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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서적 다시 읽기]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오후에 택배로 이 책을 받아 단숨에 읽었다. 참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황님을 맞이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선출된 후 흰 제의를 그대로 입고, 모제타도 걸치지 않았고, 빨간색 구두도 신지 않았으며, 금제 가슴 십자가도 착용하지 않았고, 성좌에도 앉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 선출되면 걸맞은 예우를 받아들이는 게 상식이 아니랴? 전용 리무진도 타지 않고 동료 추기경들과 미니버스로 이동하시고, 소년원을 방문하여 발을 씻기고 그 발에 입을 맞추셨다. 칼 레만 추기경은 교황님의 모습을 보고 “가톨릭교회의 근본인 성경과 영성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라고 하였다.
새 교황님은 인자한 개혁가다. 교황직 수락여부를 묻는 질문에 “저는 이런 일을 맡을 수 없을 만큼 큰 죄인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를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며 교황직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가난과 청빈의 이름인 “프란치스코”를 선택하였다.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시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자들 앞에서 먼저 교황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하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발코니를 떠나면서 “…좋은 밤 되시고 편히 주무십시오!”라고 하셨다. 얼마나 정감이 있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소박한 말씀인가?
‘프란치스코’는 오랫동안 금기시하여 사용하지 않은 교황명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청빈과 평화의 수도자이자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여 보호하신 분이며 1224년에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을 받은 분이다. 성인이 설립한 수도회는 극단적인 청빈의 정신을 수도회의 기본적인 토대로 삼았으며 주님의 겸손한 자세를 본받고자 소외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병마와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이, 죄인과 신앙이 없는 이들과 함께 하였다. 초기 수도회의 형제들은 회색 수도복에 허리띠 대신 밧줄을 둘렀고 대부분 맨발로 생활했다.
복음화에 대한 말씀을 새겨보자. 가톨릭교회는 “단 하나의 신앙과 단 하나의 성사생활과 단 하나의 사도적 계승, 그리고 단 하나의 공통 희망과 단 하나의 사랑을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매우 아름답고 명확한 정의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해준다. 가톨릭교회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서 단일성을 지니며 성사와 직무에서도 단일성을 지닌다. 교회는 우리 형제자매가 함께하는 집이며 가정이다. 복음화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사도적인 열성을 포함한다. 사도는 ‘파견된 사람’ ‘보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고 다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분에게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분에 의해 파견된 사람들이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자기 자신 안에서 나와 죄와 고통, 불의, 종교적인 냉대와 배제, 사상, 온갖 비참한 현실 등으로 소외된 곳으로 나가도록 요청 받는다. 만일 교회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자기중심적이 된다면 교회는 병들게 된다. 이는 예수님을 자기 안에 가두고 그분이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게 막아 버리는 꼴이다. 그래서 교황은 교회가 ‘복음화라는 감미롭고 위안을 주는 기쁨’으로 사는 풍요로운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다른 종교로 발을 돌리는 이유를 가톨릭 공동체나 성당에서 친절한 분위기를 거의 체험하지 못하고, 미사전례가 너무 길고 이해하기 어렵고, 일상생활의 고민을 안고 성당에 갔을 때 관공서와 같은 딱딱한 분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사제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오지 않는 공소에서는 사제가 없을 때 남성 신자나 여성 신자가 ‘세례자’로 봉사하면서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세례를 준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닌 영성은 열린 마음과 실행력이 돋보임이 아닐까 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형제에게 해준 조언이다. “여러분,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만일 필요하다면, 말로도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그 증거로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목자와 평신도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서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면 말과 삶의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면 교회에 대한 신뢰는 약해지고 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람의 행위를 정의하고 요약하는 세 가지 말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들었다. 실례한다고 허락을 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넘어 뜨리면서 지나가고, 감사란 고귀한 영혼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므로 감사의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가치조차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죄송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이라는 최악의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며 용서를 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용서는 사랑의 실천이다. 