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2년 전 ‘훈민정음학회’(이사장 李基南)가 생겨났고 인도네시아 부톤섬에서 훈민정음이 쓰이고 있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교과서 ‘바하사 찌아찌아(찌아찌아族의 언어)’를 살펴보자. 손(手)은 찌아찌아 말로 ‘을리마’로 표기한다. 발(足)은 ‘까께’, 우산은 ‘빠우’로 쓴다. 감사합니다는 말은 ‘따라마까시’로 쓰고, 사랑합니다는 ‘인다우뻬엘루이소오’, 용서하세요는 ‘모아뿌이사우’, 예는 ‘움베’, 아니오는 ‘찌아’로 쓴다.
찌아찌아족 말을 소리 나는 대로 한글 방식으로 쓰며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였던 순경음 비읍(ㅸ) 같은 문자를 사용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현재 지구상에는 5600여 종의 언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문자로 적을 수 있는 언어는 겨우 1%인 40여 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글은 가장 뛰어난 문자로 꼽힌다.
훈민정음은 명칭과 함께 처지가 몇 번은 변했다. 예를 들어 첫소리(초성) 17자 가운데 ㅿ,ㆁ,ㆆ은 사라졌고 중성 11자 중에서 ‘가운뎃점(·)’도 사라졌다. ‘이응’을 순음 아래 이어 써 순경음(ㅸ,ㅹ,ㆄ,ㅱ)을 만든 것이나 까다로운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글자를 변형하던 방식도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이기남 이사장이 세계에 보급 중인 한글은 현재 우리가 읽고 쓰는 한글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다. 왜 한글 대신 훈민정음을 보급하려는 것일까.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우리가 현재 쓰는 한글은 외국어를 표기하거나 발음하는 데 제한이 있지만 훈민정음은 아무리 까다롭고 복잡한 외국어 표기도 완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훈민정음은 어떤 소리도 표기할 수 있도록 창제됐다고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돼 있어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은 이미 사용하고 있던 재래의 문자를 개량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도의 언어학적 원리에 따라 실제 언어의 음운을 정확하게 분석해 서로 체계적인 관계를 가진 자음과 모음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세종은 창제과정에서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및 몽골어를 꼼꼼히 분석, 새로운 한글 자모를 창안하고 창제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에 영향을 받은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세계적인 문자, 훈민정음
컬럼비아대 레드야드(Ledyard) 교수는 한글 字體(자체)에 1269년 몽골(元)의 쿠빌라이 칸이 ‘파스파’ 라는 티베트의 명승을 시켜 제작한 파스파 문자의 본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당시 成三問(성삼문)·申叔舟(신숙주)로 하여금 랴오둥반도에 귀양 와 있던 중국의 음운학자 黃讚(황찬)을 열세 번이나 찾아가 상담케 했다는 설이 남아 있다. 창제 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언어체계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의 李成茂(이성무) 원장은 “세계 제국을 운영한 원나라가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발상을 가졌었다”며 “티베트 문자의 계통을 잇는 파스파 문자는 원 제국 지배하에 있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언어를 만들려는 원 세조에 의해 1269년에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 원장의 말이다.
“원이 망하고 나서도 이 글자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됐는데 황찬이란 사람이 요동에서 그 연구진의 한 사람이란 주장이 있고, 또 원이 망해버렸기 때문에 그 흔적이 훈민정음 연구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분석합니다. 물론 성삼문·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사실이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고급문화가 흘러들어 오면 그것을 우리 역량에 따라 흡수해 새롭게 만드는 것이 문화의 본질 아닙니까. 당시 원나라는 세계 초유의 국가였습니다. 국제정세로 볼 때, 주변국 문자를 통일하려는 발상이 나올 수 있지요. 그러니 한글 창제 과정에서 세종이 학자들을 동원해 파스파 문자의 장점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볼 수 있어요.”
