 헛소리나 다름없는 말을 지껄이고 잇었다. 그의 입술 언저리에는 불안스런 미소가 감돌고, 흥분한 마음의 그늘에서는 지칠 대로 지친 무기력이 얼굴을 내밀고 잇었다. 그가 얼마나 고민하는지 소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도 어쩐지 이상했다. 무언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럴 수가! 아아, 하느님!‘ 그녀는 절망 속에서 두 손을 쥐어짰다.
”아니야, 소냐, 그건 그렇지 않아!“ 갑자기 새로운 상념에 충격을 받고 흥분을 느낀 듯이 그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또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지 않았어! 차라리...이렇게 생각해줘.(그래 확실히 그 편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해보라고, 내가 자존심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은 간악하고 비열하고 복수심이 강한 놈이라고....게다가 발광하기 쉬운 경향ㄲ지 있는 인간이라고 말이야.(이렇게 된 이상 죄다 실토해버리마! 발광 증세는 전부터도 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나도 알고 있었어!) 아까 나는 당신한테 대학을 계속다닐 수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냥 계속 다닐 수 있었는지도 몰라. 등록금 정도는 어머니가 송금해줄 것이고, 신발이나 옷이나 빵을 살 돈은 내 힘으로 벌 수 있었을 테니까, 틀림없어! 가정교사질만 해도 한 번에 50코페이카는 받았으니 말이야. 라주미힌도 그렇게 일하고 있거든! 그러나 나는 베알이 꼴려서 일하려 하지 않았던 거야. 맞았어, 배알이 꼴렸던 거야.(이건 정말 근사한 말이군!) 그래서 나는 거미처럼 제 집 한구석에 틀어박혀버렸어. 당신은 게딱지 같은 내 방에 왔었으니까 알겠지만.....소냐, 알겠지, 낮은 천장과 비좁은 방은 인간의 마음을 머리까지 짓눌러버리게 마련이야! 아아, 나는 얼마나 그 게딱지 같은 골방을 저주했던 것일까! 그래도 어쨌든 나는 그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어! 일부러 나오려고 하지 않았던 거야. 며칠이고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일하려고도 하지 않았어. 먹으려고도 않고 줄곧 누워만 있었지. 나스타시야가 가져다주면 먹고, 가져다주지 않으면 그대로 하루가 지나가버리는 거야. 일부러 고집을 부려 갖다 달란 말도 하지 않았어! 밤엔 불도 없는 캄캄한 방에서 뒹굴었지만 촛불 값도 벌려고 하지 않았지! 공부는 해야 했는데도 책은 다 팔아버리고, 탁자 위 노트와 수첩 따위엔 손가락만큼 두툼하게 먼지가 쌓였을 정도야. 나는 무엇보다도 그냥 누워서 생각하기를 좋아했지. 그래서 밤낮 생각만했어.....그리고 줄곧 꿈만 꾸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말할 수 없이 기괴한 오만 가지 꿈을 말이야! 그러니 그 무렵부터 점점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어, 즉.....아니, 그것이 아냐! 또 쓸데없는 소릴 하려 했군! 그때 나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하곤 했지. 나는 왜 이렇게 바보일까? 만일 남들이 모두 바보이고 그것을 내가 확실히 알고 있다면, 왜 나는 좀 더 현명해지려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후에 나는 깨달았어, 소냐. 모든 사람이 다 현명해지기를 기다리려면 그야말로 너무 기나긴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그리고 또 나는 깨달았지. 그런 시기는 절대로 오지 앟고, 인간이라는 건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또 누구도 인간을 개조할 수는 없다고. 그런 데다가 공연히 노력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인간의 법칙이다. ....법칙이야, 소냐! 정말로 그래!....그리고 나는 이제야 두뇌와 정신이 확고하고 강한 인간이 그들 위에 설 수 있는 지배자라는 걸 안 거야! 많은 일을 용감히 해치우는 자가 올바른 인간이 되는 거지! 보다 많은 것에 침을 내뱉을 수 있는 자가 인간의 입법자가 되고, 누구보다도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가 누구보다도 올바른 인간이 되는 거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오직 맹인만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할 뿐이야!“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줄곧 소냐의 얼굴을 보았으나, 그녀가 과연 알아듣는지 어떤지는 이미 마음을 쓰지 않고 있었다. 강렬한 열정이 완전히 그를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그는 일종의 어두운 환희에 싸여 있었다. (사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냐는 그의 음산한 신조가 그의 신앙이 되고 법칙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 깨달았어, 소냐.“ 그는 환희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권력이란 다만 그것을 잡기 위해서 용감히 몸을 굽힐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단 한 가지, 그저 대담하게 해치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때 내 머리엔 난생처음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그건 나 이전에는 누구 한 사람,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거야! 어느 누구도!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게 태양처럼 명백해졌어. 이러한 불합리 옆을 지나면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 꼬리를 잡고 흔들어대는 정도의 아주 간단한 일조차 해치운 자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된 거야. 그래서.....나는.....그것을 해치우고 싶었어. 그래서 죽인 거야....나는 다만 해치우고 싶었을 뿐이야. 소냐, 이것이 노팔르 죽인 원인의 전부야!“
”아아! 그만두세요, 아무 말도 말아주세요!“ 소냐는 손뼉을 탁 치면서 외쳤다.