일상의 생활에서 꼭 지켜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새로운 교황님의 모습을 본다. 교황님은 콘클라베가 끝난 후에 교황궁에 들어가 살지 않고 성녀 마르타의 집에 있는 작은 스위트룸에서 지낸다. 성 베드로 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교황궁을 둘러보며 “여기에 300명은 족히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셨다. 교황은 이 집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만난다. 바티칸에서 일하는 정원사와 미화원을 미사에 초대하기도 하고, 바티칸 직원들 옆에 앉아 개인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내가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청립 한국신학원장인 김 신부는 “세상을 위로하는 양 냄새나는 목자”로,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프란치스코는 하나의 강령”으로, 라이너 마리아 뵐키 추기경은 “교황님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로, 쿠르트 코흐 추기경은 “세계를 위한 비타민 주사”라고 하였다. 칼 레만 추기경은 “이제 교황님이 길을 나서는데 외로운 길이 되지 않도록 도와드려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도 하느님께 마음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비추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각오를 굳게 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신앙은 우리를 부르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형성된다. 정말 교황님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위르겐 에이바허 지음|신동환 옮김|가톨릭출판사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요한 23세 성인 교황
요한 23세 교황은 엄청난 파괴와 대학살로 점철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도좌에 올랐다. 그는 전후 파시즘과 나치즘의 잔재를 치워야 했으며 공산주의와 냉전, 핵무기 경쟁,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에 대처해야 했다. 요한 23세 교황은 소작인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풍년에만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는 가난한 농부, 조반니 론칼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소토 일 몬테의 농장에서부터 풍부한 자연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안젤로 론칼리(교황)는 로마 출신도 아니었고, 교회 내 중추세력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그가 교황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실용적이고 친절한 인물이었으며 기도와 숨겨진 선행을 통해 형성된 지적이고 아이러니한 유머를 갖추고 있었다. 안젤로 론칼리가 요한 23세 교황으로 즉위할 때 교황직이 과도하고, 특별한 일없이 그저 지나가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교황은 뛰어난 직관력으로 교회의 미래상을 그렸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고 회칙 〈지상의 평화〉, 〈어머니요 스승〉, 〈하느님의 영원한 지혜〉, 〈인간의 구원〉 등을 발표하였다. 1962년 타임지가 요한 23세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지적인 사람도 아니고 전문적인 신학자도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개념으로 생각하기보다 기본적인 인간의 체험으로 다양하고 유별난 삶을 겪으면서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놀라울 정도로 자기 것으로 흡수했으며 종합했다.”고 그 이유를 들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몇 개의 회칙을 정리한다.
1. 회칙 : 〈어머니요 스승〉에서
이 회칙은 ‘보조성의 원리’를 재확인하고 ‘사회생활의 발전’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경제정의와 사회정의 문제에 관한 회칙이다. 요한 23세 교황은 현시대에 상반되는 두 가지의 모순, 즉 극도의 빈곤과 기아로 인한 재화의 궁핍과 최근의 과학 기술의 진보와 경제 발전이 인류를 공포의 죽음과 파멸로 몰아가는 수단이 됨을 심각하게 지적한다. 또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고 한다.(248-253항) 사람은 그날(주일), 일상을 미루고 천상의 선익 추구에 정신을 써야 하며 하느님과 인간의 필연적인 불가침관계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의 내밀한 양심성찰에 그날을 바쳐야 한다. 인간에게는 노동을 멈추고 휴식을 할 권리와 필요가 있다. 매일의 힘든 노동으로부터 육신을 쉬게 하고, 품위있는 오락으로 체력을 회복시켜야 할 뿐 아니라 자기 가정의 일치를 보살피기 위해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가족이 화목하고 평화로운 공동생활을 하기 위해 요구하는 것이 바로 가정의 일치다.
2. 회칙 : 〈지상의 평화〉에서
이 회칙은 요한 23세 교황의 여덟 번째, 그리고 마지막 회칙이다. 이 회칙은 질서와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을 본따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들 사이의 질서, 즉 세계평화를 위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상의 평화 마지막 부분에서 교황님은 그의 형제자매들에게 평화를 지향할 것을 당부한다. “사실 개인들 안에 평화가 없다면, 곧 각자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상의 평화>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감탄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청 사람들은 공의회 소집에 부정적이었다. 1962년 7월에 바티칸은 공의회에서 심의할 사람들에게 2,850장의 초청장을 보내고 10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공의회 개막 일주일 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을 맞아 성인의 무덤과 로데토의 성모의 집을 들러 공의회가 성공적으로 열리길 기도하면서 “내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오늘”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교황은 미사전례에서 “교리의 통찰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모든 이의 형제적 일치에 이르는 열쇠는 사랑과 자선”임을 강조하였다. 첫 회기가 끝났지만 전례, 교회 일치 운동의 범위, 진정한 평신도의 역할 등은 결정되지 않았다. 그 후 바오로 6세 교황의 지휘 아래 전례 등 8개 영역을 다루는 공의회로 거듭나게 된다.
