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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선사와 화산 인각사
황원갑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華山) 서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인각사(麟角寺)는 일연선사(一然禪師)가 만년에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하고 입적할 때까지 주석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인각사는 이처럼 고승의 자취가 서리고 자주적 민족사학의 산실이라고 할 만큼 뜻깊은 고찰로서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못난 후손들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왔고, 볼품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 형편이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라고 하겠다.
경북에서도 오지에 속해 교통이 불편한데다 퇴락할 대로 퇴락했기 때문인지 다른 지방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고 불자들의 발길도 거의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답사객 한두 명이 길을 물어 찾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해마다 음력 7월 칠석이면 군위 ․ 의성 ․ 대구 등지에 살고 있는 인각사의 신도들이 이곳에 모여 재를 올리고 있으니 그것은 음력 7월 8일이 일연선사가 입적한 날이기 때문이다.
인각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불태워버린 대웅전 자리는 주춧돌만 남았고, 역시 왜병들이 깨뜨려버린 일연선사의 부도비, 무성한 잡초밭 여기저기에 흩어진 기왓장 파편들, 일주문 지붕은 주저앉았고, 벽이 갈라진 극락전 벽 곳곳은 비닐로 풍우를 막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범종도 없고 담장도 없으니 황량한 모습은 영락없는 폐사였다.
오죽하면 조계종 사상 최초인지, 한국 불교사 최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에 없이 신문광고를 내어 주지를 공채까지 했을까. 그 광고 문안에는 주지 지원자는 이력서와 함께 중창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주지가 한 사람 채용이 되었는데 그나마 5년도 못 지나서 가버리고 필자가 취재하던 1999년 9월 중순에는 주지마저 공석이었다.
인각사는 642년(선덕여왕 11년)에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그 이듬해에 원효성사(元曉聖師)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각사가 <삼국유사>의 산실이요 일연선사의 유적이라는 사실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원효와 의상, 그리고 도선이 창건했다는 절이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어쨌든 인각사란 절 이름은 화산의 모습이 전설상의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을 닮았으며, 절이 자리잡은 자리는 그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지점이라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각사 일주문 앞에는 1985년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만들어 세운 일연시비(一然詩碑)가 있다. 전면에는 <삼국유사> 권 제3 가운데 ‘낙산(洛山)의 두 성인 관음(觀音) ․ 정취(正趣)와 조신(調信)’ 조 끝에 일연선사가 지은 시의 앞부분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새겨져 있다.
― 즐겁던 한 시절 자취 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이제 알았노라. ―
이 시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 착한 행실 위해서는 마음을 먼저 닦을지니
미인을 그리는 꿈 해로운 꿈일러라.
가을날 맑은 밤에 무슨 꿈을 꿀거나.
때때로 눈감고 청량에 이르리. ―
여기에서 청량(淸凉) ― 청량산이란 중국의 불교성지 오대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연선사는 <삼국유사>에서 이 시를 지은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 세상의 낙이라는 것은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건만 많은 사람이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에 노래를 지어 경계코자 함이다.”
인각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일연선사가 입적한 지 6년째인 1295년(충렬왕 21년)에 세운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와 일연선사의 부도인 정조지탑(靜照之塔)이라고 할 수 있다. 보각국사는 일연선사의 시호요, 이 비는 당시의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민지(閔漬)가 비문을 짓고 중국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행서를 모아서 새긴 것이다. 원래 높이 2m, 너비 1m, 두께 5㎝인 편마암 비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만행으로 깨어졌고 글자도 심하게 마멸되어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 비석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글자를 떼어내 갈아서 마시면 급제한다는 미신 때문에 대부분의 글자가 뜯겨나갔다는 전설도 있다.
일연선사의 부도비인 이 보각국존비는 이런 재앙을 당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전하고, 불완전하나마 몇몇 탁본이 남아 있어 비문의 내용을 거의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비문의 마지막 대목이 우리를 한층 가슴 아프게 한다.
