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부흥운동 4
(계 9: 16-17)
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계속하여 “대 부흥운동”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영적 부흥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일어날까요?
10. 이 부흥의 역사는 불가항력적인 위력을 지닙니다.
16절에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했습니다. 여기 “마병대”란 말 탄 기마병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신속함과 막강성입니다. 그래서 옛날 전쟁 때에 수 천 수 만의 기마병이나 전차부대들이 그 위력을 이용해서 적진을 돌파하거나 양분해 놓고 깔아뭉개기도 했습니다.
동양에서는 몽고의 징기스칸의 기병이 유명하죠. 징기스칸의 군대는 100%가 기마병이기 때문에 먼 목표를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적을 만나면 멀리서 화살로 집중해 혼란에 빠뜨린 다음 노도광풍 같은 기마전으로 초토화시켰는데 몽고군은 복장이 가볍고 마상무예가 뛰어나서 일반 보병들 여럿을 상대할 수 있었고 찌르기 위주의 유럽 기마병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효가 이만만입니다. 이만만이면 2억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병대의 일차적인 뜻은 그 위력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만만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만만을 말하면서 특별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들었다고 하는 것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치 다윗이 승전하고 돌아올 때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했던 그 만만입니다. 그 소리를 다윗도 듣고 사울도 들었습니다. 안 들었으면 좋은데 사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백성들이 나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너에게는 만만을 돌리는구나 그렇다면 네가 차지할 자리는 내 자리 말고 또 무엇이겠느냐 하면서 그 날부터 다윗을 원수로 삼고 매일 군대를 이끌고 다윗 사냥에 나섭니다. 그것이 사울이 존재하는 목적 정도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만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만이라면 만 곱하기 만 일억인데 다윗이 일억을 죽인 것은 아니잖습니까? 만만의 정확한 의미는 셀 수 없이 많다는 무한충만수입니다. 다시말해서 이만만이란 2억이라는 숫자라기보다 그 숫자가 갖는 의미 즉 막강하고 막강하여 무한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만만의 2는 무엇입니까? 2는 증인이나 증거의 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충만수와 함께 생각하면 증거의 무한 충만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부흥이 임하시면 아무도 막지 못할 강하고 충만한 복음의 증거가 일어날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요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요15:26).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사도들이 그랬고 거기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그 일을 하지 못하게 옥에 가두고 매를 때리고 온갖 위협으로 막으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열심 하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사도들을 잡아 옥에 두었더니 하나님께서 풀어주셔서 나가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행5:18-25에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는 막강한 복음증거로 나타납니다. 이 전도 앞에 하루에도 3천 4천 5천이 회개하고 예수 앞에 돌아왔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능력이었습니다.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이렇게 위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 만수위에 도달한 거대한 댐이 터질 때의 위력과 같이 혹은 이만만의 마병대의 질풍노도 같은 질주와도 같이 상상할 수 없는 영적 위력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랬기에 순식간에 예루살렘을 복음화시키고 나아가 사마리아가 복음화되고 안디옥과 아시아와 유럽이 복음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막16:20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현대에는 기적이 있네 없네, 은사가 있네 없네, 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지는 못할망정 있네 없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입니까?
성령을 알지 못한 주장입니다. 잘못된 것은 지적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잘된 것까지 부정한다면 하나님의 종들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성령의 부흥이 임하면 예수의 복음은 이만만의 마병대처럼 막강한 위력과 급격한 속도로 온 땅에 전파됩니다.
11. 부흥의 역사는 그 어떤 것도 다 이기는 능력입니다.
17절에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요한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16절의 환상은 멀리서 본 환상이라면 17절의 환상은 좀 더 가깝게 볼 수 있도록 마치 카메라의 렌즈를 줌인(zoom in) 즉 확대하거나, 부분적으로 더 명확히 볼 수 있도록 스포트라이트(spotlight)하게 비춰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여주시려고 렌즈를 줌인하고 조명을 터드려 보게 하셨을까요? 먼저 무엇을 보았습니까? 요한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병들의 가슴에는 가슴을 보호하는 호심경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 호심경은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호심경이 무엇입니까? 소중한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입니다. 가슴이 중요한 것은 심장을 비롯해서 중요한 기관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심경이라. 영적으로는 마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의학에서는 마음은 뇌에 있다고 말하지만 신앙적인 견해는 다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슴에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특히 심장과 관련이 큽니다. 그래서 심장의 강약에 따라 마음이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혹은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조그만 일에도 놀라고 마음이 하루에도 12번도 바뀔 수 있습니다. 무슨 뇌를 치료합니까? 심장이 약하면 놀라고 자꾸 울거나 웃으며 우울할 때 심장을 치료하면 고쳐집니다. 그런데 호심경이 있으니 이기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호심경이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은 모두 전쟁의 색이요, 이 색깔이 가슴에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은 무수한 전쟁을 치렀고 강한 마음으로 그것을 모두 이기어 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불빛이 났음은 무수한 불화살을 이겼고, 자줏빛이 있음은 피의 색이듯 수많은 적군들의 창칼을 이겼으며, 그리고 유황빛이 있음은 전쟁의 화약을 경험했고 이겼음을 뜻합니다. 옛날에도 유황을 전쟁에서 많이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호심경 즉 심장으로 가슴으로 즉 마음으로 이겼더라.
이처럼 부흥 운동이 임하면 우리 마음에서 온갖 이기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즉 불화살을 이기듯 세상 이론과 생각을 이기고, 자줏빛이 나듯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자행자지하며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이기고, 유황빛이 났듯 소돔 고모라가 심판 받듯 세상을 심판하며 그 유혹을 다 이깁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의 가슴이 중요합니다. 겹겹으로 보호된 마음이어야 합니다. 가슴에 흉갑이 없는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서 여기저기 눈치 보거나 남의 말을 의식해서 일을 못합니다. 마음이 약하니 상처를 받고 또 일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젠 의의 흉갑을 붙이고 어떤 비난도 공격도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세요.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이 호심경을 병사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탄 말까지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말이 다치면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안전한 호심경을 입었으니 말의 움직임은 조금도 거침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기동케 하시는 성령의 특성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말씀으로 변화 받은 성도일 뿐 아니라 성령의 거침없는 기동성에 사로잡혀 움직이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즉 육이 아닌 영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새로워지고 강해져서 성령의 흐름 따라 나도 이기고 죄도 이기고 박해도 이기면서 모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흥운동은 내부적인 장애나 외부적인 어떤 방해라도 결코 막을 수 없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의 환상 가운데 본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은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마병대와 같이 불가항력적인 믿음을 갖게 되고 말과 그 위에 탄 자 같이 어떤 죄나 장애도 다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환경이나 그 누구를 탓하지 말고 성령 충만 하지 못한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 성령의 부흥이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더욱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