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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문학회 편 23명의 시
이원형 임덕기 김선옥 이희은 최윤경 박성진 최병근 유계자 박용숙 김은정
김혁분 이병연 박정란 탁경자 백승자 백 지 허이서 이용우 사공경현 정해영
이미순 현순애 김명이
그러니까 맨드라미
이원형
닭은 죽어
꽃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맨드라미는 닭의 후생
새벽의 모가지를 비트는 아버지
눈치 빠른 어머니는 양은솥에 불을 지핀다
닭의 돌연사를 말한 셈이다
닭은 벼슬도 버리고 뼈만 남겼다
포식자의 손을 떠난 뼈다귀는 휙휙
공중제비를 돌았다
살을 버린 뼈들은 담벼락 아래로 꾸역꾸역
훗날을 도모한다
그러니까 담은 닭의 후일담
그 여름
당신들이 벌인 짓을 꿰고 있다는 듯
목청껏 닭벼슬 곧추 세우는 닭의 후생
입 다물고 서 있는 담을 방패막이 삼아
목청껏 붉은 비명을 토해내는
닭의 환생
일가는 새벽의 고요를 얻었고
닭은 몸 바쳐 저 닮은 꽃을 남겼다
----애지사화집 제18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소금의 흔적
임덕기
나물을 무치는데 액젓이 모자라
몇 알의 소금을 떨구며
소금이 필요하지 않은 동물이 없다는 생각과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기원을 생각한다
머나먼 기억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든다
꼬리에 지느러미가 생겨나
바다정글을 향해 헤엄쳐간다
적막이 감도는 해조 숲을 빠져나오면
붉은 산호초 군락 사이로 거북이가 오르내린다
둥글게 무리지어 제 몸을 숨기는 정어리 떼 곁으로
고래가 느리게 다가간다
어촌에서 태어난 부친은 태생적으로
바다나물과 바다생선, 소금에 절인 대구 알젓
멸치젓으로 무친 짭짤한 톳나물을 즐겨 드셨다
생전에 소금과 돈독한 관계로 지냈는데
입맛을 닮은 나도 소금과 친밀했다
소금에 대한 짜디짠 기억이 휘몰아쳐온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먼지
김선옥
이불을 턴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저 먼지들
햇빛 속에 날개가 번득인다
내 몸 일부였던
저울 눈금에도 없는 먼지
내가 저렇게 가벼운 적 있었던가
밤새 떨어진 살꽃잎이 먼지라면,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아이들도 다
엄마의 몸에서 떨어진 한 톨 먼지다
날개를 달고
엄마는 하늘로
자식들은 서울로 부산으로 청주로
날아갔다
가끔씩 모였다 흩어지는 먼지들
이승은 저승을 향해 지우다
한 줌 먼지로 날아갈 몸
먼지는 매일 내려앉으며
날아오르는 법을 배운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커튼
이희은
밤새 죽었다가 꿈틀꿈틀, 아침을 여는 자벌레
주름진 사제복 벗듯 빛에게 자리를 내준다
네모난 풍경이 나타나고 자벌레의 키는 반쯤 줄었다
나뭇잎 냄새 속에서도 오와 열을 맞춘 네모, 네모, 네모들, 저마다 아침 닮은 자벌레 키우고 있을까 제 몸 끝까지 줄였다가 먼 길 떠날 수 있을까
사각사각 햇빛 갉아 먹으며
옆구리에 날개 돋는 듯 한껏 몸을 흔들어 보지만
풍경은 사라지고 자벌레는 서둘러 어둠을 풀어 놓는다
모든 신호 꺼버리고 벽으로 위장한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낙화
최윤경
살아있는 번뇌도
꿈틀대는 고뇌도
피면서 피면서 사라진다
피는 것도
지는 것도
다 한순간
난 왜 이렇게 미운 것이 많아서
자꾸만 가슴에 얼룩을 만드는가
울컥
고요해져야겠다
딱딱하게 굳은 응어리
물컹하게 삭여야겠다
허공은 어둠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밤을 수놓은 불꽃 사리는
비처럼
별처럼
꽃처럼
훨 훨 훨
나의 헛됨을
아서라
사르라
날려라
자꾸만 타이르신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안마 일지
박성진
누군가의 몸 주무를 때면 나는
시냇가 언저리 무릎 꿇은 물푸레나무 된다
물푸레나무 이파리 닿을 때마다
푸르게 푸르게 변하는 물줄기들
한 번도 쉬어 본 적 없는 뭉친 근육이다, 저 물살은
나뭇잎 또르르 굴러가던 한 방울의 빗방울에서
개울을 지나 강을 지나
바다에 이르기까지 어디 한 번 맘 편히 누워보기나 했을까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 닿는 자리마다
정맥 속 흐르던 푸른 핏방울들
붉게 붉게 흘러갈 것 같은 오후다
손가락 스칠 때마다
시원타 외치는 신음소리
개울가 맑은 물소리로 흘러간다.