‘겁화(劫火)가 활활 일어 산하가 모두 재가 될지라도 이 비는 홀로 남고 글자는 마멸되지 마소서.’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보각국사정조지탑은 일연선사의 부도로서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해 도굴되어 속칭 둥딩마을로 부르는 화북3리 뒷산 부도골, 인각사의 동쪽 언덕에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인 극락전 오른쪽 마당에 옮긴 것이다. 일제는 그것도 모자라 인각사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를 뚫어 절마저 두 동강을 내버렸는데, 이는 우리 국토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국토의 정기와 인재의 맥을 끊으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악랄한 만행이었다.
이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서 있던 본래의 자리는 세수 70이 넘은 일연선사가 90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만년을 보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사 지낸 묘소 바로 앞이었으니, 이는 일연이라는 인물이 고려시대를 살다간 위대한 고승이요 문장가요 애국자였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던 겨레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증거다.
일연선사는 1206년(희종 2년) 6월에 경북 경산군 압량면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언필(金彦弼), 어머니는 이씨(李氏)였는데, 뒷날 일연 스님이 국사(國師)가 되자 아버지에게는 좌복야(左僕射), 어머니에게는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 추증되었다.
무슨 인연인지 일연선사의 탄생지는 그 옛날 원효성사와 그의 아들 설총(薛聰)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들이 태어난 산을 가리켜 삼성산(三聖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연의 비문에는 일연이 장산(章山)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장산은 압량의 당시 지명이며, 삼성산은 유곡동에 있다. 이 고을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효성사는 삼성산 동남쪽 기슭, 그 옛날 밤골에서 탄생났고, 일연선사는 약 600년 뒤에 그 반대편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씨 부인은 밝은 해가 집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배를 환하게 비추는 똑같은 꿈을 사흘 동안이나 꾼 뒤에 태기가 있어 일연을 낳았다고 한다. 일연의 본래 이름인 견명(見明)은 그런 태몽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자는 회연(晦然)이며 나중에 일연으로 고쳤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일연은 어려서부터 생김새가 빼어났고 몸가짐이 단정한데다 머리도 영리했다. 그리고 걷는 모습은 소와 같았으며 눈은 부리부리한 호랑이의 눈과 같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법에 뜻을 두어 불과 아홉 살에 집을 떠나 당시로서는 머나먼 길이었던 전라도 광주 무량사로 찾아갔다. 그 무량사가 어디쯤에 있었는지 지금은 흔적도 찾을 길이 없지만 일연은 5년 뒤 무량사의 스님들에 의해 이번에는 더욱더 먼길을 떠나게 된다.
일연의 심지가 곧고 총명함에 감탄한 스님들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찾아가 불문에 출가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설악산 남동쪽 기슭에 있던 진전사는 이미 오래 전에 폐사가 되어 지금은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부도만이 외롭게 서 있지만 일연 당시까지만 해도 이웃 낙산사에 못지않은 명찰이었다.
진전사는 중국에 건너가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남종선을 배우고 귀국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산, 한국 선불교의 비조로 추앙받는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마지막으로 주석하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고찰이었다. 전진사 터 부도도 도의선사의 부도라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은 도의선사와 함께 지장에게 법을 받았으나 도의보다 약간 뒤늦게 귀국한 홍척선사(洪陟禪師)가 지리산에 개창한 실상산문(實相山門)이 시초였다. 이어서 도의가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혜철(慧徹 : 慧哲)이 곡성 태안사에 동리산문(棟裏山門)을, 무염(無染)이 보령 성주사에 성주산문(聖住山門)을, 현욱(玄昱)이 창원 봉림사에 봉림산문(鳳林山門)을, 도윤(道充)이 화순 쌍봉사에 사자산문(獅子山門)을, 범일(梵日)이 강릉 굴산사에 사굴산문(闍掘山門)을, 도헌(道憲)이 문경 봉암사에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각각 개산했던 것이다.
