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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리대금업-이화승
<작품소개>
<작가소개>
<작품 요약과 감상>r
중국의 고리대금업-이화승
중국의 민간 금융기관이 역사적으로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는지를 통해 중국의 상업적 전통을 살펴봤다. 전당포로 대표되는 중국의 대금업은 3∼4세기 경 사원경제에서 비롯됐다. 승려들이 안정적인 수도생활을 위해 사원으로 몰려드는 자금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신도들에게 대금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후 송, 원, 명, 청 등을 거치면서 그 형태는 조금씩 변화했지만 20세기 초 서양의 근대식 은행이 들어오기 전까지 유일한 금융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북조시대의 불교사원에 의해 시작된 대금업은 당대에 와서 더 다양하게 발전해 대금에 관한 법령이 실시되고 보증이 일반화됐다고 한다. 이후 화폐경제와 대상의 출현으로 전당포는 더욱 활성화됐는데, 이에 따라 전당업자들끼리 자율적 조직을 만들어 독점적인 권리를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 열강의 진출, 아편전쟁에서의 패배 등으로 중국은 문호를 강제로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이 와중에 등장한 '은행'에 의해 전당포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 책은 일반 백성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나 부정적 선입견 때문에 조명 받지 못한 전당포를 통해 중국역사를 새롭게 바라봤다
<작가소개>
이화승 -1960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하여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88년 대만국립사범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같은해 역사연구소에 입학하여 중국 근대사 연구에 탁월한 연구 성과를 이룬 리꾸워치(李國祈)교수에게 사회경제사를 배웠다. 1991년에는 석사학위 논문 「청말민초동북민족자본중연호적연구」가 대만교육부의 '중국 근·현대사 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어 1년 간 미국 연수 기회를 얻었다. 「명. 청중국전통상인적구역화현상연구」로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중국의 전통 경제정책과 이에 따른 사회변화, 특히 상인의 조직화와 문화적 활동 등에 좀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명. 청중국전통상인의 정상관계」「청대 동북지역의 상점조직에 관한 연구」「청대표호적발전내간전통금융업적변천」「유가문화, 교육제도화사회이상적조화」 등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아주대, 이화여대를 거쳐 현재 전북대, 전주대에서 중국사회경제사와 중국문화사를 강의하고 있다
<작품 요약과 감상>
周 - 왕이 천하를 다스리던 시기로 서주와 동주로 구분이 된다. 宗法과 井田制를 기초로 왕이 강력한 통치를 했던 서주는 통치력을 확장해 나갔다. 제후들의 반란과 이민족 침입 대지진의 발생등으로 혼란은 가시화 되었는데 이민족 견융이 수도인 호경을 공략하여 幽王을 살해하자 낙읍으로 천도하고 春秋戰國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대는 극심한 정치 혼란 시기로 많은 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百家라고 하였다. 또 鐵기의 보금으로 생산 과정의 효율화를 앞당겼는데 국가의 농경에 대한 대규모 수리 시설을 확장 시켜며 농업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상공업적으로 발전했다. 씨족 집단의 해체 이후 나타난 자유 상공업자는 가족 단위로 활동하면서 당시 도시 규모의 활동 범위를 전국 규모로 넓히게 되었다. 또 철기로 인한 농업 생산 발전으로 생긴 잉여 생산품을 바로 상품으로 시장에 유통 시켰다.
商工의 발달은 상업 도시와 화폐경제 발전의 촉진을 야기 시켰다. 2500년전 춘추전국시대에서 각국에 화폐가 주조, 유통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따라서 돈을 가진자와 돈을 필요로 하는 자를 연결하는 대금업의 출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였을 것이다.
대금은 일반적으로 동산과 부동산 또는 개인의 신체나 신용을 담보로 일정 기간 동안 돈을 빌려주고 이기간 동안에 정해진 이자를 받는 행위를 말한다.
중국의 전통적 대금업의 형태로 첫째는 돈을 많이 가진 지주가 불규칙적으로 주위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주로 농민에게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전통적인 습관에 의해 돈을 받는 경우이다. 둘째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대금 기관이 일정한 규칙하에 쌍방간의 계약서를 작성하고 대금업을 하는 경우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당포였다.
