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2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의 고독 》
말 1:10~11
<아버지의 고독>
요즘 설교에서 저의 죽마고우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그 친구는 평범한 청년 시절을 보내고 누구나 그렇듯이 결혼을 했습니다.
한 여자와 둘이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딸이 태어나서 세 식구로 가족이 늘었습니다.
친구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궂은일 힘든 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1녀 1남, 더 열심히 벌었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르바이트를 하여 가정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평범하게 자랐습니다. 둘 다 지방의 국립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부부 사이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 있겠지요?
아내가 끈질기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이혼해 주었습니다.
이혼하고 나서부터 두 자녀와 단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남편, 한국의 아버지는 열심히 돈만 벌 줄 알았지 쓸 줄을 모릅니다.
아이들 키우면서도 정서적으로 자녀들과 화합하지 못합니다.
새벽같이 나갔다가 아이들 잠든 후에 퇴근합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함께하는 역할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입니다.
거실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깔깔대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각자 방으로 쏙쏙 들어갑니다.
아버지는 이런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면 피곤하니까요!
얼른 씻고 잘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생활 패턴이 바뀝니다.
일찍 퇴근해봐야 아이들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고 외톨이가 됩니다. 퇴근을 늦춥니다.
하루 종일 한 사무실에 있었던 동료들과 술집을 향합니다. 한잔, 두잔…
“남자는 외로워~” 이것이 “남자의 인생”입니다.
그렇잖아도 외로운 것이 남자의 인생인데, 제 친구는 이혼까지 당했습니다. 너무 외롭습니다.
왜 이렇게 남자는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까?
이혼 당하지 않고 노년을 살아가는 남자라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요?
☞ 아버지는 왜 이렇게 외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이 알고싶습니다.
<하나님의 고독>
하나님께 묻고싶습니다.
하나님, “남자의 일생” 어떻게 설계하셨기에 아버지가 이렇게 고독합니까?
세상 외로운 남자들, 고독한 아버지들, 모두 모여서 합창으로 외치고 싶어요!
“하나님, 왜 아버지를 왜 이렇게 외로운 인생길로 설계하셨습니까?”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외로움, 100% 아버지의 탓입니까?
아버지들은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외롭고 고독한 말년을 보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도, 남자들은 새벽같이 일 나갈 준비를 합니다.
왜요, 아내, 자식들, 생각하면 힘 닿는데까지 벌어야 합니다.
남자들은 자기의 외로움을 일로 해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힘이 있어서 현장에 나가면 그런대로 재미가 있습니다. 시간이 잘 갑니다.
☞ 세상의 아버지처럼 이렇게 외로운 아버지가 성경에 보니까 또 한 분이 계십니다.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오늘날 이 땅의 아버지들처럼 더 외롭고 고독한 “아버지”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시면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토로하실까요?
“내가 아버지인데, 너희가 나를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주인인데,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_ 제가 설교 시작하면서 친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_ 대학까지 졸업시킨 두 자녀, 전화도 잘 안받습니다. 만나자고 해도 이핑계 저핑계,
_ 설날, 추석날 명절이 와도 연락 한 번 없습니다.
_ 시골에 90넘은 노모가 계신데, 수삼년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칩니다.
☞ 말라기 시대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외롭고 고독합니다. 오 주여~
<하나님 고독의 시발점>
☞ 우리 인생은 그렇다 쳐도 하나님은 왜 이렇게 외롭고 고독하실까요?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만물, 삼라만상을 지으신 분입니다.
햇빛과 비를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자체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마치 우리를 낳아주신 아버지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가정을 꾸린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부부가 자녀를 출산하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 지구로부터 수십억 광년 거리에도 빛을 내는 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먼 거리에도 별을 만들어서 지구를 비추게 하셨을까요?
그렇게 함으로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만드셨습니다.
먼 거리에서도 지구를 향하여 별이 빛을 쏘아야 합니다. 그 환경이 지금의 지구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심하게 지구의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_ 새벽녘 아직 자식들은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출근해야 하고,
_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고, 공부도 하고, TV도 보다가 잠든 이후에야 아버지는 귀가합니다.