선불교는 전래 초기에는 이미 민중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린 화엄종과 법상종을 중심으로 한 교학불교, 귀족불교에 밀려 허황된 법이라고 하여 이단으로 몰리고 배척당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국가적 ․ 사회적 혼란기를 타고 급속히 전파되어 고려 개국 전에는 이미 한국 불교의 주류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고려조로 들어와 선불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 1158~1210년)에 의해 중흥기를 맞았다. 보조 지눌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 1055~1101년)이 천태종을 중흥시켜 교학을 중심으로 선․교 양종 통합을 시도한 데에 반해 선을 중심으로 선 ․ 교 양종 융합을 도모했다.
일연선사는 바로 보조 지눌에 이어 정혜결사(定慧結社)의 2세가 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 1178~1234년)에 의해 고려의 선불교가 한창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에 태어나고 활약했던 것이다.
설악산 진전사에서 출가하여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일연은 14세부터 22세까지 영동의 여러 명찰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는데 그의 명성은 곧 사방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의 인품이 그토록 빼어나고 공부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범한 자질로 인하여 일연은 22세에 서울인 개경으로 올라가 승려의 과거인 선불장(選佛場)에서 장원급제 격인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라는 법계(法階)를 받았다.
대선 위로는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가 있고, 선종은 다시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에 이르니, 법계란 곧 중의 벼슬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일연은 그런 닭의 벼슬보다도 못하다는 중의 벼슬에 연연할 정도로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승과에 합격한 일연은 보다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경북 달성군 현풍면의 비슬산으로 찾아 내려갔다. 비슬산은 전에는 소슬산이라고 했고, 일연 당시에는 포산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지만 일연선사비에 따르면 그는 포산 보당암(寶堂庵)에서 22세부터 44세까지 22년간이나 머물며 선승으로서 참된 깨우침을 찾아 수행 정진했다.
일연이 비슬산에서 수행하던 때는 이른바 몽골의 난이 절정에 이르러 온 국토가 황폐할 대로 황폐해지던 시기였다. 최씨무인정권 치하의 조정은 이미 개경을 버리고 강도(江都 : 강화도)로 천도한 다음이었고, 그때 31세의 일연이 비슬산에 있던 1235년에 3차로 침범한 몽골군은 경주까지 휩쓸고 내려가 국보인 황룡사구층탑을 비롯하여 불국사 ․ 분황사까지 모조리 불태우고 사람들을 마구 도륙하여 이 땅은 사람의 씨가 마를 정도로 참상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일연이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를 쉴 새 없이 염불하자 벽 사이에서 문수보살이 현신하더니 “무주(無住)에 거하라.”고 일러주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 일연은 묘문암에 머물고 있었는데 묘문암 북쪽에 무주암이 있었다.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긴 일연은 ‘생계불감(生界不減) 불계불증(佛界不增)’, 곧 ‘생계는 줄지 않고 불계는 늘지 않는다.’는 화두를 놓고 참선에 몰두했다. 그러한 정진 끝에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일연은 사람들에게 “내가 오늘 삼계(三界)가 환몽(幻夢) 같고 대지에 실오리 하나만큼의 장애도 없음을 보았노라!” 하면서 대각오도(大覺悟道)를 선포했다.
그해에 일연은 삼중대사가 되었고, 다시 9년이 지난 40세에는 선사가 되었다. 4년 뒤인 1249년(고종 36년)에 선사는 경남 남해의 정림사(定林寺) 주지를 맡았다. 이는 최씨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인 최이(崔怡)의 처남인 정안(鄭晏)이 남해로 낙향해 그의 집을 정림사라는 절로 바꾸고 선사를 초빙하였기 때문이었다. 남해 정림사에 12년간 머물며 일연선사는 당시 남해 분사도감에서도 진행되던 팔만대장경 판각 작업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54년 51세의 일연은 자신의 후원자인 정안이 최이의 아들 최항에게 죽자 정림사를 떠나 길상암(吉祥庵)으로 옮겨 5년간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저술한다. 이 책은 일연선사비에 기록된 선사의 저술 100여 권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저서이다. 참고로 덧붙이면 일연선사비에 전하는 그의 저서는 어록 2권, 게송잡저 3권, 편찬서는 <중편조동오위> 2권을 비롯하여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인데, 정작 일연선사의 이름을 만세토록 드높이는 <삼국유사>만은 이 목록에서 빠졌다. 그 동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중편조동오위>가 발견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일본 교토대학 도서관에서라고 한다. 이 책이 일본에서 발견된 까닭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약탈해간 전적들 가운데에 들어 있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일연선사의 나이 어느덧 56세. 그때 그는 대선사라는 직위에 올라 있었는데, 당시의 임금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올라갔다가 강화도 선월사(禪月寺)에 주석하게 된다. 선월사는 팔만대장경 간행시 대장도감이 있던 왕실의 원찰 선원사(禪源寺)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때 고려 조정은 최씨 무인정권이 4대 60년 만에 무너지고 형식상이나마 왕권이 회복되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삼별초의 항쟁을 끝으로 자주 독립성을 잃은 채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직후였다.