훈민정음이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세종의 창제 의미나 독창성이 훼손될 수는 없다. 세종의 천재성과 훈민정음의 위대함은 가능한 한 자료를 모두 찾아 비교·분석하고 이를 주변국 문자의 장점과 유산을 수렴한 뒤 간결하고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세계적 문자로 손색없는 훈민정음의 자랑이자 ‘우리글 수출’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또 이기남 이사장이 훈민정음을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그러나 古語(고어)나 다름없는 훈민정음을 다시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해 훈민정음학회의 산파역을 한 원암문화재단 李文浩(이문호·48) 이사장의 설명이다.
“주시경 선생이 훈민정음 중에서 몇 자를 정리해 ‘한글’이라고 부를 당시 한민족의 생활환경에 맞춰 불필요한 자모를 과감히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민족이 쓰는 단어와 언어환경이 다양해졌어요. 각종 외래어도 많아졌어요. 그러니 보다 원음에 가까운 것을 표기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겁니다. 한글도 고정된 게 아니라 시대에 맞춰 변화 내지는 발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한글이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한겨레의 문화 창조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긴다”고 했다. 말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으면 외눈박이와 다름없다.
인도네시아 동남부 술라웨시州(주)에 있는 부톤섬 인구는 16만여 명이다. 이 중 찌아찌아족이 6만명에 이른다. 이 섬에는 여러 소수민족이 20개 언어를 쓰는데 찌아찌아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다. 현재 인도네시아 전체 소수민족의 언어는 무려 737개에 이르는데 대부분 자신의 언어를 표기할 문자가 없다. 섬의 정치적 주도세력인 올리오족만 15세기 이슬람의 영향으로 아랍문자를 쓴다. 이기남 이사장의 말이다.
“문화수준과 교육열이 아주 높은 찌아찌아족은 문자를 가지기를 열망했어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통해 한국을 알고 있어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길 바라고 있었어요. 그리고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고 한국어 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찌아찌아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찌아찌아語(어)를 분석하려면 원어민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 그들을 교사로 양성하기 위해 현지에서 두 사람을 한국으로 초청했어요. 그런데 이들이 향수병과 도시 스트레스, 추위, 불면증을 견디지 못하고 한 사람은 중도 포기하고 귀국했어요. ‘아비딘’이란 선생님이 끝까지 남아서 돕지 않았다면 ‘바하사 찌아찌아’는 무산될 뻔했죠.”
국내보다 해외에서 뜨거운 관심
―어떻게 접근했나요.
“자존심이 없는 민족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아니라 그들과 동등하게 교류한다는 상호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문자 수출이나 보급이 자칫 잘못하면 ‘문화 제국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우리글의 해외 수출에 대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 등이 앞다퉈 한글의 인도네시아 수출을 소개했다. NYT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지 수십 년 만에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를 이룩한 한국이 문자가 없는 나라에 한국문자를 보급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은 월스트리트저널 9월 11일 자 기사 중의 일부다.
< 부톤섬의 초등학교는 이미 한글로 된 교재로 국어수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약 5600km나 떨어진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지만, 토착어를 보존하기 위해 한글을 표기 문자로 채택했다. 세종대왕이 1446년 발명한 한글에 대해 한국인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자와 알파벳에 대항해 한국이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해외언론이 훈민정음학회를 주목하게 된 이야기를 소개했다.
“<뉴욕타임스> 에디터가 한국 아이를 입양했나 봐요. 그래서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특히 한글을 굉장히 ‘예쁜’ 문자로 인상 깊게 봤었다고 해요. 어떤 문자는 동그랗고, 또 어떤 문자는 네모 반듯하고, 또 어떤 문자는 각이 져서 흥미를 가졌었다는 겁니다. 이 에디터가 휴가차 인도네시아에 들렀다가 현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한글 수출’ 기사를 보고 한국 특파원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 지시를 내렸다는 겁니다.”