4. 참으로 인간적인 교황
교황님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수년간 불가리아와 파리 등에서 주재 외교관으로 생활하였다. 터키에서는 수많은 유다인의 집단수용소 이송을 지연시켰고 2만 4천명의 목숨도 구하였다. 파리연회에서는 무례하게 여자 누드사진을 내밀고 히죽히죽 웃는 남자에게 “사모님인가 보죠?”라는 유머로 응대하기도 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암 투병을 하시면서 비서인 카포빌라 몬시뇰에게 “주교답게, 교황답게 죽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나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렸다. 임종 때 “나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죽을 때도 가난하게 죽을 수 있으니 매우 기쁘다.” 그리고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베드로 사도가 한 말)”라고 하셨다. 서거 후 38년 만인 2001년 6월 3일, 성 베드로 대성전 밑 지하실의 개장의식에서 관을 열었을 때 육신은 놀랄 만큼 부패되지 않았고 ‘온전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으며 이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은총과 성덕이 일치함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하였다. 요한 23세 교황은 2000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그 지방의 언어로 그 지방의 문화적 특성을 지닌 미사가 집전된다. 우리는 50여 년이 지났어도 교황님의 손길을 미사에서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지 아니한가? 요한 23세 교황님은 겸손하고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강한 의지력, 개인적인 외교력 등을 통해 교회의 핵심적인 교리를 온전히 보존하면서 그가 사랑한 교회를 구했으며 교황이 남긴 포용과 개방이라는 유산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임종이 가까웠을 때 조카에게 “십자가를 가리지 말라.”고 한 말씀이나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이 마지막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한다. - 《요한 23세 성인 교황》, 그렉 토빈 지음 / 허종열 옮김 / 가톨릭출판사
[신심서적 다시 읽기] 그래, 사는 거다!
《그래, 사는 거다!》는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제로 산다는 것’ 등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씩 자기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끔은 고민한 적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삶 주변에는 훌륭한 분들이 적지 않다. 회자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들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자기를 던진 사람들이 아니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삶의 이유를 더 깊이 묵상을 하게 된다. 결국 ‘신앙인의 일생이라는 것은 외롭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을지라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내어주는 삶’임을 깨친다. 몇 가지 묵상자료를 정리해 본다.
하나. 사랑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생활에서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가 ‘사랑’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개념이야 쓰임에 따라서 조금은 다르겠지만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가족사랑, 남녀 간의 사랑, 자연 사랑 등 가볍지 아니한 것들이다. 수도자의 얘기에 웃음을 짓게 한다. 아주 규율이 엄격한 수도원에 있는 요한 수사님의 얘기다. 수사님의 조그만 책상머리에 붙여놓은 아름다운 중년 여인의 사진을 보고 한 수도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마이 비러브드(my beloved, 사랑하는 여인)”라고 했단다. 수사님이 50대 중반을 지날 무렵 병으로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을 때 간호해 주던 간호사란다. 더 이상의 얘긴 듣지 못했지만 하늘나라에 간 천사 같은 그 간호사를 잊지 못하고 사진을 걸어둔 아름다운 그런 감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때로는 스캔들처럼 보일지라도 세상의 모든 사랑은 우리의 삶을 흔들어서 성장시키고 아름답게 만들고 있지 아니한가?
둘. 나이 듦의 삶에 적응하는 길은? 우리 인생의 오전은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외부 세계에 나아가 자리 잡고 활동하는 시기라면 인생의 오후는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소중한 기억과 내적보화를 발견하는 시기다. ‘정오에서 해질녘까지의 시간은 인생을 숙성시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진정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도 젊음도 아니요, 바로 가슴 속 맑고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살아있는 감성,즉 좋은 글 한 줄 읽고도 행복해 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가슴 속 쌓인 이야기를 풀어보고, 달빛 밤하늘을 바라보듯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 하고 부르며 기도하며 사는 일들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지 아니하는가?