그러나 일연선사의 강화도 체류는 3년에 불과했다. 선사는 행장을 챙겨 번거로운 저자들을 멀리한 채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머문 것은 포항시 항사동의 오어사. 그의 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59세였다. 오어사는 원래 이름이 항사사였으며 그 옛날 원효와 혜공이 때로는 불법의 진리를 탐구하고 때로는 탈속의 경지에서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이듬해인 1264년(원종 4년)에 선사는 과거 자신이 큰 깨달음을 얻었던 무주암이 있는 비슬산 기슭의 인홍사(仁弘寺)로 거처를 옮겼다. 선사는 이곳에서 왕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門寺)로 다시 옮길 때까지 13년을 보냈다. 일연선사는 인홍사에 주석한 지 10년째 되던 1274년 절을 크게 중창하고 그해에 즉위한 임금 충렬왕의 사액을 받아 절 이름을 인흥사(仁興寺)라고 바꾸었다. 일부 학자들은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인흥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삼국유사> 권 제1 ‘왕력(王曆)’ 편의 바탕으로 보이는 ‘역대연표’를 이곳에서 제작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삼국유사>를 인각사가 아니라 운문사에서 집필했다는 설도 있다. 그 이유는 ‘역대연표’를 간행한 시기가 운문사 체류 시라는 점 때문이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의 운문사는 현재 비구니들의 청정 도량이다. 1277년(충렬왕 3년) 왕명에 따라 72세의 일연선사는 인흥사를 떠나 운문사로 거처를 옮긴다. 이미 고희를 넘긴 나이에 이제는 한 절에 머물며 조용히 만년을 보내고도 싶었으련만, 75세가 되던 해에는 다시 임금의 부름에 따라 경주행재소로 찾아갔다가 개경까지 함께 올라가게 된다. 그때 임금은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와 있다가 일연선사가 보고 싶어 부른 것이었다.
불국토 신라의 도성 서라벌은 <삼국유사>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며, 일연선사의 고향과도 가까운 곳이다. 현재 경주 계림에는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찬기파랑가’를 새긴 일연현창향가비가 세워져 있다.
임금을 따라 개경으로 올라간 일연선사는 왕명에 따라 왕실의 원찰인 광명사(廣明寺)에 머문다. 광명사에 머물며 일연은 이따금씩 임금을 만나기도 하고 당대의 문신이며 문장가인 이승휴(李承休) ․ 이장용(李藏用) ․ 유경(柳璥) ․ 김구(金坵) ․ 이송진(李松縉) 등과 어울려 승유(僧儒)를 떠난 교유를 하기도 했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도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단군의 개국설화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또한 일연선사는 젊은 시절부터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에 두루 통달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283년(충렬왕 9년) 3월, 78세의 일연선사는 임금으로부터 국사의 칭호를 받는다. 충렬왕은 선사를 국사로 책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그의 비문은 전한다.
“선왕들이 높은 이를 왕사로 삼았으며 더욱 높은 이는 국사로 삼았거니와 덕이 없고서야 어찌 그러하겠는가. 이제 운문화상(雲門和尙 : 일연)은 도와 덕이 매우 높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바이다. 그러므로 어찌 나 혼자 자비의 은덕을 받을 것이랴. 온 나라와 더불어야 마땅하리라.”
