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주교님
이재범 동악수필 회원
지학순 주교님은 1921년,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천주교 초대 원주교구장으로 봉직하시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았습니다. 종교활동 외에도 유신 반대운동 등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삶을 사셨으며, 농촌계몽 활동으로 '카톨릭 농민회' 사제들을 위해 '정의구현 사제단' 모임을 주도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배론성지 조성과 진광고등학교 설립도 주교님의 업적입니다. 원주를 신용협동조합의 메카로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생전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1970년 어머니 병원비와 동생 학비 때문에 하루 200~300원씩 빼돌린 안젤라 안내 양이 "죄책감 때문에 성당을 못가겠다"며 지학순 주교님을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께서는 '삥땅'은 죄가 아니라며 성당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안내 양이 생활을 위해 돈을 훔치는 건 종교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지였습니다. 회사에서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봉급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교님께서는 MBC에서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습니다.
주교님은 1993년 3월 12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교님의 시신은 배론성지 성직자 묘역에 모셨는데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습니다. 주교님 시신은 서울 성모병원에서 하얀 시트로 덮고, 수녀님 두 분이 운구차에 모시고 원동성당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 원동성당 교육관에는 영안실이 없어서 드라이아이스를 넣은 비닐 자루에 시신을 모셨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관 위에 칠성판을 얹고, 수의와 제의를 입히고 구두도 신겨 드렸습니다.
저는 당시 염습 과정에 보조자로 함께했습니다. 염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거관은 전국에 있는 성당 레지오팀에서 서로 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원동성당 레지오 단원과 신자들이 절반씩 참여했습니다. 허례허식을 싫어하셨던 주교님 유지를 받들어 근조 화환을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청계천 피복 노조에서 성당 담을 넘어 화환을 보내는 바람에 모든 조화를 받기로 했습니다.
하관식에서는 주교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누구도 취토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서강대 총장으로 재직하시던 박홍 신부께서 앞장서면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주교님 시신을 올려놓았던 관은 갈거리사랑촌에 계시던 95세 할머님께서 위독하시니 할머님께서 돌아가시면 그 관으로 장사를 지내기로 하고 보관했다가, 2개월 뒤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그 관으로 장사를 지냈습니다. 제의에 둘렀던 허리띠는 우리집 장롱에 고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주교님 가르침에 반하는 마음이 생기면 장롱에서 허리띠를 꺼내 보며 기도합니다.
주교님이 남기신 말씀, 가르침은 저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부모님 못지않게 주교님에 대한 그리움이 적지 않습니다. 생전에 주교님은 "빛이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내가 등불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말씀을 받들어 JC 활동, 적십자 자원봉사활동 그리고 노숙인의 무료급식 시설인 '십시일반'에서 봉사하는 일에 참여했고, 갈거리사랑촌 곽병은 원장을 도와 장애인 시설 봉사도 하였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세상의 빛으로 살라는 주교님의 교훈을 받들며 살아왔고, 정직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저는 나이 70을 앞두고 있습니다. 104세의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인생은 70부터라고 했습니다. 저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며 남은 생을 지학순 주교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청사초롱 같이 주변을 밝히며 살겠습니다.
이재범 동악수필 회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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