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집 <중독자>의 시
마루에 앉아 하루를 관음하네
뭉게구름이 세상의 기억들을 그렸다 뭉갠다
아직껏 짝을 찾지 못한 것이냐
애매미의 구애는 한낮을 넘기고도 그칠 줄 모르네
긴꼬리제비나비 노랑 상사화 꽃술을 더듬는다
휘청~ 나비도 저렇게 무게가 있구나
잠자리들 전깃줄에 나란하다
이제 저 일사불란도 불편하지 않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꽃 덤불 속에 몰려오고
봉숭아 꽃잎 후루루 울긋불긋 져 내린다
하루해가 뉘였거린다
깜박깜박 별빛만이 아니다
어딘가 아주 멀리 두고 온 정신머리가 있을 것인데
그래 바람이 왔구나 처마 끝 풍경소리
이쯤 되면 나는 관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는데
귀 뚫어라 귀뚜라미 뜰 앞에 개울물 소리
가만있자 마음은 어디까지 흘러갔나
나비의 체중계
목욕 끝내고 날아왔느냐
산 호랑나비 표범나비 긴꼬리제비나비
저마다 몸무게를 달아보느라 수선을 떤다
나는 도라지꽃 저울 너는 구절초꽃 저울
휘청~ 바르르 르
꽃 체중계들 바늘 끝이 간지럽다고 몸살을 친다
종일 시선
키 작은 차밭에 내렸다
마당 앞 꽃 섶을 서성인다
너도 속이 탔더냐
돌 수조를 부여잡고 홀짝 둬 모금
날아온다
몰려간다 종일
새들이 머문 자리마다 내 눈이 따라갔다
언젠가는 아예 가서
오지 않을 것이다
가을악보
옛날에 진작 바닥을 친 몸
길바닥이 명당이다
널어놓은 햇살
노란 나락 위로
쩍쩍 가뭄처럼 갈라지고 굳은 살 박인
늙은 발바닥이나 고무래가
쓱 쓰억 썩 오선지를 그리고 간 자리
나뭇잎들 팔랑 툭 내려와 음표의 무늬를 놓는다
에프티에이, 쌀 전면개방
서툰 꼬부랑글자로 써내려가는
아픈 가을악보
체온
햇살이 조금 더 머물렀을까
힌 눈밭에 동백꽃 떨어졌는데
꽃도 체온이 있는가
떨어진 동백 주위 눈들이 녹아 있다
공동처럼 정지되었다
시각과 청각, 머릿속이 순간 텅 빈
내 모든 세포와 감각 기관의 작동이 멈췄을 것이다
햇살처럼 지켜봐주지 못했구나
나 누군가의 상처에 얼마나 등 돌렸었나
내 품 안 내주지 못했다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새들이 울다 가더니
붉은 꽃자리마다 뚝뚝 눈물이 흥건하다
그대를 위한 술안주
첫이라는 말은 얼마나 싱싱한가
첫눈, 첫사랑, 첫차, 첫 키스, 첫발자욱, 첫 첫 첫
첫서리가 내렸다.
