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라는 말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인도말로는 ‘우란분’이라고 합니다. 왜 거꾸로 됐다고 말할까요?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잘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돈 좀 벌어서 가족을 위하며 잘 살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행위의 결과가 다 손해날 짓을 했다는 거예요. 본인은 천당에 가려고 한 행위가 결국 지옥 갈 행위가 되었을 때 이것을 거꾸로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꾸로 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을 ‘천도’라고 합니다.
거꾸로 된 것을 바로 세우려면
그러면 거꾸로 된 것을 바로 세우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베푸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천도재’에서 ‘재’자는 ‘제사 지낸다’ 할 때 ‘제’자가 아닌 ‘베풀 재(齋)’를 씁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베풀 때 그 공덕으로 거꾸로 된 사람이 바로 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천도를 하기 위해서는 베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손실을 입히고, 내가 화가 나서 화풀이한 것이 누군가의 마음에는 큰 상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해를 끼치기도 하고,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지 모를 그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베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이 세상에서 가장 배고픈 자와 가장 가난한 자에게 베풀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곧 그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베풀 때는 가장 배고픈 사람 또는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천도재를 지내면 반드시 음식을 많이 만들어서 그날 전부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재를 지낼 때 음식을 많이 차리는 이유가 귀신이 먹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백 명분이나 천 명분의 음식을 만들어서 배고픈 사람에게 많이 나눠주기 위해서입니다.
천도재와 연관된 재미있는 옛날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한 부잣집에서 부모님의 천도재를 지내달라고 절에 쌀 100석을 시주하면서 재를 잘 지내달라고 했어요. 그 당시에 쌀 100석이면 매우 큰 돈인데, 큰스님은 그 돈을 받아서 재를 지낼 준비는 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러한 큰스님의 행동에 주지 스님은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재를 지낼 돈을 받았으면 시장을 봐서 음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돈을 자꾸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니까요. 그렇게 49재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큰스님이 재를 지낼 준비하라는 말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지 스님이 큰스님에게 재를 지낼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니 큰스님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다’ 하시는 거예요. 아무 준비도 안 하고 말이죠.
드디어 천도재 하루 전날이 되자 큰스님이 시장에 가서 콩나물 한 움큼과 채소 몇 가지를 사서 부엌에서 직접 데치고 볶고 해서 반찬을 만들었어요. 천도재 지내는 날 아침이 되자 큰스님이 전날 만들어 놓은 반찬 세 가지를 영가단에 딱 얹어놓고 죽비 3번을 치고는 ‘재 끝났다’ 하시는 거예요. 조금 후 10시가 되자 많은 수의 일가 친척들이 재를 지내겠다고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으니까 주지 스님한테 막 항의를 했어요. 주지 스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서 큰스님께 여쭤보라고 했습니다. 큰스님한테 가서 막 항의를 하니까 큰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49재는 제가 잘 지냈습니다. 남은 음식은 저기 부엌에 가면 있으니까 먹고 가시오.’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난리를 피우는데, 그 집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 주지 스님에게 큰스님이 쌀 100석으로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큰스님이 재 지낼 돈을 49일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줘 버렸습니다.’
주지 스님의 대답을 들은 그 집 아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천도재는 잘 지내졌다. 집으로 가자’라고 해서 무마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재(齋)의 정신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재를 지내면,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네다섯 시간씩 의식을 했어요. 밖에는 동네 사람들과 거지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배고파 죽겠는데 재가 끝나지를 않는 거예요. 그때 조실스님이 재를 지내려고 법당에 차려놓은 음식을 다 꺼내서 사람들에게 나눠줘 버렸어요, 그래서 재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지금 재를 지내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항의를 하니까 큰스님이 ‘배고픈 사람이 먹는 게 재(齋)인데, 지금 배고픈 사람 놔 놓고 뭐 하고 있느냐?’ 하고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지금 저도 배고픈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요? (웃음)
천도재를 가장 잘 지내는 방법
이것이 원래 재(齋)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풀 재(齋) 자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취지를 계승한다면 요즘은 재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지금 시대에는 음식을 많이 해놓아도 먹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천도재 지내줄 테니까 얼마를 내라’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얼마를 보시하면 그 돈을 모두 인도의 가난한 아이들이나 북한의 가난한 아이들 또는 제3세계 어린이 구호 활동에 사용합니다. 재비를 절 운영에 쓰지 않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재를 가장 잘 지내는 방식이며, 그렇게 해야 재주들에게 실제로 큰 공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를 잘 지내려면 베풀어야 합니다. 그럼 왜 이런 재 지내는 문화가 생겨났을까요? 저는 이게 다 우리 인간 생활의 한 모습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을 때려서 감옥에 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은 가족 중 부모나 형제가 맞은 사람한테 돈을 물어 주고 합의를 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고인을 위해 남은 가족들이 베풀어야 하는 겁니다. 둘째, 배상을 했는데도 본인이 잘했다고 계속 우기면 돈만 갖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잘못했다고 뉘우쳐야 해요. 즉, 재를 통해서 본인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법문을 듣고 깨우쳐서 자신이 뭐가 문제였는지 자각하여 어리석은 자신을 참회해야 합니다. 본인은 반성하지 않고 돈으로만 때우려고 하면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참회가 필요하고 법문이 있게 되는 겁니다. 영가가 법문을 듣고 깨우쳐서 참회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영가 천도 법문을 하는 겁니다.
법주가 요령을 흔들며 재를 지내는 이유는, 본인이 깨우쳤고 배상을 했다 하더라도 재판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맛을 좀 보고 와야 합니다. 지장경(地藏經)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옵니다. 지옥 중생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원을 세운 분이 지장보살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옥에 떨어지면 나보다 더 마음이 아픈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지장보살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지장보살을 불러서 우선 지옥까지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연유로 49재 기간 동안 지장보살님께 기도를 하는 거예요.
천도재가 만들어진 세 가지 이유
그래서 재를 지낼 때는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 법문을 듣고 깨우쳐야 해요. 즉 반성을 해야 합니다. 둘째, 베풀어서 배상을 해야 됩니다. 셋째, 큰 원을 가진 사람의 공덕으로 고통을 잠시 면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뜨거우면 1초도 못 참잖아요. 이렇게 세 가지 이유에 의해서 천도재가 만들어졌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런 취지는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겁니다. 특히 돈만 밝히는 천도재 문화가 남게 된 거죠. 이런 이유로 재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천도재를 지내는 본래의 취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종교의식으로 행한다 하더라도 그 취지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고인이 남긴 재산의 일부를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고, 훌륭한 목사님이든 신부님, 또는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을 초청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법문을 들어서 다시 한번 깨우치고, 각자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든 지장보살이든 그런 분들의 힘에 의지해서 잠시 고통을 면해 달라고 기원을 하고, 이런 것은 고인을 위해서도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도 매우 유의미한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음에 대해 어떤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식은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두려움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두려움 자체가 없으면 이러한 의식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두려움에서 생겨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의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서로 종교가 같든 다르든 또는 종교가 있든 없든,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49재에 참가할 때가 종종 있으니까 그 취지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