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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② - 박지원 <열하일기>② ‘말과 사물’의 향연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48 15.03.18 10: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③ -

열하일기② ‘말과 사물’의 향연

 

우주적 통쾌함이 문장에 깃들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연암의 비전은 언제나 우주적 이치 혹은 생사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어

… 주체와 객체, 사건과 기억, 구술과 기록 사이 자유로이 오간 위대한 글쓰기

 

 

고북구장성의 위용. 연암은 <열하일기>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를 통해 특유의 산문정신과 글쓰기의 깊은 내면을 보여줬다.

 

 

18세기는 연암과 다산이라는 두 거성의 시대였다. 다산이 양적으로 가장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면, 연암은 질적으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연암으로 인해 한문은 ‘갈 때까지 갔다’고들 한다. 대체 어떤 경지이길래?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글에는 수많은 문체가 범람한다. 그것은 고문(古文)도 아니고 금문(今文)도 아니다. 정학(正學)도 아니고 소품체도 아니다.

 

고문과 금문, 정학과 소품문 ‘사이’, 이를테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글쓰기, 곧 ‘연암체’다. 타고난 자질에다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젊은 날을 유람과 지성으로 보내면서 갈고 닦은 실력일터, 그 내공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 <열하일기>다. 그러므로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글쓰기의 ‘로드맵’이다.

 

 

 

2 연암의 카리스마 넘치는 초상. 그는 글쓰기를 통해 주체와 객체를 통합하는 변증법적 정신세계의 진경을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선보였다.

3 <열하일기>는 정조 시대 하나의 ‘금서’로서 당시 조선 사회의 정신적 지체와 통념에 정면도전하는 패기를 담고 있다.

 

 

여행이 시작되자 연암은 말 위에서 수많은 ‘썰’을 풀어낸다.

“수십만 마디의 말이,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속에 쓰고, 소리가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매일 여러 권이나 되었다”(김혈조 역, 열하일기2, 471쪽) 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말과 사물’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때론 화려한 수사와 우아한 논리로, 때론 열정의 패러독스와 깨알 같은 유머로.

 

그림자와 메아리가 섞여 있다

 

천하의 문장 가운데 <주역>이나 <춘추>보다 더 훌륭한 저술은 없다.

“<주역>은 은밀하게 감추려 했고, <춘추>는 들춰내어 밝히려 했다.”

은밀하게 감추는 기법을 우언(寓言)이라 한다. 주역 64괘의 형상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산가지를 뽑아서 괘를 놓고 보면, 길흉화린이 ‘북채로 북을 치듯 신속하게 응답한다.’ 왜? 은밀히 숨기는 방법으로 이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반면, 드러내고 까발리는 기법은 외전(外傳)이 된다.

<춘추>에 나오는 사건들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지금껏 그 해석을 둘러싸고 온갖 ‘썰’이 난무하는 것일까? 들춰진 사실을 가지고 은밀한 뜻을 부여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구사한 저자는 다름 아닌 장자다. “<장자>라는 책을 외전이라고 여긴다면 실제와 가짜가 서로 섞여 있으며, 우언이라고 생각한다면 은밀하게 숨기는 방법과 들추어 까발리는 방법이 번갈아 바뀌니, 사람들이 그 실마리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어 궤변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끝내 폐할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이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열하일기서(序)>의 전반부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연암그룹의 일원인 유득공이다. 그가 보기에 열하일기는 천고에 드문 문장이다. 그걸 밝히자니 서론이 이렇게 길어진 것이다. 주역과 춘추에 빗대고, 장자를 끌어대던 그의 논변은 이렇게 이어진다.

 

“지금 저 연암 씨의 <열하일기>는… 요동벌판을 건너서 산해관으로 들어가고, 황금대의 옛터에서 서성거리며, 밀운성을 경유하여 고북구 장성을 빠져나가, 난하의 북쪽과 열하가 있는 백단현의 북쪽에서 마음대로 구경했다 하니, 진실로 그런 땅이 있었을 것이다. 또 청나라의 큰 학자들이나 운치 있는 선비들과 교유했다고 하니,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생김새가 사뭇 다르고 옷차림이 다른 사방의 외국인, 칼과 불을 입으로 삼키는 요술쟁이, 라마 불교인 황교와 그 승려인 반선, 난쟁이 등 <열하일기>에 나오는 인물은 비록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이긴 하지만, <장자>에서 말하는 도깨비나 물귀신과 같은 그런 부류는 아니다.”(<열하일기서>, 앞의 책1, 20∼23쪽)

 

그런데도 “나는 그게 무슨 책인지 모르겠”단다. 분명 사실만을 적었는데도 뜻이 아리송하고 해석이 분분하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열하일기>는 사‘ 실과 우언을 두루 갖추었으되 결국에는 이치로 귀결’되는 책이라는 것. 오호, 이 정도면 문장에 관한 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하지만 사실과 우언의 행간에서 이치를 찾아내는 건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의 글은 지극히 투명하지만 어떤 전제나 통념도 와해시켜버린다. 전제가 사라지고, 통념이 와해될 때 의미는 사방으로 분사된다.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것과 저것 ‘사이’, 혹은 그 ‘너머’로. 이른바 ‘지묵(紙墨)의 바깥에서 그림자와 메아리를 얻는’ 수법이 이런 것일 터, 열하일기가 늘 새롭게 변주되는 것도 이런 맥락의 소산이다.

 

 

난하(?河)는 만리장성 북쪽 개평(開平)이 발원지다. 동남쪽으로 흘러서 천안현을 거쳐 노룡새에 이른다. 연암은 말한다. “그 장관은 그림과 같지만 어찌 그림이 산수(山水)를 따를 것인가.”

 

 

<열하일기>는 ‘미시사’의 현장

 

“그대 길을 아는가?”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이 두 아포리즘은 <열하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화두’다. 전자는 강을 건너면서 던진 물음이고, 후자는 여행을 마칠 즈음 찾아낸 답이다. 보다시피 ‘답’이 더 어렵다. 해서, 이 답은 결론이 아니라 수많은 물음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입구다.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형국인 셈.