셋. 무엇을 청할까? 낡은 배낭에 쌀 한 봉지, 김치 한 통을 넣고 순교성인들의 신앙답사기인 ‘한국의 성지’를 손에 쥐고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어서!’ 한 달간의 긴 여행길에 오른다. 여행은 끝났지만 아무런 응답도, 영감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긴 여행은 피곤에 지친 몸과 실망스런 마음만을 안겨 주었다. 세월이 숱하게 흐른 지금, 하느님께서는 내 삶 속에 들어와 구체적으로 이끌어 주심을 알았다. 길을 잃으면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 길을 안내 받았고, 추위와 허기에 지쳐 있을 때면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침묵의 하느님은 묵묵히 제 삶 속에서 하나하나 응답해 주고 계셨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긴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지 않으려 한다. 그저 어디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 가난한 순례자의 삶을 사는 그런 사제가 되길 청하겠다고 했다. 우리 신앙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가당치도 않은 것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넷. ‘걷는다.’는 것의 의미는? ‘사려니’는 ‘살안이’, ‘솔안이’에서 온 말로 ‘신성한 곳’을 말한다. 사려니 숲길은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신령한 느낌을 주는 밀림이다. 올레길, 둘레길은 이동이나 운송 수단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걷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이런 길은 현대인의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진정 걸어야 할 인생길을 걷도록 하는 데에 숨은 의미가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예찬’에서 길을 걷는 것은 시선을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공간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난 길을 찾아가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깊이 음미해 보자.
다섯. 영성의 정상엔 무엇이 있을까? 산악인 허영호 씨가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을 때의 순간의 느낌이다. “사투를 벌이며 올라간 정상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탁자만한 초라한 봉우리와 칼바람뿐이었다.”고 한다. 우리 영성의 산꼭대기는 어떨까? 온갖 사욕편정에 물든 자신의 욕망과 자존심과 이기심이 죽고, 마침내 자신의 전 존재가 십자가에 매달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는 곳, 그 자리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영성의 최고봉이라면 과연 절대고독의 경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섯. 내 인생에서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는 것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평생 죽음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는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단다. 죽음의 궁극적인 물음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 삶의 끝자락에서 하느님께서는 ‘네가 선택한 삶이 옳았느냐?’가 아니고 ‘그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신다. 사회학자 토니 캠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루지 못한 업적을 바라보며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고 사랑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삶을 묵상하며 푸른 하늘을 본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에 가까이 가는 길이다. 우리가 만일 살아가는 이 삶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활동도, 삶 자체도 공허와 죽음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를 전적으로 버리면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니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며 청해야 하지 않을까? - 《그래, 사는 거다!》 / 전원 신부 지음 / 바오로딸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너무 깊이, 너무 오래 감추지는 마세요!
이 책은 한국인 선교사제로서 처음으로 멕시코에 파견되어 유카탄반도에 위치한 캄페체교구 성 프란치스코 본당 공동체의 책임을 맡아 주님께서 허락하신 작은 체험과 깨달음을 모은 영성 에세이다. 문화풍토가 다른 나라에서 선교사제의 삶과 그 신앙, 그리고 우리 신앙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 말한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40도가 훨씬 넘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가정방문을 마치고 성당으로 돌아오는데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렇게 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 축제인가?”라고 말한다. 그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고개가 숙여진다. 하느님과의 더 깊고 성숙한 만남을 위해 잠시 하느님을 마음속 어느 조용한 방에 꽁꽁 숨겨두신 형제자매님들과 내가 신부가 되어 어린 시절 가장 무서워했던 뱀과 뱀들의 땅(캄페체는 뱀을 뜻하는 ‘아킴’과 진드기를 뜻하는 ‘페츠’에서 기원된 지명이다.)에 와서 사목을 하고, 형의 야구 글러브가 탐이나 그걸 사려고 오랫동안 비자금을 모아 아무도 모르게 쥐가 다니는 천장에 너무 깊이, 너무 오래 감추었다가 흔적도 못 찾고 잃어버린 쓰라린 추억을 나누고 싶다고 하였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사제의 삶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이라는 필연을 앞에 두고 좀 더 자연스럽게 인생의 희로애락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항상 죽음을 묵상하면서 살아가란다. 장례미사를 집전하면서 자녀들에게 “마지막으로 관 뚜껑을 열어젖히고 아버지의 눈, 코, 입, 그리고 나머지 모습 하나하나를 잘 새겨 놓으라고 이른다.” 얼마나 절실한 가르침인가. 냉담으로 장례미사를 거절한 그곳 사제들에게 “죽음 앞에서 소속이 뭐가 그리 중요하고, 냉담 몇 십 년 한 것이 뭐 큰 걸림돌이 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식도 없는 선교사제 셋이 모여 자기가 키웠던 강아지 자랑에 열을 올리는 난감한 상황을 팔불출의 행진이라고 해학을 편다. 그리고 사제로서의 삶은 항상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 바깥에는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릴 뿐이다. 살아 있을 때 해야 할 그 무엇을 묵묵히 실행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감추어 놓은 하느님을 찾는 신앙인의 삶”
“일주일에 한 번쯤이라도 우리의 영혼을 위해 성당에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주님의 현존과 귀를 막아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주님의 음성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고,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밝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생각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깊이 박힌 욕심들을 들어내고 그 자리를 그대로 비워 두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신앙생활을 몇 십 년 하셨다는 분도, 1년 365일 평일미사를 거르지 않는다는 신자 분을 만나도 마음을 잘 다스리는 분들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그리고 “몸에서 나는 냄새 말고 삶에서 나는 냄새도 있다고 한다. 언행이 바르고 단아하여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행이 불일치하고 어지러워서 말할 때나 행동할 때마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반성하란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영혼을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마음공부를 어떻게 하고, 우리 언행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 만큼 다음의 부정의 방법론인 세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라고 한다. 첫째,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하지 않는 것. 둘째,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하지 않는 것. 셋째,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을 갖지 않는 것.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실천한다면 단순하고 경쾌한 삶을 살아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나를 버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다.
