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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및 영양 문화 답사기
안동 이진구군으로부터 「번개모임」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젊은이들 가운데 「번개팅」이라는 묘한 모임이 있단 얘기는 들었지만 생소한 만남이 궁금하던 차에 월헌(月軒)으로부터 같이 참가하자는 강권이 있어서 사실은 조금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새벽 6시 20분 고속버스를 타기로 하고 터미널에서 토스토 한 조각으로 아침 대용식을 했다
안동시 진선예식장 앞마당에서 안동 친구들과 대구 친구들을 합류했다. 생각 밖으로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무려 15명!!! 안동에서 이진구, 천세창, 류길하, 김동수가 나왔고 대구에서 권오정, 권준현, 권오규, 김행일, 김교현, 류진상, 김기현이가 참여했고 서울에서 안용진, 김영길, 김정태가 원행을 했고 현지 영양에서 박희열이가 합류를 했다.
안동대학교 총장님의 특별 배려로 안동대학 박물관에서 고성(固城) 이씨 이응태의 묘 발굴 현장에서 나온 그의 부인 원이 엄마의 남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와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 그리고 여러 가지 服裝 실물을 보았다.
일행이 안동과 청송의 경계인 가랫재를 넘어서 한국 문학의 거장 이문열의 생가가 있는 재령 이씨의 집성촌 두들마을을 둘러 보았다.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379-1번지에 있다. 입향조 석계 이시명과 그의 부인 안동 장씨 예절관을 탐방하였다. 석계선생도 훌륭한 분이지만 안동에서 석계와 혼인한 貞夫人 안동 장씨는 사임당 신씨 못지 않은 여군자(女君子)로 서화에 능하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분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의 草書는 그 어느 명필가도 따라잡기 힘든 훌륭한 작품이었다.
이 마을은 김행일군의 처가 곳이어서 행일군의 처남 되는 분이 자택으로 우리 일행을 초대해 마당에서 시원한 맥주를 1상자나 내놓고 목 추김을 해 주시기도 한 인심 좋은 마을이기도 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안 사실은 이진구군이 우리나라에서 전탑(塼塔)에 대해 가장 연구가 깊은 학자라는 사실이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전탑이 왜 안동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지를 구명하려 애쓴 이군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가 우리에게 전탑(塼塔)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 3편을 나누어 주었는데 「임하사 칠층 전탑지 조사보고」(1986.6)와 「안동 금계동 전탑 조사보고」(1987.8) 그리고 「전탑으로 본 안동문화의 특성」(1988.1)에서 그의 열성과 학자적 소양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본 전탑(塼塔)과 모전탑(模塼塔)을 해설하는 그에게서 그 열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봉감 모전탑(模塼塔), 현일동 3층 석탑, 현이동 5층 모전탑을 해설하는 그의 눈은 빛났고 자신에 찬 해설에서 우리 일행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무식한 대머리는 이번에야 처음으로 전탑(塼塔)과 모전탑(模塼塔)의 차이를 알았다. 전탑(塼塔)은 진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이고, 모전탑(模塼塔)은 외양은 전탑 비슷하나 벽돌이 아닌 돌을 깎아 벽돌 모양을 만들어 쌓은 탑을 모전탑(模塼塔)이라고 한단다.
안동에 있는 법흥동 전탑(塼塔), 신세동 전탑(塼塔), 일직 조탑동의 전탑(塼塔)이 전탑(塼塔)이고 경주의 분황사 탑은 모전탑(模塼塔)이란다.
다음 찾은 곳은 한양 조씨 집성촌인 주실마을이었다.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번지다. 주실마을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지훈 문학관( 芝薰 文學館)이 있다.
그 다음 탐방한 곳이 민족 시인 오일도(吳一島)의 생가였다. 우리 이진구군이 되풀이해 말하길 영양 와서 오일도(吳一島)의 생가를 안보고 영양을 보았단 자랑을 하지 말랜다. 그만큼 영양 사람들이 자랑하는 분이고 영양의 자존심인 분이 오일도(吳一島) 시인이다.
마지막으로 본 곳이 연당 서석지(蓮塘 瑞石池). 그 동네를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석문(石門)! 입암 관광지를 지나 양편 절벽을 거쳐 들어가 만나 곳이 연당 서석지(蓮塘 瑞石池)다. 연당이니 물론 연꽃이 있고 瑞石池이니까 瑞石이 있었다. 자연석인 瑞石은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히니 궁금하면 가 보시게나. 소쇄원이 갇힌 정원이면 연당 서석지(蓮塘 瑞石池)는 열린 정원이란다. 소쇄원은 그 정원 하나를 보는 걸로 족하지만 연당 서석지(蓮塘 瑞石池)는 선돌(立岩)부터 석문(石門)과 그 마을 전체가 정원을 보는데 그 영향을 주는 그런 정원이란다.(잘못 그려서 이진구군에게 퉁 먹을 가 봐 겁난다!) 연당 서석지(蓮塘 瑞石池)가 우리나라 3대 정원 중의 하나라니 얼마나 훌륭한 정원인지를 짐작이나 하시오!!!
