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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20강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 마가복음 12:18-44
요절 /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일까요?
18,19절을 보십시오.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지금 들으면 ‘형수와 결혼하다니! 참 이상한 법도 다 있네’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 시대 당시에는 형이 자식이 없이 빨리 요절하는 경우,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해 자식을 낳게 해줌으로 형의 가문을 세워주도록 하였습니다. 또 당시에는 여자들이 과부가 되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 보장적 차원에서 동생들이 형의 아내를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집안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큰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신혼 초 퇴근길에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신호등도 보지 않고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후 둘째 아들이 형수를 취했는데, 여름휴가 때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그만 수영 미숙으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나머지 다섯 아들이 큰형의 대를 잇고자 차례로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각종 사고와 질병 등으로 차례차례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수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일곱 명의 형제들과 한 명의 형수가 모두 부활했을 때 이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한 여자를 두고 일곱 형제가 다툼을 벌이는 난감한 상황이 생기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당시 가장 큰 종파를 형성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이 같은 사두개인들의 주장에 반대해 부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현재 지금의 삶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두개인들로부터 이와 같은 질문을 받게 되면, 그 형수는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에 사두개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부활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층 상당수가 사두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현세의 돈과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현세의 삶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예수님은 그들이 부활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오해는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설명해주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여기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는 말씀을, 부활하면 육체가 없이 영혼만 존재한다든지, 아니면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사라져 중성이 된다는 의미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면 현재의 몸과는 다른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몸을 가리켜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죽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없어집니다. 더 이상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결혼도 없습니다. 그때에는 질병이나 아픔, 고통, 눈물, 이런 것들도 다 사라집니다. 부활은 현재 삶의 연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 이후의 삶은 부활 이전의 삶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이 크게 오해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에 부활을 다만 현재의 삶이 그대로 연장되는 것으로만 착각하고 부활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26b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도 모세오경 정경으로 인정하는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얼핏 들으면 이 말씀이 어떻게 부활을 입증하는지 이해가 잘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릎을 탁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죽어 무덤에 묻힌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노라’ 하셔야 맞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현재도 살아있어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27a).” 이것이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을 은근히 디스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산 믿음의 조상들은 육신은 죽었지만, 현재 살아서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있습니다. 또 장차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도 영생도 심판도 믿지 않고 이 땅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것만을 전부로 여기는 사두개인들은 살았지만 사실상 죽은 자들과도 같습니다. 사두개인들은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삶의 기반을 상실하고 역사의 뒤안뜰로 사라져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영원토록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누가 비웃고 조롱해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유럽 수양회에 1,100여명이 모여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에 대해 선포하며 찬양하며 기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비록 유럽의 상당수가 성경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유럽에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들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 또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활을 비롯한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능력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게 하실 것도 믿습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믿기에 이 땅에서의 삶에만 얽매이지 않고 나그네처럼 순례자의 길을 갑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사람이 산 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산 자의 하나님이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말로는 신자라고 하면서 사실상 이 땅에서의 세속적인 삶에만 관심 두며 살아간다면 현대판 사두개인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번에 예수님께 나아 온 사람은 서기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앞서 사두개인들과 예수님 간의 변론을 곁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라면 평소 잘 풀리지 않던 의문점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질문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b)?”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예수님은 신명기 6:4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40년간 광야생활 후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모세가 한 유언적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인데, 더 나아가 새이스라엘 즉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새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지켜야할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줄 알아야 그분을 사랑할 수 있고, 그분의 말씀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신은 헛된 우상이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살아계신 신이라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가나안 땅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바알, 아스다롯, 몰렉, 아세라 등이 그 땅에서 주인 노릇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이 경제적 번영과 다산과 축복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도 충분히 그것을 섬길 위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물질을 신으로 섬기기 쉽습니다. 명예와 권력, 쾌락을 주인 삼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신은 헛된 우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시고,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30절을 읽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일방적일 때도 많지만 서로 상호적일 때 그 사랑이 더욱 견고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고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의무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계명의 대전제는 출 20:2절을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그들을 애굽 땅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과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5: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겨주기까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날마다 감격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고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또 우리의 생명과 모든 은사와 재능들을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지성과 생각을 하나님께, 우리의 젊음과 정열과 에너지를 하나님께 다 바쳐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인격적으로,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미지근하게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사랑할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를 원하시지 99%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시지, 부분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영국의 설교자이자,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던 조지 휫필드(1714-1770)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일생 쉴 새 없이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마지막 설교를 마쳤을 때 완전히 기진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설교를 듣고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는 피곤을 이유로 ‘오늘은 내가 정말 피곤하고 지쳤으니 내일 오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나서 완전히 기진해 쓰러져 죽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건강을 돌봐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 그는 녹슬어 죽느니 닳아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진실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얼마나 힘을 남김없이 썼는지 마지막에는 혀를 펼 힘도 없어 그 혀가 꼬부라져 입천장에 붙어버린 채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뜨거워 그야말로 자신을 다 태워 재가 되어 죽었습니다.
