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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천상에 옥황상제가 있어 하늘과 땅의 모든일들을 관장하였다. 5천년동안 하늘과 땅을 다스렸는데 딸로 열두공주를 두었고 아들이 없어 천상의 일을 맡길만한 후사가 없었다. 이에 열두공주가 자신들끼리 회의를 연뒤 큰딸 백희가 대표로 상제(上帝)에게 아뢰었다.
“ 아버님께선 무슨 근심을 그리하십니까. 막내공주 엘사의 시종으로 라라라는 아이가 있는데
올해 나이가 열아홉으로 용모 출중하옵고 성품 아리땁고 고우니 마땅히 아버님께서 라라를
품으시어 후사를 보도록 하옵소서. ”
상제가 나이가 많아 당황하여 망설이고 주저하다 열두공주가 거듭 간하니 마침내 라라를 품에 안았다. 얼마안가 회임을 하여 열달후 아들을 낳았다. 상제가 기뻐하여 크게 잔치를 열라 하였다. 본래 천상에 큰 잔치나 행사가 있을때는 주로 그 잔치에 쓰이는 식재료를 남방마녀에게서 조달하였다. 헌데 이때 일을 맡은 신입들이 사무착오로 남방마녀가 아닌 가까운 다른 행성에서 식재료를 구해왔다. 상제가 모르고 천상과 지상의 신료와 생령들에게 이미 후하게 음식을 대접하고 잔치와 행사를 치렀는데 설거지가 다 끝났을때쯤 남방마녀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항의하였다.
“ 본래 천상과 남방에 신의가 있어 오래전부터 교역을 해와 천상에 잔치가 있으면 남방에서
식량과 물자와 자원을 조달하였고 남방에 흉년이 들면 천상에서 구휼해와 그 교역이 어느덧
천년에 이르렀소. 헌데 상제께서 어찌 천년신의를 저버리기가 이같이 할수 있소. ”
상제가 남방마녀를 말로 잘 타이르려 했으나 마녀의 노기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예 마녀는 상제의 열두딸을 짐승의 겁운을 입혀 지상의 열두동물로 만들어 내려보냈다. 그리고 막내인 아기를 품에 안고 호령하기를 ‘너는 지상에서 네 열두누이를 찾으며 평생을 보내게 되리라. 열두누이의 겁운을 벗는 묘도리를 네 스스로 깨달아 알아내지 못할때는 너 또한 세세생생 한쪽 귀가 멀고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보내게 될줄 알아라’ 하고 마지막으로 역시 지상으로 혼령을 내려보냈다.
이때 지상(地上)에 자식없이 사는 중년(中年) 부부가 있었다. 소,말,양,염소,돼지,닭,거위,오리,사슴,토끼,타조,어도라등 열두가축을 키우며 장사를 하며 살았는데 다만 자식이 없었다. 그래도 금슬이 좋아 화목하였는데 하루는 남편이 짐승을 팔러 저자에 나갔는데 밤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헌데 느닷없이 들판의 멧돼지와 들소가 들이닥쳐 아내를 겁탈하였다. 아내가 밤새 울었으나 속절없었다. 날이 밝아 남편에게 하소연하니 남편이 탄식하였고 얼마안가 부인이 회임을 하였다. 둘이 근심하며 논의하기를
“ 아무래도 짐승의 자식이 틀림없으니 아이를 지울 방도는 없으니 낳게한뒤 깊은 산속에 내
다버리도록 합시다. ” 하였다.
그리고 산달이 다가와 아이를 내버릴일만을 도모하며 기다렸는데 하루는 남편이 북쪽하늘로 베개를 배고 혼자 자는데 꿈에 갑자기 신령(神靈)이 나타나 말하였다.
“ 그 아이는 천상의 아이다. 본래 천상에 복잡한 곡절이 있어 신령을 내려보내려 하였는데
태어나게할 방도가 없어 임시방편을 쓴것이니 너희는 더럽다하지 말고 아이를 태어나게 하
여 세상을 구원하도록 하라. 아이가 태어나 나이 17세가 되면 동남쪽 천리 떨어진곳으로
보내라. 본래 그곳에 50여 소수부족이 흩어져 저마다 살고 있으나 아직 천상의 도리를 모
르고 무도하게 살고 있다. 50여 부족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보낸 신민(神民)인데, 천성은 착
하고 유순하나 아직 하늘의 글을 읽을줄 몰라 도리를 깨닫지 못한것이니 그 아이로 하여금
천도(天道)를 깨닫게 하여 만백성을 구원케하라. ” 하였다.
남편이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결국 아내와 다시 상의하여 아이를 낳게 하였고 정성껏 키워 17세가 되니 남편이 예전에 꾸었던 꿈을 이야기해주며 ‘이제 떠날때가 되었다’ 일러주었다. 아들의 이름은 아소카라 지었는데 양부의 말을 듣고 절을 한뒤 말하기를 ‘천도가 그리하다고 하나 미천한 소자 아직 뜻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버님의 뜻이 그렇다니 떠나리이다’ 하고 말을 달려 천리를 나아갔다.
아소카가 한달을 말을 달려 당도한곳을 보니 북쪽은 큰 강이 흐르고 동쪽은 바다가 인접하여있고 산과 평지가 적당히 어우러져있어 충분히 살만한 고장이었다. 백성들은 보통 여기저기 소수부족으로 흩어져 말과양을 기르며 때로는 농사를 짓기도 하는데 어린아이까지 목검을 휘두르게 하여 그 용맹함이 범상치 않았다. 아소카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상기하며 말하기를 ‘내 비록 천상의 범상치 않은 사연으로 태어났다고는 하나 재주없는 몸으로 어찌 이곳 백성들에게 천도를 가르칠수 있으랴’ 탄식하였다. 하루는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롤 ‘동남쪽 명진(明進)이라는 고장에 가면 강철검을 만드는 실력좋은 대장장이가 있어 그가 생산하는 검은 천년을 가도 부러지지 않는다 한다. 그대는 그곳에서 강철검으로 이곳 백성들을 교화시키라’하였다. 꿈에서 깨 놀라 일단 노인이 말한대로 명진이란 곳을 가니 역시 대장장이가 있었다. 강철검을 사기를 바라니 대장장이 말하기를 ‘검(劍)은 자고로 인명을 해치는것이니 지혜있는 자가 쓰면 세상을 구하는 천검(天劍)이 되나 무도한 자가 쓰면 인명을 해치는 흉기가 된다오. 그대가 지혜있는자인지 아닌지를 먼저 봐야겠으니 내가 내는 세 문제를 맞추도록 하시오. 문제를 모두 맞추면 강철검을 드릴것이나 드리지 않으면 내가 그대를 평생동안 노예로 삼겠소’ 경고하였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내니 종이에 두가지 그림을 그려서 엎어놓은뒤 ‘한개의 그림엔 꽃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한 개의 그림엔 바위가 그려져있다오. 꽃은 지는것이니 죽음을 뜻하고 바위는 영원하니 삶을 뜻하오. 그대가 바위를 택하면 영생을 택한것이니 강철검을 내여드릴것이나 꽃을 택하면 죽음을 택한것이니 마땅히 목숨을 내놓아야하오’ 하였다. 아소카가 잠시 고민하다가 문득 종이 한 장을 집어 펼쳐보지도 않고 북북 찢어버렸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제 나머지 한 장을 그대가 펴면 내가 먼저 집은 종이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알겠구료’ 하였다. 그러자 대장장이가 껄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생각보다 지혜있는자구료. 원래 두 장에는 모두 죽음을 뜻하는 꽃이 그려져 있었소. 원래 어떤 것을 뽑든 그대가 죽을 운명이었으나 오히려 내가 내 꾀에 넘어가고 말았구료’ 하고는 이번엔 두 번째 문제를 내었다. 목검 네 개를 가져와서 십자(十字) 모양을 만들고는 ‘이제 이중 목검 하나를 움직여 온전한 ’네모‘ 한 개를 만드시오. 만약 두 개 이상을 건드릴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 하오.’ 아소카가 고민하다 목검 하나를 살짝 위로 잡아당겨보았다. 그러자 원래 십자모양으로 놓여진 끝부분 가운데에 ‘작은 네모’ 그림이 만들어졌다. 비로소 대장장이가 놀라 ‘허어...그런 반전을 꺠우치시다니 놀랍구료’ 하였다. 이번엔 세 번째 문제로 손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한 작은 컵을 가져와 계란 하나를 그 안에 넣고 ‘이제 이 계란을 손을 대지않고 꺼내보도록 하시오. 마지막 테스트마저 통과하면 그때야 비로소 강철검을 내어드리리다’ 하였다. 아소카가 어디서 물을 큰 겁에 하나가득 가져와서는 작은컵에 조심스레 따랐다. 마침내 계란이 둥둥 떠올라 밖으로 나올수 있었다. 대장장이가 그제서야 아소카 앞에 무릎꿇고 사죄하기를 ‘미천한 소신(小臣)이 현자(賢者)를 몰라 뵙고 감히 얕은꾀로 우롱하였나이다. 죄를 용서하소서’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좋은 강철검 하나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지금까지 이곳에 모두 99인의 손님이 와서 강철검을 달라고 했으나 내가 낸 문제를 통과한이는 하나도 없었소.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문제를 맞추지 못한 이들을 죽이진 않았으나 그들은 모두 바라는 강철검을 구하지 못하고 허탕만 치고 돌아갔소. 드디어 백번째 손님에 이르로서야 강철검의 진주인을 만나게 되는구료’ 하였다.
아소카가 강철검을 들어 여진 50여개 부족 앞으로 나아가 이제부터 부족을 하나로 통일해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천명하니 부족들이 이를 천명(天命)이라 생각하고 모두 수긍하였다. 이로서 고대 이래로 유목민으로 떠돌던 여진이 처음 나라를 세우니 이가 ‘홍(洪)나라’다. 아소카는 홍나라를 세운뒤 스스로 시조(始祖)이자 태조(太祖)임을 자청하였다.
태조 2년. 이웃 흉노와 화려에 사신을 보내 홍나라의 개국을 알렸다. 이어 중원과 하북,서량의 국가들은 물론 남방의 오,월,초에도 모두 사신을 보내 개국(開國)을 알리니 이웃국가들이 모두 여진의 신국창조(新國創造)를 인정하고 승인해주었다. 합당한 공물을 보내고 답례를 받았다. 몽골이 이때 아직 나라를 세우지 못한 야만족인데 역시 사신을 보내 ‘저희가 땅이 척박하여 마땅한 물산이 없어 단지 양과 말의 귀한 가죽 그리고 예부터 지어온 전통장으로 공물을 대신하오이다. 우리를 침략치 말아주소서’하니 태조가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나라가 강성해졌다.
태조 5년. 제도를 정비하여 먼저 수도를 성진(星眞)이라 지으니 이는 흑수강(黑水江) 남부 약 500여리 떨어진곳에 위치해 있다. 각 지역별로 12주(州)를 설치하고 주에는 인구와 지형에 따라 시,군,현을 세웠다. 시는 인구가 많은곳은 5만 작은곳은 2-3만정도이며 군현은 인구가 많은곳은 일만 적은곳은 몇천 1천인에 이르지 못하는 지역도 있다.
