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지 못한 하나님의 슬픔
오늘날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태어날 때까지 하나님의 슬퍼했던 심정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추방할 때 슬펐던 심정, 둘도 없는 독생자로 세운 아담이 원수 사탄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슬프고 처참했던 정경을 회상해야 합니다.
그 슬픔을 해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면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보내 이 슬픈 사정을 만민 앞에 통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슬픔을 알지 못하고, 하늘이 보낸 선지자의 슬픔을 알지 못해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을 배반하는 역사노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기필코 뜻을 이루어야 하기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수고하였습니다. 결국 4천년 역사가 경과한 후 비로소 잃어버렸던 아담을 복귀할 수 있었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찾아 세운 존재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과 동시에 하나님의 가슴속에서 4천년 동안 사무친 슬픔을 체휼하여 예수님을 붙들고 대신 울어 줄 수 있고, 예수님을 붙들고 대신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할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붙들고 기뻐해 주고, 예수님을 붙들고 하나님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연고로, 하나님의 슬픔은 하나님 홀로 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깊이 사무친 슬픔이 풀어지려면 반드시 사람을 통해야 됩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런 슬픔이 맺혀진 연고로, 사람이 하나님 대신 슬퍼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 속에 맺혀진 슬픔은 풀어질 수 없습니다.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 대신 울어야 할 입장이었는데도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내적 심정이 이렇게 슬프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는 말구유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고도 진정한 마음으로 하늘 대신 슬퍼할 줄 몰랐습니다.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 양치는 목자와 안나 등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 속에 슬픔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탄생한 사실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슬픈 심정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는 인간 조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죄악의 세상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죄 많은 세상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대신 울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이런 사람이 되었던들 예수님의 뜻을 받들었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마음을 가진 동방박사가 되었던들 그들 역시 예수님의 뜻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뜻을 받들고 나서야 했던 요셉과 마리아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품고 예수님을 대하지 못했고, 동방박사 세 사람 역시 하늘이 슬픈 심정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5-91, 5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