”당신은 하느님을 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벌을 내려 악마한테 넘기신 거예요!“
”참, 그 말이 나왔기에 말이지, 소냐, 난 어둠 속에 뒹굴고 있을 때, 이건 악마에게 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제나 머리에 떠오르곤 했어, 어때?“
”잠지코 계세요! 농담 같은 건 그만두세요. 당신은 신을 모독했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아, 하느님!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가만있어, 소냐! 나는 절대 농지거리를 하고 있는 게 아냐.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어, 나는 악마에 홀린 거야. 그러니 소냐, 아무 말도 말아줘!“ 그는 음울한 어조로 집요하게 되풀이했다.
”나는 다 알고 있어. 그런 건 이미 그때, 어둠 속에 누워 있을 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몇 번이나 나 자신에게 속삭였던 일이야....그런건 모두 이미 세밀한 점에 이르기까지 검토를 거듭한 문제라서 나는 죄다 알고 있어, 죄다! 그때부터 나는 그런 넋두리엔 진저리가 날 만큼 싫증이 났던 거야! 나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어, 소냐. 그런 넋두리같은 자문자답은 집어치우고 싶었어! 당신은 내가 무턱대고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하나? 나는 지자(知者)로서 행동했던 거야. 그러나 결국은 그런 걸 몰랐다고 생각하나? 내게는 권력을 내게는 권력을 가질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고 수없이 자문하면서 거듭 생각한 걸 보면, 그것은 곧 권력을 가질 권리가 없었다는 증거였어. 그리고 인간은 이냐 아니냐 하고 내가 자문한다면 나에 있어서는 이가 아니고, 다만 이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한 사람에게만, 아무런 의문도 없이 전진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인간이 이 같은 존재라는 걸 내가 몰랐다고 당신은 생각하나? ...아아, 나폴레옹 같으면 그런 짓을 했을까 안 했을까 하는 문제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한 걸 보면, 스스로 나폴레옹이 아니란 걸 나는 명확히 느꼈던 거야. 나는 그런 부질없는 넋두리의 온갖 괴로움을 견뎌냈어. 그러고 나서 그런 고민을 내 어깨에서 떨어버리고 싶었어. 나는 말이야, 소냐, 그저 무작정 죽이고 싶었던 거야. 나 자신을 위해서 죽이고 싶었던 거야! 이 점에 대해선 나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죽인 게 아니야. 천만에! 또 돈과 권력을 손에 넣어서 인류의 은인이 되려고 죽인 것도 아니야. 당치도 않은 소리지! 나는 그저 죽였을 뿐이야. 나를 위해서 죽인 거야.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의 은인이 되든, 일평생 거미처럼 모든 인간을 거미줄에 얽어서 생피를 빨게 되든, 그 순간의 나에겐 어차피 마찬가지였어!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필요했던 건 돈이 아니라는 점이야. 나는 그 모든 걸 알 수 있었어. 제발 내가 말하는 걸 이해해줘. 나는 설사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앞으로 살인 같은 짓은 절대 되풀이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다른 걸 알고 싶었어. 그것이 내 등을 떼밀었던 거야. 나는 그때 한시바삐 알고 싶었어. 나도 남들과 같은 이냐, 아니면 인간이냐. 그걸 알아야 했던 거야. 나는 밟고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몸을 굽혀서 감히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 나는 전전긍긍하는 벌레 같은 존재냐, 아니면 권리를 가진 인간이냐........“
”사람을 죽일? 사람을 죽일 권리를 가졌다는 건가요?“ 소냐는 기가 차다는 듯이 손뼉을 탁 쳤다.