선사는 세 차례나 사양하였으나 임금은 물러서지 않았고, 선사에게는 국존(國尊)과 함께 원경 충조(圓徑沖照)라는 호가 내려졌다. 여기에서 국존이란 국사와 같은 뜻이지만 그때는 원나라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원에서 쓰는 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국존이라고 한 것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해에 일연선사는 임금에게 여러 차례 연로함을 이유로 귀향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여러 차례 말리다가 끝내 그 뜻을 꺾을 수 없어 마침내 허락하여 선사는 번잡한 개경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모를 모시고 조용한 시골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노모의 향년 96세였으니 19세에 일연을 낳아 77년간이나 홀몸으로 오로지 아들만을 바라보고 난세의 풍진을 함께 헤쳐왔던 것이다.
선사의 노모가 돌아가시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수리하고 토지 30만 평을 내리는 등 국사에 대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선사는 임금과 대신들의 존경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명실상부한 당대 불교계의 지도자로 수많은 스님과 신도가 그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이듬해인 1289년(충렬왕 15년) 음력 6월에 선사는 노환으로 자신이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7월 7일에 주변을 정리하고 이튿날 모여든 제자들에게 “내가 이제 떠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제자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뒷날에 돌아오면 다시 그대들과 더불어 한바탕 흥겹게 놀아보리라.” 하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여러 선덕(善德)은 날마다 이것에 답하라. 심하게 아프고 가려운 것과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은 것이 모호하여 가릴 수 없으리라.” 그리고는 자리에서 내려가 방으로 들어간 다음 작은 선상에 앉아 조용히 미소짓다가 그대로 입적했다. 비문의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그때 오색의 빛이 방 뒤에서 일어나는데 곧기가 마치 그 끝을 매달아놓은 듯하고 빛나기는 불타는 듯하였다. 그리고 위로는 흰 구름이 마치 지붕처럼 덮었다. 하늘을 가리키며 가는데 때는 가을 더위가 심했건만 얼굴 모습은 선명하고 희며 몸에는 밝은 윤기가 흘러 굴신함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아 원근에서 바라보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다.’
그때 선사의 세수 84세, 법랍 71년이었다. 제자들이 선사의 영골을 추려 선실에 안치하고 조정에 전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후히 장례 지내게 하였다. 시호는 보각이라 하였고, 부도탑명은 정조라 하였다. 선사의 부도탑은 인각사 동쪽 언덕에 세웠으니 그곳이 곧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도굴했던 바로 둥딩마을 부도골이요, 그 자리는 먼저 정토로 떠난 노모의 묘소 바로 앞이었다.
끝으로 <삼국유사>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지금까지 일연선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는데 이같이 위대한 민족적 문화유산이 하루아침에 인각사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삼국유사>는 140년 전에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이른바 정사(正史)라는 미명 아래 고의적으로 빼먹은 단군의 개국설화를 비롯하여 가야 ․ 신라 ․ 고구려 ․ 백제 등 여러 나라의 건국설화, 민간신앙의 설화와 민중의 향가, 고승들의 전기와 불법을 통한 신비로운 교화의 이야기 등을 빠짐없이 담은 민족사적 ․ 불교사적으로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5권 9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일연선사가 80평생을 두고 이 땅의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보고 들은 기록을 종합한 실증주의적 답사문학의 걸작이기도 하며,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전횡과 밖으로는 몽골의 침범이라는 내우외환의 수난기에 자주적 역사관과 주체의식을 결집한 민족사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일연선사가 유학자도 아니고 사학자도 아닌 한 사람의 승려의 신분이었음에도 역사 기술의 방식에서 이를테면 우리나라 임금을 천자(天子)나 천제(天帝)로, 임금의 죽음을 붕(崩)으로 표현한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그의 역사관이 얼마나 투철한 주체의식을 지녔던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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