 

헌데, 여기서 주목할 사항이 하나 있다. 두 개의 아포리즘이 모두 대화체로 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 연암은 여행 내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덕분에 고매한 문명담론이건 자잘한 에피소드건 늘 타자의 목소리가 웅성거린다. 그 타자들 속에는 물론 자신도 포함된다. 자기야말로 진정한 타자가 아닌가.

 

중국 변방의 문물을 보고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듯한’ 폭풍 질투에 빠지거나 심양의 번화함을 자랑하기 위해 ‘꿈속에서 훨훨 날아’ 형님한테로 갔다가 가위에 눌려 버둥거리거나 변방의 중국인들에게 붓글씨 솜씨를 자랑하다 망신살이 뻗치거나, 등등. 이런 글쓰기가 가능하려면 사대부라는 권위, 지식인이라는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과연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비워 남을 들이는’ 순간 여행은 사건과 서사의 무대가 된다. 역사의 언저리를 멤돌던 ‘야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그런 순간이다.

 

강을 건너고 책문을 통과할 때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가 하나 등장한다. 상판사의 마두 득룡이. 열네살부터 북경에 드나들어 이번이 서른 번째나 된다. 중국어에 능통한데다 사신단의 모든 일정이 득룡이 아니면 감당할 사람이 없다.

 

6월 26일 새벽 무렵 안개를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득룡은 안개 속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금석산을 가리키며 ‘강세작(康世爵) 이야기’를 들려준다. 금석산은 강세작이 숨었던 곳이다.

때는 바야흐로 명·청 교체기. 당시 강세작의 나이는 열여덟 살로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다.

 

청나라가 무순을 함락시킬 당시 강세작 부자는 명의 군대를 따라 이동 중이었는데 청의 복병에 걸려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강세작의 아버지도 이때 전사했다. 강세작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뒤 조선에서 파견한 강홍립 진영에 투신했다. 하지만 이튿날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왼쪽 진영을 박살내고 말았다. 그러자 강홍립은 싸우지도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청나라 군대는 강홍립의 군사를 에워싼 뒤, 도망쳐온 명나라 군사를 샅샅이 색출하여 목을 베어 죽였다. 그 순간 강세작도 큰 바위 아래 결박되어 있었다. 근데, 이게 웬일! 그의 처형을 맡은 자가 깜박하고 그냥 가버린 것이다. 강세작은 조선 군사에게 좀 풀어달라고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조선 병사들은 서로 흘깃거리기만 할 뿐 감히 나서지를 못했다. 할 수 없이 강세작은 돌모서리에 등을 비벼서 밧줄을 끊은 뒤, 죽은 조선 군사의 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리고는 조선 군대로 들어가 죽음을 면했다.

 

다시 명나라 군대에 복귀하여 봉황성에 이르렀지만 거기도 역시 청에 의해 함락되고, 그 전투에서 강세작도 10여 군데 부상을 입었다. 이제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영 틀렸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동쪽 변방 조선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그는 싸움터를 벗어나 금석산 속에 숨어들었다.

양가죽 옷을 구워 나뭇잎에 싸서 먹으며, 두어 달을 버텼다. 그러다가 회령으로 굴러 들어가선 조선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고 살다가 팔십이 넘어 죽었다. 그 자손이 번성하여 백여 명이나 되지만 아직도 한 집에서 산다고 한다.

 

그야말로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사극 스페셜 하나는 거뜬히 차지하고도 남을 이야깃거리다. 그럼 득룡이와는 대체 어떤 관계? 강세작이 처음 조선으로 왔을 때 득룡의 집에 묵었다. 그때 득룡의 조부와 친구가 되어 서로 중국말과 조선말을 배웠다 한다. 오호라, 득룡이 ‘중국통’이 된 것도 이런 집안 내력 탓이었던 게다.

 

그럼 이런 이야기는 정사일까? 야사일까? 간단히 말하면, 정사와 야사,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미시사’라 할 수 있다. 소위 주류적 역사는 명과 청, 중화와 오랑캐, 중국과 조선 같은 거대한 선분으로 절단되지만 미시사는 그 선분을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아주 엉뚱한 ‘인간극장’을 연출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국경이나 민족 혹은 이념 따위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서 씨를 뿌리는 것, 곧 생명과 번식에 있을 뿐이다. 이런 존재는 한편으론 역사의 장강에 휩쓸려간 희생양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도도한 흐름에서 일탈하여 ‘옆으로 샌’ 진정한 승자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제국과 전쟁도 이 치열한 ‘생의 의지’를 박탈하진 못할 터이므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의 도성도. 북경을 거쳐 청 황제의 여름 궁전 열하에 이른 박지원은 청국 수도 북경을 묘사한 치밀한 리포트를 <열하일기> 속에 남겼다.

 

 

‘인정물태’의 종횡무진 파노라마

 

미시사의 또 다른 축은 풍속이다. 풍속이란 욕망의 선분이 다채롭게 교차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열하에서 만난 한족 선비 가운데 연암과 가장 깊이 우정을 나눈 이는 곡정 왕민호다. 그와 주고받은 필담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 그 속에는 ‘천하의 형세’에서 ‘월세계’, ‘야소교’ 같은 문명담론이 대세지만 사이사이에 조선과 중국의 풍속이 깨알같이 박혀 있다.

 

주류적 역사의 주인공이 남성이라면 풍속사의 주역은 단연 여성이다. 중국 여성들의 신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전족이다. 연암은 의아하기만 하다. 저 볼썽사납고 뒤뚱거리는 꼴이라니. 그에 대한 곡정의 해명. “명나라 시절엔 부모에게 그 죄를 물었고, 본조에 와서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끝내 이를 막을 수가 없었지요.”