이번 탐방 여행에서 우리의 자랑 박희열군을 만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영양의 문화재에서 우리들이 느낀 건 그냥 산골 고장이고, 고추와 담배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던 영양이 또 다른 우리의 전통 문화를 가진 아주 훌륭한 고장이란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게 하나라면 박희열 같은 훌륭한 친구를 품은 고장이 영양이란 사실이 두 번째다. 박군은 오로지 후진 양성에 혼신을 다한 우직한 교육자였고, 발명가 박희열을 새로이 만난 것도 우리의 이번 탑방 여행의 큰 소득이었다. 제자 중에서 각종 발명품 대회에서 백50여 명의 수상자를 냈다니 입이 벌어졌다. 수박 접붙이기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으나 큰 기업에서 훔쳐 가 특허를 냈는데도 그걸로 농촌 소득을 올리게 했으니 다행이라는 부처님 같은 말씀을 했다. 지금은 무공해 제초제 개발을 하는 중인데 80%는 성공해 가고 있는 중이란다. 100% 성공 할 날이 속히 오길 기원해 마지않는 바이다. 박군이 산 점심도 맛나게 먹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번 답사를 기획하고 현장에서 우리들에게 좋은 공부를 하게 해 준 이진구와 안동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함께 한 친구들에게 「안동 간고등어」까지 선물을 하고 버버리 찰떡에다가 천세창군은 사모님의 귀한 솜씨로 담근 안동 식혜까지 포식을 하게 해 주어 가슴과 눈과 입까지 즐거운 탐방 여행이었다.
이번 답사를 제안하고 곁들여 해설까지 도와 준 也川선생이 저녁 식사 시간에 한마디 더 하시길, 이번 탐방으로 끝낼 게 아니고 대구 근방 답사를 이어서 하자며 일행의 동의를 구해 다음 기회까지 예약을 하게 되었다.
월헌(月軒)의 강권에 마지못해 나섰으나 정작 참여하고 보니 보물을 한보따리 횡재하고 온 기분이 들어 월헌(月軒)께 또 한번 감사드린다.
함께한 친구들, 그리고 다음에 참여할 친구들 모두 건강하시게나!!!
◉자료 모음
▣안동대학교 박물관
*묘지에서 발굴한 원이 엄마의 편지
원이 아버지 보세요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서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년) 유월 초 하루날 아내가.
▣두들마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원리)은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 마을이다. 두들마을은 조선시대 때 광제원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 이시명 선생과 그의 후손 재령 이씨들의 집성촌으로,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 전통 한옥이 즐비하여 마을에 들어서면 흡사 조선시대의 거리를 걷는 듯하다.
이 마을에는 30여채의 고택과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라 새겨진 기암괴석, 궁중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 등이 있어 볼거리와 찍을 거리가 많다.
이문열의 소설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의 작품속에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는 무대가 바로 이곳 두들마을이다
▣주실마을
조지훈생가 (호은종택) 는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78호로 1988년 지정 월록서당은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유형문화재 172호로 지정 청록파 시인 지훈 조동탁 선생이 태어나 성장하며 일제 암흑시대 '문장'지에 시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로 등단, 민족적 정서, 전통에의 향수, 불교적 선감각을 조탁된 서정에 실어 형상화 한 한편, 티 없는 지사 기질로 높은 예술혼을 발휘케 한 유서 깊은 생가이다.
이 집은 조선 중기 인조때 (17세기 말) 주곡리의 입향조 조전의 둘째아들 조정형이 창건했으며, 6.25동란 일부 소실된 것을 1963년 복구하였다.
지역의 전형적 형태인 ㅁ자형 가옥으로 정면과 측면이 7칸이며 사랑채는 정자형식으로 되어있고, 서측 1칸에 지훈선생의 태실이 있다.
▣봉감 모전탑(模塼塔) - 국보 제187호(영양에는 국보가 단 이것 하나 뿐)
영양 입암면 봉감동에 있는 봉감 모전오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은 반변천의 지류인 동산천과 만났다 헤어지곤 하면서 지루함을 모르고 찾아갈 수 있다. 이 탑이 있는 마을 이름이 '봉감(鳳甘)'이라서 탑 이름도 봉감 모전석탑이 되었다. 탑은 그다지 넓지 않은 터에 자리잡고 있으나, 바로 옆으로 흐르는 동산천 줄기가 만드는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서 기와조각과 고려청자의 파편들이 출토되어 이 일대가 이전에는 절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층 몸돌받침을 두 단으로 쌓고 그 위에 5층을 올렸는데 상륜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전체 높이가 11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탑이다.
