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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이스라엘과 중동지역 이집트,시리아,요르단 아랍 3개연합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948년 독립을 해 채 20년이 지나지 않은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이 중동지역의 3개의 거대 아랍국과 싸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대부분 국가에서는 이스라엘 패망을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의 폭격기는 이집트 전투기가 뜨기 전에 이집트에 있는 11개 공군부대 활주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전투기가 출격해서 이집트로 향하였음에도 이집트 레이더기지는 이스라엘공군기를 발견하지 못했고 최고 정보능력을 가진 미국과 소련조차도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집트 공군을 무력화시키며 6일만에 거대 아랍연합국을 제압해 승리한 이 전쟁을 우리는 6일 전쟁 혹은 3차 중동전쟁이라고 칭합니다. 이 전쟁이 끝나자 수 많은 외신들이 그 당시 이스라엘 총리 라빈에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빈총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군 장교들은 앞으로 돌격!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이 재차 묻습니다. “당신네 장교들은 어떤 명령을 내립니까?” 라빈 총리가 답을 했죠. “나를 따르라! 장교가 앞장서서 앞에서 전진하는데 어느 병사가 도망가겠습니까?” 이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 진정한 장교는 병사들을 총알받이로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장교가 앞장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에 대해 가르쳐주며 참 제자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을 따라가면 이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갈릴리호수에서 어부로 살아가던 인생이 이제 사람들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함께 하는 사역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라가면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위해 우선 조건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사역자로 변화시키실 때 그들이 먼저 포기해야 할 조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 일을 함께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의 제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가치관의 변화를 발견하고 저와 여러분도 온전히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내려놓아야 할 조건을 깨닫고 이 모든 것을 우리 주님께 맡기며 주님만 따라가는 참 제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째로 직업과 생계를 포기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0절입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시몬과 안드레를 만납니다. 이들은 그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생활했던 어부였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어부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잡은 고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배움의 기회도 없었고 어릴 때부터 물고기를 잡아 팔면서 매일매일 살아왔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이제 새로운 사명을 주시고 그들이 평생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과 2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니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바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물을 버려두고’라는 말씀을 보며 당연히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그 자리에 그물은 내버려 두지, 그것까지 가지고 따라가겠냐?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버려두고’라는 말은 그냥 그 자리에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의미 아니냐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이 뜻하는 것이 그냥 그들이 방금까지 하던 일을 잠시 접어두었다라는 뜻으로 이해되지 않고 완전히 직업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굳이 그물을 버려두고를 말씀에 기록했을까? 바로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이 그들이 잘 하던 일,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 생계로서 평생 해왔던 평생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그 직업, 그 전문직을 내려놓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잘 살기 위해 먹습니다. 그래서 인생이란 먹기 위해, 살기 위해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재산이며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 돈을 축적하기 위해 우리는 꼭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몬이라는 본명을 가진 베드로, 그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이들에게 그물은 생계를 위한 직업도구였습니다. 그물은 그들의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이렇게 분명하게 적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사역할 때 가는 곳마다 그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느 곳에 가게 되었을 때 사역에 필요한 재정을 위해 고기잡는 노하우를 가진 베드로와 안드레, 또 야고보와 요한같은 어부출신 제자들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생긴 수익으로 사역을 하면 안되었을까요? 자신들이 잘 하는 일, 자신들이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전문적인 기술은 ‘그물’을 던져 고기잡는 것인데...“시간될 때 돈이 좀 필요할 때 ‘그물’을 사용하면 안되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는 자신의 생계, 자신이 평소에 가졌던 직업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오늘 말씀의 본 뜻입니다. 최근 한국교회는 목회자로 헌신해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이 목회자가 되기 전에 받았던 자격증과 목회자가 되기전에 생계의 노하우가 있었던 일을 계속 하면서 목회와 병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교수, 교사, 각종 기술자의 자격증과 사업허가를 받은 것을 계속 유지하면서 목회자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회분위기속에서 최근 몇 몇 개신교단에서는 목회자의 생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교단적으로 힘들어 목회자 이중직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목회자 이중직’이라는 말은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겸직하여 생계를 책임지고 목사라는 타이틀은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다른 일반 직종의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면 목사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생계에 관련된 일만 하도록 했는데 이제는 생계에 관련된 직업으로 평일에 일을 해도 목사 자격은 유지된다는 말씀입니다. 목회자 이중직에 대해 허용된 교단의 목회자는 평일에는 교회에 출근하지 않고 생계를 위한 각자 직업에 종사하고 주일에만 교회를 열어 예배와 교제를 진행하는 교회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중에는 여유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와 각종 성경공부등을 평일에 진행하지 않고 문을 닫습니다. 목회사역은 가능한 토, 주일에 모든 활동을 집중합니다. 혹 생계가 더 걱정이 되면 토요일, 주일에도 교회를 열지 않고 생계를 위한 직업전선에 달려듭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아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회자 이중직을 연구하고는 있지만 아직 교단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교단에서는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목회자로서의 삶에 집중하고 생계도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속에서 채우심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고 아직은 가르치고 있고 목회자는 생계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며 목양과 전도, 성경연구 등에 전념하라고 교단법에 적시해놓고 있습니다. 법이 그렇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는 저의 신앙적 가치관으로도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돈, 재산, 가족부양이 걱정된다면 그 생계를 위해서 세상적 직업을 가져야지, 목회를 생계에 이용하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 생계를 위해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적 생활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참 제자가 되기 위해 이런 결단을 해야 합니다. “내 직업을 위해 주님을 내려놓을 것인가”, “주님을 위해 내 직업을 내려놓을 것인가”