물이
아주 잠깐
지친 몸 뒤집었다가는 것 같다
바다까지 금방일 것 같다
딱딱하던 근육이 투명한 햇살 튕겨내는 시냇물만큼이나 부드럽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모처럼
최병근
풍경소리 들으러 갔다 거기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
와중에 누군가 대장간에라도 다녀왔는지
사천왕 작두 창칼이 춤추고
목이 잘린 말들
말들이 히힝 울었다
경마장이 아니었는데
재갈을 물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첩첩산중
결가부좌로 포박당한 부처가
유리안치 되었다
일곱 걸음만 걸을 수 있게 해다오
연꽃 위에서 이슬과 노는
개구리나 되게
누구의 명이던가
붉은 장삼을 두른 나무들이
대웅전 지붕 위에
단지한 손가락을 불쏘시개로 던져
불을 질렀다
발치 사하촌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났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어머니를 대출합니다
유계자
겉표지가 낡아 덜렁거린다
풀로 붙이고 표지를 싸매고 첫 장을 열었다
훅 풍겨오는 곰팡내 책 비듬이 떨어진다
까실까실한 글자들로 들어차
손끝이 찔려 바로 돌려줄까 고민하다
이왕 빌렸으니 꼼꼼히 읽기로 했다
한쪽이 허물어져 침을 묻혀도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미 서슬 퍼런 문장들은 녹이 슬고
고단한 제목들도 코 고는 사족이다
빛나던 경칩의 장식은 떨어져 나가고
꼭지를 놓친 복숭아처럼 물러져 있다
침대맡에서 책을 읽다가
힘이 빠진 저녁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수십 년 버무려진 이야기를 한 달에 끝낼 수 없어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았더니
도서 대출 칸에
둘째 동서가 기록되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멸치, 고래를 꿈꾸다
박용숙
고래가 될 수 있을까?
메타버스에는 널려있다지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오늘도 홈쇼핑 최저가 핸드폰 결제
그래도, 태평양 가슴에 품으니
이까짓 편의점 아르바이트 서너 개쯤이야
하루 세끼 삼각김밥도 견딜 수 있어
바다 한가운데 은빛으로 빛나는 내 모습
날치 꽁치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아
노는 물도 당연 다르지
옥션의 경매 정보나 쿠팡의 쿠폰도 팡팡 쌓이고
광고판도 뼈대 있는 내 이름 석 자로 빛나고 있지
이제는 겪을 일 없는 풍파
신의 가호란 말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 이놈 똥 뺄 것도 없겠네
달랑 소주 한 병으로 나를 깨운 거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저 아줌마는 모를 거야
내가 어떤 세상 꿈꾸는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술고래 말고
푸른 물결 헤쳐나가는 대왕고래
가슴에 산다는 걸
정말, 고래가 될 수 있을까?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독서하는 소녀
김은정
밝고 환한 창가에 새가 울고 명랑한 빛이 쏟아진다 노란 리본을 맨 소녀가
창가에서 책을 펼치고
숨결이 낮게 낮게 흐르고
까치가 안산안산안산 울고
친구야,
내가 살고 있는 안산과 네가 생각하는 안산은 다르다
오늘도 안산은 천국
독서하는 소녀의 얼굴이 빛나고
푸른 마디마다 장미꽃 피어나고
은행나무는 안산안산안산 리듬 타고
창가에 드리우는 악기가 있기에