탑신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수성암으로 쌓았는데 크기는 그다지 고르지 않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감실이 나 있고 화강암으로 문기둥과 이맛돌로 짠 문틀로 되어 있다. 또한 2층 이상에는 층마다 중간 부분에 턱을 두어 쌓은 점이 특이하다.
고른 체감률로 당당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힌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말기나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국보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석탑은 보수하기 전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옛스러운 맛은 많이 없어져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자그마한 나무들에 의해 둘러싸인 보수하기 이전의 탑의 모습이 더 정겹게 다가옴은 문화재의 보수에 있어 한번은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현일동 3층 석탑
경북 영양군 영양읍 현일동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화강석탑. 보물 제610호. 전체 높이 4.27 m, 기단폭 2.13 m. 이 석탑은 밭 가운데에 있으며 주변에 신라·고려의 와편(瓦片)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곳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 위에 층을 올린 중형의 통일신라기의 양식이며 상륜부(相輪部)는 노반만이 남아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 우주와 탱주가 있고 8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의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별개석인데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1층 탑신에는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고 사각 사리공(舍利孔)이 있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홈이 음각되었고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반전된 전각(轉角)에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으며 옥신괴임은 2단이다.
▣현이동 5층 모전탑(模塼塔)
縣二洞 模塼五層石塔 (현이동 모전오층석탑)
현일동 삼층석탑과 마주하는 언덕 받이에 모전석탑 1기가 서 있다. 다가갈수록 장대한 이탑의 높이는 7m인데, 평지보다 좀 높은 구릉에 자리해서 그런지 우선 규모에 압도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인 이 탑은 커다란 암반 위에 서 있다. 높이 3.2m의 바위를 기단으로 삼았고, 다시 한 변의 너비 2.9m 높이3cm의 낮은 받침을 만들고 그 위에 벽돌 모양으로 자른 검붉은 점판암으로 5층을 쌓았다. 너비 6.5m 높이80cm 되는 석축기단은 1980년에 해체·복원할 때에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지대석 네 귀퉁이에 하나씩 뚫려 있는 구멍은 무었을 꽂았던 곳인지 알 수 없다.
지대석 위에 올린 1층 탑신은 2m 높이에 12단으로 짜여져 있다. 동면으로 감실을 내었는데, 한 변이 62cm되는 네모난 방이다. 나무문을 단 문틀을 돌로 문설주와 인방을 짜 넣었는데, 문설주 돌에는 뜻밖에 섬세하고 화려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어 이 탑에 들인 공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위와 아래의 인방은 새로 갈아 끼운 듯 돌빛이 희어서 다소 어색하다. 나무문을 열면 근래의 것인 듯 하지만 불상 한 구를 모셔두어 감실이 본래 부처를 모시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탑의 비례를 매우 엄정하여 알맞은 상승감과 비례를 보여준다. 몸돌이 올라간 높이 비례를 1층 몸돌이 12단인 데 견주어 2층부터는 7단으로 줄었고, 3층은 6단, 4층과5층은 다 5단씩이다. 5층에서 다시 한단이 줄지 않은 것은, 멀수록 작아 보이므로 4층보다 5층을 실제로도 작게 하면 시각적으로 너무 작아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주가 있으나 새로 만들어 얹은 듯한 화강암의 빛깔이 몸체와는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다.
이 모전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에, 점판암 돌을 쌓아올리면서 돌 사이사이에 흙으로 보강한 것이 점차 삐져나와 깔끔한 인상은 사라져버린 듯하다. 또 군데군데 강자갈도 섞인 모습인데, 해체·복원할 때에 뭔가 어슬프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보수 당시 탑 안에서 사리구가 나왔다고 한다.
탑 뒤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듯 대웅전 건물이 있고 돌담 너머에 요사채도 있다. 그런데 대웅전 아래쪽을 잘 보면 기단 양편으로 계단 양쪽을 지탱하던 소맷돌이 묻혀 있으니, 본래 이곳에 있던 절의 건축부재를 그런 식으로 심어 놓은 것이다. 세월 탓이겠지만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어서 좀 아쉽다.
▣오일도(吳一島) 생가
소재지 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
1991년 9월 6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본명은 희병(熙秉)이요 일도(一島)는 아호(雅號)이다. 오시준 칠원현감(吳時俊 漆原 縣監)의 10세손이며 오익휴(吳益休)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901년(光武 5년) 영양면 감천동(甘川洞)에서 태어났다.
8세에 사숙(私淑)에서 6년간 한문을 배웠을 때도 성적이 우수하였다.