 

대체 왜? “한족임을 알리고 싶은 게지요.” 헐~ 이걸 ‘민족혼’이라고 해야 하나. 여성의 ‘미친 존재감’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도 여성들은 킬힐을 고수할뿐더러 목숨이 위태로운 성형수술을 기꺼이 감내하지 않는가? 오로지 성적 매력을 뽐내기 위해서.

 

전족도 마찬가지다. 말로야 한족의 자긍심을 위한 것이라지만 그 유래를 따져보면 역시 성적 유혹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남당 시절 장소랑이라는 궁인이 송나라에 잡혀왔다. 발이 어찌나 작았던지 연꽃 위에서 춤을 추었을 정도란다. 송나라 궁녀들이 그걸 보고 완전 ‘꽂히고’ 말았다. 그때부터 헝겊으로 발을 꽁꽁 싸맨 것이 전족의 시작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전통이 되어 여성들의 신체를 옭아매기에 이른 것이다. 습속이 되는 순간 그것은 통치의 기제가 된다. 권력은 언제나 일상과 신체를 통해 작동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여성에게만 한정된 사항은 아니다. 변발이 대표적인 경우다. 청은 중원을 장악한 뒤 모든 남성에게 변발을 강요했다. 조선인들이 품었던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경멸도 주로 이 ‘헤어스타일’에 대한 것이 지배적이다. 그럼 변발 이전에는 어떠했는가? 그때는 또 두건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것 역시 강요된 패션이었다. 명나라 태조가 은밀히 한 도관에 거동했을 때 한 도사가 망건을 매어 머리칼을 싸매고 있는 것이 무척 편해 보였다. 그러자 이를 빌려 거울 앞에서 써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그 제도를 천하에 시행하게 되었다. 황제의 취향이 곧 모든 남성의 머리를 ‘죄다 그물 속에 가둔’ 셈이다. 전족이 족액이라면, 두건은 두액이다.

 

여기에 더해 또 하나의 액이 추가된다. 다름 아닌 담배. 곡정에 따르면 담배는 ‘가슴이 막히고 취해 쓰러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아메리카로부터 도래하여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차나 밥보다 더 즐기게 되었다. “쇠붙이와 불을 입에 당겨 대니 이보다 더 큰 변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구액이다. 족액과 두액과 구액, 이것을 일러 ‘삼액’이라 한다.

 

발을 묶고 머리를 죄고 입을 태우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이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는가? 솔직히 아무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런 류의 습속이 얼마나 많은가? 원인도 목적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묵수되는 것들이. 그래서 풍속이야말로 권력과 욕망, 지배와 복종, 안과 바깥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계보학적 승부처다.

 

드물긴 하지만, 성스캔들에 대한 것도 있다.

<피서록>의 한 대목에 점필재 김종직이 사방지를 풍자하여 지은 시가 나온다. 사방지는 종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여장을 하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고 다니며 바느질을 배웠다. 그 덕분에 조정 벼슬아치들의 집안을 출입했는데, 사헌부에서 풍문을 듣고 그를 체포했다.

평소에 간통을 했던 한 비구니를 심문하니, “그의 양물(성기)이 대단히 장대합니다.”

 

중국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방직이나 자수를 잘하고, 젊고 예쁘며, 신발과 버선이 네 치가 안 될 정도로 발이 작았다. 한 남자가 그 과부를 사모하여 자신의 아내와 짜고 덮쳤다.

과부의 목을 누르고 억지로 범하려고 한즉, 곧 남자였다. 관에 끌고가 국문을 하니, 이름은 상충(桑?), 나이는 스물 넷, 어려서부터 발에 전족을 했다고 한다. 황제가 요망한 인간이라고 하여 극형에 처하였다.

 

 

1 열하 청국 황제의 피서산장 전경. 열하는 장성 밖의 요충지로 강희제 때부터 이곳에 행차해 더위를 피했다. 황제는 이곳에서 때로는 책을 읽고 때로는 숲과 시내 사이를 거닐며 유유자적했다.

2 단원 김홍도가 그린 ‘담배 피는 서민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가슴을 막히게 하고 취해 쓰러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로서의 담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펼친다.

 

 

사물들과 함께 춤추다!

 

사방지나 상충은 요즘으로 치면 ‘트랜스젠더’에 해당한다. 물론 연암은 이에 대해 어떤 논평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 그런데 연암은 어쩌다 이런 이야기까지 주워담게 되었을까. 그게 바로 연암식 글쓰기다. 단지 여행의 체험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이 환기하는 각종 고사를 두루 망라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선분이 교차하다 보면 결국 인정물태가 범람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맛집에서 남 뒷담화하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역사의 이면을 장식하는 뒷담화, 그게 곧 풍속이자 ‘미시사’의 진경이다.

 

<열하일기>는 ‘이용후생’을 설파한 텍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소중화사상과 북벌론의 장벽을 뚫고 청문명의 역동성을 통해 개혁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이용후생’론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 중심으로 텍스트를 읽다 보면 열하일기의 고유성은 사라져 버린다. 연암과 다산을 ‘한통속’으로 보았던 것도 그런 식의 독법으로 인해서다.

 

그럼 열하일기의 특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바로 문체에서 찾아야 한다. 문체는 그저 내용물을 장식해주는 기교와 장식이 아니다. 문장에 리듬과 비트를 부여하는, 그리하여 서로 떨어져 있는 ‘말과 사물’을 긴밀하게 이어주는 능동적 실천이다.

 

7월 5일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또 머물러야 했다. 이때가 곧 이국의 문명을 관찰하고 익힐 수 있는 찬스다. 숙소 주인이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는다. 그 틈에 연암은 구들의 구조를 스케치한다.

