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화원에서 우리 지역 문화 강좌가 있었습니다. 제목은 '다시 보는 천하 명승 영보정'. 강사는 서천여중에 근무하는 황 의천선생님이였습니다.
황선생님은 문화강좌가 시작된 것이 07년도이고 그간 총 60회에 걸쳐 보령 문화 유적에 대해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이번 영보정에 대한 강의도 이전에 한번 했던 강의이지만 좀더 보완해서 다시 해보고자 한다고 하네요. 나 같이 처음 들어본 사람에게는 행운이지만 알아도 잊어 먹는 것이 우리 보통사람들이라 다시 되새김질하는 의미에서 강의를 듣는 것도 괜찮다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충청수영청은 09년도에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곳으로 한때는 400여척의 군선과 8천여명의 군졸이 주둔한 서해안 최대의 조선 수군 군영이였지만 영보정이라는 명승지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영보정은 수영청내 북쪽면 해안가 언덕에 위치해 있었고 1504년 연산군때 이량(李良)장군이 당시 쓰지 않는 객관으로 방치되어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이를 영보정이라 칭했다합니다. 영보정의 의미는 사람들이 즐기기만 했지 즐기는 곳을 보존할 생각은 안한다 해서 이곳을 영원히 보존하자는 의미로 永保亭이라 했다고 합니다.
영보정은 이를 대상으로 쓴 시문이 백여개 이상 현존해 있을 정도로 조선 선비들이 최고로 치는 명승지였다고 합니다. 영보정과 동격으로 치는 정자를 거론해 보면 평양의 연광정,의주의 통군정,밀양의 영남루,진주의 촉석루,안동의 영호루등이 있다고 합니다.
1642년 한번 중수(重修)가 되었는데 당시 중수기에는 임진난시 이 곳을 찾았던 중국 수군 장군들이 중국 악앙루 보다 더 낫다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종때 1896년에 폐영이 되면서 민묘가 들어 서고 일제때 신사가 들어 서면서 그 자취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시문에 나타난 영보정의 이야기는 다산 정약용의 영보정 연유(宴游)기등을 비롯해 수 많은 시문이 남아져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일화를 하나 들어 보면, 임진난때 광해군이 선조를 대신해서 호남땅을 통치하려 내려올 때 당시 송유지가 반란을 일으키자 홍주에서 충청수영으로 이동할 것을 주장했다 합니다. 그래서 이항복이 미리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그 곳을 다녀온 후 광해군에 아뢰기를 가기가 마땅치 않다고 했다고 합니다. 혹자가 나중에 그 의중을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세자가 그 곳 경치가 너무 좋아 방탕한 마음이 생길까봐 그랬다 합니다.
영보정에 대한 시문 중 가장 압권은 무엇일까? 그것은 읍취헌 박은의 시라고 합니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인 00의 아버지인 박 준원에게 그 형인 박 윤원이 영보정을 보고 쓴 편지에 대한 사연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 선비들의 풍류중에 하나가 뛰어난 명승지를 둘러 보고 시문을 적는 것이랍니다. 동생이 형이 영보정을 구경하러 간다 하니 중국 선비들이 아미산 그림을 보고 병이 나았듯이 그림과 시문은 다를 바 없으니 형의 뛰어난 영보정시문을 적어 보내면 자신의 병이 좋아질거라고 편지에 씁니다. 그러자 그 형인 박 윤원이 답장을 보내기를, 천하의 이 태백도 황학루에 올라 최 호의 황학루시를 보고 더 이상 이 곳에서 시를 쓸 수 없다 하고 이웃에 있는 봉황대에 올라 봉황대시를 썼다는 일화를 인용하면서 박은의 영보정시를 보고 더 이상 내가 시문을 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만큼 박은의 시는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박은은 연산군때 사람으로 15세에 문장이 능해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고 18세에 급제를 하여 정계에 진출했다고 합니다. 그는 매사에 의견을 개진하여 왕이 싫어 하였고 재상들도 기뻐하지 않았다 합니다. 어디를 가도 천재들의 언행은 잘난 척으로 보이나 봅니다. 그는 유자광을 탄핵하는 소를 하여 연산군에 의해 귀양이 보내 졌고 이후 갑자년에 사약을 받고 처형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 죽음을 앞두고 하늘을 쳐다 보며 크게 세 번 웃고 죽었다 합니다. 후대의 문필가들에 의해 시문으로 조선의 최고이며 중국의 명문가들과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를 받았다는 군요. 영보정시는 그가 죽기 한 해
전에 쓰여집니다.
