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KBS1 <예썰의 전당> [2부] 나를 찾아서 - 뒤러의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자화상',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자화상. 수학·의학·과학·인쇄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여 ‘독일의 다빈치’라고 불린 팔방미인 뒤러의 자화상에는 어떤 예썰이 숨어있을까? 그리고 예술가들의 자화상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예술가들의 자화상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을 고민해본다.
○ KBS1 <예썰의 전당> [2부] 나를 찾아서 – 뒤러의 자화상 다시보기
✵ 예썰 하나. 뒤러의 그림을 둘러싼 미스터리? 자화상 훼손 사건
1905년 어느 겨울,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뒤러의 자화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 자화상의 눈 부분을 날카로운 핀으로 긁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림은 복원되었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범인은 왜 하필이면 눈을 훼손했을까. 뒤러의 자화상을 둘러싼 다양한 썰을 풀어본다.
현대판 알프레히트 뒤러와 스티브 잡스의 남다른 포즈-어서 와 이런 CEO는 처음이지?
✵ 예썰 둘. 화가, 예수가 되다! 뒤러의 자화상이 특별한 이유
정면을 바라보는 구도는 권력자들에게만 허용되던 시기. 자화상의 구도로 대담하게 정면을 택한 뒤러는 더욱 과감한 일을 벌인다. 자신의 모습을 다름 아닌 예수처럼 표현했던 것! 화가들이 하대 받던 시대에 뒤러가 자신을 신처럼 표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 또한 뒤러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모았다.
✵ 예썰 셋.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뒤러는 나르시시스트?
열세 살부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해 수많은 작품을 남긴 뒤러. 끊임없이 자신에게 몰두한 뒤러는 나르시시스트였을까? 출연진들은 다양한 작품을 넘나들며 사람들이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익숙한 반고흐의 자화상부터 삶의 고통을 드러낸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까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예술가들의 자화상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을 고민해본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구현한 전인, 북유럽 르네상스의 완성자라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일은 미술계의 변방이었다. 뒤러는 서구 미술사상 가장 뛰어난 판화가로 꼽히는데,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뒤러를 ‘진실로 위대한 화가이자 가장 아름다운 판화의 창작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드로잉과 유화에서도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으며, 특히 자화상을 하나의 예술 양식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본격적으로 작품에 서명을 남기며 화가의 지위를 수공업자가 아닌 예술가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471년 5월 21일, 뒤러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사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13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금세공을 배웠으며, 이때 익힌 정밀하고 세심한 금속세공 기법은 후일 그의 동판화 기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얼마 후 아버지는 아들이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음을 깨닫고, 15세 때 그를 명망 있는 화가 미하엘 볼게무트의 도제로 들여보냈다. 뒤러는 볼게무트의 화실에서 4년여간 목판화, 제단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그 기법을 익혔다.
뒤러는 19세 때 도제 수업을 마치고 고향을 떠나 독일과 스위스 등지로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그는 마인츠, 라인 강 유역, 네덜란드 등지로 유명한 장인과 화가들을 찾아다녔는데, 이는 당시 젊은 화가들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1492년경에는 판화의 중심지 바젤에 정착해 목판화 공방에서 장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2년 후 그는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주철세공 장인의 딸 아그네스 프라이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달 후 다시 그림 여행을 떠나 이탈리아 볼로냐와 베네치아 등지에 머물며 화풍을 연구했고, 시골을 돌아다니며 스케치 여행도 했다.
산드로 보타첼리, ‘철갑코뿔소(Rhinoceros)’, 1515년, Pen drawing, 274x420mm, British Museum, London
산드로 보타첼리, ‘어린 토끼(young rabbit)’, 1502년, 22x25cm
1490년대 말에서 1500년경, 뒤러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초상화, 제단화 등 주문받은 것은 무엇이든 그렸지만, 특히 목판화와 동판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공방을 열기 전부터 이 분야에서 인정받는 장인이었는데, 특히 1498년에 간행한 목판화 〈요한 계시록〉으로 독일 전역에서 천재 판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알브레히트 뒤러, '〈요한 계시록〉 15점의 판화 중 일부', 카를스루에 주립미술관
산드로 보타첼리,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Emperor Maximilian I), 1519년, Oil on lindenwood, 74x62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산드로 보타첼리, ‘베네치아 여인의 초상’, 1505년, 35×26cm,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산드로 보타첼리, ‘야코브 머벨의 초상화’, 1526년, 패널에 유채, 48×36cm, 베를린미술관
1512년, 뒤러는 막시밀리안 1세의 부름을 받고 그의 궁정 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을 비롯해 황제의 저서에 들어갈 삽화, 황제의 기도서에 들어갈 소묘 등을 그렸다. 이 시기의 가장 큰 사업은 황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목판화 〈개선문〉, 〈개선행진〉 등을 제작한 일이다. 192개의 판목으로 만들어진 〈개선문〉은 미술사상 가장 큰 목판화이며, 당대 독일 최고의 미술가들이 참여했다. 〈개선행진〉 역시 137개의 판목으로 구성됐으며, 전체 길이 55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다. 또한 그는 막시밀리안 1세의 무덤 조성 사업을 지휘했으며, 뉘른베르크 시청사 공사에도 참여하는 등 조각가, 건축가로서 재능을 발휘했다.