우리의 발걸음이 빛나고
소녀는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를 계속 읽고
안산안산안산
어디에, 구름에 성실하게 책 읽는 소녀의 얼굴이
빛나고
자애의 눈빛이 안산을 덮고
창가에서 책 읽는 소녀를
안다, 안산
소녀가 있기에 우리가 있는
안산, 안다
낮은 노적봉폭포에 머무는 물소리도
안산안산안산
물안개 차오르는 기쁨
안산안산안산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봉숭아꽃 빛깔의 보름
김혁분
손톱을 깎았다
아버지 기일 날 묻어뒀던 꽃술을 꺼냈다
손가락에 동여매 주던 봉숭아꽃 같은 빛깔의
보름,
그때, 손가락마다 보름달이 뜰 거라고, 달이 뜨면 희소식이 올거라고
아버지 술 냄새가 여름밤의 은하수처럼 엄마의 빈 자리마다 꽉 차 있었다
골목에 아이들이 흩어지고 내가 가리키던 북극성은 손끝에서 지고
손톱 속 보름달이 뜨기도 전에 보름
보름은 가고
화단에 봉숭아꽃이 돌아와 피었다
빈집 가득, 저녁노을이 꽃술 냄새처럼 내려 앉았다
바람 멈춘 여름밤이면 뒤척임이 길어
봉숭아꽃물 손끝에 물들 때까지,
삼베 이불 한 귀퉁이에 봉숭아 꽃물이 들었다
엄마 없이 찾아온 첫 달거리처럼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바위를 낚다
이병연
낚싯대 하나 들고
제주 바다를 여러 날 거닐었다
수시로 입질이 왔다
질펀히 내려앉은 바위
이름 없이 산 것들 줄지어 낚는다
널뛰는 파도를 품었다 놓느라 울퉁불퉁한데
움푹 팬 가슴엔
햇살과 바람과 눈물이 머물러 있다
허공에 힘껏 줄을 던져
깎아지른 절벽을 낚는다
정을 쪼듯 내리치는 물살에 새겨진 문신
상처가 깊을수록
지느러미의 골이 빛난다
덜컥 입질이 왔다 이번엔 정말 크고 센 놈이다
머리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기둥처럼 떼로 서 있는 놈
하늘이 같이 끌려온다
낚싯대가 휘청인다
함께 쉽게 사는 법은 없어서
세로로 그어놓은 금이 햇살에 도드라진다
몸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
바다에서 낚은 것을 바다로 돌려보내고
당신의 마음이 닿지 못하는 날
바위 낚시를 떠나야겠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유효기간
박정란
아파트 옆 노인 쉼터 앞
허옇게 바랜 파란 화분 하나
귀퉁이 잘린 채 버려져 있다
산목숨 버리지 못해
버티고 서 있는 행운목
혈액이 안 돌아 잎은 누렇게 시들고
햇살 보듬고 목숨 지탱하고 있다
젊은 날은 나도 한때 잘 나갔지
사랑도 받았고
새끼도 낳아 분양해 주고
향기 나는 꽃도 피웠었지
낡은 스웨터 추레한 모습으로
유효기간 지난 영양제 한 알 털어 넣고
혹시나 자식 한 놈 찾아와줄까
누가 말동무라도 해줄까
정신줄 붙잡고
지막골 골목에 앉아 있는 저 여인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어초장*
탁경자
달이 섬진강
은어 떼를 몰고 오면
강가에서
시의 추를 던지며
별을 낚는다
그 별 손바닥에 올려
心자를 심으면
만장의 문장들이
서정의 잎새로 그늘 쳐 오고
민초들의 노래가 돌고 돌아
뻐꾹새 피울음으로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지필묵 잃은 어초장
언제쯤 벗어 놓고 갔나
섬돌 위 밑창 닳은 신발 위로
솔바람 타고 온 새들이
한 그림자를 스치며 간다
*송수권 시인의 집필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개망초 탄원서
백승자
망초의 입장에서 보면 마땅히 개망초지
개복숭아 개살구……
본부인이라면 그리 부르고 싶은 첩 같은 신세
묵정밭이든 불모지든 억척에 뺏긴 땅이
