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단정하면서 밝고 엄숙한 청량산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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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단정하면서 밝고 엄숙한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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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05:16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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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단정하면서 밝고 엄숙한 청량산
『택리지』에는 청량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안동의 청량산(淸亮山, 870미터)은 태백산 산줄기가 들로 내려오다가 예안강(禮安江) 가에서 우뚝하게 맺힌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으로 덮인 봉우리 두어 개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짜기에 들어가면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모두 만 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묘한 모습이 형용할 수가 없다. 그 안에 위치한 난가대(欄柯臺)는 고운이 바둑을 두던 곳으로, 모난 돌에 바둑판 줄이 그어진 듯하다. 그 곁에 있는 석굴 안에는 늙은 할머니 상 하나를 안치하였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고운이 이 산에 살 때 음식을 지어 올리던 계집종이라 한다.
산에 연대사(蓮臺寺)가 있고, 이 절에는 신라 때의 명필 김생이 쓴 불경이 많다. 근래 한 선비가 이 절에서 글을 읽다가 불경 한 권을 훔쳐 집에 왔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곧 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 가족이 두려워하여 불경을 즉시 절에 돌려주었다 한다.
낙동강 상류에 자리한 청량산을 조선시대의 주세붕은 『청량산록』이라는 기행문에서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다.
해동 여러 산 중에 웅장하기는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 금강산이며 기이한 명승지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또한 주세붕보다 여섯 살 아래이며 이곳 예안이 고향인 퇴계 이황은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렇게 노래하였다.
청량산 옥류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까 하노라
퇴계 이황이 청량산의 내청량사로 가는 길옆에 ‘오산당(吳山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남명 조식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황은 조식과 달리 벼슬길에 여러 차례 나갔다.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였기에 임금이 부르면 벼슬길에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몇 차례, 그동안에 풍기군수와 대사성 부제학과 좌찬성 벼슬에 올랐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귀향한 것이 68세였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이곳에 집을 지어 ‘청량정사’라 이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가르쳤다.
연화봉 기슭에 자리한 내청량사와 금탑봉 기슭에 자리한 외청량사는 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지만 창건 연대를 보자면 당시 의상은 중국에 있었으므로 원효가 창건했다는 것이 맞을 듯싶다. 이후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다가 송광사 16국사의 큰스님인 법장 고봉선사가 중창했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 승당 등 27개의 부속 건물을 갖춘 큰 사찰이었다는 것만 전해져온다. 그러나 이 두 절은 비록 거리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연화봉 아래 내청량사의 법당은 유리보전이고, 금탑봉 아래 외청량사의 법당은 응진전이다.
청량산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에 솟아 있는 해발 870미터의 산이다. 산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고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청량사의 유리보전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자그마한 건물이다. 유리보전은 동방 유리광(琉璃光)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유리보전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있고, 힘찬 필체의 유리보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유리보전 앞에는 가지가 세 갈래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봉화군지』에 따르면 명호면 북곡리에 사는 남민이라는 사람의 집에 뿔이 세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힘이 세고 성질이 사나워서 연대사 주지가 데려가 짐을 나르게 하였다. 소는 이 절이 완성되자 힘이 다했는지 죽어 절 앞에 묻혔다. 그 후 무덤에서 가지가 세 개인 소나무가 나왔기 때문에 ‘세 뿔 송아지 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절에는 크게 내세울 만한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바위봉우리가 연꽃잎처럼 벌어져 있고 그 가운데 들어앉은 청량사 터는 대단한 명당임이 분명하다. 한편 주세붕의 글에 적힌 청량산의 암자 이름들 중엔 중국 화엄의 영산에서 따온 것임을 짐작할 만한 게 많다.
직소봉 아래 백운암ㆍ만월암ㆍ원효암ㆍ몽상암ㆍ보현암ㆍ문수암ㆍ진불암ㆍ연대암ㆍ벌실암ㆍ중대암ㆍ보문암 등이 있고, 경일봉 아래 김생암ㆍ상대승암ㆍ하대승암이 있으며, 금탑봉 아래 치원암ㆍ국일암ㆍ안증사ㆍ상청량사ㆍ하청량사 등 무려 19개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을 비롯하여 고운 최치원과 고려 말 공민왕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정하면서 밝고 엄숙한 청량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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