태조 7년. 이승이라는 측근이 상소를 올렸다. 이때 아직 여진의 관료제와 법령이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았는데 이승이 상소를 올려 ‘그 옛날 중원에 거대한 고대국가가 있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으나 법령과 제도가 아주 잘 정비되어있는 나라라 들었소이다. 중원이 열국시대를 거쳐 북방과 동방의 많은 나라들이 그 땅을 차지하였으나 오히려 제도는 옛 중원 노나라의 사례를 본딴 것이 많으니 우리도 마땅히 그리하소서’ 하였다. 이에 목환이란 측근이 다시 상소를 올려 반박하기를 ‘옛 중원 노나라는 북방민족들의 침략을 당해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게된지 이미 500년 세월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어찌 옛적 미개한 오랑캐의 법령과 제도를 따르리이까. 마땅히 폐하께선 자주적인 여진의 법도를 세우소서’ 하였다. 태조가 들으니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쟁을 오래 할 것 없다 판단 ‘옛 중원의 미개한 나라라도 한때 그만한 세력이 있다면 마땅히 천도(天道)를 아는 백성들이었을터. 어찌 무작정 무도하다고 할수 있겠는가. 또한 중원의 북방과 동방의 많은 나라들이 이미 옛 중원의 법령과 제도를 참고하여 각자 자신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살려 저마다의 민족국가를 세웠으니 우리도 이같이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관료제를 정비함에 국정을 총괄하는 이를 영상(領相)이라 부르게 했고 ‘제1승상’과 ‘제2승상’이 영상을 보좌토록 했다 또한 각부의 장관은 총관(總管)이라 부르게 해여 내정을 주로 관리하는 이는 ‘내무총관’ 외교를 맏는이는 ‘외교총관’ 국방의 일을 맡아보는이를 ‘국방총관’ 형법을 다스리고 재판기구를 관리하는곳을 ‘법무총관’ 나라의 산업과 경제를 관리하는곳은 ‘산업총관’ 교역을 담당하는 이는 ‘교역총관’ 교육과 문화를 담당하는 이를 ‘교문총관’이라 부르게 하는등 이때 처음으로 10여인의 장관자리를 신설하고 그 밑에 관료를 두었다. 또한 나라를 지탱하는데 있어 마땅히 필요한 법령을 정비하니 살인이나 절도,음란한 행위를 금하게 하고 백성은 나라에 충성하게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하며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는 법도등 모두 81개조의 법령을 정비하였다. 이 작업을 하는데 3년세월이 걸렸다. 여진이 처음 고대국가를 완성해가는 과정이 이와같았다.
태조 15년. 태조가 본래 미르족의 여식 유씨를 정비로 맛고 원남족의 여식 안씨를 차비로 받았다. 유씨와 안씨가 모두 아들을 낳으니 유씨가 낳은 아들을 ‘아사달’, 안씨가 낳은 아들을 ‘아스달’이라 불렀다. 어머니가 달랐으나 태조가 법도를 세우고 두 황후가 서로 화목케 하도록 배려 길항(拮抗)하는일이 없었다.
하루는 아사달이 태조앞에 나아가 ‘신이 본래 북방에 뜻이 있어 교류하는 친우들과 북방을 여행하길 원하나이다’ 하였다. 정비 유씨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선조때부터 북방의 일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데 북방에 몽골이란 사나운 부족이 살고 그 지역을 지나 더 북쪽으로 가면 춥고 쓸모없는 얼음땅이다. 네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말고 후계수업이나 열심히 받도록 하라’ 하고 타일렀다. 허나 아사달이 기어이 어미말을 듣지않고 평상시 어울리는 약 20여인의 친우의 무리들과 함께 북방으로 떠났다. 떠난지 수년이 지나도록 소식도 알 수 없고 돌아오지 않지 다들 이를 안타깝고 기이하게 여겼다.
태조 20년. 거란이 여진보다 국가형성이 늦었는데 양국 국경이 확정되지 않아 마찰이 생겼다. 사신을 교환하여 2:2 회담을 가진뒤 오석산 북동쪽 티루스강에서부터 마르스산맥 그리거 어뱅 삼림지대에 이르는 지역을 양국 국경으로 확정하였다. 중신 오상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여진은 동쪽에 바다를 인접해있고 북으로는 큰강(흑수강)이 있어 땅이 비옥하고 농사지을 평야가 넉넉하나이다. 그러나 산림지대가 적어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나 거란에는 오석산에 풍부한 광물이 나니 교역으로 양국간 화친을 긴밀히하면 두 나라의 미래가 번창하고 번성할것입니다’하였다. 태조가 이에 따르기로 했다.
태조 25년. 이때 거란에서 진귀한 황금상을 선물로 보냈는데 차남 아스달이 호기심에 만져보다 그만 부러뜨렸다. 태조가 격노하여 ‘양국간이 선물과 예물을 교환하는 것은 그만큼 화친과 친교를 돈독히 하기 위함이니 외국에서 짐에게 준 선물은 그 외교의 상징과도 같다. 헌데 네가 경망하게 한때의 호기심으로 이런짓을 벌이니 항차의 일일 어쩌란말이냐. 도저히 용서할수 없다’ 하였다. 태조가 아스달을 처단하려하자 모후 안씨가 울며 애원하기를 ‘일찌기 장자 아사달이 무모하게 북방으로 나갔다가 소식을 알수없게 된지 오래인데 폐하께서 이제 차자마저 폐하시면 어렵사리 세운 여진의 대통은 이제 누가 이어간단말입니까. 부디 통촉하소서’ 태조가 탄식하며 답하기를 ‘성통(聖統)을 이어가는일이 아무리 막중하다하나 국법을 어긴 왕자를 어찌 두고볼수 있겠는가 ?’하며 북방 벽촌으로 귀양을 보내 향후 10년동안 스스로 100차례의 참회문을 써 올리도록 명했다. 허나 아스달이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결하였다.
태조 30년. 장자 아사달이 본래 후사없이 사라져버렸고 아스달에겐 다섯 살난 아들 영(影)이 있었다. 태조가 나이들어 병세가 악화되자 신료들이 후사를 논의했다. 황실에 대통으로 남은 것이 오직 황손 아영뿐이니 그를 태손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어리니 태조가 무슨일이 생겨 어린 손자 영을 세울 경우 안비(安妃)가 섭정에 나설 것을 의논하였다. 논의가 이와같자 안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의 진의를 후대가 의심하고 왜곡하여 전해질 것을 두려워하노라. 내가 본래 바란 것은 여진의 황실이 자자손손 화목하여 부디 천년대통을 이어갈 것을 바랐다. 부디 황실의 여인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편견없이 사랑하며 과분한 욕심을 부리지 말며 혹시 후사가 너무 어려 섭정에 나서더라도 아들,손자를 모두 편견없이 사랑할것이며 대의로서 국사를 논하여 천년사직을 이어가기 바랬는데 첫단추부터 이미 그르쳤으니 어쩌면 좋은가. 이미 대소신료들이 간하는바 있고 현실이 내 손자 영밖에 없으니 그가 황위에 올라 내가 섭정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나 후대의 황실여인들은 과분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모든 황자,황손을 편견없이 자기 배아파낳은 자식처럼 사랑하여 천년대업이 한치의 오차없이 이어지기를 충심으로 바라노라’ 하였다. 안비가 글을 몰라 그의 말을 오라비 안드로스가 대신 적어 세상에 남겼다.
태조 35년. 태조가 마침내 하늘로 돌아가니 이때 나이 55세였다. 황손 영을 황위에 앉히니 이때 나이 10세요, 그가 2대 대종(代宗)이다. 대종이 나이어려 안비가 섭정에 나섰다.
대종 6년. 여진이 원래 거란문자를 차용해썼는데 이때부터 독자적인 문자를 갖자는 주장이 나와 본격적인 연구와 작업에 들어갔다. 거란문자는 야율태후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확실치는 않다. 허나 어떤이들은 여진의 언어와 거란의 언어가 크게 다르지 않는데 굳이 별도의 문자를 만들필요가 있느냐 주장하고 어떤이들은 기왕 ‘민족국가’ 노선을 가기로 했으면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독자적인 문자가 필요하다고 주장 결국 후자의 주장을 따르기로 했다. ‘언문청’을 세우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나 쉽지 않아 3년만에 이 안이 폐기되었다.
대종 10년. 대종의 나이 20세가 되니 안비가 직접 나서 명문 공신집안의 여식 오씨를 황후로 들이게 했으니 그가 오황후다. 오황후 외에도 별도의 후궁 두명을 더 들여 황실의 번창을 기원했다. 오황후가 대종과의 사이에 아들 넷을 낳으니 이름을 아사홍,아사로,아사몬,아사흔이라 지었다. 장남 아사홍이 건강이 좋지 않아 차남 아사로를 후계자로 세웠다.
대종 12년. 한 상신(相臣)이 소를 올려 간하기를 ‘여진은 동쪽으로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 큰 강이 있어 땅이 비옥하고 재물이 풍족하나 외국과의 교통이 쉽지 않은 약점이 있나이다.’ 여진이 예부터 중원 남쪽의 오,월,초와는 반도 남쪽바다를 지나 교통하였으나 거리가 멀고 시간이 오래걸려 불편함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중원이나 하북의 많은 나라들과 교류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니 이는 흉노가 중간을 가로막고 있어 그 길을 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들리는 전설에 동쪽 바다 멀리 가면 더 넓고 큰 신묘한 세상이 있다하니 차라리 우리는 바다를 개발하여 먼 나라들과 교역하고 소통하는 지혜를 발휘함이 옳은줄로 아옵니다‘ 하였다. 또 한 신하가 소를 올려 말하기를 ‘흉노가 거란에게도 길을 잘 내주지 않아 이미 그로인한 분란이 여러차례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에게까지 중원과 교통하는 길을 빌려주길 기대하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방도는 오직 반도의 항구를 빌리거나 반도 남쪽바다를 지나 대륙과 교통하는 길밖에 없으니 마땅히 이리하소서’ 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바다를 개발할 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종 18년. 말갈은 본래 거란과 여진 그리고 반도국가 사이에 위치한 작은 소수부족이었는데 세력은 작고 풍습은 미개했으나 늘상 독수(毒手)를 품고 있었다. 하루는 말갈의 한 무리가 여진 남쪽 고을 여럿을 급습하니 장군 민홍태를 내보내 평정할수 있었다.
