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목요일 맑음. 에어콘 속에서 한 여름에 겪던 애환을 생각한다.
이번에도 미국의 사위 집에 오니 역시 하루 종일 에어콘을 돌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내가 그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이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그것을 마루에 한번 설치한 일은 있었지만 10여년 동안 그것을 한 번도 작동한 일은 없었다. 몇 년 전에 서울로 이사를 와서는 아예 그것을 설치하지 않았더니, 작년 같은 혹서에 고혈압 증세가 있는 내자가 혈압이 높아져서 큰 고생을 하였다고 여름이 다 지난 뒤에야 뒤 늦게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금년에는 아주 일찍부터 여기 와서 피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는 카나다 태생인 사위 녀석은 조그마한 더위도 견디지 못한다고 하면서 늘 에어콘을 크게 틀어놓고 지낸다. 집 사람이야 그것이 반가운 모양이지만, 나는 어찌된 셈인지 그 바람만 맡으면 기침이 나오고, 콧물이 쏟아져서 팔이 긴 옷을 찾아내어 입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된다. 그렇지만 이 집의 주인을 보고서 습관을 바꾸라고 할 수도 없고, 또 내자도 좋아하는 것이니, 부득불 내가 그런 곤란한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내가 집 밖에 나가서 지내는 시간을 좀 많이 가지고자 하여, 아침 만 먹으면 혼자서 볼 책을 한 권 끼고 가까운 공원에 들어가서 볕을 가리는 곳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서, 그것을 읽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들어와 보고는 한다. 또 저녁에도 가능하면 다시 한 번 더 바깥에 나가서 하늘을 좀 쳐다보면서 한 여름 밤의 정취를 느껴보고자 한다. 이곳의 기온도 꼭 지금 한국의 대구나 서울에 비슷하여 낮에 조금만 걸어 다녀도 전신에 땀이 난다. “이 더운데 왜 이렇게 좋은 집을 나두고 또 나가세요?” 하고, 자주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내자는 쳐다보지만, 내 나름대로는 좀 더울 때는 더운 대로 더위 맛을 좀 보고 사는게 좋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다. 특히 밤에 에어콘 돌아가는 소리만 듣고 있다가, 바깥에 나가 보면 밤중에 우는 여름 벌래들 소리도 들리고,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한국서는 듣지 못하던 괴상한 새 소리도 더러 들린다. 하늘을 쳐다보면 별을 그렇게 총총하지만은 않으나 달이 있는 날이면 그 빛도 밝고, 밤 구름도 볼만하다.
이런 더운 날 땀을 좀 흘리면서 걸을 때면 항상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가지 일이 불현듯 떠오른다. 우리가 어릴 때에는 늘 여름만 되면 벼논에 들어가서 김을 메는 농삿꾼들의 고된 노동이 있었다. 뺑 볕을 받으면서 물이 찬 논에 들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하는 일이니 얼마나 고되겠는가? 나는 그런 고역을 직접 하여 본 일은 없지만, 그런 일을 후원하는 일 또한 쉽지 않은데, 그런 일은 좀 하여 본 일이 있다. 오전 오후에는 새 참이라고 하여 간식과 술을 날아다 주어야 하기도 하고, 점심 때가 되면 논이 집에서 먼 경우에는 점심을 논까지 지고 가야 한다. 그런대 먼 곳에 있는 논까지 대낮에 점심을 지고 간다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힘이 드는 것은 좋은 데 또 마을 사람들 중에 더러 싱거운 사람들을 만나면, “어! 양반 집 도련님이 짐을 다 지고 가시네!” 라고 하거나, “어! 학생이 다 지게를 지고 다니네!” 하고 흉을 보는지, 비웃는지 모를 말을 듣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런 일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부득불 어머니가 그것을 손수 머리에 이고도 다니셨다. 여름 날 부엌에 불을 때면서 밥을 한다는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닌데, 그것을 또 이고서 집에서 먼 논까지 나가기도 하셨으니…이런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참 가슴이 찢어 질 듯이 아프고 불효막대하였던 것이 후회스럽다.(이런 때도 바깥어른들은 대개 방안에 앉아서 낮 잠이나 자고 있는 게 보통이었으니, 살림도 기울고, 신분도 바꾸어 가던 과도기에 살다간 우리 어머니 같은 부인네들의 고초는 이루 다 형언할 수도 없었다)
여름의 낮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추억도 남아있지만, 그래도 여름의 밤에 관하서는 대개는 아름다운 추억이 더 많다. 평상이나 멍석을 깔아놓고 시원한 바람을 씌어 가면서 온 식구가 함께 저녁을 먹는다든가, 식후에도 모깃불을 지펴놓고 식구들이 함께 별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하다가 못하면, 밤에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는 것조차도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좋은 밤에까지도 사방 문을 다 닫아놓고서 계속하여 에어콘을 돌리고 있다니? 집 주위에 나무도 많고 넓은 잔디밭도 좋은데, 왜 이렇게 24시간 에어콘만 돌리는지 알 도리가 없다. 이런 것을 일러 “문명”의 첨단이라고 좋다고만 해야 하는지?
7월 21일 금요일 더움. 대낮을 달려서 캔터키 주를 지나서 테네시 주의 수도 내시빌까지 오다.