_ 자식은 아버지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성장합니다. 자식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없습니다.
☞ 지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기억에서 지우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이후 얼마 못 가서 “외로운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만유의 주재 하나님>
하나님 앞에 우리는 수식어 붙이기를 즐겨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 앞에 붙이는 수식어 중에 ‘만유의 주재(萬有의 主宰)’가 있습니다.
“만유의 주재 하나님!” 무슨 뜻이냐면요,
모든 것의 소유자이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통치하는 임금 하나님, 이 뜻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외로우세요!
☞ 가정을 이루어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쳐 사회에 내보내신 ‘아버지’ 바로 그 뜻이지요!
☞ 그런데 그 아버지가 외롭습니다. 만유의 주재 하나님이 지금 고독하십니다.
사람이 고독을 못 견뎌 하듯이 하나님도 고독은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고독을 싫어하실까요?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외로우면, 피조물 인간은 더 외롭습니다.”
“아버지가 고독하면, 자식의 인생은 더 고독합니다.”
아버지가 의절한 자식, 집 나간 자식을 왜 걱정하는 지 아십니까?
아버지를 떠나, 집을 나가면, 그 아들은 더 힘들고 고독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장례식에도 안 오는 아들, 그 아들이 힘들고 고독 할까봐, 손을 내밉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은 그것을 걱정하시는 겁니다.
싫다는 데도 하나님이 자꾸 다가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고독” 때문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외로우면 피조물 인간은 더 큰 외로움과 고독에 직면합니다.
☞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을 향한 사랑입니다.
☞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 하와, 선악과 따먹고 집을 나갔습니다.
☞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얼마나 힘들고 처절하게 삽니까?
☞ 에덴동산을 떠나자마자 일어난 사건이 가인과 아벨, 살인사건입니다
☞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중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 그러니, 하나님이 편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좌불안석입니다.
하나님은 끊임 없이 손짓을 하십니다. 노아에게 손짓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손짓하십니다.
<가장 고독한 민족>
하나님의 손짓에 아브라함이 응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을 시조로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 제사장 나라로 삼습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아들이 되어라!” 다윗언약(삼하 7:14a)
이스라엘 족속이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잘 하겠습니다. 공경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또 집을 나갑니다.
하나님은 또 외로워지셨습니다. 또 고독해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손길, 전 세계적으로 확장이 됩니다. 신약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지금 어떻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이스라엘이 가장 잘 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이 미국을 꽉 거머쥐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자금줄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행복하고 신나는 민족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보실 때, 지금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고독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전쟁 중입니다.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뭐라고 부르지요? “중동의 화약고”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불안한 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곳에 사는 이스라엘,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민족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역으로, 다른 나라, 이방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십니다.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아, 너희는 이제, 이방 민족 중에서 하나님이 이름이 크게 되는 것을 보아라!
그 모습을 보고 돌아오라! 그런데 이들이 돌아옵니까, 안 돌아옵니까? ~ 안 돌아와요!
구약성경만을 붙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속정>
유대인은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아랍 민족은 모하멧이라는 우상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두 민족이 세계의 근심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화약고”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곳은 중동이다.’ 세계인들이 입을 모읍니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 계십니다. 오 주여~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하나님이 400년간 침묵을 하셨으면,
유대인도, 아랍인도 깨우쳤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함으로써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목격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하여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사람에게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의지로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에덴동산을 폐쇄하시고, 하나님은 외로우십니다. 고독합니다. 자식이 떠났으니까요!
하나님을 등진 인간들, 하나님의 고독보다 더 지독한 고독에 빠졌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자식은 훨씬 더 힘들고 외롭고 고독한 현실에 맞닥뜨립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간의 사랑의 교제가 풍성하고 넘쳐납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로울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인생, 그들의 고통, 그들의 외로움이 가슴아픕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는 떠난 자식들의 고통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니 어떠냐? 더 외롭고 고독하고 힘에 부치지?”
“돌아오라!”
돌아올 겁니까, 끝내 안 돌아올 겁니까?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