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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3.수요합심기도예배 설교문【교회 세우는 달】
제목: 믿음은 동행이다. Belief is a going together.
본문: 마태복음 1: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Behold, a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shall bring forth a son, and they shall call his name Emmanuel, which being interpreted is, God with us.
찬송: 540장(통 219장) –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542장(통 340장) – 구주 예수 의지함이,
543장(통 342장) – 어려운 일 당할 때,
544장(통 343장) – 울어도 못하네,
546장(통 399장) –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620장(미 1623장) – 여기에 모인 우리.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은총이 교회 공동체여러분과 교회 공동체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교회 공동체여러분의 사업과 가정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은 예수님의 동행 두 번째 말씀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행.Going together doing with Jesus.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시간을 보내기거나 다른 취미나 흥미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하든지 아니면 사역을 위하여 일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일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친밀함의 기준은 함께 있는 시간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달에 5분 정도, 10분 정도를 함께한다면 그렇게 친밀한 관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에 멸 시간씩 함께 한다면 훨씬 친밀함의 관계는 높아지고 깊어지고 진해지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친밀함과 관계를 하나님과 항상 유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루 시작은 이렇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And in the morning, rising up a great while before day, he went out, and departed into a solitary place, and there prayed.(막1:35절) 예수님은 하루의 일과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충 보내시지 않고 깊이 있게 한적한 장소로 가서 기도하며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렇게 해야 성부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하지 선명하게 아실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과 깊은 시간을 갖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둘째는 재충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새로운 사역과 새로운 도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루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과 문제들과 상황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초긴장된 모습으로 사셔야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거나 고갈되어 있으면 사명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과 시간을 자기면서 재충전 돼야만 새로운 능력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변함없이 목적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무엇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지만 마지막까지 완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난이나 핍박,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아야 합니다. 맡겨주신 일을 끝까지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사에 잘나가는 사람들, 유력한 자들이나 권세 있는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 생애와 사역과 삶을 100% 의탁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갖고 교제하며 사셨습니다. 다윗 왕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My voice shalt thou hear in the morning, O LORD; in the morning will I direct my prayer unto thee, and will look up.(시5:3절)라는 하루의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하루는 불안하거나 꺼림칙할 정도로 하루를 실패하거나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항상 함께라는 것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놓았고(요8:16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And yet if I judge, my judgment is true: for I am not alone, but I and the
Father that sent me.), 누구와 함께하는가에 따라 승리와 패배가 결정되는지 분명하게 아셨기에 때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2제자들을 세웠을 때 하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3:14절에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And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wilderness, even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라는 첫 번째 제자들을 세운 목적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전도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도 함께 라는 축복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and, lo, I am with you alway,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Amen.(마28:20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중심에 두고 산 사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 공동체들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Behold, a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shall bring forth a son, and they shall call his name Emmanuel, which being interpreted is, God with us.(마1:23절).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혜는 임마누엘(Immanuel, Emmanuel, Imanu'el)의 이름을 가진 예수님이십니다. 그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복음의 알파(Α)와 오메가(Ω)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이 여기에 있고, 이 믿음이 확고하면 어떤 위기와 어려움, 고통과 아픔, 낙심과 절망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 채드윅(Samuel Chadwick)은 말하길 하루 30분만 은밀한 장소에서 입 다물고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 우리교회 가족들의 믿음을 지탱시켜주고, 무한한 일들도 넉넉하게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어느 위험이나 난관도 넘을 수 있도록 극복의 힘을 주십니다. 그 함께하는 것을 우리교회 공동체는 동행이라고 부릅니다. 동행은 함께하는 것의 구체적인 삶이며 생활입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할 때, 믿음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이 동행입니다. 그러면 동행하는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요?