일본 역시 한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日語(일어) 붐을 일으켰던 일본으로선 한국이 부러울 만도 하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자카르타 특파원이 현지를 찾았고 <시코쿠신문>은 “한국인의 발상이 놀랍다”고 소개했다. 또 NHK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며 한국 정부에 취재 문의를 해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와 표기법, 발음으로 되돌아가자는 이 이사장의 주장은 누가 봐도 파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슨 연유로 “문자 없는 나라에 한글을 수출해 우리의 문화적 영토와 역량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고집 센 학자들을 설득해 학회를 결성하고 자기 돈을 써 가며 無(무)문자 민족을 위해 한글 교과서를 만들었을까.
아버지가 음성학자 圓庵 李揆東 선생
이 이사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한글을 배우며 우리 문자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의 부친은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를 나와 경북고 교사와 대구 대륜고 교장, 경북대 사범대학장을 역임한 음성학자 圓庵(원암) 李揆東(이규동·1905~1991) 선생이다.
원암이 가르친 제자로는 申鉉碻(신현확) 전 총리, 金埈成(김준성)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李萬燮(이만섭·국회의장)·白南檍(백남억·공화당 의장)·吳鐸根(오탁근·법무장관)씨 등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스승을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만 해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 친구끼리 우리말을 쓰면 퇴학이나 무기정학을 시켰어요. 당시 대륜중학교에는 일본 선생과 한국 선생이 절반씩 계셨는데 한국 선생 중에서도 우리말을 쓰는 학생을 적발해 무기정학이나 퇴학처벌을 내리는 가혹한 경우도 있었어요. 이규동 선생님은 혹시 형사들이 복도에서 감시하지 않나 살펴가며, 수업 시간에 우리말을 하곤 했어요. 또 수업시간에 성삼문·하위지·박팽년 등 死六臣(사육신)에 관한 얘기도 들려주셨지요.”
故(고) 김준성 전 부총리 역시 경북고 시절, 스승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기남 이사장은 아버지(이규동)의 문집에 실린 김준성 전 부총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국어(일본어) 상용’에 반항적이던 저는 교실에서나 어디서나 마구 우리말을 지껄여대다가 일본인 선생에게 들켜 교무실로 불려 가면 교무실에 있던 일본인 선생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지요. 그러나 단 한 분, 이규동 선생님이 저를 걱정스레 감싸주는 듯한 시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원암 선생은 결국 대구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북고)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몰래 한글을 가르치다 학교에서 免職(면직)을 당했고, 폐결핵에 걸려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4월의 일이다. 이기남 이사장의 설명.
“일제 강점기 때 집에서 한글을 배웠어요. 그러니까 제가 너덧 살 때였을 겁니다. 아버지가 ‘비록 지금은 못 쓰지만 우리 말과 글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주 말씀하셨지요. 신문지에다 ‘가나다~’를 붓으로 힘들게 쓰면서 배웠습니다. 한번은 일본 순경들이 집에 들이닥쳐 책을 가져가기도 했어요. 일본 사람이 와서 책을 다 가져가는 것을 보니 한글공부가 얼마나 커다란 일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됐죠. 광복이 됐을 때 11세였는데 우리말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무척 들떴던 기억이 납니다.”
국내 최초로 컴퓨터 서체 개발
이 이사장은 대구 덕산초등(現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여중과 경북대 사범대 가정교육과(1기생)를 졸업했다. 3년 동안 경북대 사대부속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결혼과 함께 사직하고 서울로 이사갔다.
몇 년 뒤 뜻하지 않게 남편이 실직하자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주거생활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집 짓는 사업을 시작, 1992년에는 세금 랭킹 전국 100위권 안에 들 정도로 성공했다.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어릴 때는 심훈의 <상록수>를 읽었어요. 어른이 되면 여주인공 최영신처럼 ‘문맹퇴치 운동’을 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커서 보니 우리나라에 문맹자가 없더군요. 어릴 때의 꿈이 지구상에 있는 무문자 민족에게 문자를 만들어주는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 이사장은 어느 날 知人(지인)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깜빡깜빡하는 모니터 화면의 ‘커서(cursor)’가 만들어내는 문자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이 기계’가 널리 쓰일 것이라 직감했다.
