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금둔사의 돌담길
남도에 당도하는 봄은 언제나 산사의 깊고 고요한 뜰에서부터 가장 먼저 피어오른다. 아직 겨울의 시린 입김이 대지를 온전히 떠나지 않은 이른 봄날, 순천 금둔사(金芚寺)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은은하고도 매혹적인 매화 향기가 짙게 배어든다. 모난 돌들을 켜켜이 쌓아 올린 투박한 돌담길과, 그 위로 기어이 핏빛 꽃망울을 터뜨린 맹렬한 홍매화의 춤사위. 수백 년의 인고를 품은 낡은 산사에서, 우리는 가장 척박한 계절을 뚫고 솟아난 가장 순결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를 마주하게 된다.
모난 돌을 끌어안은 묵직한 돌담과 붉은 화관(花冠)
금둔사의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크고 작은 자연석들을 이리저리 얽어 투박하게 쌓아 올린 돌담길의 풍경이다. 매끄럽게 가공되지 않은 거친 돌덩이들이 서로의 모난 틈새를 내어주며 단단하게 어깨를 겯고 서 있고, 그 위로는 정갈한 검은색 기와가 차분하게 지붕을 덮고 있다.
이 무겁고 차가운 돌담의 궤적을 단숨에 온기 가득한 축제의 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단연 붉은 홍매화다. 짙은 회색의 낡은 돌담 곁에서 굵은 가지를 뻗어 올린 매화나무는, 마치 기와지붕 위로 거대하고 붉은 화관(花冠)을 씌워주듯 맹렬하게 핏빛 꽃송이들을 흩뿌리고 있다. 돌담 옆으로 솟아난 푸른 댓잎과 소박한 가로등조차 이 압도적인 붉은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완벽한 동양화를 완성한다. 이토록 거칠고 차가운 돌덩이의 토대 위에서도 기어이 눈부신 꽃을 피워내는 대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팍팍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우리의 마음마저 속절없이 다스하게 녹아내린다.
발걸음을 경내 깊숙한 곳으로 옮기면, 전통 사찰이 품고 있는 아득한 색채의 미학이 절정에 달한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전각의 처마 아래로는 초록, 파랑, 붉은색이 정교하게 교차하는 화려하고도 장엄한 단청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다.
단청 아래의 노란 벽면에는 불교의 깊은 진리를 담은 듯한 그림들이 다정하게 그려져 있다. 어떤 벽면에는 여백의 미를 극대화한 거칠고 긴 먹물 나뭇가지가 그려져 있고, 또 다른 벽면에는 맑고 결백한 정신을 상징하는 둥근 일원상(一圓相)과 옛 선인들의 평온한 모습이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철학적이고도 무거운 깨달음의 공간 앞으로,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매화 가지들이 어지럽게 뻗어 나와 있다. 영원을 이야기하는 빛바랜 단청의 묵언과, 찰나를 가장 뜨겁게 연소하는 붉은 매화의 아우성. 금둔사의 전각은 서로 다른 시간의 속도를 가진 이 이질적인 두 존재가 완벽하게 포옹하며 빚어내는 가장 경이롭고도 숨 막히는 화엄(華嚴)의 세계다.
산사의 봄은 결코 서두르거나 요란을 떨지 않는다. 푸르고 짙은 상록수림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우뚝 솟아 있는 다층 석탑의 자태는 수백 년 전에도 그러했듯 흔들림 없는 숭고함을 뿜어낸다. 층층이 쌓아 올린 그 서늘한 회백색 돌의 뼈대 사이로 부드럽고 여린 분홍빛 매화 가지들이 살며시 스며드는 풍경은, 강인함이란 무조건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다정하게 세상을 껴안는 부드러움에 있음을 무언으로 설법한다.
‘관월당(觀月堂)'이라는 소박한 현판을 단 전각 앞의 풍경도 한없이 고즈넉하다. 반듯하게 짜 맞춘 나무 문살과 하얀 창호지 위로 분홍빛 매화들이 마치 수를 놓듯 만발해 있다. 굳게 닫힌 나무 문살 너머로 누군가 홀로 참선에 들어 있을 것만 같은 깊은 정적 속에서, 허공에 흩날리는 매화꽃의 은은한 향기만이 산사의 문틈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마음의 묵은 먼지들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금둔사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불쑥불쑥 나를 가로막던 삶의 뾰족하고 모난 순간들이 기실 이토록 아름다운 담장을 쌓기 위한 소중한 재료였음을 깨닫게 된다. 매끄럽지 않은 돌덩이들이 모여 천 년의 세월을 견디는 단단한 담벼락이 되고, 그 거친 토대 위에서 기어이 가장 붉고 찬란한 꽃을 피워내는 홍매화의 기적. 세상을 살아가며 길을 잃거나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는 날이면, 주저 없이 금둔사의 낡은 돌담과 그 위를 덮고 있던 붉은 화관을 떠올릴 것이다. 추위를 견뎌낸 자만이 이토록 맑고 짙은 향기를 품을 수 있다는 옛 성현의 말처럼, 수많은 상처로 쌓아 올린 내 삶의 거친 돌담 위에도 언젠가 저토록 눈부신 붉은 봄날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