첫째, 예수님에게 나오는 자만이 통행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취할 태도는 먼저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5:37~40절을 보겠습니다.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37And the Father himself, which hath sent me, hath borne witness of me. Ye have neither heard his voice at any time, nor seen his shape. 38And ye have not his word abiding in you: for whom he hath sent, him ye believe not. 39Search the scriptures; for in them ye think ye have eternal life: and they are they which testify of me. 40And ye will not come to me, that ye might have life.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에 대해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말씀 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며 증언하셔도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합니까? 성경에 영생을 얻는 길이 제시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연구하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에게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나와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이 동행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까지는 왔으며 예배는 드리고 열심히 성경도 보고 설교도 듣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마태복음7: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Because strait is the gate, and narrow is the way, which leadeth unto life, and few there be that find it.고 한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찾거나 그 앞에 나오려고 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사람들은기독교에 적을 두고 교회에 소속되고 기독교라는 울타리에 들어오는 정도의 종교적 행위까지만 선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만나는 직접적 믿음보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정도의 간접적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예수님 앞으로 나와 예수님과 삶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나 의식이 아닙니다. 향을 피우고 권위적인 의복이나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을 하고 어떤 주술과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오면 그때부터 영혼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한복음7:37절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In the last day, that great day of the feast, Jesus stood and cried, saying, If any man thirst, let him come unto me, and drink.고 했는데 바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But whosoever drinketh of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shall never thirst; but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shall be in him a well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요4:14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다릅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영혼에 만족이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약속을 준비한 부르심이기에 누구든지 응답을 하면 기쁨, 영생, 만족이라는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동행을 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ye believe in God, believe also in me.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까? 예수님만이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한분이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사람들을 돕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위험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 공동체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교회 공동체 자신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여러분이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교회 공동체여러분을 구하고 도와줄 수 있는 분이 없이 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이 오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깨지고 포기하며 더 이상 버티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며 동행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정말 감동적으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4:7~9절을 읽겠습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7But we have this treasure in earthen vessels, that the excellency of the power may be of God, and not of us. 8We are troubled on every side, yet not distressed; we are perplexed, but not in despair; 9Persecuted, but not forsaken; cast down, but not destroyed;
누가 이렇게 능력 있게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죄로부터 해방과, 그리고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자유만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요3:17~18절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7For God sent not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hat the world through him might be saved. 18He that believeth on him is not condemned: but he that believeth not is condemned already, because he hath not believed in the name of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흔적이 드러나고 나타납니다. 넘어지고 낙심하고 고통당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만족함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님을 구원자라고만 하시지 않고 목자로(마26:3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Then saith Jesus unto them, All ye shall be offended because of me this night: for it is written, I will smite the shepherd, and the sheep of the flock shall be scattered abroad.), 왕으로(요8:5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Jesus answered, If I honour myself, my honour is nothing: it is my Father that honoureth me; of whom ye say, that he is your God:), 신랑으로(마9:15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And Jesus said unto them, Can the children of the bridechamber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but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shall be taken from them, and then shall they fast.)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함께하시는 축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영웅적인 행동이나 특별한 행위기가 아닙니다. 모두가 순교자가 되고 예수님처럼 젊은 나이에 죽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탁하신 말씀은 믿음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or else believe me for the very works' sake.(요14:11절). 어느 날 제자인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or else believe me for the very works' sake.(요20:27절). 예수님은 믿음을 주기 위하여 끈질기게 무모 하리 만큼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믿음입니까?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없으면 죽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걷고 나누고 하나가 되려면 서로가 닮거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서로 다르면 동행이란 불가능합니다. 교회 공동체여러분이 정말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다면 이것을 지켜야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함께 동행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0: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He that loveth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he that loveth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라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직역해서 그러면 예수님은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사랑을 말할 때 부모의 수준만큼 넘어야한다는 역설적인 답입니다. 이만큼 예수님은 사랑을 말할 때 강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예수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고, 예수님과 함께 사역하려면 부모나 자녀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까지 동반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지키는 것(요14: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If ye love me, keep my commandments.)이라고 했을 때 말씀을 지키는 것도 억지로 하는 것과 사랑으로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새로운 본성, 즉 예수님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의 본성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구속적 사랑, 희생적 사랑, 영원한 사랑, 거룩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런 사랑을 신적 사랑(divine love)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마5: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But I say unto you, Love your enemies, bless them that curse you, do good to them that hate you, and pray for them which despitefully use you, and persecute you;,눅6:27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But I say unto you which hear,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em which hate you,). 이런 사랑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들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신적 사랑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에서 하는 사랑과 전혀 다릅니다. 사랑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사건이 있습니다. 누가복음7:36~47절(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36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36 And one of the Pharisees desired him that he would eat with him. And he went into the Pharisee's house, and sat down to meat. 37And, behold, a woman in the city, which was a sinner, when she knew that Jesus sat at meat in the Pharisee's house, brought an alabaster box of ointment, 38And stood at his feet behind him weeping, and began to wash his feet with tears, and did wipe them with the hairs of her head, and kissed his feet, and anointed them with the ointment. 39Now when the Pharisee which had bidden him saw it, he spake within himself, saying, This man, if he were a prophet, would have known who and what manner of woman this is that toucheth him: for she is a sinner. 40And Jesus answering said unto him, Simon, I have somewhat to say unto thee. And he saith, Master, say on. 41There was a certain creditor which had two debtors: the one owed five hundred pence, and the other fifty. 42And when they had nothing to pay, he frankly forgave them both. Tell me therefore,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st? 43Simon answered and said, I suppose that he, to whom he forgave most. And he said unto him, Thou hast rightly judged. 44And he turned to the woman, and said unto Simon, Seest thou this woman? I entered into thine house, thou gavest me no water for my feet: but she hath washed my feet with tears, and wiped them with the hairs of her head. 45Thou gavest me no kiss: but this woman since the time I came in hath not ceased to kiss my feet. 46My head with oil thou didst not anoint: but this woman hath anointed my feet with ointment. 47Wherefore I say unto thee,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th little.
