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27 : 7, 26
제목: 은화 30의 수혜자들
일시 : 2021. 3. 28(고난주일)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나서 일이 그 정도로 커질 줄은 몰랐다. 뒤늦게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면서 주님을 판 몸값 은화 30닢을 대제사장들에게 다시 돌려준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노라” 그러나 유다에게 돌아온 답은 절망적이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거래는 이미 끝났고 물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유다는 야속하게 “나 몰라라”하는 그들에게 은화를 던져 버리고 나온다. 그리고 이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그러했다.
II. 성소에 내동댕이쳐진 그 은화 30개는 더러운 돈인가 귀한 돈인가?
그 은화30을 “유다”와 결부시켜 볼 때 그 돈은 돈독이 오른 유다의 “탐욕의 돈”이요, 주님을 배반한 “배신의 돈”이요, 주님을 판 “불의의 돈”이다. 그렇다면 유다가 던져버린 그 은화 30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대제사장들은 그 은화가 생명을 거래했던 부정의 값임을 알고 있었기에 난감해 했다. “이것은 핏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마27:6). 쓰자니 부정하고 버리자니 아까운 은화들이었다.
그러나 그 은화 30을 유다가 아닌 “예수님”과 결부시켜 볼 때 그 은화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예수님의 생명 값 즉 피값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핏값의 혜택을 본 수혜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은화가 그저 유다가 땅이나 사고 가족이나 배불리고 노후나 준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면 천박하고 부정한 재물이지만 그 예수님의 판매대금 은화로 안식과 생명을 얻은 수혜자들이 있기에 그 은화는 값진 것이다.
저는 주님의 핏값 이 은화 30을 생각할 때마다 아주 오래전 저희 교회를 방문했던 어느 부흥사의 사례비가 생각난다. 얘기하기가 좀 거부하지만 영락없는 그 느낌이다. 몇 일 간의 모든 집회를 마친 후 그분이 다음 일정을 위해 떠나기 직전 월요일 아침이었다. 그분께 그 동안 집회를 인도해서 감사했다는 예의 인사와 함께 사례비를 드렸다. 그리고 바깥까지 나가서 그분을 배웅해 드리는데 갑자기 휙 뒤돌아서서 사례봉투를 흔들며 “권목사, 강사를 모셨으면 사례를 제대로 해야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디 있어”라고 야단을 치신다. 그러면서 제게 던지듯이 하시며 “선교비로 써”라고 하신다. 저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고 당황하여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제 인생에 그렇게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그 후 목사님은 그 부실한 대접에 속이 상한지 몇 차례나 제게 전화를 하여 강사를 초청했으면 대우를 제대로 해야지라고 하신다. 저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예의는 갖추었지만 내용은 강하게 응대했다. “목사님 제가 초청한 적 없습니다. 목사님이 오시겠노라고 해서 마지못해 모신 겁니다. 그리고 이게 오늘날 부흥사 세계의 현주소이군요.” 한 일주일이 지났을까? 또 전화를 하셨는데 목소리가 차분하다. “우리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그냥 풀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라고 하신다. 뭐라해야 하는가? 그저 “예”라고 대답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압권이었다. “아 그리고 내가 주었던 사례비 있지? 그거 다시 내게 보내줘”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몸값 은화30을 생각할 때마다 그 사례비가 생각나는 것은 여러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거래대금 은화 30은 오늘날 500유로 정도에 해당하는 가치이다. 그분께 드린 사례가 딱 500유로이다. *그분이 사례봉투를 제게 던질때 유다가 은화를 성소에 던지는 장면이 연상이 되었다. 그러니 어찌 그 사례를 제가 쓰거나 성전고 즉 교회 재정에 넣어두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또한 그 사례비는 예수님을 팔아 만든 돈과 같이 “말씀”을 팔아 만든 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주님의 최측근 제자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소위 주의 종이 그랬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그 사례의 수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비로 쓰라고 했을 때 저는 그것을 곧바로 집행했다. 그 때 느닷없이 혜택을 본 이가 할레교회와 조규석선교사이다.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보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돈을 보내드렸다. *유다는 결국 심한 자책감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목을 매는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그렇다면 그분은 어떠한가?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그 후 들은 이야기는 자신의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그 은화는 부정하고 더러운 돈인가? 깨끗하고 귀한 돈인가? 그 은화는 주님의 핏값이기에 깨끗하고 그 값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있기에 귀한 돈이다.