“목사님, 그건 목사님이나 선교사들에게 맞을지 몰라도 이 말씀으로 성도들까지는 적용하기 그렇지 않나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신도들까지 “직업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라”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신도들, 성도들도 주님의 제자로 서기를 소망한다면 가치관의 변화는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직업을 활용하고 있느냐?” “직업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고 있느냐?”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사역의 협력자로 부르실 때 제자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진정 나의 직업이 우선이 아닌 예수님이 우선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생계가 우선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우선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먹고 살 걱정, 우리의 생계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2~2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재물이 무조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세상에서 누렸던 모든 기득권과 가진 재산, 권력, 명예를 다 버렸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따를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주님 말고 내가 먹고 살 길이 있다고 기대할 것을 남겨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생에 진정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생명이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돈, 명예, 권력도 예수님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직업을 내려놓게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혹여 주님말고도 내가 믿고 의지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스스로 먹고 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에게 우리를 맡기지 않고 내 소질, 내 능력, 내 노하우, 내 인간관계, 내 힘 등을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목회사역자이든 평신도사역자이든 우리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생각하며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둘째, 미래를 위한 대비책도 내려놓았습니다.
마태복음 4장 21절입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앞에서 우리는 ‘그물을 버려둔다’는 것을 직업을 포기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만났을 때는 조금 다르게 묘사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과 동일하게 마가복음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던지며 한창 어부라는 직업에 충실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을 말씀에서 볼 수 있었죠.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잡는 일은 잠시 멈추고 그물을 깁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르신 것을 우리는 말씀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뭐 큰 차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이 차이를 두고 첫 번째 ‘그물을 버려둔다’는 것을 ‘직업을 내려놓는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물 깁고 있는 것에 대해 ‘미래에 대한 준비, 걱정, 염려를 내려놓는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물을 깁는다는 것’은 고기잡는 일을 더 잘하고 다음에는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대비해 놓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미래에 대한 대비책을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우리의 갈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진정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질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왜 미래를 걱정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버트 슈바이쳐는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13년에 아프리카로 떠났다. 슈바아쳐의 재능은 참 많았습니다. 신학도 공부했고 철학에 대한 학식도 대단했습니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그는 목사이면서 대학교수로 일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던 파이프오르간의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 그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목회도 교수직의 일도, 심취했던 음악연주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데 그 명성이 알려져서 독일 음악단체에서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연주회를 아프리카에서 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주회 때 사용한 대형오르간을 그냥 선교지에 남겨두고 돌아갔습니다. 슈바이처가 처음 아프리카로 떠날 때에는 그가 가진 명성과 존경, 인정받던 교수직책을 포기했지만 선교지에서 정말 바쁘게 강의하며 사역하였습니다. 몇 년 후 안식년을 맞아 귀국했을 때 고국의 각 대학에서는 앞 다투어 강의 개설을 요청했고 수 많은 수강생들이 몰려왔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었지만 그가 저술한 자서전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신의 선택한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그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잠언 16장 3절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영국의 찰스 스펄전목사님은 어떤 경우에도 빚을 지지 않으며 목회와 구제사역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교회건축도 하고 고아원도 설립하고 방대한 교육단체 사업도 했음에도 절대 대출을 한다든지 빚지며 사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모았던 돈이 바닥나기 시작하면 그는 가진 모든 것을 헌금함에 넣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바닥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지 말라고 하라는 증거”라며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협박하는 듯한 황당한 기도를 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어디서인지 알 수 없는 헌금이 들어오는 기적을 꼭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합시다.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주님의 팔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라며 격려하며 자신이 경험했던 채움의 역사를 간증했습니다. 스펄전이 세운 재단의 재정은 더욱 풍성해져서 고아원과 신학교의 운영도 원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로 그들은 하나님께는 일하는 자에게 필요한 재원을 언제나 준비해 주시고 또 적절한 때에 허락하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고 우리 예수님께서 삶의 구원자되심을 확신하며 우리 성령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에 대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주심을 믿는다면 정말 우리의 삶속에 어떤 걱정, 염려도 내려놓고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조금이라도 해결될 일이 아닌데 왜 걱정하고 염려하며 초조하고 불안하며 하루하루 스트레스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의 미래를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며 따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셋째, 가족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았습니다.