유일하게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언제 듣고 보아도 아름답고 정말 닮고 싶은 러브스토리(love story)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멋진 로맨스를 한번은 해보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꼭 주인공을 해보고 싶은 드라마입니다. 주님께서 이 스토리의 주인공인 여인에 대한 평가가 특별합니다. 사랑이 많은 여인.Love is many women.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이 말을 예수님에게 직접 들었을 때 이 여인은 지난날의 쓰라린 삶과 아픔을 날려 보내며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찾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되 크게 사랑한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강렬하게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이 여인이 했던 사랑을 큰 사랑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 자신의 사랑이 큰 사랑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 자신의 사랑이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교회 공동체들을 하실 때 어떤 사랑을 하셨습니까?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빌2: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And being found in fashion as a man,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unto death, even the death of the cross.). 그러므로 양유를 부으며 큰 사랑을 보여주었던 여인의 모습과 예수님이 우리교회 공동체를 사랑하시는 큰 사랑의 모습이 일치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신적 사랑을 향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갈2:20절). 사도 바울 자신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과 동일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예수님을 크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은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의 분량을 지금보다 자라게 해야 합니다. 사랑의 믿음을 자라게 해야 합니다. 사랑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혈연적 사랑을 넘지 못하면 신적 사랑은 하지 못합니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 미운 사람을 품에 안는 것, 삶은 사람을 감싸주는 것, 못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배신한 사람을 따뜻한 애정으로 대하는 것 모두는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저 주는 사랑이며 먼저 하는 사랑이며 크게 하는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우리교회 공동체들의 사랑이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 넘쳐나는 주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우리교회 공동체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가치 있고 배울만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과 동행하길 원하십니다.
동행하는 믿음이란,
첫째, 예수님에게 나오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지도자였던 지도자 모세는 이렇게 부르짖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And he said, If now I have found grace in thy sight, O LORD, let my LORD, I pray thee, go among us; for it is a stiffnecked people; and pardon our iniquity and our sin, and take us for thine inheritance.(출34:9절). 지도자 모세는 은혜를 입은 자신의 증거가 하나님이 동행하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동행을 위한 기도를 간절하게 드렸습니다. 혹 목이 뻣뻣한 백성이지만 악과 죄를 사하여 주시고 기업으로 삼아달라고 동행하는 분이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교회 공동체에게 필요한 기도가 이것입니다.
능력도 필요하고 기적도 필요하고 경제 희생도 필요하고 행복도 필요하고 성공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것은 주님! 우리교회 공동체와 동행하옵소서! Lord! At our church family and Donghaenghaopso!라는 임마누엘의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교회 공동체와 임마누엘로서 동행을 하실 때 잔정한 자유와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때 사람, 가정, 교회, 국가의 모든 문제와 짐과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임마누엘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우리교회 공동체가 동행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에게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것으로, 부르심의 기회를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님의 충만으로 변화되어 예수가 나의 주와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침기도: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우리교회 공동체가 동행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에게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것으로, 부르심의 기회를 응답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시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님의 충만으로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과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전파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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