“화면에 나오는 문자가 영어뿐이어서 한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안된다’고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글서체를 개발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녀는 미국 MIT대의 홍가이 교수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글 글꼴 개발에 착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명시스템즈를 설립하고 국내 최초로 매킨토시 서체(SM폰트)를 개발해 전자출판시대를 열었다. 매킨토시는 출판·인쇄 분야에 주로 쓰인다. 납활자 신문에서 전자출판으로 넘어간 데는 이 이사장의 노력이 크게 작용한다.
“한국의 전자출판 문화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큽니다. 투자금을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이 IT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것도 그 밑바탕에 훈민정음이라는 우수한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훈민정음의 조합원리가 컴퓨터 조합원리와 일치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이후 그녀는 부친의 호를 따서 ‘원암문화재단’을 설립, 무문자족에게 훈민정음으로 그들의 말을 적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네팔, 중국, 몽골, 베트남 등의 오지를 찾아다녔다.
훈민정음학회 창설 秘話
시행착오 끝에 그녀는 2007년 (사)훈민정음학회를 창설하게 된다. 학회를 만들겠다는 구상에 대한 학계의 첫 반응은 “한글과 국어와 관련된 학회가 부지기수로 많은데 또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국어학자도 언어전공자도 아니었지만 두 가지를 설득하며 2년간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 이사장의 말이다.
“온갖 학회가 다 있는데 웬 여자가 나타나 또 학회를 만들자고 하니 기가 막혀 하더군요.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세계에 무문자족이 5000여 족이나 된다는데, 훈민정음으로 문자를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라고요. ‘책상물림’ 학자들이 제 말을 듣고 깜짝 놀라더군요.
그래서 또 물었지요. ‘세계 학술저널 가운데 문자와 관련된 저널이 있느냐’고요. <네이처>니 <셀>이니 하는 저널은 있어도, 문자연구를 위한 국제저널은 없거든요. 그래서 ‘문자에 대한 국제저널을 기존 학회에서 만들 수 있느냐’고 다시 물으니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이 두 가지 때문에 훈민정음학회를 만들겠다’고요. 재원은 원암문화재단에서 전적으로 대겠다고 했습니다.”
서울대 언어학과 김주원 교수와 국어학자 이승재 교수가 찬동해 전국 국어학자와 언어학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전문가 등 100여 명이 참여하여 지난 2007년 10월 9일 한글날에 맞춰 ‘훈민정음학회’가 창립했다. 지난해에는 ‘훈민정음과 음소문자 체계’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고 이달 중순쯤에는 국제저널인도 발간할 예정이다.
‘사단법인 훈민정음’의 정관 제1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이 법인은 훈민정음의 연구와 이해 그리고 세계화를 위한 국내외의 공조와 인류의 문화발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원암문화재단 이문호 이사장의 말이다.
“영국 런던대학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자에 대해 합리성, 과학성에 대해 비교조사를 했는데 훈민정음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해요. 그리고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세종대왕상’을 시상하고 있잖아요. 훈민정음학회 활동은 인류의 문맹을 퇴치하는 숭고한 일을 통해 훈민정음의 세계사적 위치를 알리는 데 있어요. 연회비 2만원만 내면 누구나 학회에 참여할 수 있게 문호도 열어놨습니다.”
이기남 이사장은 무문자족에게 문자를 만들어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모교인 경북대에서 명예박사(교육학) 학위를 받았다.
이 이사장의 다음 꿈은 ‘세계 문자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초동 ‘예술의전당’ 옆에 박물관 부지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요즘 철학자와 언어학자들과 함께 박물관 설립의 철학적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다음 목표는 세계 문자박물관 건립
문자는 어떻게 생겨나고 변화해 왔는지, 문자의 기록 방법과 기록 매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문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문자박물관에서 보여줄 생각이란다.