“사랑을 설명한 글”
중학교 1학년인 몬세는 주교관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를 따라와 자주 일을 돕는다. 병으로 집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맛있는 음식의 유혹을 참아내고 자기 몫인 소시지와 소고기를 소중하게 싸서 아버지께 갖다드린다. 비닐봉지 안에서 심장처럼 뜨겁게 살아서 펄떡이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죄를 짓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그 지은 죄에 대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느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회와 용서가 필요하단다.
판치토 노신부님이 죄인임을 자처하며 젊은 사제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도움을 청하는 고해의 모습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없는 감동과 배움을 얻었다고 했다.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내 남편과 다른 사람의 남편을, 내 아내와 다른 이의 아내를, 내 아이와 다른 이의 아이를 절대로 비교하지 말라고 한다. 비교하는 순간 공정치 못한 기준에 따라 그릇되게 우월이 가려지게 된다.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훨씬 부드럽고 풍요해진다고 하였다.
어느 날, 구걸하는 늙은 여인이 햄버거를 받아들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바카디(사탕수수를 증류해서 만든 독한 럼주의 일종) 한 병만 사 달라.”고 했다. 여인은 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것 같아서 “술은 절대 안 된다.”고 말은 했지만 “추워서 도저히 잠을 못 잔다.”는 말에 걸려 별 생각을 다 하다가 한 병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주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주님!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여쭙는다. 인간으로서의 어려운 고뇌 끝에 내린 최후의 결정이 아니었을까? 선교사제의 삶이 어찌 쉬우랴. 사랑과 연민으로 떠난 수난과 죽음의 여행은 빈 무덤처럼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우리 마음에서 부활로 이어진다며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떠나라!(루카 10,3 참조) - 《너무 깊이, 너무 오래 감추지는 마세요!》, 최강 신부 지음, 가톨릭출판사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는 2014년 11월의 신심서적 읽기 선정도서다. “일용할 사랑을 주십시오”(1장), “사람을 사랑하는 신앙”(2장) 등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황님께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과 미사강론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침들을 제시해 준다.
우선 책의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꼭 명심해야 하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 아닌가 싶다. 담화는 사전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음을 말한다.’ 뒷담화(뒷땅)는 담화와 우리말의 뒤(後)가 합쳐서 만들어진 말이다. 보통 남을 헐뜯거나, 듣기 좋게 꾸며 말한 뒤에 하는 대화 또는 그 말이다. 흔히 우리가 남에게 욕하고 싶을 때 떳떳이 그 대상 앞에서 하지 못하고 대상이 없을 때 혹은 대상이 듣지 못하게 욕을 하는 행위로 풀이한다. 뒷담화는 사람들의 명성을 헐뜯고 사람을 해친다. 속담에 ‘세치 혀가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있지 아니한가? 우리 모두가 뒷담화를 하고자하는 욕구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 종국에 가서는 모두 성인이 될 것이라고 한다. 참 희망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바른 삶을 위한 몇 가지 말씀을 묵상하며 간추려 본다.