”이것 봐, 소냐!“ 그는 화를 내며 외치고는, 무어라고 반박하려다가 갑자기 경멸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남의 말을 꺾지 말아요, 소냐! 나느 ㄴ당신에게 한 가지만 말 해두고 싶은 게 있어. 다름 아니라 그때는 악마 녀석이 나를 유혹해놓고 나중에 가서 ‘네게는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너도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이에 지나지 않으니까’라고 나한테 설명하더란 말이야! 악마란 놈이 나를 우롱했던 거야. 그래서 난 지금 이렇게 당신을 찾아온 거야! 자, 어서 손님 대접을 해야지! 만약 내가 이가 아니라면 뭣 하러 당신한테 찾아왔겠어! 실은 그때 내가 노파한테 간 건 그저 시험 삼아 가봤던 거야....그 점을 알아줘!“
”그리고 죽였군요! 죽였군요!“
”그런데 어떻게 죽였다고 생각해? 살인이란 그렇게 하는 걸까? 내가 그때 간 것처럼 그렇게 사람을 죽이러 가는 걸까? 내가 어떤 모양으로 갔었는지 그건 언젠가 다음에 이야기하지. 정말 나는 그 노파를 죽인 걸까? 아냐, 나는 나 자신을 죽였지 그 노파를 죽인게 아니야! 나는 거기서 단숨에 나 자신을 죽여버린거야, 영원히!....그 노파를 죽인 건 악마의 짓이지 내가 아니란 말이야....자, 됐어, 됐어, 소냐, 이젠 그만 날 내버려둬.“ 갑자기 경련적인 고민에 몸부림치면서 그는 외쳤다. ”제발 날 내버려둬!“
그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서 집게로 죄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아, 이런 고통이 또 어디 있을까!“ 괴로운 비명이 소냐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자, 이젠 어떡하면 좋지, 말해줘!“ 그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절망한 나머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어떡하면 좋으냐고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녀는 외쳤다. 그러자 지금까지 눈물이 글썽거리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일어나세요!(그녀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곧 여기서 나가 네거리에 서세요. 그리고 거기 엎드려서 우선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을 맞추세요. 그다음에 사방으로 돌며 온 세계를 향해서 절을 하고 똑똑히 들리게 큰 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말하게요!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다시 생명을 내려주실 거예요. 가시겠죠?“ 그녀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이 온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그의 두 손을 움켜쥐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는 놀랐다기보다, 오히려 그녀의 이 뜻밖의 감격에 어떤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당신은 징역 이야길 하고 있는가 보군, 소냐? 자수라도 하라는 건가? 그는 침울한 어조로 물었다.
“고통을 받고 그것으로 속죄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해요.”
“아냐! 나는 그런 자들에겐 가지 않겠어, 소냐.”
“그럼 어떻게, 대체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세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갈 작정이세요?”하고 소냐는 부르짖었다.
“지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어머님께선 뭐라고 하시겠어요? 아아, 그분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아니,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있을까! 당신은 이미 어머님도 누이동생도 다 버리셨어요. 아주 버리셨어요. 버리셨어요! 아아, 이 일을 어쩌나!”하고 그녀는 외쳤다.
“당신 자신도 잘 아시잖느냐 말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떠나서 살아갈 수 있어요! 앞으로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둬, 소냐.”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햇다.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거야? 무엇 때문에 가라는 거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그런건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아.....그들은 자기 손으로 몇백만의 인간을 살육하면서도 자기대로는 선행을 베푼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들은 모두 사기꾼이고 비열한이야, 소냐! 나는 가지 않겠어. 게다가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사람은 죽였지만 돈을 훔칠 용기가 없어서 돌 밑에 감추었습니다, 라는 말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는 빈정거리듯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면 놈들은 오히려 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할 테지. 이 바보야, 왜 그 돈을 갖지 않았어, 겁쟁이 바보 같으니라고! 놈들은 아무 것도, 아무것도 몰라, 소냐.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가야 하지? 난 안 가겠어.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둬, 소냐.......”
“당신은 반드시 고민할 거예요. 고민할 거예요.” 처절한 애원의 빛을 띠고 두 손을 내밀며 그녀는 되풀이했다.
“어쩌면 나 자신을 너무 학대했는지도 몰라.” 생각에 잠기는 듯한 음울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인간이지, 이가 아닌지도 몰라. 너무 조급히 자신을 책망했는지도 몰라....나는 좀 더 싸워보겠어.”