삼천리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 없으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 꼴 아니겠나
더구나 왜倭에서 경술국치 해에 들어온 망국초고 보면
왜풀이라는 불청객 소리를 들어도
무릎 꿇어 읍소할 처지지만
천하가 굶주리는 보릿고개에는
나물이 되어 살을 주고
약이 되어 피를 주고
꽃이 되어 풍년을 주고
아궁이 다비까지 해 주는데
엄연히 국화꽃과에 이름까지 있는 족보를
풀인 듯 꽃인 듯
자기들 심사꼴리는 대로 이랬다저랬다 개취급이니
홍실망종화* 옆에서는 무참하게 뽑히는 잡초였다가
메마른 찻길 옆에서는 아쉬운 대로 꽃무리라네
한들한들 앙증맞은 국화들이 떼창을 부르며 흔들어주니
군악대 사열이라도 받는 듯한가
통 크게 자연사自然死를 허락하네
강산은 십 년이면 변하고
세상은 십 일이면 바뀌는데
이 땅에 뼈 묻은 지 백 년도 넘은 이름에
분명한 명패 하나 걸어주지 않는 야박함이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 대로라면 만 번은 용서받고 사랑받았을 터
얄궂은 세월은 묻어버리고 화끈하게 화해**해 보자구요 우리
끝내는 한 땅에 묻히고 말 것인데
*꽃말 : 변치않는 사랑, 당신을 버리지 않겠어요
**개망초 꽃말
벚꽃 튀밥
백지
뻥튀기 아저씨는 반달눈 마술사
우리는 도둑고양이처럼 벚나무 아래 둘러앉아 배가 볼록한 뻥튀기 기계가 터지기만을 기다려
쉿! 작은 눈은 속임수야 벙글거리는 입속에 주문을 가득 숨기고 있는지도 몰라
우리는 숨을 참고 눈을 크게 떠, 군침은 소리 없이 삼켜야 해
꿀꺽! 들키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마술사가 천천히 풍로를 돌리기 시작했어
하얀 요술 가루를 살짝 집어넣고 따뜻한 바람도 호호 불어넣고 있어
풍로를 따라 우리 눈도 빙글빙글 돌고,
나는 달콤한 냄새에 취해 어지러워 잠이 들어
뻥이야!
하얀 연기가 요술을 부렸나 하늘에서 꽃가루가 흩날리고 있어
우리는 숨을 크게 쉬고 입을 벌려 튀밥처럼 튕겨 나온 꽃잎을 먹어
나는 향기로움에 취해 꽃길을 걸어
누구라도 고백만 하면 다 받아 줄 타이밍인데
눈 감고 서 있어도 얄미운 바람만 살랑살랑 스쳐 가
좋아! 고백은 내년에 받아줄 게
나는 잔뜩 뻥을 넣은 벚나무 어깨에 기대 내 사랑의 개화 시기를 물어 봐
내년 4월쯤 반달눈 아저씨가 풍로를 돌린다는 소식이야
하얀 거짓말, 거짓말 같은 사랑이 벚나무 가지에서 튀밥처럼 부풀고 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푸른 첼로를 펼치다
허이서
나는 먹구름에서 음악들 듣는 사람
음표들이 쏟어지며 물보라 피어난다
나는 수면 위에서 첼로를 펼치는 사람
파란이 들려주는 어느 먼 부족의 노래
물의 발톱 세워 첼로를 붙잡는다
선율이 이렇게 비린걸 보니
현의 피가 튀어 있었나 보다
한 음 한 음 내력을 전해 듣는다
어쩌면 첼로의 음계들은
멍 자국인지도 모른다
신이라는 지휘자의 무서운 서슬에 눌린 비명
외마디 비탄으로 봉인되었던 묵음이 풀리면
여른 귀 커다랗게 열고 수면 위를 떠도는 새는
누구의 상처를 듣게 될까
먹구름을 첼로로 연주하면
젖은 사람이 한번 더 젖는 것 같아서
나는 물결 위에서 첼로를 품는다
30년 전 죽음 음계가
차르르 차르르 펼쳐지고 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똥물
이용우
야심한 시간에
쫓기는 짐승처럼 도움을 청했다
먼 친척이었던 그, 사내
하룻밤 묵고 떠나갔다
이튿날
종경리 지소로 끌려간 아버지는
몇 날을 개 패듯 얻어맞으셨다
아주까릿대 의지하고 기어 돌아와
몸 뉘인 초가집,
달빛 기둥도 휘청대며
한쪽 지붕이 내려앉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깨송하지 못하는
지아비를 위해
새댁이었던 어머니는
뒷간에 딸린 구덩이에서
누런 똥물을 그릇에 퍼 담으셨다
‘똥물에 튀겨 죽일 놈 때문에...’