그러나 순수한 경제적 의미의 전당업이라는 명칭이 출현한 것은 남북조 시대 이후 이다. 질과당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 인신을 담보로 하는 수단이다. 이말이 晉에 이르러 경제적인 의미로 바뀌게 된다.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은 魏晉 남북조 시대에는 마음을 의탁할 새로운 정신적 가치 체계를 찾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佛敎였다. 그동안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했던 정신적 사고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오랜 정치 혼란과 생활고 속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욕망은 불교의 내세관과 윤회 사상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통치자들도 세력 확장과 민심 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불교를 이용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는 政治的 목적과 정신적 위안이라는 두가지 배경하에 점차 민생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상업적 요소가 짙은 여러 사업에 손을 댄 사원은 시장에 대해 점차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사원에서는 쉽게 안정적으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사업은 급히 돈이 필요한 신도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금업이었다.
장사사의 예에서, 사원에서 돈을 빌려준 것은 분명했다. 청정한 사원에서 엄격한 규율에 의해 고행과 수도에 正進해야할 수도자들이 세속인들도 떳떳히 여기지 못하는 사업을 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대금업을 지속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자모진전 무진고’라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이는 중국 불교의 명확한 특징중의 하나는 승려들이 재산을 관리 하는데 많은 탄력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도 불교 경전에 근거를 두면서 중국 문화의 특수성을 반영한 사원의 재산 증식 방법은 중국의 전통경제 체제와 융합하면서 대금업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융업을 창조하게 되었다.
唐은 高祖때 부터 율령에 기초한 강력한 中央 집권을 실시하여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공존의 번영을 구가한 왕조이다. 율령에 의해 行政이 구체적인 근거에 의해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대금에 관한 계약서가 구체적으로 작성 되었고 소송에 관한 문서들도 보관 된 것이 돈황에서 발견 되었다. 이시기는 사원에서 하는 단조로운 국면에서 벗어나 백성들이 다양한 대금업의 경영에 참여하여 대금업이 사회 속의 금융업으로 보편화 되기 시작 했다는 점에서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민영 대금업의 배경과 성격은 첫째, 地理적으로 백성들의 생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둘째, 사원은 신도의 神心을 대금의 전제로 했다. 신심으로 인한 대금은 급전을 필요로 하는 백성에게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민영전당포에는 특별한 금지 품목을 제외한 모든 물건을 저당 할 수있어서 담보물의 종류가 다양했다.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었냐가 문제일 뿐 저당 잡을 수 없는 종류의 물건이란 없었다. 넷째, 唐은 사회적 신분 계급이 분명했던 사회로 만약 良民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자나 이를 알고도 돈을 빌려주는 자의 사회 계급을 모두 강등 시키는 엄벌에 처하는 식으로 이를 금지해서 다소 백성들이 안심해 하였으나 根원적으로 이를 막지는 못하였다. 다섯째, 율령의 체계화에 따라 정부에선 이자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을 명시하고 계약서를 쓰도록 하여 쌍방간의 계약 내용을 문서화 하기 시작 하였다.
민영 전당포의 출현으로 백성들은 생활상의 金錢적인 어려움을 해결 하는데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허나10%를 받는 너무 높은 이자는 부단과 원성을 백성들에게 사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월 이율 5%를 초과하지 못하게 했다.당대에 들어서는 정부가 대금업에 개입 하게 되었다. 당대에는 제국의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기상과 더불어 대금업도 전 시대에 비해 훨씬 다양함을 보인 시대였다. 사원의 질고에서 벗어나 민영전당포와 공해본전을 비롯한 관영 대금업이 각기 성행 했기 때문이다.
절도사였던 조광윤은 회군하여 정권을 잡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그게 바로 宋이었다. 무관의 병폐를 누구보다도 잘 알던 太祖는 철저한 문관 중심의 정치를 폈다. 문관 중심의 정치는 국가 경제 정책에서 다른 왕조보다 탄력성을 발휘하여 많은 발전을 이뤘다. 그리하여 송대는 도시 경제의 발전을 중심으로 국가 經齊가 한 층 도약하게 되었다.