초상화에 나오듯 코끼리처럼 예리한 눈으로. 구들 위에 놓여진 벽돌의 크기와 모양에서부터 굴뚝을 내는 방법, 그리고 불길이 굴뚝 속에서 퍼져나가는 원리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그 순간 구들장의 모든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근대문명의 기술지(知)와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근대 문명은 모든 사물을 ‘대상화’한다. 즉 쓰고 버려지는 소비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때 무미건조한 매뉴얼이 탄생한다. 매뉴얼에는 리듬도 활기도 없다. 왜? 대상과 오직 대상을 착취하고 이용할 뿐 교감할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체란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태도이자 윤리이기도 하다. 연암의 문명론을 글쓰기의 차원에서 음미해야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우리나라 온돌에는 여섯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내 한 번 얘기해볼 테니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보게나.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들지. 그 돌의 크기나 두께가 애초에 가지런하지 않으니 조약돌로 네 귀퉁이를 괴어서 뒤뚱거리지 않게 할 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불에 달궈지면 돌이 깨지고 발랐던 흙이 마르면 늘 부스러지네. 그게 첫 번째 문제점이야.

 

구들돌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움푹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니, 불을 때도 골고루 따뜻하지 못한 게 두 번째 문제점이야. …허나, 중국 온돌의 구조를 보게나. 자네와 함께 벽돌 수십 개만 깔아 놓으면,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몇 칸 온돌이 만들어져서 그 위에 누워 잘 수 있을 걸세. 어떤가?”(<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 129∼130쪽)

 

 

여기서도 역시 대화체로 진행된다. 그래서 이 ‘온돌론’도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진흙과 돌, 구들과 불, 땔감 등이다. 이 사물들은 서로 어울리고 부딪치면서 온돌이라는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낸다. 이때 온돌은 그저 무형의 시설이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일상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말을 다루는 도’를 터득하다

 

 

말을 탄 청나라 관리의 모습. <열하일기>에서 청국의 관원은 황제의 명령을 열정적으로 이행하는 충직한 존재로 묘사된다.

 

 

동물에 대한 묘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낙타나 코끼리처럼 난생 처음 보는 기이한 동물은 물론이고 여행 내내 연암과 함께 했던 말에 대한 성찰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야삼경 깊은 밤에 고북구 장성을 나와 물가에 이르렀을 때다. 강이 어찌나 험난한지 무려 아홉 번이나 건너고 나서야 겨우 물을 나설 수 있었다. 그 위기를 벗어나면서 연암은 ‘말을 다루는 도’를 터득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말 다루는 방법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옷소매는 넓고 한삼 역시 긴 탓에 두 손이 휘감겨 고삐를 잡거나 채찍을 휘두를라치면 몹시 거추장스러운 것이 첫 번째 위태로움이다. 그래서 부득이 다른 사람으로 견마를 잡게 하니 온 나라의 말이 졸지에 병신이 되어버린다. 이에 고삐를 잡은 자가 항상 말의 한쪽 눈을 가려서 말이 자유롭게 달릴 수 없음이 두 번째 위태로움이다.

 

말이 길에 나서면 그 신중하고 조심함이 사람보다 더하다. 그럼에도 사람과 말이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까닭에 마부는 자신이 편한 땅을 디디고 말은 늘 구석진 곳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므로 말이 거칠게 치받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평소 늘 사람에 대한 노여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번째 위태로움이다.”(같은 책, 하권, 177쪽)

 

이런 식으로 무려 여덟 가지의 위태로움이 나열된다. 여기서 포인트는 말의 효용성이 아니다. 말과 사람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존의 지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말의 속도와 감응을 터득해야 한다. 이름하여 ‘말-되기’! 그의 어조가 타령을 읊듯 리듬과 비트를 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럼 이런 글쓰기는 기술지의 영역인가? 아니면 철학적 잠언인가? 왜 이런 우문을 던지느냐면 흔히 기술지는 글쓰기의 영역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의사들이 글쓰기와 담을 쌓는 것도 그런 맥락이리라.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건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맺는 관계에 있다.

 

“독서란 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모리스 블랑쇼)라는 말이 있듯이, 글쓰기의 역능 또한 사물과 함께 춤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솔직히 기술지만큼 글쓰기와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좋은 예로, <동의보감>은 의학적 임상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와 노래로 표현한다). 자연의 물리적 법칙이 생활의 현장과 마주칠 때 그것을 일러 소위 기술이라 하고 문명이라 하지 않는가. 기술에도 윤리와 철학이 필요하듯, 사물도 ‘일상의 향연’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글자는 군사요, 글자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요, 고사의 인용은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소단적치인>) 이것이 연암의 글쓰기 전략이다. 글쓰기가 병법이라면 목표는 간단하다. 적을 제압하는 것. 그걸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암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가장 흔하게 쓴 전략은 ‘줍는’것. 연암은 길 위에서 틈나는 대로 ‘말들’을 줍는다. 전설과 민담, 야담과 실화 등등 연암은 닥치는 대로 주워서 한편의 글로 버무려낸다. 많은 글이 그렇게 탄생했다.

 

 

연암은 <열하일기> 속 단편소설 ‘호질(虎叱)’을 통해 ‘이중적 인간’ 양반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글쓰기와 병법-줍고 훔치고 가로채고

 

또 하나는 ‘훔치는’ 것. 가장 압권은 역시 <호질>이다. 산해관을 통과한 뒤 관 안에서 저잣거리를 배회하다 한 점포에서 발견한 절대기문, 그것이 호질이다. 연암은 한눈에 반한다. 그래서 정진사와 함께 전문을 베낀다. 정진사는 ‘어리바리’ 캐릭터의 대명사다.

 

당연히 대충 베꼈다. 덕분에 연암이 다시 문맥에 맞게 수정·윤색을 가했다. 이 멘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학자가 이 작품이 연암의 창작인가 아닌가를 놓고 왈가왈부했던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창작 여부보다 글쓰기의 탄생 현장이다. 똥부스러기와 기와조각을 가지고도 최고의 명제를 만들어내는 그에게 <호질> 같은 기문은 그야말로 대박이다.