탕약을 먼저 맛보신
어머니의 평생 애고땜이었다
]
숙제
사공경현
소크라테스가 죽었다
플라톤도 죽었다
숙제를 마친 사람은 죽는다
범인은 평생을 헤매지만
천재에게는 금방 풀린다
따라서 천재는 요절한다
24세에 나도향이 죽었다
27세에 이상이 죽었다
28세에 윤동주가 죽었다
29세에 김유정이 죽었다
29세에 기형도가 죽었다
32세에 김소월이 죽었다
35세에 이효석이 죽었다
천재는 밤하늘에 반짝이고
둔재는 아침이슬에 젖는데
육십령 고개를 넘기도록
여즉 숙제를 풀고 있다
범인이 감히 시를 쓴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나이를 지우고
미래를 지우고
하늘을 지운다
땅의 주름을 잡아 광야를 뛰어넘는 도인들처럼
시간의 맥을 잡아 세월을 뛰어넘는 천재들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지 못하는 둔재는
시시콜콜 일기를 쓰듯 숙제를 지우고 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내가 나를 친구하다
정해영
눈 내리는 새벽
그에게 보낼 엽서를
쓴다
무리지어 피어나는 꽃무릇
목마른 뿌리도 그리고
바람처럼
허공을 몇 바퀴 돌다
내리는
몇 글자 안부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래 전 슬픔도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다고
속삭이는 내 말
내 귀가 듣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꽃의 흔들림
바람 때문이예요
내 손이 그려낸 꽃송이
내 눈이 본다
고요한 새벽
오른손이 왼손을 잡듯
내가 나를 친구한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지랄
이미순
키 큰 남자가 걸어간다
배꼽 근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툭,
바닥에 떨어뜨렸다
지랄하네
자기가 떨어뜨리고 떨어뜨린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지
자기가 떨어뜨려고 떨어진 휴대폰에게 하는 소린지
내가 자기를 앞질러 가서 그러는지
야!
이번엔 고함소리가 들린다
앞질러가며 자기 얘기를 핸드폰 메모장에 쓰는 걸 눈치 챈 건지
떨어뜨린 지랄을 주워들고 전화 속 상대에게 화풀이하는 건지
몰라,
쿵 내려앉는 심장을 추스르고
앞만 보고 걸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곶감을 꿈꾸다
현순애
바람 넘나드는 문간방 처마
그늘에 매달려 아픔 말리고 있다
허공에 상처 부벼
껍질 만드는 일이다
흔들어대는 바람도
손 놓아버린 감나무 가지도 야속해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을 때
“괜찮다, 괜찮다”
제격인 찬바람과
생각의 모서리에서 만난 햇살이 다독였다
배고픈 새도 염탐하는 곶감
벌서 일주일
눈물 빠져 자신을 추스르고 있다
서리 내린 듯 하얀 분 피워 올리며
뭉친 근육 주무르듯
상처 난 속내 주무르고 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흰 달빛 조각하는 변두리의 저녁
김명이
책 낱장은 비현실이고 지난날 학문으로 지금 요긴한 밥 구실을 할까 싶었다 과년한 딸은 불리한 면접을 뚫고 취직해 서울 변두리 방 한 칸 세 들었다
출근길 얼어있는 계단에 미끄러져 발을 다쳤다는 울먹임, 병가 내며 아프단 말보다 밥줄 끊기고 적금 못 부을까 봐 죄처럼 미안하다고만 했다
말렸지만 끌고 간 책상이 반의반 차지하고 구석에 밀어붙인 중고 전자피아노, 시린 등뼈 녹인 것인지 세상 물정 알라고 밀어낸 말들에 크레셴도 두들기다 멈춘 것인지
“왜 못 버려?” 유아 때 몰래 치운 낡은 핑크이불 기억을 되돌린다
아이에게도 허공에 걸린 눈빛이 있었다
딴엔 요령껏 세간이며 옷가지 배치하고 피하여 제 몸 눕고 세웠을 것, 입구부터 달라붙은 신발 냄새 세탁기만 빠져나온 셔츠 냄새 쪼개서 두 끼 때웠다는 배달음식 냄새들
짜고 단단한 슬픔은 방 한 칸 키워줄 능력 없는 어미 보란 듯 오후 내내 닦고 치우고 정리의 기술 확인한 후 앉을자리를 내주었다
보일러 기능 온돌로 잡아 돌리고 밥 한술 후루룩 뜨는 동안 찜질방처럼 뜨끈해지는 바닥, 한 팔 뻗으니 너의 볼 만질 수 있는 거리다
단칸방에서 구물구물 먹구름 한 장 덮던 날, 굼벵이처럼 말아 잠든 옛날도 다녀간다 이 정도에 질식하지 않을 거다 달빛 줍는 방 몇이나 되겠냐고 가만히 손을 쥐었다
책 하나만 믿게 한 나의 지옥,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
----박용숙 외 애지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