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저녁노을(Im Abendrot, D. 799)이 조용히 흐른다. 상형문자로 쓴 편지를 지고 왔으니 얼마나 먼 길을 왔을까? 아득한 세월을 지고 온 지게를 지겟작대기에 세워 놓고 노을이 점점 물들어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본다. 꿈길인 듯 일몰의 바닷가를 서성인다. ‘가없는 태평양으로 빠져드는 저 해를 조리로 건져내 주고 싶다’던 그가 보낸 편지다. “사슴 가죽에 상형문자로 편지 써 주세요.” -오늘 밤 느티나무 아래서 만나요- 라는 추신 더불어 사연은 단 두 줄이다. 상형문자가 그려진 사슴 가죽이 첨부되어 있다.
머릿속에서 뱅뱅 돌 뿐 때때로 단어 하나가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다. 모국어로 편지 한 장 쓰기도 어려운 이방인이 되어 세월만 흐른다는 전언에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영어도 모국어도 아닌 쉽게 그림으로 보라는 배려 깊은 상형문자로 쓴 편지다. ‘신의 말씀’을 뜻하는 상형문자로 보낸 그림문자 편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싸리나무로 엮은 발채(지게에 얹어 짐을 싣는 데 쓰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에 담긴 사슴 가죽에 그림이 그려있다. 달과 별 하나, 둥근 나무 아래 남녀가 손을 잡고 서 있다. 시냇물인지 발아래엔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흐른다. 그믐달이 그려져 있으니 오늘 밤이 되려면 그믐달이 뜨기를 기다려야겠다. 아무리 보아도 동그란 나무는 느티나무와는 닮은 구석이 없다. 상형문자로 답신을 하라기에 궁리 끝에 꽃 한 송이와 푸른 나비 한 마리를 그려본다. 별로 신통치가 않아 지워버린다.
경사 경(慶)자의 유래를 보면, 마음을 담아 사슴 가죽을 가지고 가서 축하해 주는 일로 경사를 말한다. 예로부터 결혼의 길례에 사슴의 가죽을 예물로 삼아 축하했다니 편지에 담긴 의미가 축하의 마음이려나. 언젠가 나의 작품집에 대한 독후감을 보내겠다던 이야기가 생각나게 하는 특별한 편지다. 더구나 삼나무 거목이 울창한 숲 어딘가에 전설처럼 산다는 흰 사슴의 가죽에 담긴 그 정성이 더욱 귀하고 고맙다.
어느 봄날 날아온 거짓의 비수는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같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따라다닌다. 선혈 낭자한 영혼을 치유해 주는 노래가 있었으니, 계양산 자락에서 보내주신 한 권의 책 <가문비나무의 노래>였다.
‘가문비나무는 우리에게 죽은 것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옳지 않은 것과 헤어지라고 말합니다. 빛을 가리는 모든 행동과 결별하라고 이릅니다. 이는 곧 솔직함, 진정성, 정의, 자비, 화해가 없는 모든 일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울림 있는 삶에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지요. 살아가면서 어떤 부분과 결별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힘과 가치를 앗아가는 죽은 가지를 알아봅니다.’
(가문비나무의 노래 중 / 마틴 슐레스케)
책을 펼쳐 든 순간, 노래하는 나무는 자기 생명에 해로운 것을 버린다고 가문비나무의 노래를 들려준다. 시꺼멓게 죽은 가지를 버리라고 썩어가는 내 영혼에게 알려준다. 그래야 아름다운 울림을 위한 공명통을 마련할 수 있다고 버림의 미학을 노래한다. 빙하의 울음터를 지나 알래스카 데날리 상공에서 내려다보던 만년설 사이로 끝없이 펼쳐지던 가문비나무 숲, 침묵의 산마루에서 가문비나무의 노래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점점 커져갈 달님처럼 나의 감사는 점점 만월이 되어 차오르되 나의 의지는 점점 작아져 그믐달이 되기를. 침묵으로 부르는 가을 숲의 노래를 배우고 싶다.
(중략)
어디든지 동행하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을 여행을 떠난다. 숨어있는 가을 숲에서 내 생의 잎사귀에 내려앉은 먼지를 가만히 털어내시며, 생채기가 그리는 영가를 배우라 하신다. 상처 난 무수한 잎사귀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거기. 금관의 영락처럼 가만한 바람에도 사르르 흔들리는 은사시나무의 노래는 무반주 합창으로 가을 숲에 메아리친다. 고적한 오솔길을 따라 산속 깊이깊이 들어가 의지를 잠재우고 침묵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라는 아카펠라이다.
눈썹처럼 가는 초승달이 검은 나무 그림자 위에 고요히 떠 있다. 이 밤엔 내 영혼도 침묵에 잠기어 고요하다. 그믐달이 뜨면 길을 떠날 것이다. 내 님은 능금나무 아래서 달콤한 칠현금으로 시레나의 노래를 들려준다 하셨으니. 동구 밖 느티나무를 지나 능금나무 아래로 갈 것이기에 왠지 만나지 못할 예감이다. 예지의 소유자만이 쓸 수 있는 상형문자 편지는 보이는 대로만 읽어서는 아닐 될 듯하다.
저녁노을의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타오르는 노을에 먼지들이 젖어 들 때,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홍조 빛 노을이 내 조용한 창가에 스며들 때, 아쉬움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선악을 아는 해치를 그려 빈 지게에 담아 보낼까. 그믐밤을 날아다니는 월하향의 향기를 대신 띄워야겠다. 향기는 멀수록 맑다(香遠益淸) 하였으니 느티나무 아래 먼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