별들이 어린 상추 잎 위에 밤새 떨지 말라고
호호 하얀 입김을 불어 놓았다
텃밭에 반짝이며 손짓하는 아기 손바닥
두레박 가득 은하수를 길어와 씻은
첫 상추 위에 늦가을 통통하게 살이 오른 햇살 한 점
노란 산국의 노래에 재워 타오르는 맨드라미 숯불 위에 굽고
매콤한 노을구름 한쪽과 소나무 숲을 흐르는
파란 바람의 미소 반 술로 간을 한 양념장을 찍어
한 입 가득 와삭와삭
그대를 위해 차리고 싶은 내 마음의 안주
중독자
익어가고 있다
햇빛과 달빛, 별들의 반짝이는 노래를 기다렸다
너무 격정적이지 않게 그러나 넉넉한 긴장과 두근거림이
휘감았다 마디마디 관통했다
사랑이었던, 슬픔이었던
너를, 당신을, 나를
거친 바닥에 깔아 무참히도 구긴다
비빈다 휘감아 뭉갠다
산다는 것 이렇게 서로의 몸을 통해
흔적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 퍽큐- 나를 더 뜨겁게 짓이겨줘
악을 써봐 제발 비명을 질러봐
어찌하여 상처가 향기로운지
이따금 틈틈이
모던한 멜랑콜리와 주렴 너머의 유혹이 슬그머니 뿌려진다
찻잎의 그늘이 깊어진다
어쩌면 고통,
어쩌면 욕망의 가장 먼 길 저 산 너머 끝자리
한 점 티끌이기도 거대한 중심이기도
지독하다 끔찍하다 너에게로 물든 중독
발효차가 익었다
우주의 고요 한 점 아침 찻잔에 띄운다
공중그네
강물은 흐른다
얼마나 고단한가 머물지 않는 삶이란
빗소리에 눈을 뜬다
단풍으로 물든 노란 석류나무 잎새 하나
거미줄에 매달려 빙빙 공중그네를 탄다
어지럽지 않니
뿌리박지 못하고 세상을 떠도는 것
누군가 나도 맴도는 쳇바퀴로 띄워놓았을까
재미있니
꼭두각시,
외줄의 생에 매달려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 내려가고 싶니
처마 밑에 쪼그려 앉은 낡은 햇살이
넝마 같은 제 그림자를 누덕누덕 깁고 있다
추적거리는 땅거미 내려와 야금야금 숨어들고 있다
황태와 나
얼었다 녹았다 눈보라 친다
흔들리는 명태들이 덕장에서 부풀어 오르기를 거듭하며
마른 빨래처럼 부드러워진다
춥다 비로소 겨울이 온몸에 전해온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데 찬바람이 머릿속을 뚫는다
등짝과 발가락 떨어질 듯 시리다
아프도록 이런 명징한 감각이 살아 있는
겨울을 다시 맞이했다는 것
느낄 수 있다는 것, 생명이라는 축복이겠지
아궁이 앞으로 돌아앉았다 바로 했다
나도 부드러워질 것인가
부드럽다는 것,
세상을 향한 눈과 마음과 손길이 따뜻해진다는 것이겠다
그 길로 향하는 한 걸음의 발길을 내딛는 것이겠다
나무물고기
나무물고기는 분홍빛 가슴에 산다네
사랑한다는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
그 물고기가 파닥거리며 강물을 뛰어오르고 있다는 거야
나무물고기는 별을 바라보는 두 눈에 산다네
마음속에 반짝이는 꿈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지
작은 꽃들에게 인사하고 싶은 것
새들의 노래에 손짓하는 건 말이야
그대 안에 나무물고기가 꿈틀거리며
랄랄라 휘파람을 불고 있다는 것이야
나무물고기는 따뜻한 사람의 마음 안에 살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을 일으키는 것도
자작나무숲에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도
네 안에 맑고 고운 마음들이
네 안에 나무물고기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이야
한 발, 첫 발자국
새의 노래를 듣기 위해 새장을 사지 않고
주머니를 꺼내 모이 그릇에 채워놓지 않고
한 그루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
향기로운 그늘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
꽃을 꺾어 창가에 놓지 않고
꽃씨를 뿌리며 그 꽃씨가 퍼져나가
세상을 물들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
제 몸의 온기를 나누어
쫓기고 지친 마음을 껴안을 수 있다면
한 뼘은 더 따뜻해질 것이다
우주의 시간이 빛날 것이다
새해 첫 마음 한 발, 첫 발자국,
내 안의 바로 너
나 또한 세간의 문을 열고 그 길에 한 걸음
내딛는 시작이기를
상추쌈 기도
상추쌈 한 입 싸서 먹다가
앗~ 기도가 빠졌네
삼키고 할까 하다가
세상에 어떤 것도 더 담을 수 없는
터질 듯 양 볼, 숨 가쁘도록 밀어 넣은
입안 가득한 기도를 드린다
텃밭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드리우던
초록빛 햇살이 찰칵 지나갔다
핀셋과 깡통을 들고 벌레를 잡던 아침이
샥- 스쳤다
비바람의 날이 쩍쩍 가문 날이
호미를 들고 풀을 뽑던 발자국 소리가
땀방울이 떨어지며 등줄기가 축축하던
고맙습니다^^
눈부신 생명의 시간들
『중독자』
- 지은이 / 박남준
- 펴낸 곳 / 펄북스
- 펴낸 때 / 2015년 8월
박 남 준
- 1957년 전라남도 영광(법성포)에서 출생
- 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 시집으로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풀 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중독자』 등이 있음
- 거창 평화인권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인터넷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