첫 번째는 이 사회의 병폐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날이 갈수록 무례함과 뻔뻔함, 그리고 몰염치함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 타인을 자신과 동등하고 고귀한 존재로 인정해 주는 예의와 배려, 고마운 것에 진정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 잘못한 것에 대해 순수하게 인정하는 사과로 참된 평화와 사랑을 지키는 세 가지 말을 알려주신다. 첫 번째, “해도 될까요?”, “내가 할 수 있을까요?”와 같은 존경과 관심을 지니고 타인의 삶 안에 들어가기 위한 정중한 부탁을 한다. 두 번째, “고마워요.” 내 옆에 있는 이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아는 것은 그 삶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고맙다.”는 말을 하며 살자. 세 번째, “미안해요.” 이 말은 우리의 삶 안에서 많은 실수를 할 때 쓰는 단순한 말이다. 이 세 마디 말을 생활화하면 우리의 삶에서 서로에게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가르친다.
두 번째는 바른 직무 사제직을 위한 조언이다. 사제가 되어 깊어진 직업병이라면 남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려는 습관을 들 수 있다. 어찌 보면 남들을 어떤 기준에 따라 재단하고 판단하게 된다. 사랑하는 이웃, 친구, 가족에게 잘못된 점, 고쳤으면 하는 점을 알려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난도질이자 뒷담화일 뿐이다. 제5계명에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 21-22)라고 하지 않는가? 단순히 이웃의 생명에 대해서 폭력을 써서도 안 되지만 분노의 독을 쏟아 내거나 험담이나 상처를 입혀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뒷담화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해친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들과 평화롭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진실할 수가 없다. 모든 계명은 사랑의 요구이자 보다 큰 계명으로 모두가 하나 됨을 향하는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제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여라.”(마태 22,37-39)는 우리 공동체의 삶에서 지켜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세 번째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각 구성원에게 말씀하신다. 사제들에게는 전례와 기도 안에서 주님께 가까이 가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사랑하여라. 젊은이들에게는 청춘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니 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희망을 품고 도전하여라.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가족이란 하나의 가정교회임으로 예수님이 점점 커지고, 부부의 사랑과 자녀들의 생명 안에서 점점 커지도록 하여라. 환우들과 장애우들에게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형제자매들과 몸이 불편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수난의 기름부음을 받은 형제자매들이니 자신의 십자가와 삶의 어려운 순간 속에서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임을 생각하라고 이르신다. 어르신들에게는 우리와 교회의 지혜이니 우리에게 우리 사회의 기억과 교회의 기억과 기쁨의 의미를 전해주길 바라신다. 일이 잘 안된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투정도 하지 말고 성령께 기도하고, 해결해 달라고 의탁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네 번째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의 매듭이 꼬여있으면 그것을 스스로 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풀지 못하는 것이라면 풀어달라고 청하라 한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56항)고 하였다. 성모신심의 첫 번째 요소는 성모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매듭이 풀린다는 사실이다. 성모님은 어머니의 손길로 우리를 자비로운 아버지의 품으로 이끄신다. 또 베드로 광장의 설교에서는 교황님은 생명의 복음을 말씀하셨다. 희망과 사랑과 빛의 복음을 증언하라고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양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고 닮으라 하신다. “어린양은 지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순종한다. 어린양은 공격하지 않고 평화롭다. 어린양은 자신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도 발톱이나 이빨을 보이지 않고 견뎌낸다. 그래서 어린 양은 예수님임을 알게 하지 않는가?”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이가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뒷담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일상을 바로잡아 한 걸음씩 성인의 행로를 걸어야 하리라.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평화가 물같이 흐르게 하자. -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진슬기 신부 옮겨 엮음, 임의준 그림, 가톨릭출판사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이 책은 김수환 추기경 외 17분의 성직자가 쓴 어머니를 회상한 이야기다. 평범하고 편안한 삶을 버리고 봉헌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인내와 사랑없이는 불가능했던 일들이 많았음을 사제들은 이제야 알았다고 고백한다. 어머니! 참으로 정겨운 이름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얘기들이다. 김 추기경님은 우리 어머니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어머니라 하셨고, 임 알렉산데르 신부님은 ‘눈물 젖은 빵맛’을 얘기하셨고, 조 타대오 대주교님은 후회하지 않으려고 어머니의 ‘기도문’을 적었고, 김 시몬 신부님은 밤새 ‘양팔 묵주기도’를 바치는 어머니를 보고 회심을 하였고, 오 루도비코 신부님은 사제수품 선물로 배냇저고리를 받고 우셨다고 한다. 사제 어머니들의 공통점은 기도로 사신 점이 아닐까 한다. 그 절절한 이야기를 다 전하지 못하고 그중 몇 이야기를 줄여 옮긴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내게도 우리 조국 한국이 으뜸이고, 우리 어머니도 세계에서 으뜸가는 어머니이다. 우리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크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산과 들을 헤매는 착한 목자의 사랑과 다를 바가 없다. 큰 형이 20대에 집을 나가 일본에 있다가 다리에 큰 화상을 입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곧바로 주소 하나만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일본 말은 한 마디도 모르시지만….) 형을 데려와 약을 만들어 먹여 살렸다. 떠나시던 날에는 중풍으로 누워있던 병상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들고 성당에 가서 그 십자가를 손에 꼭 잡은 채 성로신공(십자가의 길)을 다 했고, 때마침 기도하고 있던 나이 든 사제에게 다시 한 번 총고해를 한 후 집에 와 저녁을 잘 들고, 그날 밤에 조용히 돌아가셨다.