송대에도 사원에서 운영하는 “장생고”가 있는데 무척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민영 대금업의 중심이었던 전당포의 괄목 할 만 했다. 전당포는 이름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고 규모도 커서 천만전 이상의 자본을 가진곳도 많았다. 월4%의 이자로 모든 계층이 전당포를 이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송대에는 행이라는 대금업자의 조직을 결성 했는데 업종의 특수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行의 결속력은 매우 강했는데 이를 통해 서로의 정보를 교환 하거나 관청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보호 하면서 한 지역의 영업을 독점하기도 하였다.
元은 엄청난 영토로 중국 문화와 유럽과 중동문화의 공존하는 형태를 탄생 시켰다. 이들은 유목 문화인 자기들만의 고유한 대금업을 漢族의 대금업과 동화 시키며 발전 시켰다.
오히려 이들은 도덕적 명분이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皇帝부터 귀족 관리까지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높은 이자율에 대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관영 전당포를 설립하였다. 원대에도 민영전당포에 대해 월3%의 이자율과 계약사항, 채무자와 보증인 한계 등을 명시했다. 그리고 전당업자가 물건을 분실 했을 경우를 강조 하였고 어떠한 경우에도 이자가 원금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평민 출신인 주원장이 한족의 정통성을 회복한 明이 태어났다. 이민족에 의해 훼손된 사회 경제를 회복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 시키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통치를 행사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황실이나 귀족 관리들이 대금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 보기 힘이들다. 명대에는 북방 몽고족의 잔재를 방어하기 위해 백만 대군을 주둔시켰다. 이에 따른 엄청난 군사비를 해결하고자 각지의 상업발전 매매등 또 명대에는 “세금은 부자에게 걷고 가난한 자에게는 걷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당업자들에게는 다른 업종보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 되었다. 그러나 수익에 비하면 이 정도의 세금은 가벼운 것이었다.
淸은 만주족이 여덟 개의 유목부족이 연합하여 일어 났는데 이 정권을 유지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부족에서 일어난 팔기군이었다. 이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국가에서 생활을 보조 해 주었다. 갈수록 돈이 없어지고 노동의욕을 상실해서 국가에서 이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
“발상생식”이라는 국가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 수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아주 성공적이어서 한족 군인에게도 적용을 시켰다. 특히, 전당업은 직접 관영 전당포를 개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 시대에는 발전 생식이나 발염생식이라는 단어가 보통명사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청대의 전당업은 다시 황,관,민이 운영하는 형태로 회귀했고 양적인 증가도 훨씬 심했다.
전당업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발전한 전당업은 엄격한 관리를 통해 직원들의 영업의 투명성과 높은 수익성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인적 관리 방면에서는 노련한 직원을 중용하여 내부적으로는 安正을 꾀하고 외부적으로는 信用을 유지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었다. 또 전당포는 전통사회에서 백성들의 금융기관의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지방의 敎育과 자선 사업에 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19C초 서구 열강들이 값싼 원료, 넓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재편성 되고 있었다. 허나 중국 정부는 외부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채 여전히 전통 경제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1850년 太平天國운동으로 사회소외계층에 그 뿌리를 두어 전당포들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전당업이 쇠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근대식 금융기관의 등장이다. 서구 帝國주의가 침범하여 외국의 근대식 은행이 중국의 경제를 흔들어 놓고 이어 중국인이 세운 은행도 출현하여 전당포와 전통 금융 기관들은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위ㆍ진 남북조 시대 → 중국의 대금업은 불교 사원에서 시작
당 → 정부의 개입 시작
이후 관영 대금업과 민간 대금업은 서로 공존하며 발전
송 → 화폐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
민영중심의 전당포가 대금업의 주류 - 사회 금융의 중요한 한 부분
관영 대금업 - 세수 부족으로 인한 공적 자금의 충당
원 → 황제, 귀족, 신하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활발하게 참여
명 → 관라나 귀족의 참여 못하게 지정 부호에게만 세금을 걷는 것이 원칙
청 → 악화되는 팔기군의 생활을 돕기위해 - 발전생식 정책 수립
발전생식 : 정부가 민영전당포에 자금을 대고 그 이자를 이용하는
식으로 국가 정책을 부담.