우리가 다 조지 휫필드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다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조지 휫필드의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은 깊이 배워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께 “하나님 사랑합니다”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 건물을 짓고, 헌금을 많이 내는 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절대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예수님의 양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 표현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웃 사랑이 따라오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이웃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고아원이나 노인회관에 방문에서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한계적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상대방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도 똑 같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존재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저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저 사람도 동일하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듯이 상대방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데는 애써 투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사랑은 우리의 본성적인 성품입니다. 옆을 둘러보십시오. 옆에 앉아 있는 분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입니까? 우리는 옆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고 영접해야겠습니다. 또 이웃 사랑은 전도로 나타내게 됩니다. 그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죄 가운데 방황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어찌하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 말씀을 덧붙이심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최고의 계명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구마와 같은 답답한 심령에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신앙생활의 본질과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명쾌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서기관들, 랍비들이 수없이 논쟁을 벌였어도 결론이 나지 않던 문제를 예수님은 어떻게 이렇게 단번에 대답하실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 중심에 늘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기초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이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말려도 예수님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왜입니까? 역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의 제사를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죄로 병들고 심판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인생들, 당신의 이웃인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그들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들,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결국 어떻게 되셨습니까? 자기를 다 잃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습니까? 35,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하던 당시 서기관들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근본적으로는 다윗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은 시편 110:1절을 인용하십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께서 장차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가 되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신 예수님! 우리 인생들을 이웃 삼아 긍휼히 여기시고 섬기시고 사랑하신 예수님! 그래서 기꺼이 자기 목숨 버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그러나 그분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늘 보좌에 높이 앉아계신 만유의 주,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가 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여러 부자들이 와서 거액을 헌금했습니다. “촤르르르” 은전이 수북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반면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곧 로마동전으로 하면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가치로 약 2천 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땡그랑” 렙돈은 너무 가벼워 떨어지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헌금에 관한 예수님의 평가가 어떠합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아니, 겨우 동전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가 여러 부자들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니요? 팩트 체크가 영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헌금액수를 가지고 평가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일부를 넣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어떻게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 있었을까요? 이 과부의 행동을 헌금에 국한하여 볼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두 렙돈이지만 이 작은 것으로나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또 그가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헌금을 드리고 하루를 굶을지언정 어디선가 이틀을 굶고 있을 이웃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두개인들처럼 혹은 서기관들처럼 오직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계, 종교계 가릴 것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자신들의 미래만을 걱정할 뿐 예수님의 마음을 아무도 헤아리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가난한 과부에게서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처럼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제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이어야 하고 예수님의 인정하심이어야 합니다. 이 시대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 예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한 또 다른 과부 한 사람을 우리 중에서도 찾고 주목하여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이용하는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예수님께 인정받은 한 명의 과부의 신앙을 깊이 배우고 닮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