“내년에 G20 회의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됩니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G20 회의를 통해 한국이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축으로 이동되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하셨어요. 영국에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어 세계시간의 표준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한국에 세계 문자박물관을 세워 21세기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도록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문자 박물관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인이 동참하는 박물관이 돼야 합니다. 유엔의 도움도 받아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일에 크게 기여하고 싶습니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교과서 ‘바하사 찌아찌아(찌아찌아族의 언어)’를 살펴보자. 손(手)은 찌아찌아 말로 ‘을리마’로 표기한다. 발(足)은 ‘까께’, 우산은 ‘빠우’로 쓴다. 감사합니다는 말은 ‘따라마까시’로 쓰고, 사랑합니다는 ‘인다우뻬엘루이소오’, 용서하세요는 ‘모아뿌이사우’, 예는 ‘움베’, 아니오는 ‘찌아’로 쓴다.
찌아찌아족 말을 소리 나는 대로 한글 방식으로 쓰며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였던 순경음 비읍(ㅸ) 같은 문자를 사용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현재 지구상에는 5600여 종의 언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문자로 적을 수 있는 언어는 겨우 1%인 40여 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글은 가장 뛰어난 문자로 꼽힌다.
훈민정음은 명칭과 함께 처지가 몇 번은 변했다. 예를 들어 첫소리(초성) 17자 가운데 ㅿ,ㆁ,ㆆ은 사라졌고 중성 11자 중에서 ‘가운뎃점(·)’도 사라졌다. ‘이응’을 순음 아래 이어 써 순경음(ㅸ,ㅹ,ㆄ,ㅱ)을 만든 것이나 까다로운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글자를 변형하던 방식도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이기남 이사장이 세계에 보급 중인 한글은 현재 우리가 읽고 쓰는 한글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다. 왜 한글 대신 훈민정음을 보급하려는 것일까.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우리가 현재 쓰는 한글은 외국어를 표기하거나 발음하는 데 제한이 있지만 훈민정음은 아무리 까다롭고 복잡한 외국어 표기도 완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훈민정음은 어떤 소리도 표기할 수 있도록 창제됐다고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돼 있어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은 이미 사용하고 있던 재래의 문자를 개량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도의 언어학적 원리에 따라 실제 언어의 음운을 정확하게 분석해 서로 체계적인 관계를 가진 자음과 모음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세종은 창제과정에서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및 몽골어를 꼼꼼히 분석, 새로운 한글 자모를 창안하고 창제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에 영향을 받은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세계적인 문자, 훈민정음
컬럼비아대 레드야드(Ledyard) 교수는 한글 字體(자체)에 1269년 몽골(元)의 쿠빌라이 칸이 ‘파스파’ 라는 티베트의 명승을 시켜 제작한 파스파 문자의 본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당시 成三問(성삼문)·申叔舟(신숙주)로 하여금 랴오둥반도에 귀양 와 있던 중국의 음운학자 黃讚(황찬)을 열세 번이나 찾아가 상담케 했다는 설이 남아 있다. 창제 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언어체계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의 李成茂(이성무) 원장은 “세계 제국을 운영한 원나라가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발상을 가졌었다”며 “티베트 문자의 계통을 잇는 파스파 문자는 원 제국 지배하에 있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언어를 만들려는 원 세조에 의해 1269년에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 원장의 말이다.
“원이 망하고 나서도 이 글자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됐는데 황찬이란 사람이 요동에서 그 연구진의 한 사람이란 주장이 있고, 또 원이 망해버렸기 때문에 그 흔적이 훈민정음 연구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분석합니다. 물론 성삼문·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사실이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고급문화가 흘러들어 오면 그것을 우리 역량에 따라 흡수해 새롭게 만드는 것이 문화의 본질 아닙니까. 당시 원나라는 세계 초유의 국가였습니다. 국제정세로 볼 때, 주변국 문자를 통일하려는 발상이 나올 수 있지요. 그러니 한글 창제 과정에서 세종이 학자들을 동원해 파스파 문자의 장점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볼 수 있어요.”