산드로 보타첼리, '고라 일당의 심판', 1480-1482년, 프레스코, 348.5×570cm, 시스티나 성당, 바디칸
산드로 보타첼리, ‘기사 죽음과 악마(Knight, Death and the Devil), 1513년, Engraving, 245x188m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이 시기 그는 궁정 화가 활동 외에도 개인적인 창조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그의 대표적인 목판화 중 하나인 〈자기 방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기사와 죽음과 악마〉 등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알브레히트 뒤러, '멜랑콜리아 1(Melencolia I)', 1514년, 동판화, 대영박물관 소장
조르조 바사리가 전 세계를 경탄시키는 작품 중 하나라고 찬사를 보낸 〈멜랑콜리아 1〉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A4 용지 한 장 정도 크기의 작은 작품이지만, 제목의 의미를 비롯해 화면 중앙의 생각에 잠긴 듯한 여인이 상징하는 의미, 여인이 들고 있는 도구, 사냥개, 물, 무지개, 혜성, 화면 우측 상단의 숫자 조합 등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상학적인 아이콘들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난무한다. 미술사가뿐만 아니라 의사, 수학자, 천문학자, 프리메이슨 단원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무지개와 혜성을 묵시론적인 상징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여성을 멜랑콜리(인간의 네 기질 중 하나의 표현)의 화신으로, 아기, 사냥개, 도구들과 각종 기하학적인 상징들은 인간의 창조적 재능을 의미한다는 신플라톤주의적 해석도 존재한다.
1519년에 막시밀리안 1세가 죽고, 이듬해 뉘른베르크에 역병이 들자 그는 아내와 함께 네덜란드로 떠났다. 1년 정도 수많은 소묘와 회화를 그리며,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등 네덜란드 화가들과 교류했다.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후에는 초상화, 동판화, 목판화를 여러 점 제작했으며, 화가로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고 평가받는 〈네 사도〉를 그렸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톨릭과 개신교로 양분되었다. 이로써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농민 운동과 결합되어 급진적으로 발전하자 시 당국은 폭력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뒤러는 신앙심이 깊었으며, 루터와 서신을 주고받을 만큼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때문에 탄압이 극심해졌을 때 제자들과 함께 이 일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산드로 보타첼리,, 네 사도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네 사도〉는 새로운 종교적 횃불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루터 성서에는 사도 요한, 베드로, 바울, 마가 등 네 사도의 서간들이 진정한 성서의 핵심이라고 쓰여 있는데, 뒤러는 이런 관점에서 이들을 신앙의 왜곡과 거짓 예언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즉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린 것이다. 그런 한편 네 인물을 인문학적 도상으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각각이 르네상스 시기에 유행하던 인간의 네 기질(다혈질, 점액질, 담즙질, 우울질)을 표현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 시기에 뒤러는 작품 활동만큼이나 이론적인 저술 작업에도 힘썼다. 그는 예술에도 인문학적 성찰과 과학적 방법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측정술 지침서》, 《인체 비례론》, 《요새론》 등의 저술에는 예술적 상상력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듬어야 한다는 뒤러의 인문주의적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측정술 지침서》 서문에는 ‘오늘날까지 독일의 젊은 화가들은 작업 경험으로만 제작하고 있는데 이는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독일의 작가들은 측정에 관한 과학을 전혀 모르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판화가, 조각가, 건축가, 회화가, 이론가 등 르네상스적 전인(全人)이었던 뒤러. 미술 전 분야를 아우르는 탁월한 재능을 비롯해 인문주의자로서 르네상스 정신을 구현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전개했던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에는 뒤러가 유일하다.
또한 뒤러는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판화가 중 한 사람이지만, 수공업자나 장인의 취급을 면치 못했던 미술가의 지위를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의 지위로 확립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로서의 비전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고, 독립한 이후에는 화가의 사회적 지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었는데,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는 자신의 창조적 작업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예술가로서의 독립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산드로 보타첼리, ‘롤러 카나리아의 날개(Wing of a Roller)’, 1512년, Watercolour and gouache on vellum, 20x20c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또한 그는 ‘자화상의 화가’로 널리 알려질 만큼 평생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화가 수업을 받기 전인 13세 때부터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그린 자화상이나 주변 사람들의 소묘는 선이 정교하고 동작과 비례가 정확하며 인물의 특징과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리스도를 닮은 〈자화상〉은 개인 공방을 열었을 무렵인 1500년경에 그린 것으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다.
스스로 ‘미술의 1인자’라고 여겼던 뒤러는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그 자부심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다. 1528년에 뒤러가 죽은 이후 수많은 제자와 숭배자들이 그의 화풍을 따랐고, 1600년경 독일에서는 뒤러 르네상스가 일어나 그의 작품은 ‘신성한 그림’으로 취급되었다. 3세기가 지나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는데, 1800년대 독일 낭만주의가 태동할 때는 가장 위대한 독일 미술가로서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1870년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태동할 때는 ‘궁극적 독일인’으로 추앙받았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2부] 나를 찾아서 - 뒤러의 자화상/미술사를 움직인 100인(김영은·청아출판사)/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