 

하지만 그건 <호질>이라는 텍스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절대기문이라 한들 연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으리라. 변방의 한 장터에서 점포 주인의 손에 옮겨진 뒤 벽을 장식하고 있을 때 이 문장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리라.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존재를. 자신들을 세상에 흘러갈 수 있게 해줄 ‘전령사’를. 그런 점에서 연암과 <호질>의 마주침은 운명이었다.

 

근대적 글쓰기는 주체가 일방적으로 글을 생산하는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일찍이 이옥이 설파했듯이,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나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다.” 글은 천지만물에 깃든 기운이요, 정보의 흐름이다. 그것이 특정한 신체적 흐름과 접속할 때 언어적 기호가 되어 세상에 흘러나온다. 저자와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마주침이 곧 글이다. 그런 점에서 연암이 최고의 문장가가 된 건 무엇보다 그 신체적 유연성에 있다.

 

그의 글쓰기가 예측불허의 방향성을 지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마주침을 어떻게 미리 측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시절인연에 맡기는 수밖에. <허생전>이 탄생하는 과정은 더더욱 기묘하다. 그 원전에 해당하는 <옥갑야화>는 비장들과 더불어 밤새 노닐면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문제의 <허생전>은 여러 이야기 중의 하나다. 솔직히 앞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다. 그러면 이 글들은 연암의 작품인가, 아닌가? 어찌됐든 열하일기에 실렸으니 연암이 ‘가로채기’를 한 셈이다.

게다가 <허생전> 자체도 연암의 창작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윤영이라는 노인에게서 들은 것이다. 그 이야기는 원전 그대로일까, 아닐까?

 

오랫동안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문득 중국의 한 객관에서 연암의 입을 통해 ‘토해진’ 것이니 말이다. 한마디로 주체와 객체, 사건과 기억, 구술과 기록 사이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뭐 이따위 글쓰기가 다 있느냐고 따진다면 연암은 이렇게 답하리라. “병법을 잘 아는 이에게는 버릴 병졸이 없고, 문장을 잘 짓는 이에게는 가려 쓸 글자가 없다” “변통하는 방편은 ‘때’에 달렸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이국의 풍물에서 세상의 심연 통찰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또 있겠는가?”

정조대왕의 말이다. 과연 호학군주답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소개하면, 첫째, ‘고전을 통해 진리를 배운다.’ 둘째, ‘탐구를 통해 문제를 밝힌다.’ 셋째, ‘호방한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낸다’.

 

“이것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안대회, <정조치세어록>)이라는 것. 글쓰기의 통쾌함이라! 그것도 ‘우주적 통쾌함’이라니, 그건 곧 ‘도(道)’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 시대야 글쓰기가 한낱 테크닉으로 전락했지만, 조선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글쓰기란 인간의 보편적 활동이었다. 하여, 글쓰기의 비전은 언제나 우주적 이치 혹은 생사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었다.

 

‘야출고북구기’와 ‘일야구도하기’는 열하일기가 낳은 최고의 명문장이다. 전자는 고북구 장성에 흐르는 ‘원혼들의 비가’요, 후자는 생사의 경계에서 터득한 ‘명심(冥心)의 도’다. 둘 다 죽음에 대한 탐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죽음이란 삶에 대한 통념을 전복하는 사유의 장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주옥 같은 묘비명이 그 증좌이다. 열하일기가 이국의 풍물 속에서 언제나 심연에 대한 통찰을 오버랩시킬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때려죽이니, 그 코야말로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데가 없어 하늘을 우러러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서운 존재라 말한다면 조금 전에 말한 바 이치가 아니다.”(‘상기’, 위의 책 하권, 332쪽)

 

“요술의 술법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요술이 있으니, 그것은 크게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것과… 웃음 속에 칼을 품는 것이 입 속으로 칼을 삼키는 것보다 더 혹독한 일이 아닐까요?”(‘환희기’, 같은 책, 343쪽)

 

앞의 글은 코끼리를 통해 본 차이의 철학이고, 뒤의 것은 요술의 기예를 통해 본 정치적 윤리다. 만물의 법칙과 정치적 윤리는 서로 맞물려 있다. 물리와 윤리의 매끄러운 일치! 이 천지의 유동적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주적 통쾌함’일 터, 열하일기가 시공을 넘어 글쓰기의 지도가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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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평론가의 "썰"이 대단하다.

 

열하일기는 아래 주소 "한국고전 종합DB" 에 번역서와 원문을 모두 볼 수 있다.

고전번역서 → 서명별 <아> →연암집 → 열하일기 순으로 .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열하일기 > 피서록(避暑錄) > 피서록(避暑錄) >

 

피서록(避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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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에 떠드는 말 하간전 외는 소리 / 街頭喧誦河間傳

규중의 슬픈 노래 양백화가 이 아니야 / 閨裏悲歌楊白花

 

이 시는 곧 점필재(?畢齋)가 사방지(舍方知)를 풍자한 것이다.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년(1463년)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

 

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도 역시 이보다 먼저(뒤인 것을 잘못 센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오군(吳郡)양순길(楊循吉)의 《봉헌별기(蓬軒別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년)에 경사(京師)에 과부 하나가 여공(女紅)에 능란하고 젊고도 예쁘며, 또 신이나 버선이 네 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모든 부귀가에서 서로 맞이하여 수놓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자를 보면 문득 부끄러운 빛으로 회피하기도 하려니와, 밤이면 그에게 배우는 여자와도 서로 자누이되 자물통을 튼튼히 잠그곤 한다. 그러므로 남들은 더욱이 그가 자기 몸조심에 가장 엄격하다고 믿었다.