대종 20년. 몽골은 원래 풍습이 미개하고 땅이 척박해 겨울에 양식이 떨어지면 곧잘 따뜻한 남쪽나라들을 침략하려 했다. 이때 다시 몽골의 양도석,남태현의 무리가 500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 북쪽지역을 침략하니 장군 몽진을 보내 진압하였다. 한 신하가 소를 올려 간하기를 ‘여진이 동으로는 거란과 화친하여 교역으로 서로의 부족한 물자를 채우고 있으나 북으로는 몽골이 남으로는 말갈이란 야만인이 있어 늘상 침략의 위협에 도사리고 있나이다. 마땅히 군제를 개편하여 이들의 침략을 대비하소서’ 하였다. 황제가 올케여겨 군제를 개편하고 멀리 중원의 옛 병법서를 어렵사리 들여와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여진의 군략과 책략을 발전시킬수가 있었다. 어떤이들은 ‘이 모든 것이 안비(安妃)의 공이로다’ 칭송하였다.
대종 25년. 대종이 나이 35세에 하늘로 돌아갔다. 차자 아사로를 황위에 올리니 이때 나이 11세라 다시 섭정이 불가피하였다. 정비 오씨가 승상 안료와 국방총관 대승영을 등용하여 이들과 국사를 논의하기로 했다. 아사로는 3대 정종(定宗)이 되었다.
정종 2년. 남부 은진현(恩眞縣)에 백옹이라는 이가 있어 큰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이 80이 다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해 후사를 보지 못하다가 이웃마을에 현지라는 상처입은 19세 소녀를 부인으로 맞을수 있었다. 그러나 백옹은 현지와 정상적인 잠자리는 갖지 않은채 매일같이 폭행하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참다못한 현지는 웅한이라는 22살 하인과 사통하다가 그와 짜고 백옹을 약을 먹여 죽인뒤 시신을 불에 태우고 그의 소유인 과수원도 모두 불질러 없애버렸다. 조정에서 일을 보고받았으나 황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사리분별을 못하니 오태후가 원상을 소집 일을 정밀조사하고 의논케 했다. 원상에서 결론내리기를 ‘비록 백옹이 어린 아내를 학대한 죄가 있다하나 이미 한번 혼사를 치룬 부부로서 정조와 신의를 지킬 의무가 있음에도 현지는 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젊은 하인과 사통 남편을 독하게 살해하였으며 또한 백옹 소유의 과수원을 모두 불질러 타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것도 자유경제이치(自由經濟理致)에 맞지 않도다’ 하고는 현지와 웅섬을 모두 극형에 처했다.
정종 5년. 말갈이 또다시 독수를 품고 남방의 다섯마을을 기습하여 잔혹한 살육을 저질렀다. 오태후가 보고를 받고 노하여 장군 김은식,이동주에게 직접 명하여 말갈을 치게 하니 은식과 동주는 1만대군으로 말갈의 10여부락을 습격하고 500인도 넘는 말갈인을 불에태워 죽였는데 노인,어린아이,여성,장애인이라고 봐주는 경우가 없었다. 마침내 말갈추장 우현을 사로잡으니 은식과 동주가 직접 시신을 99토막 내고 산에 버러 맹수의 밥이 되게 했다. 이때 우현의 아들 우태와 우동이 사로잡혔으나 극적으로 탈출한뒤 김은식,이동주의 만행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죽을때까지 여진에서 나는 그 어떤 물과 음식도 먹거나 취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어떤이들이 조롱하기를 ‘말갈족 부락에 이미 여진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곳이 없는데 여진의 물과 음식 없이 어찌 말갈인이 살아간단 말인가’ 하였다. 우태와 우동은 남쪽의 반도국가로 피신하여 달아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종 7년. 수도 성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곳에 청성이란 도시가 있는데 이곳에 타지에서 이주해온 기노을과 엄태식이란 60 노인이 있었다. 기노을은 남부에서 이주해왔는데 늘상 말하기를 ‘우리 여진의 가장 큰 위협은 북방의 야비한 몽골 오랑캐다’라고 했고 엄태식은 항상 입에 담기를 ‘우리 여진의 가장 큰 위협은 뭐니뭐니해도 남쪽의 미개하고 천지도리를 모르는 말갈 야만족이다’라고 했다. 늘상 이런 주장을 하다 마침내 감정싸움으로 번져 기노을이 엄태식을 때려죽였다. 조정에서 보고를 받고 말하기를 ‘남쪽에서 온 자가 오히려 북방 오랑캐를 더 위협적이라 말하고 북쪽에서 온 이는 반대로 남쪽에 더 큰 위협이 있다’고 했으니 뭔가 상식에 많이 어긋나도다. 무엇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인명을 해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중대범죄다라고 하여 급기야 엄태식을 죽인 기노을을 참형에 처했다.
정종 10년. 정종이 마침나 나이 스무살이 되니 황후를 맞아들이니 모종화라는 여인이었다. 나이는 정종과 동갑이었고 성품이 유순하기 이를데없어 황후감으로 손색이 없었으나 다만 가문이 일천하여 이로인한 논란이 있었다. 오태후가 말하기를 ‘여진이 본래 나라를 세운지 얼마되지 않아 그 이전에는 공신도 중신도 명신도 없는 다 같이 풀을 뜯으며 이주하는 유목민이었소. 어찌 태초부터 귀하고 천함이 구분이 있을수 있었겠소. 또한 혼사는 오직 황실의 고유권한이니 신료들은 관여치 마시오’ 하고는 마침내 모씨를 정종의 황후로 맞아들였다.
정종 12년. 여진이 이때까지 교육제도가 체계적으로 자리잡지 않아 보통 낙향한 관리들이 고향에서 학문과 예절,역사등을 가르쳤고 언어와 문자는 보통 각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자가학습’ 시켰다. 홍섭이라는 이가 있어 조정에서 차관(글자그대로 차관급. 총관=장관, 차관=차관) 벼슬을 하고 나이 50을 넘겨 낙향하여 남동부의 자기고향 마원현에 가서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학문을 가르칠 때 보통 귀족,평민의 구분은 없었으니 이는 보통 가르치는이 재량에 맟겨졌다.
마원현에 운태라는 17세 소년이 있었는데 하루는 상소를 올리니 홍섭이 지역에서 학문을 가르치는데 오히려 남부의 화려왕조 제도와 장수,명신들을 칭송하며 여진의 선대 황제와 중신,명신들을 헐뜯는다며 아무래도 사상이 불순하다는 내용이었다. 증빙자료도 함께 첨부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를 보고 판단하기를 ‘홍섭의 사상이 불순한건 유감이지만 제자로서 스승을 고발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해하는것과 같다. 인륜의 근본이 아니다’ 하고 우선 홍섭을 두 눈을 멀게하고 고향에서 천리 떨어진곳으로 귀양보내 그곳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게 하고 운태는 성기 100대를 몽둥이로 때러 스승을 모해한 죄를 물었다. 여진의 법도가 이렇게 잡혀져갔다.
정종 15년. 북방 각부현이란 곳에 동진과 성읍이라는 이가 살았는데 본래 하급무관 시절에 군수물자를 사사로이 횡령하다 적발되어 변방의 노비로 충당되어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노역에만 종사하게 했다. 이때 둘이 채석장과 소금광산에서 돌이나 암염을 캐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평상시 친분이 있던 몽골인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사전에 적발되어 관련자는 모두 참형에 처해졌고 이후 평민이나 노예가 사사로이 몽골인과 서한을 주고받는일을 금하였다.
정종 17년. 북서쪽 원석이란 고을에서 별다른 직업없이 떠도는 60노인이 자신의 후사를 잇게 하겠다며 14세 소녀를 납치하였다. 보고를 받고 엄벌에 처하였다. 어떤이들은 이를 2년에 있었던 백옹의 일과 너무 다르다며 이의제기를 하는데 조정에서 답하기를 ‘백옹의 일은 이미 정식 혼사로서 부부의 의를 맺은이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하나 아내된 도리를 다하지 않고 배신함은 물론 내연남과 함께 남편의 재산을 모두 불태워버린 죄도 있어 죄를 묻지 않을수 없었다. 허나 이 일은 부부간의 신의를 그르친일이 아니라 한쪽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벌인 ‘약탈혼’이니 어찌 엄중한 죄를 묻지 않을수 있겠는가. 이후에도 나이어린 소녀를 함부로 납치해서 데리고 사는 약탈혼은 엄벌에 처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정종 20년. 이때까지 아직 여진에 종교가 없었다. 멀리 중원은 물론 반도에도 이미 석문교가 널리 퍼져있다 하나 여진과는 워낙 거리가 멀어 영향을 받거나 접해본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어떤이들은 거란의 오석산까지 가서 그곳의 신령께 비는일도 있었다. 조정에서 의논한뒤 이를 우려하여 ‘거란이 비록 우리와 오랜 친교가 있다하나 거란의 전통종교에까지 여진인이 가서 비는일은 유감이다. 앞으로 오석산에 가서 비는일은 금한다’ 하였다. 백성들이 정신적 위안을 삼을만한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정종 22년. 해일이 일어나 육지안 10여리까지 바닷물이 스며드니 침수되는 가옥이 많고 이재민이 발생했다. 나라의 곡식과 재물을 풀어 피해자와 이재민을 구제,구휼하였다.
정종 25년. 역병이 도니 이때 무당과 주술사들이 마음대로 굿을하고 점을 쳐 해괴한 요설로 백성들에게서 금품을 갈취 피해가 막심하였다. 나라에서 ‘역병보다 더 극악한 무리가 무당과 주술사’라며 이를 엄금하고 화려에서 귀한 의서를 들여와 이를 필사,보급하여 백성들에게 의술을 보급하였다. 외부에서 들여온 서책을 번역,필사,보급하는 일은 주로 기술청(記述廳(의 관료들이 담당하였다.
정종 28년. 북방에서 대욱이란 노예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역시 몽골과 손잡고 내통한자였다. 한달만에 반란을 진압한뒤 이후 몽골인과 사신(私信) 교환을 더욱 엄금하였다.
정종 31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동해안에 묵호라고 하는 오래전부터 어업이 융성한 큰 도시가 있었는데 그곳의 고깃배에 이상한 여인이 하나 붙잡혀 들어왔다. 형상은 분명 사람이었는데 이곳의 언어를 쓰지 않았고 키가 7척(대략 170-180cm정도)이나 되었고 피부가 유독 가무잡잡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지역의 관원은 물론 통역사까지 달려와 확인해보았으나 몽골이나 흉노는 물론 반도의 언어 그 어느것과도 일치하지 않아 주민들은 물론 관원까지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가 쓰는 언어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조정에 보고를 올리니 황도로 직접 보내 정밀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본래 황궁에 외국에서 진상한 진귀한 동물들을 기르는 작은 동물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한방을 비우고 여인을 임시 거처하게 했다. 대충 이곳의 글과 말을 가르쳐주며 언어로 소통을 해보려 했는데 1년이 지나서야 겨우 간단한 단어로 소통이 가능해졌다. 대충 사연을 들으니 여인은 먼 바다에서 섬나라를 오가며 해적질을 하는 해적의 딸이었는데 무리가 풍랑을 만나 모두 세상을 떠나고 혼자남은 여인만이 우리나라의 묵호항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름이 ‘나니’라고 했고 스스로 나이가 열일곱이라 했으나 외모가 생각보다는 그보다 더 들어보였다.