그의 시는 5언 7구 4연으로 되어 있는데 수영성을 둘러싼 지세와 바닷가 풍광,영보정 누각에 대한 감상을 운율에 맞춰 형식미까지 갖추는 한시로 기가 막히게 표현했나 봅니다. 그중에 1연을 베껴보았는데 급하게 이기(移記)한거라 정확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교정해 줄거라 믿으며 적어 봅니다.
땅이 끝나 드넓은 바다는 다 보지 못 하지만
급한 바람이 안개 불어 흩고(?) 불은 거원(?) 같은데
가까운 물가에 사람없고 채만 스스로 노래한다
객지에서 매양 맑은 경치에 마음이 심란하더니
일번에서 다시금 고향이 아득히 멂을 깨닫는다
고심해 시 읊느라 안 떠나서 새 싯구가 부족해
석양이 먼 하늘에 잠기는 광경 시름겨워 하노라
(오타 많음. 누가 보충해 주면 좋을 것 같음)
한시를 우리말로 옮기고 지금 시대의 느낌으로 읽자니 별 감흥이 안 오지만 한시 싯구로 읊고 당시의 조선 양반들의 정서로 받아 들이면 기막힌 시가 되었나 봅니다. 이 정자에서 풍악을 울리고 풍류를 즐길 때 기생들이 읊은 시가 오직 박은의 시였다고 하니 말입니다. 시에 대한 조선 평론가들의 격찬에 비해 내 자신의 감상이 다소 썰렁하니 입맛이 떨떠름 하더군요. 어떻든 과문한 내가 어찌 봉황의 맘을 알겠습니까~ 흑흑~~
정약용은 박은의 시를 보고 평하기를 지형은 어떻고 호수가 어떻다는 표현만 있고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 했다고 다소 박한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인의 영보정에 대한 시에서도 박은을 소개할 정도로 그 그늘은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더군요.
자~ 그런데 그런 영보정이 지금 오천의 충청수영성 안에는 없습니다. 최근 8천만원을 들여 시청에서 발굴작업을 시행하였다고 하는데 공식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 결과가 시시한 가 봅니다. 황선생님이 보여 주신 현재의 영보정 자리 사진을 보니 나무가 무성하여 시야는 가려져 있고 돌무덤 일부가 그 곳이 영보정 자리임을 알려줄 뿐이더군요. 잘 발굴하여 옛 정취가 살아 나는 영보정을 복구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문화원 강좌를 들으면서 청중으로 오시는 문화원 회원이신 어르신들과 많이 친해진 느낌입니다. 저하고는 1세대 정도 차이나시는 분들이죠. 6.25세대와 건설세대가 주를 이룹니다. 요즘 문화원이 보면 문화원장 선거 과정에서 내분이 있나 봅니다. 누가 낫고 덜 하고를 떠나 다소 아쉬운 상황이지만 이 것이 결국 보령시민의 관심이 부족하고 일부의 회원에 의해서 문화원이 운영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문화원의 행사에 참여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문화원장님을 비롯한 몇 분에게 우리 마을에서 인문학 페스티벌을 한다고 말씀드리고 전단지를 드렸더니 처음 대하는 것 처럼 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홍보가 부족한가? 싶지만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것 같고 오시겠다는 분도 있는데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소속단체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과 세대의 차이에서 무관심이 그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보령 문화 발전의 차원에서 어르신들과 우리들의 자주 만나 대화하고 소통하고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보다 젊은 우리가 그 분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더 해야 겠죠?
다소 늦게 끝난 강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옵니다. 바람이 시원한게 여름이 저 멀리 간 듯 하네요. 다리에 힘을 주고 가슴을 열어 젖히고 택시를 타러 갑니다. 올 가을엔 충청수영성에 올라 영보정 자리에 가 볼까 합니다. 그 자리에 서서 정 약용이 되고 박은이 되고 자신의 무능을 탓한 박 윤원이 되어 보고자 합니다. 멋진 나들이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 누구 같이 갈 사람없슈?"
첫댓글 헉... 기억하고 있다가 막상 시간이 되었을때 까먹고 못갔네요.
그래도 이렇게 내용을 알려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