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이 갖는 의미가 불교의 정신과 같다고 해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불교적 삶은 세상과 함께하면서도 세상의 온갖 혼탁한 문제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 글의 제목인 진이(塵異)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불교적 삶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사람이 이렇게 초연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진여심(眞如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일상의 마음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뒤범벅되어 있지만, 그 본성인 진여심은 항상 청정 하고 영원하다.
이와 같은 본성의 이치에서 본다면 혼탁한 것은 혼탁한 대로, 청정한 것은 청정한 대로 모두가 평등하게 텅 비어 공적한 것이다.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도 단지 그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혼탁과 청정, 중생과 부처는 어디에서도 그 실체를 찾을 수 없는 허명(虛名) 이기 때문이다.
동안 상찰 선사는 「십현담」에서 한비자(韓非子)의 변화편(卞和篇)에 나오는 변화씨 (卞和氏)의 옥과 몸빛이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다는 진주를 그 예로 든다.
모두가 천하의 명옥(名玉)이며 유명한 구슬이다.
전국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라는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봉황이 돌 위에 깃들이는 것을 보고 그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였다. 자신이 가질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곧바로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감정가에게 감정을 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하였다.
화가 난 여왕은 월형(刖刑)이라는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주어 변화씨는 왼쪽 발을 잘렸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남은 오른쪽 발꿈치마저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끌어안고 초산 기슭에서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문왕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었다.
"세상에 죄를 짓고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대만이 그처럼 슬퍼하며 통곡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자 화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발뒤꿈치가 잘렸다고 통곡을 한 것이 아닙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보옥(寶玉)인데도 평범한 돌덩이로 단정하고, 그것을 바친 저를 사기꾼으로 취급한 것이 슬퍼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문왕은 즉시 훌륭한 세공인(細工人)을 찾아 변화씨(卞和氏)의 옥돌을 갈고 닦게 했다. 그러자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문왕은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名玉)을 화씨지벽(和氏之璧) 이라고 명명하였다.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다는 여주(驪珠), 곧 여의주 (如意珠) 또한 세상에 둘도 없이 진귀한 보물이다. 그 가치와 빛이 언제 어디서나 같다는 의미에서 사람의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동안 상찰 선사가 이 옥을 비유로 든 것과 같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도 그 내면에는 청정무구한 진여심이 참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다. 마치 화씨지벽이 겉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돌이지만 그 속은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인 것과 같다.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세상에 초연할 수 있는 이유와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마치 진흙 속에서 피지만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연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