훈민정음이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세종의 창제 의미나 독창성이 훼손될 수는 없다. 세종의 천재성과 훈민정음의 위대함은 가능한 한 자료를 모두 찾아 비교·분석하고 이를 주변국 문자의 장점과 유산을 수렴한 뒤 간결하고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세계적 문자로 손색없는 훈민정음의 자랑이자 ‘우리글 수출’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또 이기남 이사장이 훈민정음을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그러나 古語(고어)나 다름없는 훈민정음을 다시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해 훈민정음학회의 산파역을 한 원암문화재단 李文浩(이문호·48) 이사장의 설명이다.
“주시경 선생이 훈민정음 중에서 몇 자를 정리해 ‘한글’이라고 부를 당시 한민족의 생활환경에 맞춰 불필요한 자모를 과감히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민족이 쓰는 단어와 언어환경이 다양해졌어요. 각종 외래어도 많아졌어요. 그러니 보다 원음에 가까운 것을 표기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겁니다. 한글도 고정된 게 아니라 시대에 맞춰 변화 내지는 발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한글이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한겨레의 문화 창조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긴다”고 했다. 말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으면 외눈박이와 다름없다.
인도네시아 동남부 술라웨시州(주)에 있는 부톤섬 인구는 16만여 명이다. 이 중 찌아찌아족이 6만명에 이른다. 이 섬에는 여러 소수민족이 20개 언어를 쓰는데 찌아찌아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다. 현재 인도네시아 전체 소수민족의 언어는 무려 737개에 이르는데 대부분 자신의 언어를 표기할 문자가 없다. 섬의 정치적 주도세력인 올리오족만 15세기 이슬람의 영향으로 아랍문자를 쓴다. 이기남 이사장의 말이다.
“문화수준과 교육열이 아주 높은 찌아찌아족은 문자를 가지기를 열망했어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통해 한국을 알고 있어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길 바라고 있었어요. 그리고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고 한국어 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찌아찌아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찌아찌아語(어)를 분석하려면 원어민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 그들을 교사로 양성하기 위해 현지에서 두 사람을 한국으로 초청했어요. 그런데 이들이 향수병과 도시 스트레스, 추위, 불면증을 견디지 못하고 한 사람은 중도 포기하고 귀국했어요. ‘아비딘’이란 선생님이 끝까지 남아서 돕지 않았다면 ‘바하사 찌아찌아’는 무산될 뻔했죠.”
국내보다 해외에서 뜨거운 관심
―어떻게 접근했나요.
“자존심이 없는 민족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아니라 그들과 동등하게 교류한다는 상호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문자 수출이나 보급이 자칫 잘못하면 ‘문화 제국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우리글의 해외 수출에 대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 등이 앞다퉈 한글의 인도네시아 수출을 소개했다. NYT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지 수십 년 만에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를 이룩한 한국이 문자가 없는 나라에 한국문자를 보급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은 월스트리트저널 9월 11일 자 기사 중의 일부다.
< 부톤섬의 초등학교는 이미 한글로 된 교재로 국어수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약 5600km나 떨어진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지만, 토착어를 보존하기 위해 한글을 표기 문자로 채택했다. 세종대왕이 1446년 발명한 한글에 대해 한국인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자와 알파벳에 대항해 한국이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해외언론이 훈민정음학회를 주목하게 된 이야기를 소개했다.
“<뉴욕타임스> 에디터가 한국 아이를 입양했나 봐요. 그래서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특히 한글을 굉장히 ‘예쁜’ 문자로 인상 깊게 봤었다고 해요. 어떤 문자는 동그랗고, 또 어떤 문자는 네모 반듯하고, 또 어떤 문자는 각이 져서 흥미를 가졌었다는 겁니다. 이 에디터가 휴가차 인도네시아에 들렀다가 현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한글 수출’ 기사를 보고 한국 특파원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 지시를 내렸다는 겁니다.”