팔,다리가 육중하고 주먹이 커서 혹시나 해서 시험을 해보니 웬만한 성인 사내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혼자 능히 들 정도로 힘이 셌다.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도도 없어서 황궁 근처에 작은 거처를 마련해주고 그곳에서 살게 배려해주었다.
정종이 스무살에 혼인한 모황후와의 사이에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의 이름은 조이 차남의 이름은 메이였다. 조이는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즐겨 그 배움에 막힘이 없었고 예의와 절도가 그 어느것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 다들 ‘가히 여진의 대통을 이을만한 왕재로세’ 하며 칭송하였다. 한편 차남 메이는 어려서부도 용무가 유독 아름답고 깜찍하여 황후가 무척이나 예뻐하여 심지어 나이 17세가 될 때까지 자기 침전에서 재우고 젖을 물려줄 정도였다. 그러나 후계는 결국 장남 조이로 세웠다.
조이가 이때 나이 어느덧 21세였는데 호기심에 종종 나니의 처소에 들렀고 처음엔 어린나이의 호기심이라 생각하고 크게 개의치않았다. 허나 어느새 둘 사이에 정분이 생겨 조이가 나니와의 혼인을 청했다. 황실은 물론 대소신료들도 기겁하여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리고 태자를 설득하려 들기에 이르렀다. 모황후도 몹시 놀라 하루는 조이를 불러 꾸짖기를 ‘여염집의 자손이라면 어떤 여식과 혼인하든 크게 개의치 않을것이나 무릇 황실의 여인은 여진의 대통을 이어가기에 합당한 핏줄을 낳아야 하는 중요한 소임을 맡은몸이다. 황실의 혼인을 동서고금에서 함부로 정하지 않는 이치가 거기에 있는데 너는 어찌하여 경거망동하여 피부색까지 다르고 근본도 모르는 이방의 흑녀(黑女)를 사모하기에 이르렀느냐’고 하며 ‘더 늦기전에 그만두도록 하라’ 다그쳤다. 허나 태자가 당돌하게 반박하기를 ‘어마마마께서도 일천한 가문의 자손으로 아바마마와 혼인하였는데 어찌 소자만 부당하다 하시옵니까 ?’하니 모황후가 더욱 화가나 급기야 뺨을 때리며 꾸짖기를 ‘어미가 비록 신분이 그리 높지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나 어려서부터 예의와 부덕을 배우기에 부족함이 없어 다들 ‘황실의 여인으로 보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칭송하였다. 허나 너는 단순히 신분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뿌리도 근본도 모르는 이방의 흑인을 사랑하기에 이러는 것 아니냐 ? 경거망동을 말고 어서 그만두거라‘하였다.
조이가 거듭 고집을 부르며 나니와 혼인할 것을 바라니 급기야 황제와 황후가 함께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니를 택한다면 너를 후계자로 삼을수 없으며 후계자를 포기한다면 나니와의 혼인을 반대하지 않겠다’ 하니 조이가 오히려 ‘둘중 어느것도 포기할수 없나이다’ 하였다. 백날을 꾸짖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으니 급기야 황제와 황후가 태자에게 항복하였다. 이때부터 ‘부모는 자식을 못 이긴다’는 속설이 생겨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조이가 결국 나니와 혼인하여 아들 여덟을 낳았다. 한편 메이는 조이의 대란때 내심 다른마음이 생겨 기대를 걸었으나 대통은 결국 조이로 결정되자 남몰래 이렇게 탄식했다. ‘오늘의 일이 훗날 거란에 큰 분열의 결과를 낳을까 심히 우려되도다’ 하였다. 메이는 모후가 짝지워주는대로 명문가의 여식과 혼인 4남2녀를 낳았고 다른 첩실을 두어 5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더 보기까지 했다.
정종 35년. 정종이 마침내 하늘로 돌아가니 이때 나이가 45세였다. 태자 조이가 대통을 이으니 이때 나이 25세요 그가 4대 명종(明宗)이다.
명종 2년. 화려에 양치라는 말장(末將) 하나가 여진의 국경마을을 급습하니 태신과 엄칙을 보내 토벌하였다. 화려에 사신을 보내 항의하고 배상을 요구하니 화려가 듣지 않았다.
명종 5년. 말갈이 공녀 20여인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이를 받아주고 말갈녀는 모두 원로공신의 첩실로 삼게했다. 이때 말갈에 백화승이란 주술사가 있어 떠나는 행렬을 보며 통곡하여 말하기를 ‘말갈이 약하고 여진이 강성하니 너희가 늘상 우리를 핍박하길 이와같이 하니 어찌 천지도리가 이와 같을수만 있겠느냐. 두고보아라 저 머나먼 우주 반대쪽 어디선가는 우리 말갈이 여진뿐만 아니라 반도국가는 물론 흉노,거란,몽골은 물론 저 중원의 국가들까지 모두 발밑의 노예로 삼아 천년동안 다스리고 있으리라 !!!’ 하였다. 말단 호송병 하나가 이를 듣고 노하여 단칼에 노인을 베어버렸다. 시신을 보며 말하기를 ‘네X의 나이가 이미 백살이라 들었으니 여기서 뒈져도 여한이 없으리다’ 하고 가래침을 수도없이 내뱉었다.
명종 7년. 선대때부터 바다를 개척할 중요성을 아뢴 상신이 있어 마침내 먼 바다를 항해할수 있는 큰 배를 건조하고 항해를 시작했다. 제1대는 대장을 토성이라 부르고 300여 무리와 함께 동쪽마다 멀리 나가보게 했으며 제2대는 대장을 울진이라 부르고 500여 무리와 함께 남쪽바다로 향하게 했다. 여진이 원래 화려반도 남해안을 거쳐 오,월,초등과 교역,소통하였는데 제2대는 그보다 더 먼 남쪽바다까지 항해하게 하는 것이다. 3년후 두 부대가 모두 돌아와 보고하기를 제1대는 동쪽바다로는 계속 나가보아야 거친 풍랑이 잦고 간간이 섬이 보이나 사람이 사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봐야 실익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제2대는 보고하기를 ‘우리가 그전까지는 오,월,초가 남쪽세상 끝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이다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날은 더 더워지나 무한한 나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사옵고 세상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 큰 세상일수 있음을 알았나이다. 여진의 미래를 위해선 부디 더 먼 남쪽나라와 교류하는 것이 이로울 것 같사옵니다’하였다. 황제가 보고를 받아들이고 바다멀리 남쪽나라들과 교역,소통할일을 의논하였다.
명종 10년. 거란에서 진귀한 새 몇 마리를 선물로 진상하여 황궁 동물원에서 키우게 했다. 말단 병사와 관료들이 킥킥대며 웃기를 ‘원래 저곳에서 나니를 키웠는데 지금은 황후가 아닌가. 이제 곧 말못하는 짐승들도 황후가 되는꼴을 보겠구나’ 하였다. 황제의 귀에 들어가니 바로 노하여 이와같은 말을 지껄이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목베게 했다.
명종 15년. 여진에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많은 전설이나 설화 민담들이 있어 이것들을 수집,채록하여 이야기와 노래,춤을 섞어서 공연하는 전통공연이 있어 이를 ‘정극’이라고 불렀다. 정극을 집필한 3대작가로 대중상,원충기,오운용의 작품들이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고 이때에 이르러 민가는 물론 귀족집안 연회에까지 초청받아 공연하는 극단이 약 20여개에 이르렀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극단으로 ‘단성단’이란 극단이 있어 종종 황도에까지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였다. 단성단의 1대 단장이 단공이라는 이였는데 나이 50에 극단의 21세 어린배우 소연과 혼인하여 딸 둘을 낳아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단공의 뒤를 이어 단장이 된 2대 단장은 염광이란 이였는데 역시 나이 50에 22세의 어린 배우 유경과 혼인 딸 넷을 내리 낳아 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어 3대 단장이 된 이는 안철이라는 이였는데 그는 나이 60에 24세의 배우 수영과 혼인 딸 여덟을 낳으니 다들 탄복하였다. 황궁에서 보고를 받고 놀라 어린 부인과 자녀들을 모두 초청하였다. 그리고는 ‘이 또한 어찌 기재(奇才)라 아니할수 있겠는가’ 하고 부인과 자녀들에게 금,은,비단,명주를 하사하였다.
명종 20년. 석문교가 중원과 하북은 물론 흉노와 거란,반도지역에까지 퍼진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급기야 여진에도 이를 믿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떤이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석문교는 저 머나먼 대륙 남쪽에서 시작된 종교인데 그 탄생의 곡절부터가 해괴하며 이생에서의 업연과 인과대로 다음생의 삶이 결정된다하니 실로 근거없고 허무맹랑한 교리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마땅히 배척하셔야 합니다.’ 하였고 또 어떤이들이 간하기를 ‘옛부터 종교란 것이 각 민족이나 부족의 시조를 믿어오다 시절이 지나면서 좀 더 체계적인 교리를 가진 종교들이 나타나 그와같은 고급종교로 진화,재편되었나이다. 불행히도 우리 여진은 아직 신앙이 없어 백성들이 삶의 위안을 찾을길이 없나이다. 석문교의 교리가 백성들의 삶에 위안이 되고 여진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묶기에 그런대로 부족함이 없나니 석문교를 받아들이오서’ 간하였다. 오랫동안 격론이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 황제가 결론내리기를 ‘석문교를 민가에서 신앙하는일은 허용하되 귀족집안에서 지나치게 불공이나 치성을 드리는일은 삼간다’는 정도로 중재안이 나왔다.
명종 25년. 남동쪽 마을에 요녀가 하나 살았는데 손수 가짜 한약이나 정력제를 비싼값에 유녀나 노인들에게 팔아 실속을 챙겼다. 요녀가 만들어 파는 한약이나 졍력제를 여러 의원에게 자문을 구하고 멀리 화려에까지 사신을 보내 정밀분석케 했는데 전혀 의학적 근거가 없는 허당맹물이었다. 황제가 마침내 진노하여 혹세무민한 요녀를 붙잡아 능지처참했다.
명종 29년. 명종이 바야흐로 세상을 떠나니 이때 나아 54세였다. 명종이 본래 태자시절 모후와 수많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바닷가 마을에서 잡힌 나니라는 수수께끼의 여인을 배필로 맞았는데 황제가 된후 황후는 ‘나황후’가 되었다. 나황후가 명종과의 사이에 여덟 아들을 낳으지 장남은 구진, 차남은 구왕, 3남은 구공, 4남은 구당, 5남은 구교, 6남은 구홍, 7남은 구재, 8남은 구일이라 이름하였다. 장남 구진이 이때 나이 33세로 태자를 거쳐 황위에 오르나 그가 5대 성종(成宗)이다
성종 3년. 바다를 개척하는 것이 선대때부터 숙원사업이었는데 이때 황도라는 이가 나와서 이전에 바다로 나아갔을 때 남쪽으로는 대륙 남쪽 많은 나라와 교류하는 길을 텄으나 동쪽의 이치는 아직 다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이제 신에게 500의 무리를 내주시면 동쪽바다의 신세계를 반드시 알아오겠나이다 하였다. 황제가 허락하고 10여척의 거함에 500여 무리를 태우고 나아가게 하니 3년여후에 돌아왔다. 보고를 보니 이전 명종때 토성이 이야기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풍랑이 거칠고 기후가 몹시 좋지 않았으며 간간이 작은 섬을 보았으나 생명체가 사는 것 같지 않았나이다 하였다. 이후 남쪽바다로 계속 항해하는 것은 이로우나 동쪽바다로 계속 항해하는 것이 이로울지 이견이 생겼다.