마태복음 4장 22절입니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 그들은 그들의 직업을 버려두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야고보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를 때 버려둔 것을 기록하면서 아버지를 버려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실 우리가 나이가 들어 이제 독자적인 생활을 하려고 할 때 가장 큰 걱정은 가족들에 대한 내려놓음입니다. 결혼하기 전엔 부모와 형제의 관계를 끊기 힘들고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나서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 염려를 내려놓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이런 관심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집중하며 주님을 따르려고 하지만 우리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모, 형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또한 자녀들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버린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피에미(αφιημι)입니다. 이 단어는 울부짖다, 용서하다, 버리다, 떠나다, 포기하다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이를 번역하면서 전체 문맥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엉뚱한 의미로 오역될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을 모르고 그냥 ‘버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해버리면 주님을 따르려면 가족을 무시하고 가족을 등한히 하고 아예 인연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다는 말을 마치 불교에서 불가로 귀의하면 ‘속세에서의 모든 혈연은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잘못된 적용을 하면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모든 세상의 가족관계를 끊어버린다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디모데에게 목회권면을 하면서 교회내에서 신앙이 좋다고 하면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했던 내용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적용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그러면 우리가 성경에 말씀하는 “가족을 버려두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과 디모데전서에 기록된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에 배반한 자이며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에서 ‘버리다’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 아피에미(αφιημι)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피에미(αφιημι)라는 단어의 가장 중심되는 뜻은 ‘버리다’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울부짖다, 용서하다, 포기하다’라는 다양한 뜻도 포함된 단어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포기하다’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내려놓다’라는 의미도 가능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성경에서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자식을 버리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내려놓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부모의 문제, 자녀의 문제, 형제와 자매의 문제에 항상 관여하고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내가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다면 이제부터는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께 가족문제를 맡기고 나는 온전히 주님만 따르면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주님께서 부양에 대한 모든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과연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가족의 문제 때문에 골몰해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고 마음을 가족에게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가정일에 더 집중한 나머지 주님과의 교제시간을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혹여나 우리의 가족이 눈에 밟히고 우리 가족의 생계나 건강 등을 돌보려고 하니 주님을 따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께 우리 가족의 형편을 돌보시고 지켜주시도록 주님께 가족을 맡길 수 있는 신앙,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족의 형편과 건강, 관계를 돌봐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업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걱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고 가정의 상황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자들은 그렇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가 재물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걱정, 일가친척들과 가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그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주님을 따르는 것인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신학대학교 교수이며 목회자로서 살았던 ‘캘빈 밀러’의『포기하는 삶의 즐거움』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시간, 돈, 꿈, 자존심 이것들은 너무도 자주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때로는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마저 깨어진다. 이제, 하찮은 것을 내려놓고 영원한 것을 붙잡는 지혜를 발휘하라. 일단 놓고 나면 잃는 것은 없고 얻는 것은 전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당신 귀에다 대고 계속 말씀하신다. “네 손에 하찮고 덧없는 보물이 가득한데 너와 내가 어찌 손잡고 걸을 수 있겠느냐?”》
하루의 시간을 다 보낸 후 돌이켜보면 그 짧은 하루 동안에도 주님과 바꾼 세상의 가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믿는 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넘어져 넘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탄하는 일도 수 없이 자주 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매 순간 “내가 주님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속에 어떤 집착이 우선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며 세상의 어떤 집착과 세상의 어떤 걱정, 염려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빨리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내려놓을 수 있는 부분은 내려놓으면서 주님을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로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생계, 나의 취미, 나의 관심사, 나의 미래에 대한 대비보다 주님이 나의 삶에 주인이 되어주시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참 제자로, 참 신앙인으로, 참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