이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아무개가 그를 연모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의 집에 맞이하고, 가만히 그 아내에게 타일러 밤들어 문을 열고 거짓으로 뒷간에 가는 듯이 하고는,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끄니 과부는 고함을 치자, 그는 과부의 목덜미를 껴안고는 강탈한즉 곧 남자인지라 구속하여 관청에 보내어 조사하니,

그의 성은 상(桑)이요, 이름은 중(?)이며, 나이는 24세인데 어릴 때부터 발을 싸 매었다 한다. 법사(法司)가 그 옥사를 위에 아뢰었더니 헌종 황제(憲宗皇帝)가 이는 ‘인요(人妖)’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연암집(燕巖集) > 燕巖集卷之十四○別集 > 熱河日記 >避暑錄

 

街頭喧誦河間傳。閨裡悲歌楊白花。

此?畢齋刺舍方知也。舍方知者。私賤也。自幼爲女服。傅粉脂。學剪製。及長。出入朝士家。天順七年春。憲府風聞。逮訊其素所私一尼。尼曰。陽道壯也。令女醫班德?之。永順君溥,河城尉鄭顯祖雜驗之。

皆吐舌曰。壯也。

當時中朝。亦先有此。

 

吳郡楊循吉蓬軒別記。

 

成化庚子。京師有寡婦。善女紅。少而艾。履襪不盈四寸。諸富貴家相薦。引以敎刺繡。見男子輒羞避。夜與從敎者寢處。謹鎖?。人益信其嚴於自防。庠生某慕之。乃以厥妻。始爲妹延寡至家。潛戒其妻。夜啓戶。佯如?。生遽入滅燭。寡大呼。生扼其?。强犯之則男子也。繫送于官。鞫之。

姓桑名?。年二十四。自幼纏足。法司上其獄。憲宗皇帝以爲人妖。置諸極典。

 

 

 

 

 

열하일기(熱河日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 산장잡기(山莊雜記) >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에 이르는 데는 창평(昌平)으로 돌면 서북쪽으로는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게 되고, 밀운(密雲)을 거치면 동북으로 고북구(古北口)로 나오게 된다. 고북구로부터 장성(長城)으로 돌아 동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7백 리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기는 2백 80리로서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요(險要)로서는 고북구 만한 곳이 없다. 몽고가 출입하는 데는 항상 그 인후가 되는데 겹으로 된 관문을 만들어 그 요새를 누르고 있다. 나벽(羅壁) 001]의 지유(識遺)에 말하기를,

 

“연경 북쪽 8백 리 밖에는 거용관이 있고, 관의 동쪽 2백 리 밖에는 호북구(虎北口)가 있는데, 호북구가 곧 고북구이다.”

하였다. 당(唐)의 시초부터 이름을 고북구라 해서 중원 사람들은 장성 밖을 모두 구외(口外)라고 부르는데, 구외는 모두 당의 시절 해왕(奚王 오랑캐의 추장)의 근거지로 되어 있었다.

《금사(金史)》를 상고해 보면,

 

“그 나라 말로 유알령(留斡嶺)이 곧 고북구이다.”

 

했으니, 대개 장성을 둘러서 구(口)라고 일컫는 데가 백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산을 의지해서 성을 쌓았는데, 끊어진 구렁과 깊은 시내는 입을 벌린 듯이 구멍이 뚫린 듯이 흐르는 물이 부딪쳐 뚫어지면 성을 쌓을 수 없어 정장(亭?) 002]을 만들었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시절에 수어(守禦) 천호(千戶)를 두어 오중관(五重關)을 지키게 했다. 나는 무령산(霧靈山)을 돌아 배로 광형하(廣?河)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 나가는데, 때는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다. 중관(重關)을 나와서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 길이나 되었다. 필연(筆硯)을 끄집어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쓰되,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朴趾源)이 이곳을 지나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으면서,

 

“나는 서생(書生)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

했다.

옛적에 몽 장군(蒙將軍 몽염(蒙恬))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임조(臨?)로부터 일어나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는데, 그 중에는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으니, 이제 그가 보니 그가 산을 헤치고 골짜기를 메운 것이 사실이었다.

 

슬프다. 여기는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운 전쟁터이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유수광(劉守光)003]을 잡자 별장(別將) 유광준(劉光濬)은 고북구에서 이겼고, 거란의 태종(太宗)이 산 남쪽을 취할 적에 먼저 고북구로 내려 왔다는 데가 곧 이곳이요,

여진(女眞)이 요(遼)를 멸망시킬 때 희윤(希尹 여진의 장수)이 요의 군사를 크게 파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요, 또 연경을 취할 때 포현(蒲? 여진의 장수)이 송의 군사를 패한 곳도 여기요, 원 문종(元文宗)이 즉위하자 당기세(唐其勢 여진의 장수)가 군사를 여기에 주둔했고, 산돈(撒敦 여진의 장수)이 상도(上都) 군사를 추격한 것도 여기였다.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004]가 쳐들어 올 때 원의 태자는 이 관으로 도망하여 흥송(興松)으로 달아났고, 명의 가정(嘉靖) 연간에는 암답(俺答 미상)이 경사(京師)를 침범할 때도 그 출입이 모두 이 관을 경유했다. 그 성 아래는 모두 날고 뛰고 치고 베던 싸움터로서 지금은 사해가 군사를 쓰지 않지만 오히려 사방에 산이 둘러 싸이고 만학(萬壑)이 음삼(陰森)하였다.

때마침 달이 상현(上弦)이라 고개에 걸려 떨어지려 하는데, 그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 세운 칼날 같았다. 조금 있다가 달이 더욱 고개 너머로 기울어지자 오히려 뾰족한 두 끝을 드러내어 졸지에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횃불 두 개가 산 위에 나오는 것 같았다.

북두(北斗)는 반 남아 관 안에 꽂혀졌는데, 벌레 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은 숙연(肅然)한데,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그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 놓은 것 같고, 큰 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하늘 밖에 학이 우는 소리가 대여섯 번 들리는데, 맑고 긴 것이 피리소리 같아 혹은 이것을 거위소리라 했다.

 

 

[주C-1]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 ‘다백운루본(多白雲樓本)’에는 도고북구하기(渡古北口河記)로 되어 있다.