III. 오늘 마태복음 말씀에 그 은화로 직접적인 혜택을 본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나그네”이다. 마태복음 27장 7절을 보라.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천덕꾸러기와 같은 예수님의 핏값 은화 30으로 사람들은 뭘 했나?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고 여겨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해하던 그들은 의논을 거친 후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를 위한 묘지로 삼았다. 예레미야가 이미 예언한 바와 같다.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가격매긴 자의 가격 곧 은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렘32:6~9). 구매된 토기장이의 밭은 피 값으로 산 땅이기에 피밭이라고 명명되었고 “나그네”의 묘지로 활용되었다. 나그네들이 주님의 핏값의 수혜자들이 된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나그네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가족없이 떠도는 사람이나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노숙자라기보다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오는 순례자들을 의미했다. 오랜 순례의 끝에 예루살렘에 와서 죽기도 했다. 은화 30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묘지구입비가 된 것이다. 나그네된 이 순례자들이 도달하고 싶은 마지막 순례의 끝은 어디인가? 진리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구매된 그 땅에서 나그네 길을 걷던 순례자들이 묻힌다는 것은 영원한 안식처를 발견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핏값 은화 30의 수혜자는 진리가 필요한 순례자요 안식이 필요한 나그네였다.
그리고 혜택을 본 사람이 바라바이다. 바라바가 죽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대신 들어갔고 바라바는 즉각 석방되었다. 바라바는 예수의 핏 값으로 가장 직접적인 혜택을 본 사람이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긴다. 재판석에 앉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다. 하지만 그는 예수에게서 아무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를 놓아주기를 원한다. 당시 유월절의 전례에 따라 유월절특사 전통이 있었는데 빌라도는 그 명분으로 예수를 놓아주려 했다. 그래서 일단 한 죄수를 꺼내와서 예수와 사면 경합을 시키려 한다. 바로 그 죄수가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이다. 죄수가 유명하면 별 것 있는가? 아주 고약한 중죄인일 뿐이다. 바라바는 반란과 살인, 그리고 강도를 저지른 중 범죄자였다. 빌라도는 예수와 바라바를 경합시키면 군중들이 당연히 바라바 No 예수는 Yes 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연호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한다. 이에 빌라도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다. 바라바는 은화30에 팔린 예수님으로 인해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어 생명을 건졌다.
주님이 십자가 핏값으로 수혜를 입은 자들이 당시 역사의 현장 속에서는 바로 바라바요 나그네들이었다.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수혜자가 그들만이 아니고 우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바로 그 나그네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고 하신 말씀이 나그네요 순례자인 우리를 향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또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유명한 죄인 그 바라바가 나 자신임을 알고 있다. 바라바가 유죄인 것처럼 나 역시 유죄이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로 가야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바라바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 핏값의 수혜자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
IV. 오늘 성찬식을 했다. 주님께서는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다. 영원한 하늘 양식으로 주님은 당신의 몸을 주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로 언약의 피를 주셨다. 살과 피 주님의 십자가의 수혜자는 나그네들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얻었고 안식을 얻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됨으로 사형수 바라바는 생명을 얻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처절한 영적 싸움을 벌이시지만 그 혜택과 은혜는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순례자에게 필요했던 진리와 안식을 얻었다. 예수의 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게 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다. 우리가 바로 유다가 판 은화 30의 수혜를 입은 수혜자들이다.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우리 위해 살과 피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높이며 십자가의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