일본 역시 한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때 전 세계적으로 日語(일어) 붐을 일으켰던 일본으로선 한국이 부러울 만도 하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자카르타 특파원이 현지를 찾았고 <시코쿠신문>은 “한국인의 발상이 놀랍다”고 소개했다. 또 NHK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며 한국 정부에 취재 문의를 해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와 표기법, 발음으로 되돌아가자는 이 이사장의 주장은 누가 봐도 파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슨 연유로 “문자 없는 나라에 한글을 수출해 우리의 문화적 영토와 역량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고집 센 학자들을 설득해 학회를 결성하고 자기 돈을 써 가며 無(무)문자 민족을 위해 한글 교과서를 만들었을까.
아버지가 음성학자 圓庵 李揆東 선생
원암 이규동 선생의 생전 모습. |
원암이 가르친 제자로는 申鉉碻(신현확) 전 총리, 金埈成(김준성)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李萬燮(이만섭·국회의장)·白南檍(백남억·공화당 의장)·吳鐸根(오탁근·법무장관)씨 등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스승을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만 해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 친구끼리 우리말을 쓰면 퇴학이나 무기정학을 시켰어요. 당시 대륜중학교에는 일본 선생과 한국 선생이 절반씩 계셨는데 한국 선생 중에서도 우리말을 쓰는 학생을 적발해 무기정학이나 퇴학처벌을 내리는 가혹한 경우도 있었어요. 이규동 선생님은 혹시 형사들이 복도에서 감시하지 않나 살펴가며, 수업 시간에 우리말을 하곤 했어요. 또 수업시간에 성삼문·하위지·박팽년 등 死六臣(사육신)에 관한 얘기도 들려주셨지요.”
故(고) 김준성 전 부총리 역시 경북고 시절, 스승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기남 이사장은 아버지(이규동)의 문집에 실린 김준성 전 부총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국어(일본어) 상용’에 반항적이던 저는 교실에서나 어디서나 마구 우리말을 지껄여대다가 일본인 선생에게 들켜 교무실로 불려 가면 교무실에 있던 일본인 선생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지요. 그러나 단 한 분, 이규동 선생님이 저를 걱정스레 감싸주는 듯한 시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원암 선생은 결국 대구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북고)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몰래 한글을 가르치다 학교에서 免職(면직)을 당했고, 폐결핵에 걸려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4월의 일이다. 이기남 이사장의 설명.
“일제 강점기 때 집에서 한글을 배웠어요. 그러니까 제가 너덧 살 때였을 겁니다. 아버지가 ‘비록 지금은 못 쓰지만 우리 말과 글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주 말씀하셨지요. 신문지에다 ‘가나다~’를 붓으로 힘들게 쓰면서 배웠습니다. 한번은 일본 순경들이 집에 들이닥쳐 책을 가져가기도 했어요. 일본 사람이 와서 책을 다 가져가는 것을 보니 한글공부가 얼마나 커다란 일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됐죠. 광복이 됐을 때 11세였는데 우리말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무척 들떴던 기억이 납니다.”
국내 최초로 컴퓨터 서체 개발
이 이사장은 대구 덕산초등(現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여중과 경북대 사범대 가정교육과(1기생)를 졸업했다. 3년 동안 경북대 사대부속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결혼과 함께 사직하고 서울로 이사갔다.
몇 년 뒤 뜻하지 않게 남편이 실직하자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주거생활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집 짓는 사업을 시작, 1992년에는 세금 랭킹 전국 100위권 안에 들 정도로 성공했다.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어릴 때는 심훈의 <상록수>를 읽었어요. 어른이 되면 여주인공 최영신처럼 ‘문맹퇴치 운동’을 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커서 보니 우리나라에 문맹자가 없더군요. 어릴 때의 꿈이 지구상에 있는 무문자 민족에게 문자를 만들어주는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 이사장은 어느 날 知人(지인)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깜빡깜빡하는 모니터 화면의 ‘커서(cursor)’가 만들어내는 문자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이 기계’가 널리 쓰일 것이라 직감했다.