성종 6년. 천문관에서 오래전부터 하늘을 관측하며 천지음양의 도리를 살폈는데 하루는 관상감이 보고하기를 ‘기이한 현상을 하나 발견하였나이다’ 하였다. 작은 별 하나를 그보다 작은 별 몇 개가 순환하는듯한 이치가 발견되었다 하니 아직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좀 더 예의주시 관측하라 명했다.
성종 9년. 태원익이라는 이가 다시 황제께 소를 올려 ‘제게 500의 무리와 10여척의 기술좋은 군함을 주시면 다시금 동쪽바다 더 먼곳의 이치를 알아오겠나이다’ 하였다. 황제가 허락하니 이전 토성이나 황도보다 더 오랜시간이 걸려 돌아왔다. 보고하니 ‘풍랑이 간간이 이는 것은 사실이나 기후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으며 간간이 작은섬이 보였고, 주민이 사는 섬들이 있었나이다. 이중 해적무리 몇몇을 잡았는데 말하기를 ‘동쪽으로 5천리를 더 가면 다른 세상이 있다’ 증언하더이다. 이미 우리가 간곳에 동쪽으로 5천리를 간곳인데 그곳에서 5천리를 더 가면 만리가 되는것이옵니다‘ 하였다. (* 다만 여기서 5천리,만리등은 단순한 추정치다.) 황제가 기이하게 여겨 이후 좀 더 견고한 기술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였다.
성종 12년. 천문을 보는 관상감이 보고하기를 ‘서남방에서 아주 기이한 별 하나를 발견하였나이다’ 하였다. 내용을 보니 ‘이전에 볼 수 없는 별이었는데 망원경으로 자세히 관측하니 몹시도 아름다웠고 마치 한두개가 아닌 여러개의 무수한 별이 무리를 지어 한데 뭉쳐있는 듯 하였나이다’ 하였다. 황제가 직접 확인을 해보려 했으나 망원경으로 봐도 깨알보다 작은 크기라 세세한 확인은 어려웠다. 다만 그 아름다운 별 이름을 ‘지환공주’라 이름지어 부르게 했다. 지환공주는 옛 여진 전설에 나오는 아주 아름답고 총명한 공주 이름이다.
성종 17년. 성종의 17년 치세가 큰 탈없이 무난히 흘러가고 성종이 나이 50세로 승하하였다. 장자 동낭(東郞)을 15세때 태자로 삼고 이때 황위에 올리니 나이 23세였다. 그가 6대 중종(中宗)이다.
중종 3년. 황제가 순행을 하던도중 한 무리의 기습을 당했는데 잡아보니 우두머리는 오진이라는 말갈녀였다. 말갈녀가 노기를 띠며 황제를 노려보며 말하기를 ‘너희 여진이 무도하게 우리 말갈인을 학살할 때 나 역시 가족,친지 30여인을 잃었다. 그때 나와 비슷한 불행을 당한 동지 10여인과 함께 이날만을 기다리며 도모하였는데 실패하였으니 실로 분하기 그지없도다’ 하였다. 붙잡은 십여인이 모두 말갈녀였는데 놀랍게도 모두 오진과 비슷한 스무살 안팎의 어린 여성이었다. 격노한 황제가 산뽕나무 가지 백개를 꺾어오게 하여 그것으로 오진의 무리 맨발을 죽을때까지 때렸다.
중종 6년. 석문교의 고승 하나가 황궁을 방문 이와같이 간했다. ‘요 근래 주변정세가 심상치 않고 천문을 보니 본국(本國)의 기운이 이전같지 않았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친히 나라가 주관하는 대 법회를 열어 부처님께 공양하고 치성을 올리면 부처님의 법력으로 능히 여진을 천년동안 지킬수 있을것입니다. 마땅히 대왕께서 굽어살피소서’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선대에서 이미 석문교를 민가에서 신앙하는 것을 허용하였소. 허나 이제 국가가 나서 석문교와 함께 법회를 열면 국가가 석문교를 공인하는 것이 되어 그것은 곤란하다’며 허락지 않았다.
중종 9년. 해일이 일어나 민가 수십채가 침수되었다. 물자와 곡식을 풀어 이재민을 지원하였다.
중종 11년. 2년만에 다시 해일이 일어났는데 그 규모가 더 컸다. 나라에서 다시 재물과 곡식을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중종 15년. 융성시에서 작은 변고가 발생했는데 경자라는 요녀가 있어 정부와 짜고 남편을 해쳤다. 심지어 둘 사이에 자식까지 있었다. 사건을 조사한뒤 ‘부부간의 의를 그르치고 인명을 살상한 극악한 범죄’라 하여 연루된 둘을 모두 참형에 처했고 둘 사이에 생긴 부적절한 아이들은 외국으로 은밀히 보내 그곳에서 키우도록 조치했다.
중종 20년. 중종이 본래 태자때 명문가 여식 하씨를 제1비로 들였고 황제가 된 뒤에 지씨를 제2비로 들였다. 하씨가 먼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태(台)’로 지었다. 하씨가 태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니 지씨가 태를 양육했다. 어떤이들이 간하기를 ‘태가 본래 황후마마의 혈손이 아니거늘 태자가 황위에 오른뒤 마마를 모후로 대접하겠나이까 ? 또한 태가 황제가 된뒤 나중에 마마께서 낳은 자손을 핍박한다면 그땐 어찌하시겠나이까 ?’하였다. 그러나 지황후가 말하기를 ‘내가 태를 내 자식처럼 사랑하고 아끼거늘 어찌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수 있겠소. 또 설사 내가 다른 자손을 낳는다 하더라도 태에 대한 의를 그르치지 않으리다’ 하였다. 지황후가 딸 둘을 먼저 낳고 막내로 아들을 하나 더 낳았는데 이름을 ‘정(程)’으로 지었다. 정이 15세가 되니 이름난 거상 둘을 몰래 황궁으로 들여 아들에게 장사를 가르친뒤 이렇게 말했다. ‘너는 형이 있으니 황제가 될수 없다. 네 형은 어릴적부터 어미가 의로써 키운 아이니 어찌 이를 배신할수 있겠느냐. 대신 네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 저 바다건너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하니 그리로 나가보는게 어떻겠느냐 ?’ 타일렀다.
중종 24년. 천문관에서 다시 기이한 천체현상을 간하나 ‘옥성(玉星)과 도성(圖星)의 운행이 쌍둥이처럼 흡사하니 범상치가 않사옵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천문현상을 발견할 것 같나이다.’ 황제가 좀 더 세밀하고 유심히 관찰할것일 명했다.
중종 28년. 석문교의 고승이 다시 황제를 찾아와 황궁에서 대법회를 열어줄 것을 요구하나 이는 황실이 공식적으로 석문교를 공인하는 것이 되어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법회를 여는 것은 막지 않겠노라 방편을 내리니 황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태(志泰)‘라는 도시에서 대대적인 법회를 열었다. 참석하는 백성이 1천인에 이르고 멀리서 대신 불사와 치성의 축원을 올리는이가 1만여인에 달했다. 어느덧 석문교의 교세가 이와같이 확장된것에 다들 놀라워했다.
중종 38년. 중종이 재위 38년만에 하늘로 돌아가니 향년 61세다. 태자 태가 황제에 오르나 이때 나이 32세요 그가 7대 선종(宣宗)이다.
선종 3년. 화려에서 장수 엄태도,무만지등이 여진의 남부 10여현을 치니 장수 대원진을 보내 격퇴하였다.
선종 6년. 거란에서 무장 오란시,제무라등을 보내 여진의 서부 지역 10여성을 공력하니 장수 권응칠을 보내 격퇴하였다.
선종 9년. 몽골이 무장 10여인과 장수 1만을 보내 북부지역을 공격하니 장수 계진와 팔복을 보내 격퇴하였다.
선종 11년. 해일이 일어나 민가와 가옥이 침수되었다.
선종 12년. 본래 정종시절 모황후 소생의 조이와 메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조이는 황제가 되고 메이는 모후의 총애를 받았으나 황제가 되지 못하였다. 메이가 아들 아홍단을 낳고 아홍단이 아진관을 낳았는데 아진관의 아들 아겸이 진관의 후처 재희와 사통하여 승덕이란 아들을 낳았다. 승덕이 자라서 나이 20세가 됨에 어울리던 무리 사인상,홍희섭,김창식등을 모아 이와같이 말했다. ‘그 옛날 정종시절 모후께서 우리 선조를 사랑하시었는데 조이가 근본없는 흑녀를 배필로 맞아 황실의 핏줄을 더럽힌 이래 어느덧 더러운 핏줄이 4대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여진에 변란이 그치지 않고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황실의 혈통을 그르쳐 나라의 근본을 어지럽힌데 대한 천지신명의 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나 아승덕은 여진황통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나니 동의하는자는 모두 따르라 !!!’ 하였다. 1천여 사병으로 황궁을 에워싸니 선종이 더 버텨낼 재간이 없어 결국 항복하였다. 선종을 폐위시켜 북방 극변천리로 귀양보내고 황위에 오르니 그가 8대 덕종(德宗)이다.
덕종 3년.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와 ‘북방 몽골 세력이 강성해지고 있어 일이 심상찮으니 함께 손잡고 방비를 하는게 어떻겠냐 ?’고 제안했다. 황제가 큰 의미를 두지 않은채 사신을 돌려보냈다.
덕종 5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몽골이 거란의 국경을 거듭 침략 혼자서 당해내기 쉽지 않다. 몽골이 거란을 쓰러뜨리면 이어 여진도 함께 도모할것이 뻔하니 부디 도와달라’하였는데 응하지 않아였다. 사신에게 후한 선물만을 내린채 돌려보냈다.
덕종 10년. 몽골이 여진 북서부 일대를 공략 10여개 성을 빼앗았다. 장군 원철과 함승환을 보내 대비케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몽골에 사신을 보내 일시적으로 화친을 청했다.
덕종 15년. 거란에 사신을 보내 함께 손잡고 빼앗긴 10여개 성을 되찾자고 했다. 중신들이 ‘이미 이전에 거란의 동맹요청을 거절한바 있는데 도와주겠는가 ?’ 하며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허나 거란이 군자와 대인같은 면모를 보내며 원군요청해 응했다. 17년에 비로서 거란-여진 연합군으로 몽골군을 격파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을수 있었다.