청말 →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전당업의 유동성 부족
서구적 근대식 은행에 의해 밀려 전통업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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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큰나라이다.이러한 나라를 경영하기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책들이 실험되엇을것이고 고리대금업도한 그런맥락에서 이해할수잇을것이다. 자연발생적인 측면도잇엇을것이고 정책적인 측면도잇엇을것이다. 이러한 대금업은 중국의 각 시대마다 그리고 통치자의 차이에 의해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국가에서 각 시대마다 백성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짐은 그다지 쉽게 해결 되지는 못한 것 같다. 고리대금업이 아주 오래전 자연스럽게 발생 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화폐 경제의 촉진을 초래하게 하였다. 인간의 문명이 시작하고 또 인간들의 기본적인 상호 경제 활동과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전환 과정중에 생산성이 발전하고 그에 따른 잉여 생산물은 사업과 씨족의 해체 후 도시 단위의 무역이 국가 단위의 무역을 활발히 하게 되었다. 각 시대의 독특한 특징을 반영하며 중국의 고리대금업은 발전해왔다. 이 책을 읽고 다루며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 시대를 상상해 보려 노력했다. 백성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감사려는 왕조와 또 부호들의 지나칠 정도로 이득을 취하려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중국의 역사속에서만 일어나는일은 아닐것이다.
지금도 엄연히 고리대금업이라는 사금융이 존재하고있고. 책에서 나올범직한 여러 가지 관행들이 이루어지고잇을것이다. 그러한 금융의 행태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중에 한단면일것이고 먼미래에는 그러한 것들이 후손들에게 우리시대를 바라보는 척도로 작용하게 될지도모른다.r
*본문요약*
이들은 도덕적 명분이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皇帝부터 귀족 관리까지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높은 이자율에 대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관영 전당포를 설립하였다. 원대에도 민영전당포에 대해 월3%의 이자율과 계약사항, 채무자와 보증인 한계 등을 명시했다. 그리고 전당업자가 물건을 분실 했을 경우를 강조 하였고 어떠한 경우에도 이자가 원금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평민 출신인 주원장이 한족의 정통성을 회복한 明이 태어났다. 이민족에 의해 훼손된 사회 경제를 회복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 시키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통치를 행사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황실이나 귀족 관리들이 대금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 보기 힘이들다. 명대에는 북방 몽고족의 잔재를 방어하기 위해 백만 대군을 주둔시켰다. 이에 따른 엄청난 군사비를 해결하고자 각지의 상업발전 매매등 또 명대에는 “세금은 부자에게 걷고 가난한 자에게는 걷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당업자들에게는 다른 업종보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 되었다. 그러나 수익에 비하면 이 정도의 세금은 가벼운 것이었다.
淸은 만주족이 여덟 개의 유목부족이 연합하여 일어 났는데 이 정권을 유지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부족에서 일어난 팔기군이었다. 이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국가에서 생활을 보조 해 주었다. 갈수록 돈이 없어지고 노동의욕을 상실해서 국가에서 이들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
“발상생식”이라는 국가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 수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아주 성공적이어서 한족 군인에게도 적용을 시켰다. 특히, 전당업은 직접 관영 전당포를 개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 시대에는 발전 생식이나 발염생식이라는 단어가 보통명사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청대의 전당업은 다시 황,관,민이 운영하는 형태로 회귀했고 양적인 증가도 훨씬 심했다.
전당업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발전한 전당업은 엄격한 관리를 통해 직원들의 영업의 투명성과 높은 수익성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인적 관리 방면에서는 노련한 직원을 중용하여 내부적으로는 安正을 꾀하고 외부적으로는 信用을 유지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었다. 또 전당포는 전통사회에서 백성들의 금융기관의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지방의 교육과 자선 사업에 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