임희택 알렉산데르 신부의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심순덕 시인의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의 내용 일부이다.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 엄마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찬 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 ……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 아! /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쫓겨나 배도 고프고 무섭기도 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먹을 것을 찾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살며시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내밀어보니 어머니가 방문 앞에 빵을 사다 놓았다. 난 그날 ‘눈물 젖은 빵 맛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꾸역꾸역 그 빵을 먹었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느님과 같은 맘으로 날 사랑하고, 하느님처럼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지만 나의 작은 사랑과 관심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리라.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의 ‘강림공소 팔남매 이야기’
부모님은 저희를 엄격하게 키우셨다. 반찬투정을 하거나 동생이나 형과 싸우다가는 “너는 내 아들 아니다. 당장 나가라!”는 어머니의 매서운 말씀을 들으며 쫓겨났다. 쫓겨난 아들은 골목을 서성대다가 어머니 몰래 담을 넘어 들어와 가만히 솥뚜껑을 열어 보면 따뜻한 밥이 한 그릇 담겨 있었다. 그 밥은 물론 어머니가 밖에 쫓겨난 아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엄마는 올해 93세로 치매를 앓고 있는데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한테 배운 기도만 기억하고 있다. 오늘 이 기도를 잊으면 후회가 될 것 같아서 적는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아침·저녁 기도와 식사 전·후 기도를 모두 이 기도로 바치신다. 사제성소도 부모님의 믿음과 기도 덕분이 아닌가 싶다.
김강정 시몬 신부의 ‘피에타 상의 성모님처럼’
사제직을 포기하려고 술에 절어 만취상태로 집으로 돌아와 울고 또 울었다. 엄마는 나를 가슴에 끌어안고 말없이 등을 쓸어주었다. 마치 피에타 상의 성모님처럼….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더니 안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무릎을 꿇고 양팔을 든 채 묵주기도를 바치며 울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엄마는 눈물의 밤 기도를 봉헌하고 있었다. 어쩌면 몹쓸 아들을 위해 평생 저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오세민 루도비코 신부의 ‘어머니가 주신 선물 보따리’
사제품을 받고 첫 부임지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내게 사제수품 선물이라며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임지에 가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풀어보라고 하셨다. 그 선물 보따리를 풀어본 나는 어머니의 깊고 깊은 사랑에 목이 메어 한참을 울었다. 그 보따리 안에는 장롱 깊숙이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던 내 갓난아기 적 배냇저고리들과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당신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책을 읽고 나서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불현듯 어머니가 그립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하숙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러 보따리를 들고 40리 길을 걸어서 하숙집에 오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직장을 가지고도 연락을 하면 엄마는 늘 고샅길에 나와 계셨다. 힘 빠진 주먹으로 아들의 가슴을 치던 머리가 허옇던 어머니! 그리고는 국수와 묵을 내오셨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다. 어느 어머니인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다르랴마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은 그 사랑을 가슴에 묻는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신심서적 다시 읽기] 《세상 속 신앙읽기》 - 복음적 삶을 위하여
《세상 속 신앙읽기》는 2014년 2월 선정도서이다. 이 책은 네 개의 장(1. 세상 속 나, 2. 세상 속 하느님, 3. 세상 속 교회, 4. 세상 속 사람들)으로 나뉘어 있고 각 장의 끝에 신학 에세이 한 편씩을 실었다. 글을 열면서 “신앙, 그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말,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나한테 익숙한 삶에 변화를 추구하는 힘든 도전일 수 있지만 내가 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제3의 눈’을 갖는 아름다운 체험”이라고 적고 있다. 또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서도 진주를 발견하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며,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는 영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늘 자신에게 하는 물음이 있다. “당신은 신앙인인가? 그리고 당신은 진실한 신앙인인가?” 젊은 시절, 자신의 판단만을 믿고 멋대로 살아온 걸 후회하면서 40대 중반 늦깎이로 신앙을 가졌다. 그것도 성당에서 하는 교리공부가 부담스러워 통신교리를 하고 보충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구색만 갖추고 주일미사에만 나가는 신자생활을 하였다. 그게 마음에 걸려 보속하는 마음으로 정년퇴임 후 13년 동안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교사로 봉사를 한 이유의 하나다. 