덕종 20년. 덕종이 재위 20년만에 승하하니 나이 40세였다. 태자 임둔이 15세 나이로 황위에 오르니 그가 9대 익종(翼宗)이다. 황제 나이 어리고 북방정세가 심상찮으니 원상제도를 두어 원로대신과 백전노장들이 중심이 되어 외교와 국방의 일을 논하도록 했다.
익종 3년.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와 흉노-거란-여진이 손을 잡고 몽골에 방비하는 ‘5천리 장성’을 쌓자는 제안을 했다. 비용을 동등하게 부담하는 것으로 하고 성을 쌓는데 합의했다. 아울러 몽골에 별도의 사신을 보내 ‘불가침조약’을 맺도록 했다. 장성을 쌓는데 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익종 5년. 남부 반도의 화려가 무도하개 맹장 관윤과 박준경을 보내 우리의 성 9개를 빼앗았다. 노한 황제가 명장 오천성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9성을 되찾을수 있도록 했으나 쉽지 않았다. 두 나라가 9성을 사이에 두고 3년을 대치하였다. 신료 루마니가 지혜를 발휘하여 ‘화려에게 9성을 무도하게 빼앗아간 책임이 있는 관윤과 박준경을 처벌하고 9성을 돌려주면 이후의 죄는 묻지 않겠다’고 하소서 하니 그의 제안에 응하여 이와같은 뜻을 전하는 사신을 화려에 보냈다. 화려가 오랜시간 고민하다 마침내 9성을 돌려주고 관윤과 박준경을 처벌하니 황제가 예로써 치하하고 이전의 죄를 사해주었다.
익종 10년. 거란에서 장수 강승규,박갑수가 쳐들어와 여진의 서부 10여지역을 공략하였다. 장수 유진석을 보내 빼앗긴 10여지역을 되찾고 거란에 사신을 보내 이와같이 말했다. ‘이전에 화려에서도 우리의 요충지 9성을 관윤,박준경이란 이를 보내 무도하게 빼앗아 책임자인 관윤과 박준경을 처벌하고 9성을 돌려주면 죄를 더 묻지 않겠다 하니 화려가 응하였소. 거란도 이를 본따서 이번일을 주도한 장수 강승규,박갑스룰 처벌하고 빼앗은 10여지역을 되돌려주면 더는 문제삼지 않겠소’ 하니 거란이 고심 끝에 결국 강승규,박갑수의 목을 베어 보내고 10여지역을 돌려주여 사죄하였다. 대저 여진이 천하를 경영하는 이치가 이와 같았다.
익종 15년. 여진의 해군대장 맹탄과 섬부란 이가 2천여 수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 화려의 경주,포항,울산지역을 침탈하였다. 화려가 노하여 사신을 보내 ‘반도의 동부해안 침입에 대한 사죄’를 요구했다. 이전에 우리가 관윤과 박준경을 처벌하고 9성을 돌려준 예를 본따 마땅히 여진도 이번일을 주도한 맹탄과 섬부를 처벌하고 경주,포항,울산일대의 피해를 보상하라 요구하였으나 우리가 응하지 않았다.
익종 20년. 화려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여진의 요충지를 침략하였다. 장군 마후라와 어사귀가 1만대군으로 이를 무찔렀다.
익종 25년. 몽골이 북쪽에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일전에 이미 흉노,거란과 손잡고 쌓은 ‘오천리 장성’이 있으니 몽골이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였다. 여진의 장수 부개와 소개가 장성을 넘어 몽골의 남부 다섯성을 빼앗았다. 몽골이 황금 3천관과 은 5천관을 보내며 사죄하였다.
익종 30년. 몽골이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여진이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니 금 5천관과 은 7천관을 보내 사죄하였다. 몽골여인 20여인을 공녀로 요구하니 역시 몽골이 응하였다.
익종 35년. 익종이 재위 35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이때 향년이 50세다. 태자 승(丞)을 황위에 올리니 정비 공씨의 소생이요 이때 나이 24세다. 10대 안종(安宗)이 되었다.
안종 2년. 남서부 승현이란 고을에서 대욱이란이가 반란을 일으켜 진압하였다. 여진이 태초부터 벼슬길에 등용된이를 귀족이라 하고 농엄,상업,공업,어업,임업,목축업등 평범한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평민으로 삼았으며 (1) 전쟁때 포로가 된 외부인으로 복속을 거부한자와 (2) 역적모의를 한 죄인의 자손들을 노예로 삼아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일에 주로 종사하게 했다. 헌데 대욱의 경우 두가지에 모두 해당이 안 되는데 노예가 되었다하여 이것이 불만의 원인이었다. 황제가 명하여 억울한 노예가 없는지 진상을 자세히 조사하게 했다
안종 5년. 해일이 일어 많은 가옥이 침수되었다. 재물과 곡식을 풀어 이재민을 구제,구휼하였다.
안종 7년. 북서쪽에 한 요녀가 살아 하루에 세 남자와 동침을 하였다. 진상을 조사한뒤 여인으로써 음란하였으며 부부간의 신의도 지키지 못하였다하여 참형에 처하였다.
안종 10년. 멀리 드림국이란곳에서 사신이 와서 진귀한 선물과 공물을 바쳤다. 드림국은 ‘오,월,초’에서도 남쪽으로 무려 천리를 더 가야 있는 나라인데 그렇게 먼곳에도 나라가 있고 인걸이 살아간다는데 모두 놀라워했다. 먼길을 찾아온 노고를 특별히 치하하여 많은 황금을 주고 돌려보냤다.
안종 12년. 선대 익종이 정비 공씨와의 사이에 2남3녀를 낳았고 후비 안씨와의 사이엔 4남2녀를 낳았다. 어떤이들이 뒷공론으로 말하기를 ‘여진이 만들어지고 대대로 황실의 분란이 없었던 것은 대개 후비들이 후덕하고 성품이 유순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번 안씨는 경우가 다르니 분명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안종이 이를 듣고 노하여 요설을 퍼트린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벌하였다.
안종 14년. 어기구라는 이가 있어 새로운 망원경을 발견 황제께 진상하였다. 천문관에 주어 천체관측에 더 힘을 쏟도록 했다.
안종 17년. 황도에서 남서쪽으로 50여리 떨어진 남현(南玄)시에 소연이라는 처자가 있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이후 어머니가 혼자 딸 여섯을 키웠는데 그중 첫째였다. 소연의 어미가 본래 삯바느질과 남의 빨래를 대신 해주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소연이 열다섯살때부터 어미일을 도왔다. 일이 야무져서 한 대감댁에서 눈여겨보다 집사(執事)로 삼았다.
옛 중종시절 막내아들로 규(圭)라는 아들이 있었다. 덕종이 난을 일으켜 집권하니 규는 모후와 함께 몸을 피해 사가(私家)에서 살았다. 이후 남현시로 몸을 피신 신분을 숨기며 살아갔는데 이후 규가 태홍을 낳고 태홍이 진수를 낳고 진수가 민섭을 낳으니 진섭은 아규의 증손(曾孫)이다. 실은 소연이 집사로 일하게 된곳이 아규의 증손 민섭의 집이었다.
민섭이 집사일을 하는 소연과 종종 정을 통하니 집안에서 두 사람의 혼사를 허락하였다. 이후 소연이 집안의 내력을 알고 민섭을 부추기니 이와같았다. ‘그 옛날 나후(羅后 : 명종이 정비였던 나니)의 핏줄이 여진의 법통을 이어가니 이때에는 오히려 나라에 변란이 없고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하여 백성들의 삶이 윤택하고 풍성하였습니다. 허나 일찍이 승덕(8대 덕종)이란 자가 딱히 나라에 공을 세운것도 없고 덕망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사사로운 허욕으로 단지 나후의 핏줄이 천박하다는 이유로 난을 일으켜 무도하게 집권하였습니다. 천지 도리에 어찌 태초부터 천한것과 귀한 것이 따로 있을수 있겠습니까. 승덕은 여진의 법통을 바로 잡겠다고 난을 일으켰으나 그 자손들이 집권하면서 오히려 나라에 변란이 끊이지 않고 여진의 백성들의 삶이 핍박해졌나이다. 이제 공께서난 나후의 먼 혈손임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마땅히 이제라도 칼과 창을 드시어 여진의 혈통을 바로 잡으시고 백성을 평안케 하소서’ 하였다. 민섭이 우유부단하여 쉬이 결정을 못하니 소연이 몸소 무리를 모아 비로소 난을 일으켰다. 안종을 재위 17년만에 폐위하고 민섭을 황위에 올리니 그가 11대 신종(新宗)이다.
신종 원년. 소연이 본래 사가에 있을 시절부터 삯바느질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틈틈이 외국의 서책을 들여와 공부해 외국어와 국제정세를 보는 시선이 밝았다. 반면 신종은 글을 몰랐으므로 신종이 즉위한뒤 외교에 관한일은 소연황후가 직접 실권을 지고 외교 실무자들과 일을 논하였다.
하루는 거란사신이 찾아오니 소연이 말하기를 ‘거란과 여진은 예부터 교역과 소통의 시간이 많았는데 근래들어 잦은 분란과 변란이 있었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오. 여진은 바다와 큰 강이 있고 평야가 많아 예부터 풍족한 물산이 나고 거란은 오석광산이란 하늘이 내린 천혜의 광산이 있으니 앞으로도 이 두 물자를 서로 교류하며 교역하여 평화를 공존할수 있기 바라오’ 하였다. 거란사신이 예전의 일들을 사죄하고 양국관계를 회복하였다.
몽골이 사신을 보내오니 소연이 말하기를 ‘몽골은 날씨가 차고 땅이 척박하여 나라를 세우는게 늦어진 것으로 알고있소. 뒤늦게나마 따뜻한 남쪽 평야를 차지하고픈 뜻을 모르는바는 아니나 무도하게 거란과 여진을 해친죄를 용납할 수는 없소. 몽골과의 교역을 허락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후에도 다시 우리땅을 노릴 경우 엄중하게 죄를 물을것이오’ 하였다. 몽골사신이 경계의 눈빛을 지우지 못하고 돌아갔다.
