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덕 시인의 시집 『와온에 와 너를 만난다』
책 소개
- 추천사
박현덕의 이번 시편들은 남도의 곳곳과 자연 만유에 마음의 발자국이 찍힌다. 그 마음은 외로움, 그리움, 슬픔, 아픔, 쓸쓸함, 절망, 기억, 눈물, 적막 등등의 상처인 바, 그 상처에 의해 풍경은 재구성된다. 이렇듯 마음의 풍경, 상처로 들여다보는 풍경을 체화
하는 시법은 전통 서정시의 제1원리다. 그만큼 그것은 근원적인 것으로, 그 근원적인 마음의 행로가 찍히는 풍경을 통해 "먼길을 끌고 왔던 생의 본질 추구에 천착하거나, "파도에 휩쓸린" 난파된 삶에 대한 자기 위로나 멘탈 정립, "눈물 버무리면 뼈만 남거
나 "부도난" 마음을 복원하려는 생의 의지 등을 격렬히 피력한다. 그 격렬함 속에 이따금 정제되지 않은 분노나 과잉된 슬픔이 터져 나오는 것까지 그의 시는 가장 정직하고, 진정성 있고, 성실한 인생론의 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우물」, 「눈 깜짝할
사이 가을은 오고」, 「저녁비」, 「숨비기꽃」 등등의 작품은 이 감상에 부합하는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의 이곳저곳에서 '독하는 시인의 고통들이 사회적 연대의 '건배'로까지 적극적으로 나아갈 때 그의 시적 진정성이 더욱 빛을 발하리라.
고재종 시인
약력
박현덕 시인
1967년 전남 완도 출생으로 광주대학교 문창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시조문학』 천료와 1988년 『월간문 학』
신인상에 시조가, 199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는 『겨울 삽화』, 『밤길』,
『주암댐, 수몰지구를 지나며』, 『스쿠터 언니』,
『1번 국도』, 『겨울 등광리』, 『야사리 은행나무』,
『대숲에 들다』, 『밤 군산항』이 있다.
중 앙시조대상, 김만중문학상, 백수문학상, 송순문학상,
오늘의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역류' '율격'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다.
e-mail poet67@hanmail.net
시인의 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듯
이렇게 마음을 추슬러
풍경으로 세운다
거친 삶,
드러내지 못한 채
무릎 꺾고 울었던 날들의
편린이여
풋잠 끝에 맞는 아침이여
2024년 봄날에
박현덕
와온에 와 너를 만난다 1
-노을
세상일 망했다고 무작정 차를 몰아
와온해변 민박집에 마음 내려 놓는다
나는 왜 춥게 지내며 덜컹덜컹 거렸지
해변을 걷다 문득 마파람 씹어 보면
바람에 쓰릿해져 누군가 생 펼친다
제 몸의 상처가 터져 걸어온 길 적신다
잔파도에 쓸려간 철새들의 발자국
무릎 괴고 숨어서 눈 붉도록 울고 나면
하늘을 미친 바람처럼 물고 또 뜯고 있지
* 와온해변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상내리에 있으며, 일몰이 아름답다.
진도에 내리는 눈
진도대교 건너자 와락 눈이 한창이다
울돌목 곡소리도 내 귀엔 들리지 않아
먼 길을 끌고 왔던 생, 길 따라 굳어지듯
남도의 끄트머리 그리움이 눈에 섞여
바다가 훤히 보인 죽림길 언덕 앉아
술잔에 파도를 담아 뭉친 가슴 풀어낸다
무장무장 눈 내려 칼바람에 베이고
어디론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중
나는 또 난파된 배처럼, 적막 하나 키운다
나를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 말레콘의 밤
긴 바람과 방파제를 기어오른 파도들
점점 더 여름밤에 럼주로 몸이 녹듯
노인 몇 라틴 음악에 기억을 풀고 있다
나를 너를 사랑하리, 가슴이 찢어지게
우르르 몰려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심장을 찌르는 시를, 읽어 주는 밤이여
말레콘에 기대 앉아 젖가슴 멍들게 한
영혼들을 꺼내서 파도 자락에 보내면
모질게 슬퍼하지 마 바람 겹겹 에워싼다
*말레콘 올드 아바나에서 바다를 따라 길게 이어진 방파제길.
모두가 잠든 시간
-소쇄원에서
수척해진 하루가 바람결에 짐짓 놀라
깊어진 상처들을 모두 풀어 놓는 밤
제월당 난간에 기대 그 어둠을 핥아 본다
미친 듯 비 퍼부어 계곡 쩍쩍 악을 써
빗줄기에 가리워진 흰 문장을 펼치면
비울음 내게로 와서 한 몸이 되는구나
한밤 내내 비질하는 소리들이 마음 적셔
숨어 있는 어둠을 끌고 나와 북 만든다
푸른 생 야위어 가는 그런 밤, 두드릴 거야
목포항, 마음에 비 내리고
겨울비 흩뿌리는 여객터미널 대합실
누군가 유리창에 써 놓은 자모들이
잊혀진 기억에 불 붙여 환상의 꽃 피운다
저녁놀은 아궁이 같아 마음만 둥글어져
달리도행 철선에서 남해를 응시한다
눈물이 새는 악기인가, 파도에 휩쓸린 삶
한껏 부푼 파도 위를 구름이 가다 말고
바다가 잉태한 섬을 허리 굽혀 바라본다
외딴 섬 흐릿한 불빛에 밤새 마음 젖는다
시월
잎 진다 마음 또한
툭 하고 떨어낸다
통증 달고 사는 일에
미칠 것만 같아서
바람에
귀 기울이듯
들창문 열어 둔다
발자국 소리 따라
쪽잠에서 깨어나
가슴속 통증 꺼내
바람에 씻어 내면
수척한
나의 영혼이
가을을 앓고 있다
해설 I
서정을 통해 발현된 절제의 미학
백애송 시인·문학평론가
박현덕 시인의 이번 시집 『와온에 와 너를 만난다』를 관통하는 시어는 '눈'과 '겨울'이다. 시인이 눈 내리는 겨울을 건너오며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인 슬픔과 그 슬픔 뒤에 감추어져 있는 희망이다. 슬픔은 상실과 결핍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로부터 단절된 경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슬픔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박현덕 시인은 이러한 슬픔의 정서에 과도하게 함몰되지 않고 감각적으로 사유하여 담담하게 보여준다. 방랑자처럼 떠돌며 직접 체험하는 장소와 사유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삶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하고, 삶의 한 단면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외로움과 쓸쓸함을 보여준다. 현재의 경험을 통해 그 정서의 결을 압축하여 충만한 언어의 현장으로 인도하는 박현덕 시인의 시에는 이 시대의 노동자, 홀로 살아가는 노인 등으로 고단한 현대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의 정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조가 지녀야 하는 율격을 지니면서도 그 안에서 최대한 서정의 본질을 자유롭게 보여주고
자 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지금-여기'의 순간에 집중하여 미래를 향해 뻗어 나가는 희망이 발견되는 충만한 현재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