1915년 3월 16세로서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년을 건너뛰어 1918년에 4학년을 졸업하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응시 합격하여 입학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의 입교(立敎)대학 철학부에서 학구(學究)에 정진(精進)하는 한편 시예술(詩藝術)에 심취해서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朝鮮文壇) 4월호에 처녀작 <한가람 백사장(白沙場)에서>를 발표하였다.
흰 갈매기 같은 우리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모여 흰 빛을 발하던 한가람(漢江) 백사장을 갈가마귀 떼가(왜인들) 차지했으니 한민족(韓民族)의 한(恨)이 서린 영탄(詠嘆)은 다음과 같다.
[한가람 백사장은 흰 갈매기 놀던 곳 흰 갈매기 어디 가고 갈가마귀 놀단 말가. 교하(橋下)에 푸른 물은 의구(依舊)히 흐르건만 이처럼 변하였노]
8·15 직후 민족반역인 좌익분자들이 광복 조국을 어지럽힐 때에 구국〔救國)의 뜻을 품은 선생은 민족 민주 진영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입당했으나 이듬해인 1946년에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2월 28일 맏아들의 가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46세의 애석한 나이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지사이자, 항일시인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1901~1946)의 생가이다. 口자형 뜰집으로, 그의 조부(祖父) 시동(時東)이 고종 원년(1864)에 건축하였다. 솟을대문을 가진 전면 대문간채는 정면 5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근화학교[槿花學校 德成女中高의 前身]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었다. 1935년 2월 사재(私財)를 기울여 순수시지(純粹時誌) 시원(詩苑)을 창간(創刊)하여 조선문단의 시인들을 총망라(總網羅)하다시피 한 시 작품 발표기관의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시단에 끼친바 영향(影響)이 크다.
오일도(吳一島)시를 순수 서정시(純粹 抒情詩)라 일러, 황량(荒凉)과 조락(凋落)이 주조(主調)를 이룬 그의 시엔 민족의 얼과 정과 한(恨)이 스민 민족시인이기도 하다.
▣연당 서석지(蓮塘 瑞石池) - 한국 3대 정원 중 하나
정영방이 광해군 5년(1613)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못과 정자이다. 자양산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敬亭)·주일재·수직사·남문 등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경정(敬亭)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이며, 주일재는 ‘운서헌’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서재이다. 주일재 앞에는 연못쪽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四友壇)을 만들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었다.
연못은 사우단(四友壇)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각양 각색의 형태로 솟아있는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을 서석군이라 하는데, 이 연못의 이름은 서석군에서 유래하였다.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어 정영방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탑리 5층모전석탑은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또 다른 양식이니 시간이 나면 한 번씩 보시면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대머리 총각 수고 하셨네! 현장 답사 할때보다 더 생생한 자료를 재공 해주어서 무지 고맙네.가을쯤 대구에서 만날수 있도록 일을 꾸며 봄세.
안용진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내 마음을 잠시 당황하게 하였다네. 산행 계획이 잡혀서 함께 하지못해서 못내 아쉬워서 말이야 그래 이번에 영양가서 얻은게 많아서 좋겠구나. 나는 친구들의 경과 보고로 만족한다. 정태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어쩜 정태는 그렇게도 소상히 소개를 할수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리동기생들의 보배 김정태 고맙다.
龜川 대머리 선생, 역시 천재적 노인 친구야. 어찌 그리 잘 외워서 이런 좋은 글을 올려주나? 난 그래서 늙었다는 핑계로 어리멍텅,두리뭉실 잊기를 밥먹듯하지만 대머리 구천 친구 덕분에 오래 기억할 수도 있을듯하네. 난 70나이 왜 인제 됐느냐? 70이 되었으니 이런 만남이 이런 감격이 있을줄은 미처 몰랐지? 다음모임이 기다려는 건 내가 80을 향해 가니까 그런가? 우리 빨리 80이 와서 모든 친구들 감동의 인생드라마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네.
과찬 말게.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헷갈리기만해서 진구군에게 전화를 해 어느 순서로 무얼 보았는지 물어서, 그리고 기억을 더듬고, 인터넷까지 뒤져서 기록했다네. 너무 단편적인 기록이 되어 되레 미안하이.....
이번 행사에 같이 못한 친구들이여! 정태의 글을 두 세번 읽으면 실제 가서본 사람보다 영양을 더 잘 알것이네. 그만큼 정태의 글이 소상하고 군더더기 없이 영양의 명승을 잘 표현하고 있다네.-- 구천아재 어쩌면 글을 그리도 조리있게 잘 쓰셨는가. 이제는 전문 여행작가의 길로 들어서기를 바라네.
둔재보고 글 잘 썼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 진구군이 쓰라고 해서 썼으나 뭘 봤는지 뭘 써야 할 지 많이 당황 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