화려가 사신을 보내니 소연이 꾸짖었다. ‘화려와 여진사이에 원한이 별로 없는데 어찌 자꾸 우리땅을 범하며 노략질을 일삼는가’ 하니 화려사신이 당당히 말하기를 ‘우린 옛 조상 구려(句麗)가 다스린 땅을 회복하기 바랄뿐 다른뜻이 없소이다.’ 하였다. 소연이 다시금 엄히 꾸짖기를 ‘동서고금 흥망성쇠의 사례가 한둘이 아니거늘 저마다 다 옛 땅을 되찾겠다고 하면 멀쩡한 땅이 어디있겠으며 변란의 구실이 되지 않을것이 어찌 있겠는가. 구려는 이미 멸망한지 수백년이 지났고 이제 이곳은 여진이 대대로 천년을 지배해온 땅이니 두 번다시 우리를 범하지 말라. 교역은 허하되 두 번다시 우리땅을 넘볼 경우 용서치 않으리다’ 하였다. 화려 사신이 돌아갔으나 승복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흉노가 사신을 보내니 소연이 말하였다. ‘여진은 동쪽 끝에 있어 예부터 중원과의 교류를 바랐으나 흉노가 막고있어 일이 쉽지 않았소. 여진은 거란과 달라 바다를 끼고 있어 바다를 이용하여 남부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할수 있는 이점이 있으니 오,월,초 이북(중원,하북 둥)지역과의 교류엔 지리와 시간상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소이다. 흉노가 부다 중원의 나라들과 여진이 교류할수 있도록 길만 터준다면 다른뜻은 없소이다’ 하였다. 흉노 사신이 말하기를 ‘거란도 예부터 중원과의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여진의 요구가 어찌 거란의 그것과 한자 다를것이 없는가. 남의나라 사신이 오가는 길을 함부로 내주었다나 내통이나 전란의 구실이 되면 그땐 어찌한단 말이오 ? 쉽게 허할수 없는 일이외다’ 하였다. 소연이 거듭 설득하기를 ‘교역로를 빌리는 합당한 댓가를 지불할것이요 흉노의 땅을 범하거나 비밀을 염탐하는일은 결코 없을것이오’ 서약서를 요구하니 소연이 써주고 직접 흉노의 선우에게 보내는 서찰을 썼다.
말갈 미개인이 또한 누군가를 보내 말하기를 ‘말갈은 예부터 터전잡을 땅이 마땅찮아 거란과 여진 그리고 남쪽 멀리 화려의 땅까지 떠돌며 유량생활이 이미 천년이 넘었소이다. 원컨대 여진의 남쪽 9성을 말갈이 자리잡을 터전으로 내어주신다면 우리 더 이상 다른뜻을 품지 않으리다’ 눈물로 아뢰었다. 소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냉정히 답했다. ‘9성은 여진의 요충지라 어느것 하나 양보할것이 없도다. 들어줄수 없는 청이니 그만 돌아가라’ 하였다. 말갈인들이 돌아가며 눈물로 탄식하기를 ‘여진은 집권자가 바뀌어도 변하는 것이 없구나. 이제 우리 불쌍한 말갈백성은 어디에서 산단말인가’ 하였다.
신종 2년. 한 상신이 아뢰기를 ‘여진이 이전에 함선으로 동쪽바다 5천리를 가니 해적들이 사는 작은 섬나라가 여기저기 있어 그곳 해적들이 말하기를 ‘여기서 5천리를 더 가면 더 넓은 새로운 세상이 있다’ 하였사옵니다. 여진이 그때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만리를 더가면 바다간너 분명 새로운 세상이 있음이 분명하니 지금이라도 다시 해군력을 발전시켜 다시 바다를 도모함이 어떤가 하옵니다‘ 하였다. 허나 소연이 회의적으로 보며 ‘5천리를 더 가도 작은 섬나라외엔 나오는게 없었다면 더 나아가는게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또 그런 작은섬의 미개한 해적의 말을 일방적으로 신뢰할수도 없고 설사 바다건너 만리 떨어진곳에 새로운 대륙이 있다한들 만리 떨어진 그런 먼 나라와 교류하는게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아니함만 못하도다’ 하며 거듭 회의적이라 허락지 아니하였다.
신종 6년. 한 신하가 간하기를 ‘여진이 세워진지 어느덧 300년 세월인데 아직까지 정식 교육시설이 없나이다. 지금까지 보통 낙향한 향리들이 각지에서 귀족,평민의 자제를 모아 학문과 예절을 가르쳤고 귀족집안에선 재량껏 언어와 문자를 가르쳤으나 그 교육체계가 일원화되어있지 못해 오히려 혼란스럽사옵니다. 이제라도 체계적이고 일원화된 교육제도를 확립하소서’ 하였다. 황후가 가하다 여겨 실무자들을 불러모아 제도를 세우게 하니 귀족들 대상으로 언어,문자,학문,예절등을 가르치는 10년 교육제도의 학교가 이때 만들어졌다. 또한 평민의 경우엔 별도의 과학,기술청을 만들어 그곳에서 과학,기술을 가르치게 했고 귀족들의 학문을 가르치는곳에 평민의 가족이 입교를 원할시엔 쌀 천석이나 황금 100냥을 낼시 허해주었다. 그러나 노비에겐 학문을 허락지 아니하였다.
신종 10년. 석문교의 고승이 찾아와 대법회를 열기를 청하니 선대의 예를 따라서 황도나 황궁에서의 법회는 허하지 않고 황도 근처의 도시에서 민간주도의 법회를 여는 것을 허하였다. 한달만에 법회가 열리니 참여하는이가 2천인이 넘었고 먼 지역에서 불사와 치성,축원을 올리는 이는 5만명이 넘었다. 석문교의 세력이 어느덧 이렇게 퍼졌나 하여 소연황후도 몹시나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신종 13년. 흉노가 중원,하북과의 교역로를 허해주어 비로소 사신이 오갔다. 중원의 도승국 하북의 내원국,이치국등의 사신이 와서 황제께 알현하였다. 황후가 진귀한 선물을 내려주며 사신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돌려보냈다. 양국간의 우호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다짐을 주고받았다.
신종 16년. 몽골이 다시 동북방의 성을 공략하였다. 장군 태승이 가서 무찔렀고 몽골에 사신을 보내 항의하였다. 몽골에 ‘두번다시 국경을 침탈하거나 우리 영토를 노릴 경우 묵과하지 않겠노라’ 거듭 경고했으나 몽골이 듣지 않았다.
신종 19년. 해일이 일어 이재민이 발생 곡식과 재물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구휼하였다.
신종 22년. 보성현에 사는 조덕(趙德)이란 이가 있어 진귀한 물건을 발명하였는데 수확과 탈곡을 하는 속도를 열배로 올릴수 있는 기기였다. 황후가 보고받고 기기의 성능을 직접본뒤 노고를 치하하며 후한 상금을 내리고 이 기기를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되 제조기술만은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금하였다.
신종 25년. 중원의 도승국에서 진귀한 황금상을 선물하였다. 소연황후가 본래 신종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을 두수, 차남을 두라라고 했다. 장남 두수의 나이 이때 23세였는데 장난으로 그만 진귀한 황금상을 깨트리고 말았다. 황후가 노하여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찌 이 나이가 되어 외국에서 보낸 귀한 선물을 사사로운 장난으로 망가뜨릴수 있느냐’ 하고는 몽둥이로 300대를 직접 때렸다. 두수가 한달을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 하는수없이 차남 두라를 태자로 삼았다.
신종 28년. 이때 뜻밖에 역병이 돌아 3년만에 그 병을 진압할 수가 있었다. 태자 두라도 역병이 걸려 시름시름 앓다 1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황후가 슬피울며 통곡하기를 ‘내가 이전엔 진노를 이기지 못하여 장남을 먼저 보내고 말았는데 이제 사랑하는 둘째마저 병으로 잃으니 하늘이 내리는 징벌인것이냐. 어찌 내게 주는 자손복이 이리 박할수 있단말이냐’ 하였다. 장남 두수는 사망 당시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들이 있었는데 황후가 후궁 솔씨(率氏)에게 명하여 귀하게 키우리 하였다.
신종 30년. 신종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이때 나이 50세였다. 태자였던 두수,두라가 모두 세상을 떠나 두라의 아들 오승(悟勝)으로 하여금 황위를 잇게 했다. 이때 나이 6세이니 그가 12대 진종(眞宗)이다. 새 황제의 나이가 어려 만조백관이 회의를 열어 태후의 섭정을 승인하였다.
진종 3년. 하북의 내원국과 이치국이 사신을 보내왔는데 말하기를 ‘흉노가 중간에 교역품을 검수하여 시간이 지체되었나이다’ 하였다. 탸후가 듣고 노하여 손수 흉노의 선우에게 항의서한을 보내니 ‘이미 이전에 우리가 중원,하북과 교역하는 길을 허하여주셨거늘 어찌 이후에 의심하여 의를 그르치기를 이와같이 할수 있나이까. 타국간의 교역품을 검수하는 것은 마치 타인의 편지를 몰래 보거나 선물을 풀러보는것이나 다름없으니 앞으로 이런일이 없도록 하소서’ 유감의 뜻을 엄중이 전하였다.
진종 6년. 엄광이란 노신(老臣)이 있어 나이 70에 22세 기녀를 후실로 맞아들여 5남매를 낳았다. 신료들이 모두 놀라고 태후도 듣고는 부부와 자손을 친히 불러 진귀한 선물을 내리고 노고를 치하하였다.
진종 9년. 서북방 이종현(理鐘縣)이란 곳에서 운태라는 이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석달만에 진압하여 삼족의 목을 베고 몽골과의 내통혐의가 없는지를 조사하였다. 이전에도 종종 북방의 반란이 몽골인과 내통한 경우가 있어 이와같이 한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
진종 11년. 이례적인 지진이 일어나 이재민이 발생하여 곡식과 재물을 풀어 구호하였다.
진종 14년. 황제의 나이 어느덧 20세가 되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태후가 황후를 맞을 준비를 않고 있었다. 신료들이 거듭 의아하게 여기며 연유를 물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결국 황후책봉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진종 17년. 아직까지 황후가 책봉되지 않아 신하들이 거듭 태후에게 연유를 물었으나 태후는 여전히 일을 미루기만 했다. 조정중신들이 거듭 공론을 모하 황후책봉문제의 중요성을 아뢰니 그제서야 명문가의 여식 2명을 들여 제1비가 구씨, 제2비가 오씨였다. 이때 태후의 나이 이미 70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금껏 별다른 지병이 없다가 갑자기 몸져 앓아누었다.
진종 21년. 황제가 아직 젊은 나이인데 갑자기 별다른 지병없이 세상을 떠나니 다들 의아하고 놀라워했다. 나이 27세였다. 황제에게 후사가 없고 신종때 사망한 태자 두수에게 갓난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구일(求壹)’이라고 했다. 소연태후의 명으로 신종의 후궁 슬씨가 대신 양육하여 구일은 슬씨를 모후로 여기고 자라났다. 구일 역시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니 다들 의아해했다.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 이름이 융(隆)으로 나이 7세, 차남 승(乘)이 나이 4세였다. 하는수없이 태후가 섭정을 계속 이어가는 조건으로 구일의 장남 융을 황위에 올렸다. 13대 소종(昭宗)이다.
소종 2년. 융성시에 사는 박귀(朴歸)라는 이가 또 진귀한 물건을 발명하였는데 옷감을 만드는데 쓰는 면화에서 실을 좀 더 빨리 뽑아낼수 있는 기기였다. 발명한 박귀를 치하하고 발명품을 전국 각지에 보급하되 역시 제조비법은 국외유출을 방지토록 했다.