[주D-001]나벽(羅壁) : 송의 학자. 자는 자창(子蒼).

[주D-002]정장(亭?) : 요새(要塞)같이 만들어 사람의 출입을 검열하는 곳.

[주D-003]유수광(劉守光) : 후량(後梁)의 장수로서 뒤에 연(燕)의 황제라 자칭하였다.

[주D-004]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 : 몽고 사람. 원실(元室)의 지예(支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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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莊雜記

 

夜出古北口記

 

自燕京至熱河也。道昌平則西北出居庸關。道密雲則東北出古北口。自古北口循長城。東至山海關七百里。西至居庸關二百八十里。中居庸山海而爲長城險要之地。莫如古北口。蒙古之出入常爲其咽喉。則設重關以制其?塞焉。羅壁識遺曰。

燕北百里外。有居庸關。關東二百里外。有虎北口。虎北口。卽古北口也。

自唐始名古北口。中原人語長城外。皆稱口外。口外皆唐時奚王牙帳。按金史。

國言稱留斡嶺。乃古北口也。

?環長城稱口者。以百計。緣山爲城而其絶壑深磵。??陷。水所衝穿則不能城而設亭?。

 

皇明洪武時。立守禦千戶所。關五重。余循霧靈山。舟渡廣?河。夜出古北口。時夜已三更。出重關。立馬長城下。測其高可十餘丈。出筆硯?酒磨墨。撫城而題之曰。

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夜三更。

朝鮮朴趾源過此。乃大笑曰。

乃吾書生爾。頭白一得出長城外耶。

昔蒙將軍自言吾起臨?。屬之遼東。城塹萬餘里。此其中不能無絶地脈。今視其塹山塡谷。信矣哉。

 

噫。此古百戰之地也。

後唐莊宗之取劉守光也。別將劉光濬克古北口。契丹太宗之取山南也。先下古北口。

女眞滅遼。希尹大破遼兵。卽此地也。其取燕京也。蒲?敗宋兵。卽此地也。元文宗之立也。唐其勢屯兵於此。撒敦追上都兵於此。

禿堅帖木兒之入也。元太子出奔此關趨興松。明嘉靖時。俺答犯京師。其出入皆由此關。其城下乃飛騰戰伐之?。而今四海不用兵矣。猶見其四山圍合。萬壑陰森。

時月上弦矣。垂嶺欲墜。其光?削。如刀發?。少焉月益下嶺。猶露雙尖。忽變火赤。如兩炬出山。

北斗半揷關中。而蟲聲四起。長風肅然。林谷俱鳴。其獸?鬼?。如列戟摠干而立。河瀉兩山間鬪?。如鐵駟金鼓也。天外有鶴鳴五六聲。淸?如笛聲長。或曰。此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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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우리나라 선비들은 생장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강역(疆域)을 떠나지 못했으나, 근세의 선배로서 오직 김가재(金稼齋)001]와 내 친구 홍담헌(洪湛軒)이 중원의 한 모퉁이를 밟았다.

전국(戰國) 시대 일곱 나라에서 연(燕)이 그 중의 하나인데 우공(禹貢)의 구주(九州 《서경(書經)》의 편명)에는 기(冀)가 이 하나이다. 천하로써 본다면 가위 한 구석의 땅이지만 원과 명을 거쳐 지금의 청에 이르기까지 통일한 천자들의 도읍터로 되어 옛날의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과 같다.

소자유(蘇子由)002]는 중국 선비지만 경사(京師)에 이르러 천자의 궁궐이 웅장함과 창름(倉?)ㆍ부고(府庫)와 성지(城池)ㆍ원유(苑?)가 크고 넓은 것을 우러러 보고 나서 천하의 크고 화려한 것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거늘, 하물며 우리 동방 사람으로서야 한번 그 크고 화려한 것을 보았다면 그 다행으로 여김이 어떠했으리요. 지금 내가 이 걸음을 더욱 다행으로 생각한 것은 장성을 나와서 막북(漠北)에 이른 것은 선배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깊은 밤에 노정(路程)을 따라 소경같이 행하고 꿈속같이 지나다 보니 그 산천의 형승(形勝)과 관방(關防)의 웅장하고 기이한 것을 두루 보지 못했다. 때는 가을 달이 비끼어 비치고, 관내(關內)의 양쪽 언덕은 벼랑으로 깎아 섰는데, 길이 그 가운데로 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膽)이 작고 겁이 많아서 혹 낮에도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조그만 등불을 만나더라도 미상불 머리털이 움직이고 혈맥이 뛰는 터인데, 금년 내 나이 44세건만 그 무서움을 타는 성질이 어릴 때나 같다. 이제 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섰는데, 달은 떨어지고 하수(河水)는 울며,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이 날아서 만나는 모든 경개가 놀랍고 두려우며 기이하고 이상하였건만 홀연히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고 기흥(奇興)이 발발(勃勃)하여 공산(公山)의 초병(草兵)003]이나 북평(北平)의 호석(虎石)004]도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하니, 이는 더욱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

한스러운 바는, 붓이 가늘고 먹이 말라 글자를 서까래만큼 크게 쓰지 못하고, 또 장성의 고사(故事)를 시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동리에서 다투어 병술로 위로하며, 또 열하의 행정(行程)을 물을 때에는, 이 기록을 내 보여서 머리를 모아 한 번 읽고 책상을 치면서 기이하다고 떠들어 보리라.

 

 

[주C-001]야출고북구기후지(夜出古北口記後識)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주D-001]김가재(金稼齋) : 조선 문학가 김창업(金昌業). 가재는 그의 별호인 노가재(老稼齋)의 준말.

[주D-002]소자유(蘇子由) : 송의 문학가 소철(蘇轍). 자유는 그의 자.

[주D-003]초병(草兵) : 팔공산(八公山)에 서 있는 풀까지도 군사로 보였다는 부견(符堅)의 고사.