오만한 웃음이 그의 입술 언저리에 떠올랐다.
“그토록 무서운 고민을 안은 채! 어떻게 한 평생을, 한평생을!”
“그러는 동안 익숙해지겠지......”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울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1분쯤 지나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만 울어줘, 이제부터 용건을 말해야 하니까.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놈들이 내 뒤를 쫓으며 체포하려 하고 있다는 걸 당신한데 알리기 위해서야.......”
“아아!” 소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아니, 왜 그런 소리를 지르지? 아까는 나더러 징역을 가라고 해놓고 이번엔 또 그렇게 놀라다니!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그런 놈들에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테니까. 확실한 증거라곤 없거든. 어제만 해도 나는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져서, 이젠 틀렸구나 생각했었지. 오늘은 사정이 달라졌어. 놈들이 가지고 있는 증거는 모두 양쪽 끝에 꼬리가 있어서, 그러니까 놈들의 기소 자료를 나는 내게 유리하게 역용할 수 있단 말이야, 알겠어? 정말로 역용해 보일 테야. 이젠 요령을 알았거든. 그러나 일단 구속은 당할 거야. 만약에 어떤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쯤은 감옥에 들어가 있었을지도 몰라. 하긴 이제부터라도, 오늘 중으로 감금될지도 모르지...하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냐, 소냐. 얼마 후엔 다시 석방되게 마련이니까....왜냐하면 놈들은 정확한 증거라곤 하나도 갖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런 증거가 나타날 리는 만무하거든. 장담할 수 있어. 하여튼 지금 놈들이 갖고 있는 증거로 사람 하나를 망쳐버릴 순 없단 말이야. 자, 이젠 됐어....난 그저 당신에게 랄리기만 하면 되니까....누이동생이나 어머니한텐 어떻게 해서든 잘 납득시켜서 놀라지 않도록 할 생각이야. 하긴 이번에 누이동생의 신상 문제는 보증된 셈이니까....따라서 어머니도....자, 내 말은 이게 다야. 그러나 당신도 조심해줘, 만일 내가 감금되면 면회 와주겠어?”
“네, 가고말고요! 가고말고요!”
그들은 마치 폭풍 뒤에 단둘이 황량한 바닷가에 밀어 올려진 사람들처럼 풀이 죽은 처량한 모습들을 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소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푸근하게 자기를 감싸주고 있는가를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그렇게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괴롭고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하고 무서운 느낌이었다! 아까 소냐한테 오는 도중만 해도 그는 자기의 모든 희망과 모든 활로가 전적으로 그녀에게 달려 있다고 느꼈었다. 그는 자기의 고민을 얼마만큼이라도 덜어주기를 바랐었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이 온통 자기에게 쏠려 있음을 알자 갑자기 전보다도 훨신 더 불행해진 것을 느꼈고 의식했다.
“소냐”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형무소로 가더라도 역시 면회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소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몇 분이 흘렀다.
“당신 십자가를 갖고 계세요?” 하고 문득 생각난 듯이 소냐는 갑자기 물었다.
처음에 그는 질문의 뜻을 몰랐다.
“없죠? 없으시죠?....자, 그럼 이걸 가지세요, 노송나무로 만든 겅예요. 나한텐 리자베타가 준 구리 십자기가 또 하나 있어요. 리자베타하고 서로 십자가를 교환했었죠. 그녀는 나한테 십자가를 주고, 나는 그녀한테 조그만 성상을 주었어요. 난 앞으로 리자베타가 준 십자가를 걸기로 하고, 이건 당신한테 드리겠어요. 자, 받아주세요.....이건 내 것이에요! 내 것이라니까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우린 함께 고통을 받는 거예요, 함께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받아두지!”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를 받으려고 내밀었던 손을 이내 움츠리고 말았다.
“지금은 안 되겠어, 소냐. 나중에 받을께.”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네, 알겠어요. 그게 낫겠군요, 그게 낫겠어요.” 그녀는 흥분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고통을 받으로 갈 때 이걸 걸고 가세요. 저한테 들르시면 제가 걸어드리겠어요. 그리고 같이 기도를 올리고 함께 떠나도록 해요.”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세 번 노크했다.
“소피아 세묘노브나, 들어가도 좋습니까?”
누군지 무척 귀에 익은 공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냐는 깜짝 놀라며 문께로 달려갔다. 레베쟈트니코프의 금발 머리가 불쑥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