소종 5년. 봉산과 염치라는 고급관료가 있어 파벌을 만들고 전횡을 일삼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태후가 듣고 노하여 ‘여진이 나라를 세우고 300년간 파벌이 생기는일이 지금껏 없었는데 어찌 이제와서 이런일이 생길수 있는가’ 하며 둘을 모두 극형에 처하게 했다. 봉산과 염치는 처형당하면서 ‘지금 이 시대 진짜 여진을 망치는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소종 8년. 말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우리가 정착할수 있는 지역을 만들어달라. 그럼 더는 말썽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정착해 살겠다’ 하니 태후가 허락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말갈의 동태를 더욱 엄중히 감시하게했다.
소종 11년. 화려에서 장수 고하승,백봉기,최진원이란 장수들이 1만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의 남동부 지역을 다시 공략하였다. 장군 염문환과 우창승이 막아 격퇴할수 있었다. 격노한 태후가 화려에 서신을 보내 ‘이전에 관윤과 박준경이 우리 영토를 공략하였을때도 빼앗아간 땅을 돌려받고 일을 주도한 장수를 처단함으로써 난을 정리할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전란을 일으켜 피해를 입힌 지역에 대한 보상과 함께 장수 고하승,백봉기,최진원의 처벌을 원한다’고 하였다. 허나 화려가 이번에는 듣지 않았다. 소연태후가 거듭 노하여 직접 대군을 조직하여 화려를 정벌할 것을 천명했다. 신료들이 화급히 만류하며 ‘지금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삶이 전쟁을 일으킬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화려가 또다시 우리 국경지대를 범한죄는 용서할수 없으나 두 번 세 번 엄중경고하는 것으로 그치고 옥체를 보존하소서’ 하였다. 태후가 거듭 격노하여 ‘엄중경고만 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니 화려가 우리를 업수이 여기는 것 아닌가. 내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 화려의 패왕(悖王)의 무릎을 꿇려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게 해야 비로소 화려를 굴복시킬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신료들이 거듭 태후의 격노를 진정시키며 앞날의 일을 근심하였다.
소종 14년. 소종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또다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니 다들 놀라고 괴이해하면서 안타까와했다. 하는수없이 동생 승을 후사로 세우니 그가 14대 민종(敏宗)이다. 태후의 섭정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민종 3년. 남서부 신원현에 홍두(紅豆)와 자두(姿豆)란 자매가 살았다. 그 부친이 먼저 첫 부인과의 사이에 홍두를 낳았으나 부인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후 후처를 얻어 둘째 자두를 낳았다. 세월이 흘러 부친도 후처도 모두 세상을 떠나니 아버지의 남겨진 유산이 있자 홍두와 자두 자매가 이렇게 말했다. 먼저 동생 자두가 말하기를 ‘언니가 집안의 장손이니 마땅히 승계의 대업을 이어야합니다. 유산은 마땅히 언니의 것입니다.’하였고 언니 홍두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 또한 오랫동안 마땅한 생업이 없으시다 새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 갖은 노력으로 집안을 일으켰는데 내가 집안에 무슨 공로가 있다고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다 차지하겠는가. 아버지의 유산은 마땅히 아우가 차지해야한다’하였다. 쉬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보고가 결국 태후에게 들어갔다. 태후가 홍두와 자두 자매를 불러 말하기를 ‘재산을 사이좋게 반반씩 공평하게 나누던가 아니면 나라에 기부하여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구휼하는데 쓰도록 하던가 둘중에 하나를 결정하라’ 하였다. 자매가 상의 끝에 결국 백성을 구휼하는데 선친의 재산이 쓰여지길 바라며 나라에 기부하였다.
민종 6년. 북동부 해안가에 날도 밝은데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더니 어디선가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대지를 흔드는 듯 했다. 백성들이 놀라서 가보니 길이 열자도 넘는 큰 구덩이가 패여져있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여진에 약간의 해일까지 있었다. 다들 이전에 보지못한 기이한 변괴로다 하며 놀랍고 두려워하였다.
민종 9년. 중신 보세르,만총일,우국태등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늙은 태후가 오랫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니 변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제라도 더 늦게전에 노태후의 노욕을 멈추게 하고 권좌에서 끌어내려야한다. 이제라도 다시 여진의 법통을 다시 세우고자 하니 경들의 뜻이 어떠한가’ 연좌서명을 돌리니 서명하는 귀족,관리,장수들이 무러 3500인도 넘었다. 이때 소연태후 나이가 어느덧 90이 다 되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어리고 미욱한 황제를 대신하여 여진의 법도를 바로잡기 70년 세월이었는데 경들이 어찌 이제와 야박하게 나를 핍박할수 있는가’ 하고는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태후가 궁에서 나와 고향 남현시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며 생을 마감했다.
여진에 마땅히 대통을 이을만한 후사가 없어 2년동안 중신들이 임시로 ‘원상회의’를 열어 조정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원상체제가 지속되었다. 그러다 어떤이들이 대안을 말하기를 예전 익종(9대황제)의 4남 복승왕자의 자손이 황도 남동부 문성시에 살고 있으니 복승의 증손 법태공이 지혜가 출중하고 기질이 남다르다 합니다. 그를 불러 황제로 추대합시다. 옳다 여겨 법태공을 불러 황제로 추대하니 나이 25세요 그가 15대 애종(哀宗)이다.
애종 2년. 동북방 염전밭 10여곳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장군 대원국(大原國)을 보내니 부장 문성,종진과 함께 3개월만에 난을 진압하였다. 몽골과의 내통혐의를 정말조시하였다. 대원국은 이때 나이 70으로 선대시절부터 대대로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이였는데 나이 70에도 그 용략과 정력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황제가 치하하여 큰 상을 내렸다.
애종 6년. 말갈족 추장이 어느날 느닷없이 황도를 찾아와 여진의 역대황제들을 마구 욕하는 장문의 글을 방방곡곡에 뿌렸다. 황제가 듣고 노하여 추장을 잡아 저자에서 능지처사했다. 허나 훗날 깨닫고보니 이 일은 우리가 말갈의 독한 계교에 빠진것이었다.
애종 8년. 동해안 한 부락마을에서 수상한 이들을 잡았다고 신고해 조사해보니 뜻밖에 화려에서 몽골로 가는 밀사였다. 문득 의심이가서 편지를 살펴보니 일상적인 외교관례가 적힌 내용일뿐 의심갈만한 내용이 없었다. 황제가 사과하고 사신을 돌려보냈으나 어떤이들이 간하기를 ‘화려가 통상적인 몽골과의 외교를 위해 사신을 보내는것이라면 굳이 신분을 위장하여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뭔가 흉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되옵니다’하였다. 허나 지금으로선 별다른 혐의를 찾을길 없어 불안해하기만할 뿐이었다.
애종 10년. 몽골에서 거란으로 가는 수상한 밀사 일행이 잡혀 조사해보니 거란이 몽골과 손을 잡고 함께 여진을 치자는 내용이었다. 황제가 노하여 거란에 사신을 보내 항의하니 거란은 ‘영문을 모르는일’이라며 그저 어리둥절해할뿐이었다. 책사 원침이 간하기를 ‘몽골이 이미 거란과 국경을 맞닿고 있는데 둘이 비밀서한을 주고받으려면 직접 국경으로 교통하면 될 것을 굳이 거란땅을 지나갈 필요가 있습니까 ? 아무래도 제3자의 다른 밀계가 아닐까 심히 우려되옵니다.’ 하였다.
애종 12년. 흉노에서 모처럼 사신을 보냈는데 멀리 서역에서 들여온 귀한차를 선물로 바쳤다. 황제가 마시니 온 몸에 핏발이 돌며 쓰러져 사망하였다. 나이 37세다. 다들 황망해하며 비상시국에 옛 신종의 후궁 슬씨가 낳은 부두(釜頭)의 장손 문혁(文赫)을 황위에 올리니 그가 여진의 첫 번째 왕조 ‘홍(洪)나라’의 마지막 황제 16대 말종(末宗)이다.
말종 2년. 주변정세가 심상치 않아 그간 무너져있거나 나태해져있던 군제등 각종 제도를 개편하였다.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실시했다.
말종 5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금과 은 각 1천냥 그리고 철과 구리 각기 1천관을 바치며 다른뜻이 없음을 밝혔다. 거란의 공물을 받아주고 다시 화친토록 했다.
말종 8년. 석문교의 고승 덕후(德厚)가 찾아와 말하기를 ‘천문을 보니 북방의 기운이 쇠하고 남방의 기운이 승하옵니다. 아무래도 홍나라(여진의 첫 왕조 명칭)의 운이 다한 것 같사옵니다’ 하였다. 안 그래도 시류가 심상찮아 다들 불안해하였다.
말종 11년. 어떤이들이 제보하기를 장군 대관(大觀)과 책사 임원(任源) 그리고 명신 노흥두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했다. 황제가 놀라고 불안해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단했다. 시간이 지난뒤에 누군가의 계교에 빠져 이런일을 벌였음을 깨달았다. 많은 백성들이 탄식하며 ‘이때 장군 대원국만 살아있었어도 이런 계교에 빠지는일이 없었을 것을’ 하였다.
말종 15년. 처음 척후병들이 보고하기를 몽골이 다시 북부에서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다고 해서 북부 오천리장성 부근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화려의 간악한 계교에 빠졌다. 화려가 먼저 말갈을 포섭 자신들의 특수 정예병으로 키운뒤 여진의 남부를 급습하였다. 이어 화려의 정규군이 대군으로 습격해와 순식간에 남부 4개주가 화려에 먹혔다. 북부 군대를 임시로 빼서 남부를 막게 하니 이번엔 그 허점을 이용 몽골이 북부지역을 습격 북부 3개주를 빼앗았다. 부랴부랴 거란에 원군을 청하니 거란도 내부사정으로 인해 원군을 파병하기 쉽지 않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이번엔 동해바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적떼가 나타나 동부해안 3개주를 침탈하였다. 순식간에 여진 12개주중 10개주를 빼앗기고 황도와 중부 2개주만 남은채 농성하였다.
말종 16년. 장수 부진,오상,명진,태동등을 보내 빼앗긴 땅을 되찾도록 했으나 이때 계책을 쓸만한 책사가 없어 모두 패퇴하였다. 거란에 다시 원군을 청했으나 역시 곤란하다는 답장만 돌아왔다. 말종이 자살하려는 것을 측근들이 막았다.
말종 18년. 화려와 몽골 연합군이 황도를 기습하여 마침내 여진의 영토를 모두 빼앗고 황도마저 적의 손에 떨어졌다. 화려와 몽골은 본래 약조하기를 함께 여진을 친뒤 영토를 반씩 나누기로 했고 몽골은 별도로 여진의 옛 땅 일부를 떼어주어 말갈의 터전을 잡아주겠다고 약조했다. 이렇게 남북 양쪽에서 공략하는 간교한 계교에 넘어가 여진의 첫 왕조 ‘홍나라’는 16대 300여년만에 막을 내렸다. 하늘에서 태조 아소카가 통곡하듯 사흘간 억수로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