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위기 상태였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구원병 파병에 큰 역할을 한 조선역관(외교관)이 홍순언(洪純彦)이었다. 홍순언이 명나라로부터 구원병을 파병받는 등 여러가지 굵직한 외교적 성과를 내는데에는 놀랍게도 명나라 기생집의 한 기녀와의 인연덕분이었다.
1. 홍순언의 1차 외교성과 '종계변무(宗系辨誣)'
1368년 농민반란군이었던 '주원장'에 의해 건국된 명나라는 건국 초기 국경문제로 우리나라와 관계가 굉장히 좋지 못하였다. 명나라에서 원나라의 옛영토를 가져가겠다며 일방적으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자, 고려 우왕과 최영장군은 5만명의 군사를 동원해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요동정벌, 遼東征伐) 친명파였던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위화도 회군, 威化島回軍).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명나라와 외교적으로 마찰이 생기면 어김없이 군사를 동원해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주원장은 "고려가 20만 대군을 내어 요동에 쳐들어 오면 우리 군대가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라며 요동방어에 걱정이 많았다고한다. 이렇게 심기가 불편했던 명나라는 명나라의 여러 법령을 집대성한 종합적인 행정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이자춘이 아닌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으로 표기하였다. 이에 발끈한 태조 이성계는 사신을 보내 정정하라고 요청하지만 명나라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200여년에 걸쳐서 조선조정에서는 수시로 사신을 보내 정정하라고 요청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알았다고만 할뿐 정정해주지 않았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외교적으로 필요할 때 협상카드로 쓰기 위해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외교적 난제는 1584년 역관 홍순언이 북경(北京)에 파견되면서 해결되게 된다.
1-(1) 통주(通州) 기생집 기녀와의 인연
종계변무 문제가 해결되기 10년 전인 1574년 홍순언은 역시 종계변무 문제로 북경(北京)에 파견되게 된다. 북경을 30리 앞에 둔 통주에 도착하여 여독을 풀 겸해서 한 기생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곳에서 한 아름다운 중국기생을 보고 마음에 든 홍순언은 주인에게 얘기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류씨라는 그 기생은 소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것이 아닌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소녀의 성은 류씨로, 남경(절강)의 호부시랑 류모의 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류모가 공금공금횡령 혐의로 누명을 쓰고 옥사하고 모친마저 죽게 되어서 부모의 장례를 치를 사람과 비용이 없었고,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기방으로 팔려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부모님의 관이 객사에 있습니다." 당시 그 여인이 부모님의 관을 고향으로 모셔가서 장례를 지내는데 필요한 비용은 모두 300금이었다.
이에 홍순언은 여인이 가엽다고 여겨 가지고 있던 외교자금 300금(약 천만원) 전부를 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이 의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홍순언이 대답을 해주지 않자 여인은 주는 것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홍순언은 어쩔수 없이 성만 알려주고 기생집에서 나왔다.
이후 홍순언이 기생집에 가서 300금을 중국 기생에게 준 후 성만 알려주고 손도 안 댄 채 그냥 나왔다고 하자 다른 일행들이 기생에게 홀려서 거금을 뜯겼다고 비웃었다고 한다.
결국 조선에 귀국한 뒤 홍순언은 공금횡령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이후 조선왕 선조로부터 이번에도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목을 벨것이라는 엄포를 받고 10년 뒤인 1584년 다시 북경(北京)에 파견되게 된다. 홍순언은 어차피 성사되지 못할 외교적 난제라며 자포자기 하면서 명나라 예부로 들어가 담당 책임자와 면담을 요청했는데 직급이 높지 않은 불청객 종계변무 정정사를 고위직인 명나라 예부시랑(외무부차관) 석성(石星)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석성은 "군은 통주에서 베푼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내가 부인의 말을 들으니 군은 천하의 의로운 선비요."
이렇게 말하는 예부시랑 석성 뒤에 서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와 홍순언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은혜에 보답하여 절을 하는 것이니 받으셔야 합니다.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님 장례를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어느 날엔들 잊겠습니까?"
홍순언이 통주에서 은혜를 베풀었던 아름다운 중국 기생은 예부시랑 석성의 후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석성부부는 홍순언을 극진히 대접했으며 종계변무 분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했다.
드디어 두달이 지나서 연락이 왔는데, 대명회전의 내용이 조선의 요구대로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수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는 전주의 혈통을 물려 받았고, 선조는 이한이며, 신라의 사공 벼슬을 했다. 6대손 긍휴는 고려로 왔고, 이성계는 이자춘의 아들이다."
석성은 홍순언의 임무가 완수되도록 애를 썼고, 석성의 부인은 홍순언이 귀국할 때 정성이 담긴 많은 선물을 보냈다.
종계변무는 200년만에 해결된 외교적 난제로서 조선왕 선조입장에서는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조선이 시역을 저질러서 세워진 나라가 아닌 떴떳한 정통성을 가진 왕조로 내보일 수 있는 큰 경사였다. 이후 홍순언은 우금위장으로 임명되었고 당릉군이라는 군호를 하사받았다 (백지원, 2009).
2. 홍순언의 2차외교 성과 '명나라의 구원병 파병'
종계변무가 해결된지 8년 후 일본이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당시 조선은 개전 20일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될 정도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끊임없이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병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는 만력제 시기로 내부적으로 정치적 부패로 쇠퇴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병화(兵禍)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신하들이 조선에 구원병 파병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당시 명나라 어전회의 내용을 살펴보면,
신하1: "한때 강성했던 조선이 갑자기 새처럼 숨는 것은 스스로 자초한 화입니다. 따라서 명나라가 구원병을 파병할 명분이 없습니다."
신하2: "지금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하면 북쪽의 흉맹한 몽골과 남쪽의 잔인한 왜가 언제 우리의 변경을 노릴지 모릅니다. 조선보다 명나라 방어에 먼저 신경을 써야합니다."
석성은 당시 명의 병부상서(국방부장관)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다른신하들과 다르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를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조선을 도울 것을 주장한다.
석성: "명나라가 이빨이라면, 조선은 입술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도 시리기 마련입니다. 만약에 조선이 계속 패전하여 멸망하고 일본이 조선을 차지한다면 요동이 위험해지고, 요동이 일본에게 점령당하면 다음은 이곳 북경(北京)입니다. 일본이 명나라 정복을 단언한만큼 조선을 반드시 도와야 합니다."
[출처] 조선 역관(외교관) 홍순언(洪純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