“화면에 나오는 문자가 영어뿐이어서 한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안된다’고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글서체를 개발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녀는 미국 MIT대의 홍가이 교수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글 글꼴 개발에 착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신명시스템즈를 설립하고 국내 최초로 매킨토시 서체(SM폰트)를 개발해 전자출판시대를 열었다. 매킨토시는 출판·인쇄 분야에 주로 쓰인다. 납활자 신문에서 전자출판으로 넘어간 데는 이 이사장의 노력이 크게 작용한다.
“한국의 전자출판 문화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큽니다. 투자금을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이 IT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것도 그 밑바탕에 훈민정음이라는 우수한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훈민정음의 조합원리가 컴퓨터 조합원리와 일치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이후 그녀는 부친의 호를 따서 ‘원암문화재단’을 설립, 무문자족에게 훈민정음으로 그들의 말을 적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네팔, 중국, 몽골, 베트남 등의 오지를 찾아다녔다.
훈민정음학회 창설 秘話
인도네시아 부톤섬에는 찌아찌아족이 6만여 명 산다. 이들은 훈민정음으로 자신의 언어를 읽고 쓴다. 지난 2007년 방문 당시 찌아찌아족 100세 할머니와 함께한 이기남 이사장. |
“온갖 학회가 다 있는데 웬 여자가 나타나 또 학회를 만들자고 하니 기가 막혀 하더군요.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세계에 무문자족이 5000여 족이나 된다는데, 훈민정음으로 문자를 만들어줄 수 있습니까?’라고요. ‘책상물림’ 학자들이 제 말을 듣고 깜짝 놀라더군요.
그래서 또 물었지요. ‘세계 학술저널 가운데 문자와 관련된 저널이 있느냐’고요. <네이처>니 <셀>이니 하는 저널은 있어도, 문자연구를 위한 국제저널은 없거든요. 그래서 ‘문자에 대한 국제저널을 기존 학회에서 만들 수 있느냐’고 다시 물으니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이 두 가지 때문에 훈민정음학회를 만들겠다’고요. 재원은 원암문화재단에서 전적으로 대겠다고 했습니다.”
서울대 언어학과 김주원 교수와 국어학자 이승재 교수가 찬동해 전국 국어학자와 언어학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전문가 등 100여 명이 참여하여 지난 2007년 10월 9일 한글날에 맞춰 ‘훈민정음학회’가 창립했다. 지난해에는 ‘훈민정음과 음소문자 체계’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고 이달 중순쯤에는 국제저널인
‘사단법인 훈민정음’의 정관 제1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이 법인은 훈민정음의 연구와 이해 그리고 세계화를 위한 국내외의 공조와 인류의 문화발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한다.>
원암문화재단 이문호 이사장의 말이다.
“영국 런던대학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자에 대해 합리성, 과학성에 대해 비교조사를 했는데 훈민정음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해요. 그리고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세종대왕상’을 시상하고 있잖아요. 훈민정음학회 활동은 인류의 문맹을 퇴치하는 숭고한 일을 통해 훈민정음의 세계사적 위치를 알리는 데 있어요. 연회비 2만원만 내면 누구나 학회에 참여할 수 있게 문호도 열어놨습니다.”
이기남 이사장은 무문자족에게 문자를 만들어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모교인 경북대에서 명예박사(교육학) 학위를 받았다.
이 이사장의 다음 꿈은 ‘세계 문자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초동 ‘예술의전당’ 옆에 박물관 부지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요즘 철학자와 언어학자들과 함께 박물관 설립의 철학적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다음 목표는 세계 문자박물관 건립
문자는 어떻게 생겨나고 변화해 왔는지, 문자의 기록 방법과 기록 매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문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문자박물관에서 보여줄 생각이란다.
“내년에 G20 회의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됩니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G20 회의를 통해 한국이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축으로 이동되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하셨어요. 영국에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어 세계시간의 표준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한국에 세계 문자박물관을 세워 21세기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도록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문자 박물관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인이 동참하는 박물관이 돼야 합니다. 유엔의 도움도 받아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일에 크게 기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