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요리 집에서 흔히 먹는 단무지. "왜무지"라고도 하는 "다꾸앙"이 그것을 처음 만든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다꾸앙"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선승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호기심이 생길 법하다.
다꾸앙 소오호오(澤庵宗彭, 1573~1645) 선사는 중국 선종의 정맥인 임제종의 승려로서 우리나라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 살았던 스님이다. 또한 일본 동경 시나가와 부근에 동해사(東海寺)라는 절을 개창한 고승이기도 하다. 10세 때 출가하여 수행승으로 참선에 몰두하였으며 32세 때 스승으로부터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하였다"는 인가를 받고 "다꾸앙(澤庵)"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천하일미 단무지의 유래
어느 날, 다꾸앙 선사가 있는 동해사(東海寺)로 장군 도꾸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식사 도중, 무 절인 것을 먹어 보고 도꾸가와 장군이 말했다.
"아, 이것은 천하일미(天下一味) 군요!" 매일같이 산해진미에만 익숙해진 장군인지라 오히려 담백한 것에서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다꾸앙 선사가 웃으며 말했다. "무로 만든 것인데……." 도꾸가와 장군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무를 어떻게 해서 만들었습니까?" "쌀겨와 소금에 절였을 뿐입니다." "아! 참 별미요. 대사께서 고안하신 모양이니 앞으로 이 무를 "다꾸앙"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이렇게 해서 단무지의 이름이 생겨났다. 덕이 높고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능통할 뿐 아니라 교양을 두루 갖춘 다꾸앙 선사는 일왕과 막부의 장군을 비롯해 당대의 권력자는 물론 문화인사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졌고 단무지 역시 도꾸가와의 식사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일본 다도와 검도의 정신적 지주
특히 차 마시기를 즐겼던 다꾸앙 선사는 다도가 유흥으로 여겨져 사치로 흘러가는 것을 가슴 아파했다. 이러한 선사의 다도관(茶道觀)이 잘 나타나 있는 것으로 「다꾸앙 화상 다정지기(澤庵和尙茶亭之記)」라는 짧은 글이 있다. 이 글에서 선사는 "천지 자연의 일대 조화, 그 온화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주(主)와 객(客)이 함께 몰입하여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면서 세속을 초탈한 청정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다도"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꾸앙 선사는 일본의 무도(武道)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에미쓰(家光) 장군의 검술 사범인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에게 검과 선의 일치를 설한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은 유명한 어록이다.
"동(動)하지 않는 지혜에 관한 신묘한 기록"이란 뜻을 가진 이 글에서 다꾸앙 선사는 "언제, 어느 곳,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머무르지 않는 "무주심(無住心)"이야말로 수행의 가장 중요한 요체임"을 설파하고 있다. 그의 깨달음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부동지(不動智)"에 대한 그의 법문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 바깥 경계에 의해 동(動)하지 않는 지혜를 "부동지"라 한다. 이는 불교의 중도(中道), 즉 양변이 끊어진 마음의 상태에서 나오는 지혜를 말한다. 양변이란 바깥의 경계와 그에 따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으로 항상 상대(相對)를 이뤄서 일어나는 허상을 말한다. 이 허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지혜가 부동지이다. 흔들릴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안심(安心) 속에서 신경을 끊으니 자유롭다. 의식이 매어있지 않고 자유로우니 어떤 움직임에도 즉각 그에 가장 알맞은 대응을 할 수 있다.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음(觀音)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뺏기지 않기에, 몇 천의 적을 상대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만일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가면 틈이 생겨 그 다음 차례의 칼에 맞게 된다. 이것을 무심(無心)의 경지라고 한다. 고수(高手)는 초심(初心)에서 최고에 이르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 그래야 무심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최고에 머문다면 마음이 최고에 매여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무엇을 이루면 부숴버려야 그것에 매이지 않는 원리다. 최고수는 남이 보기에 무심하여 허수아비 같이 보인다. 밖에서 그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이(理)의 수행이 되면 사(事)의 수행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도리(道理)가 가슴 속에만 있으면 손과 몸이 오히려 제약을 받는다. 이(理)와 사(事)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