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제사(忌祭祀)
일요일 오후, 둘째 내외와 셋째 내외가 왔다. 주말마다 번갈아 일산 본가(本家)를 찾자는 저들끼리의 약속에 따라, 온 모양이다. 밖에서 식사하고 들어와 아들 둘과 나는 거실에, 두 며느리와 아내는 안방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오늘 아들들과 의논할 일은 열흘 후에 있을 기제사에 관한 것이다. 장마에 날씨도 무더우니 손이 많이 가는, 전(煎)을 비롯한 몇 가지를 외부에다 주문하고,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니 3세대인 손주들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걸로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좋다고들 했다. 한데, 여느 때와 달리 아들들의 대답이 심드렁하게 맥이 빠져 있었다.
원래 우리 집에는 제사가 없었다. 부모님 제사를 큰집 조카들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의 시작은 20여 년 전 내가 일산 신도시로 이사 오고 나서였다. 문중 어른들이 족보상 내가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되어 있으니 그 집 제사를 모셔야 한다고 했다. 작은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문중 어른들의 뜻을 받들기로 했다. 그때 두말없이 제사를 받아준 아내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삼부자의 의논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셋째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제수를 준비하는 쪽은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약간 상기된 모습의 아내가 나타났다.
“작년에 제사가 끝난 뒤 올해부터는 기제사는 지내지 않는다고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돌아가신 지 90년이 넘으면 원래 기제사는 모시지 않는 것이야!” 논의해 보자는 게 아니고 이미 결정되었으니 그리 알라는 투의 억양이었다. 이쯤 되면 시쳇말로 게임 끝이다. 나는 손자며느리를 셋씩이나 본 노마님(?)을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중에 아내의 뜻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내 못지않게 내 목소리도 높고 당당할 때가 있었다.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절대권력, 내 한마디는 가족들이 곧장 지켜야 하는 서릿발 같은 법령이었다. 그 시절 가족들에게 미치는 내 영향력은 아마 병영 안에서의 사단장 권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아내는 사단장 말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중대장쯤이었을 것이다.
그처럼 막강하던 파워가 저물기 시작한 것은 아마 내가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60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모두 좋은 일터를 얻은 다음 결혼해서 손주들이 줄줄이 태어나고, 가장이 돈을 더 벌어오지 않아도 되는 태평성대(?)가 도래하면서 내 말발은 차츰 힘을 잃기 시작한 것 같다. 반면에 전업주부인 아내의 말발은 그때부터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해,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지금의 목청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한데, 작년 기제사 후에 올해부터 기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를 나는 듣지 못했다. 아마 제사 후에 안방에서 며느리들에게만 한 말일 것이다. 그랬다면 며느리들은 당연히 제 남편에게 얘기했을 터, 그래서 좀 전 거실에서의 내 얘기에 대한 아들들의 반응이 심드렁했던 모양이다. 온 식구가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허허, 화를 낼 법도 한데 어째서 웃음이 나오는 걸까.
십여 년 전 강남 쪽 어느 할머니들 모임에서 “밤에 드리는 기제사는 우리 대에서 끝내자.”라고 뜻을 모았다는 얘기가 인터넷을 타고 널리 퍼지면서 수도권의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호된 시집살이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게 밤중에 올리는 기제사였기에 며느리들에게는 그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영향이었는지 아내도 “기제사는 내 살아 있을 때 만이다.”를 며느리들에게 다짐하곤 했었다. 한데, 오래 사는 장수 시대라 그 ‛우리 대’가 쉬 끝나지 않고 계속되다 보니, 예의 그 강남 쪽 할머니들이 다시 모여 ‘우리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당장 기제사를 그만두자,’ 라는 메시지라도 올린 것일까. 그렇다면 그게 카톡 사발통문을 타고 일산의 우리 집에까지 날아왔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돌아가신 지 90년이 넘으면 기제사는 모시지 않아도 된다.’라고 한 말은 내 양부와 그 윗대 어른들이 돌아가신 지 90년이 넘었다는 사실만이 아닐 것이다. 90년의 세월, 1대를 30년으로 치면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된다. 제사의 큰 뜻이 고인에 대한 추모에 있다면 손자의 뇌리에 고인과의 추억이 생생히 살아있는 할아버지 대까지만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내는 지금쯤 나를 위로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목청은 높지만, 마음은 따뜻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조상님들께 잘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4월 청명 한식 절이면 음식을 장만해서 온 가족에다 조카들 식구까지 합해 전세 버스로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성묘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음력 10월 상달에 올리는 문중 시제에도 천 리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합니다. 그리고 밤중 기제사는 지내지 않지만, 명절 차례상은 제가 계속 올릴 것입니다. 이만하면 조상님들도 노여워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제사 문제는 워낙 휘발성이 강해서 잘못 건드리면 곧바로 폭발해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 친척 중에 제사 문제로 형제끼리 다투다가 서로 외면하며 남남처럼 사는 분들도 있다. 이제 우리 집에서는 기제사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에 따른 후속 조치는 서둘러야 한다. 먼저 가족들에게 자초지종 경위를 설명하는 문자를 띄우고 제사 때마다 참석하던 장조카에게도 전화로 경위를 설명해야 한다.
추석 명절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아내는 지금부터 조금씩 차례상 준비를 할 것이다. 나도 아래위층 청소는 물론 앞마당과 뒤꼍까지 깨끗하게 다듬어야 한다, 올해는 손자며느리 셋이 새 식구로 들어와 해외에 있는 셋을 빼고도 열여덟 가족이다. 온 집안이 떠나갈 듯 왁자지껄할 걸 생각하니 벌써 맞선 앞둔 총각처럼 콩닥콩닥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에세이문학 2020년 겨울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