어느 날, 집 앞 재래시장에서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줍는 남루한 차림의 한 아주머니가 기쁨에 찬 모습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참, 기쁘게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껏 주일미사에 나가고, 1년에 한두 번 성사생활을 하면서 필요할 때 형식적인 기도를 바치면 그게 옳은 신앙인인 걸까?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경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퇴근 후 어버이 성경학교에 다니고, 그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에서의 과정도 수료하였다. 성경공부를 시작하고부터는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세상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얕은 지적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을 배우라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그 뒤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과정을 끝내고 해당 성경의 내용을 개괄하면서 3년여에 걸쳐 필사를 완료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 짧은 지식으로 내용을 개괄하였으니 무식한 소치가 아니었나 싶다. 성경을 읽거나 필사하는 이유는 ‘삶의 변화를 모색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삶이 달라져야 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엉뚱한데 마음을 쓴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김 추기경님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하러 기차를 타고 가시는데 차내 복도에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는 소리를 듣고 ‘인생은 계란’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일화가 웃음 짓게 한다. 진리라는 게 멀리 있는 게 아닌가 보다. 하느님 없이 산 날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잘 모르지만 부활신앙이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앎의 갈증을 이 책이 조금은 풀어준 것 같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일화를 생각한다. “모래 구덩이를 파고 조가비로 바닷물을 떠 채우면서 바다를 옮기겠다.”는 꼬마의 말. 어떻게 그 신비가 쉽게 이해가 되랴.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고 당연한 것임을 늦게야 깨닫는다. 신앙인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을 없애주시기 보다 오히려 그런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짊어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분이심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 신앙인이 찾는 여정은 하느님을 닮은 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여정이 아닐까?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폭력과 불의의 혼탁함 속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갖는 것이라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연 속에서, 토마스 모어는 세상 권력의 불의 앞에서조차 하느님은 살아계시고 인간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조화롭거나 아름답지 않고, 창조주 하느님께서도 고개를 돌리실 정도라고 한다. 어두움과 무질서, 혼돈과 파괴가 세상을 뒤덮고, 살인과 자살, 폭력과 전쟁, 환경파괴와 자연재앙, 이른바 죽음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가 기세를 떨치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우리 삶이 어떤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나의 신앙은 하느님 없이 사는 날은 없는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정작 나의 십자가는 외면하지 아니 하는가? 혀끝으로 전달되는 신앙은 결코 타인을 움직일 수 없다. ‘하느님의 몽당연필이 된 마더 테레사, 수단 톤즈에서 믿음과 사랑을 전파한 이태석 신부’는 자신의 복음적 열정을 삶으로 보여준 분들이 아니었을까?
기도하는 삶은 아름답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성호를 긋고 짧은 감사기도를 바치는 사람,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고 짧은 성호경을 바칠 줄 아는 사람, 식사 전후에, 사람을 만나기 전에, 버스 안에서, 책상 앞에서, 거리를 걸을 때조차도 속삭이듯 하느님께 화살기도를 바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한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기 이전에 하느님이 내 삶의 중심에 계신지 반성해 보자.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결단이란다. ‘믿음이라는 인격적 행위에 뿌리를 둔 신뢰에 찬 결단임을 생각하자. 삶의 어두움과 두려움,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신뢰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가 샘솟아 오른다.
이 책에서는 부활신앙, 성령, 삼위일체의 신비,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등을 설명하고 있다. 모두가 ‘쉬운 신앙은 없다.’는 가르침에 따라 자신부터 복음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도 늘 함께 하시고 힘을 더하여 주시리라. 신앙은 생각이나 말뿐이 아니라 내 삶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신학 에세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에서 “신앙인이란 땅을 밟고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삶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다.”를 깊이 음미하면서 살아가야 하리라.
-《세상 속 신앙읽기》, 손용민 지음, 바오로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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