[주D-004]호석(虎石) : 한(漢)의 이광(李廣)이 우북평(右北平)의 바위를 범으로 보고서 활을 쏘았다는 고사.

 

我東之士。生老病死。不離疆域。近世先輩唯金稼齋。吾友洪湛軒。踏中原一隅之地。

戰國時七國。燕其一也。禹貢九州。冀乃一也。以天下視之。可謂一隅之地。而自元皇明至今淸。爲一統天子之都。如古之長安洛陽。

蘇子由中國之士也。猶自幸其至京師。仰觀天子宮闕之壯與倉?府庫城池苑?之富且大而後。知天下之巨麗。?如我東之士。一得巨麗之觀。其所自幸。當如何哉。今余此行。尤有自幸者。出長城至漠北。先輩之所未?有也。

 

然而深夜追程。?行夢過。其山川之形勝。關防之雄奇。未得以周覽。時微月斜照。關內兩崖。百丈壁立。路出其中。

余自幼時。膽薄性怯。或晝入空室。夜遇昏燈。未?不髮動脈跳。今年四十四。其畏性如幼時也。今中夜獨立於萬里長城之下。月落河鳴。風凄燐飛。所遇諸境。無非可驚可愕。可奇可詭。而忽無畏心。奇興勃勃。公山草兵。北平虎石。不動于中。是尤所自幸者也。

所可恨者。筆纖墨焦。不能大書如椽。且未及題詩爲長城故事也。及東還之日。里中爭以壺酒相勞。且問熱河行程。爲出此記。聚首一讀。競拍案叫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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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하수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 승(萬乘)과 전기(戰騎) 만 대(萬隊)나 전포(戰砲) 만 가(萬架)와 전고(戰鼓) 만좌(萬座)로서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흘연(屹然)히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蛟?)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宮)과 우(羽)에 맞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지금 나는 밤중에 한 강을 아홉 번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을 뚫고 유하(楡河)와 조하(潮河)ㆍ황화(黃花)ㆍ진천(鎭川) 등 모든 물과 합쳐 밀운성 밑을 거쳐 백하(白河)가 되었다. 나는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하류(下流)였다. 내가 아직 요동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이라, 뜨거운 볕 밑을 가노라니 홀연 큰 강이 앞에 당하는데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 끝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대개 천리 밖에서 폭우(暴雨)가 온 것이다. 물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우러러 하늘을 보는데, 나는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머리를 들고 쳐다 보는 것은 하늘에 묵도(?禱)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물이 돌아 탕탕히 흐르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눈은 강물과 함께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가 나면서 물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늘에 비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 함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랴.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물소리도 듣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요동 들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물소리가 크게 울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니,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다시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강이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을 삼으니, 이제야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판단한 터이므로 내 귓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禹)는 강을 건너는데, 황룡(黃龍)이 배를 등으로 떠받치니 지극히 위험했으나 사생의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밝고 보니,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크거나 작거나가 족히 관계될 바 없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나는 또 우리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을 증험해 보고 몸 가지는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한 것을 자신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연암집(燕巖集) > 燕巖集卷之十四○別集 > 熱河日記

 

一夜九渡河記

 

河出兩山間。觸石鬪?。其驚濤駭浪。憤瀾怒波。哀湍怨瀨。?衝卷倒。嘶哮號喊。常有?破長城之勢。戰車萬乘。戰騎萬隊。戰砲萬架。戰鼓萬坐。未足諭其崩?潰壓之聲。

沙上巨石。屹然離立。河堤柳樹。?冥鴻?。如水祗河神。爭出驕人。而左右蛟?。試其?攫也。或曰。

此古戰?。故河鳴然也。

此非爲其然也。河聲在聽之如何爾。

余家山中。門前有大溪。每夏月急雨一過。溪水暴漲。常聞車騎砲鼓之聲。遂爲耳?焉。

余?閉戶而臥。比類而聽之。深松發?。此聽雅也。裂山崩崖。此聽奮也。群蛙爭吹。此聽驕也。萬筑迭響。此聽怒也。飛霆急雷。此聽驚也。茶沸文武。此聽趣也。琴諧宮羽。此聽哀也。紙?風鳴。此聽疑也。皆聽不得其正。特?中所意設而耳爲之聲焉爾。

 

今吾夜中一河九渡。

河出塞外。穿長城會楡河潮河。黃花鎭川諸水。經密雲城下。爲白河。余昨舟渡白河。乃此下流。余未入遼時。方盛夏。行烈陽中而忽有大河當前。赤濤山立。不見涯?。?千里外暴雨也。渡水之際。人皆仰首視天。余意諸人者仰首默禱于天。久乃知渡水者。視水??洶蕩。身若逆溯。目若沿流。輒致眩轉墮溺。其仰首者非禱天也。乃避水不見爾。亦奚暇默祈其須臾之命也哉。其危如此而不聞河聲。

皆曰 遼野平廣。故水不怒鳴。

此非知河也。遼河未?不鳴。特未夜渡爾。晝能視水。故目專於危。方??焉。反憂其有目。復安有所聽乎。

今吾夜中渡河。目不視危則危專於聽。而耳方??焉。不勝其憂。吾乃今知夫道矣。冥心者。耳目不爲之累。信耳目者。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今吾控夫。足爲馬所踐。則載之後車。遂縱?浮河。攣膝聚足於鞍上。一墜則河也。以河爲地。以河爲衣。以河爲身。以河爲性情。於是心判一墜。吾耳中遂無河聲。凡九渡無虞。如坐臥起居於?席之上。

 

昔禹渡河。黃龍負舟至危也。然而死生之辨。先明於心。則龍與??。不足大小於前也。聲與色外物也。外物常爲累於耳目。令人失其視聽之正如此。而?人生涉世。其險且危。有甚於河。而視與聽。輒爲之病乎。吾且歸吾之山中。復聽前溪而驗之。且以警巧於濟身而自信其聰明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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