사위가 자기 큰 형이 지금 네시빌에 와서 사업차 반달씩 머물고 있기 때문에는 그 형을 만나러 차를 몰고 갈 생각인데 같이 가고 싶으면 동행을 하자고 하였다. 쉬지 않고 달리면 4시간 반쯤 걸리는데 동남향 고속도로를 따라서 내려 가는데, 캔터키주를 지난다고도 하였다.
내시빌이라는 도시는 이전에 한번 가서 몇 일을 지내본 일이 있다. 10여년 전에 보스톤에 와서 있을 적에, 종교학을 하는 한국 친구가 거기서 미국의 종교학회가 있는데 같이 가보자고 하였다. 그 때 마침 그 도시에 있는 경제학으로 유명한 반드빌트대학에 조카 하나[둘쩨 형의 3남, 지금 선경그룹의 타이완 지점장]가 와서 경영대학원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도 만날 겸 그 친구가 몰고 가던 차에 동행을 하였다. 당시 큰 호텔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도서 전시회까지 겸하여 몇 일 동안 계속하는 그 어마 어마한 학술 발표 대회의 큰 규모에 놀란 것과, 서른 전후의 총각으로 혼자 외국에 나와서 외롭게 지내다가 뜻밖에 우리를 내외를 만나서 몹시 반가워하던 그 조카와 짧은 시간이지만 몇 차례나 틈틈이 만나서 너무나 정답게 지냈던 일 같은 것을 제외하면, 별도로 그 도시나 그 부근을 관광한 곳은 없어, 지금 그 도시 자체에 대하여서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보스톤에서 거기까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캔터키 주 지나가는데, 좁은 길을 따라서 시골로도 더러 들어가본 기억은 난다.
오늘은 낮 11시에 집에서 떠나서 중간에서 더러 서기도 하였지만, 사뭇 큰 고속도로 길로만 곧장 달려서 저녁 때에 내시빌 공항 근처에 있는 여관[inn]에 와서 그 호텔 로비 곁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간단한 저녁을 찾아먹고서 일찍부터 잤다.
7월 22일 토요일 더움. 미국 제7대 대통령 잭슨 기념관에 가서 보다.
아침은 역시 여관에서 제공하는 그 로비 곁의 간의 식당에서 먹고, 사위는 자기 형과 만나고 우리는 미국 제7대 대통령인 잭슨 기념관에 가서 보았다. 지금 미국 돈 20불 짜리에 나오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 이름은 들은 것 같으나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더니, 이 지역에서 법조인으로 일하면서 많은 토지도 소유하였고, 독립전쟁 때는 이 테네시 지역의 의용군 사령관으로 출정하여 많은 공을 세워 대통령에까지 당선 되었으며, 은퇴 후에 여기 다시 돌아와서 큰 농장을 경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중서부에 산재하여 살고 있던 여러 인디안 원주민들을 몰아낸 것, 흑인 노예들을 거느리면서 농장을 경영하였던 일은 비록 그 당시 백인 정착민들로서는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는 꼭 모두 잘한 일이라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인권”에서 이런 사람들의 인권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을 터이니…
오후 2시경에 길을 나서서 다시 어제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데, 다시 캔터키 주에 들어와서 이 주에 안에 있는 링컨의 고향이나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길을 많이 돌게 된다고 해서 그만 두었다. 그러나 미국 노래에도 나오는 “옥수수” 밭은 지나가는 고속도로 연변에도 끝없이 넓게 이어졌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모든 면에서 규모가 큰지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주 하나씩이 대개 우리 한 반도의 넓이만큼씩 하니…캔터키 주 서북쪽을 벗어나기 전에 이리노이 주와 사이에 오하이요강이라는 한강 정도의 큰 강이 양쪽으로 갈라진 곳이 있는데, 그 강을 넘기 전에 전에 이미 저녁 때가 되어서 그 접안 도시[Paduck]에서 다시 달리는 고속도로 연변의 여관을 찾아들어가서 잤다.
어제 저녁에 네시빌에서 묵었던 것과 똑 같은 계열의 여관인데도 방 값은 어제 보다도 훨씬 쌌다. 어제나 오늘 묵은 이러한 여관(inn)이 위치가 대개 큰 고속도로 주변에 있어서 좀 아늑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시설이나 대접(아침, 저녁 식사제공)은 한국의 왠만한 호텔 정도보다도 못할 것이 없는데도, 한국의 보통 호텔보다도 가격은 오히려 훨씬 저렴한 것 같이 생각되었다. 다만 방에까지 데리고 들어간 개에게도 하루에 25불을 씩을 방값에 추가하여 더 받는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7월 23일 일요일 오하이오 강가에 거닐다가 다시 센트루이스로 되돌아오다.
오전에 오하이요 강에 나가서 조금 구경을 한 뒤에 오후에 다시 센트루이스로 돌아왔다. 독립전쟁 때나 남북전쟁 때에 이 큰 강 연안에 이미 해군 부대가 설치되기도 하고, 이 강을 끼고서 격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강에 큰 배들이 다니고 있는 게 보인다. 거기 적힌 설명을 보니 이 일대의 수역의 범위가 온 세계의 모든 강들 중에서 가장 넓다고 하였다. 미시시피를 위시한 세계의 딴 이름난 강들은 길이로만 더 길다는 말인 모양이다. 오늘 하여튼 세계 제1을 하나 더 보았으니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