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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원문보기 글쓴이: 장미비
가르멜수도원 한국 관구본부 | 임시본부 성주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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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군 [星州郡, Seongju-gun ]
동쪽은 낙동강을 건너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칠곡군, 북서쪽은 김천시, 남쪽은 고령군, 남서쪽은 가야산(伽倻山), 경상남도 합천군과 접한다. 소백산맥의 줄기인 가야산이 남서쪽을 달리고 있어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고, 가천(伽川) 연안 일대는 관개가 잘 되어 있다. 이천(伊川)은 군의 중앙부를 꿰뚫고 낙동강에 흘러들어가며, 연안지역은 비옥하여 농산물이 잘 자란다. 북서쪽 산악지대에도 경작지가 많다. 이천 및 낙동강 유역은 신생대 제4기에 속하는데, 곳곳에 하성층(河成層)과 현무암층으로 되어 있어 충적토질을 이루어 농경지로 적합하다.
[출처] 성주군 [星州郡, Seongju-gun ] |
(문화재)
1.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1121호
머리 위에는 넓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단정한 인상이다. 단아한 체구에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높직한 무릎으로 인하여 신체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쥔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는데,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몸광배에는 불꽃무늬와 작은 부처를 세밀하게 조각하였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 원당형대좌로 사자와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다.
중대의 북 모양이나 상대·하대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표현기법에서 대구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244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종 목 사적 제86호 경상북도 성주군 성산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들이다. 성산의 정상에는 성산산성이 있고, 그 주변에 70여기의 가야 무덤들이 분포하고 있다.
1호 무덤은 높이 3.6m, 지름 13.6m로 내부구조는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으로 보인다. 돌방(석실)에서는 은제관장식과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각종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2호 무덤은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으로 창·도끼·손칼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58호 무덤 굴방에서는 금제굵은고리귀고리(금제태환이식), 은제팔찌, 금동제말장식(행엽)이 발견되었다. 각 무덤에서 발견되는 굽다리접시(고배)의 굽에 생긴 구멍(투창)이나 1호 무덤에서 출토된 관장식이 경주지역의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58호 무덤의 유물은 전형적인 신라제품으로 5∼6세기경 성산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성산가야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당시 신라와 적대관계였던 인접한 대가야와는 문화적으로 교류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종 목 사적 제444호 세종대왕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255호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자들이 세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짓고 회연서원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숙종 16년(1690)에 임금으로부터 ‘회연’이라는 이름과 토지·노비를 하사 받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서원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서원 중의 하나로 선생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고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다.
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양현청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해마다 2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0호
기단의 네 면과 탑신의 각 몸돌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특히 1층 몸돌에는 문 모양을 깊게 새겼다. 1 ·2 ·3층 지붕돌 네 귀퉁이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고려시대의 자유로운 조각양식이 엿보인다.
탑이 자리하고 있는 성주지역의 지형은 소가 누워서 별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이 때문에 냇물이 성주읍을 돌아 동쪽으로 빠져 나가는 것으로 보아, 성주땅의 기운이 냇물과 함께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성주따의 기운을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일명 ‘지기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제말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성주목사로 있던 제말은 의병을 모아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제홍록과 함께 전사하였다. 선조는 그의 공을 치하하여 병조판서로 벼슬을 높이고 이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정조 16년(1792)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서유린이 글을 짓고 이병모가 글씨를 썼으며, 조윤정이 비의 제목을 새겼다.
원래의 자리는 성주초등학교 교정이었는데, 학교 운동장을 넓히면서 1940년 경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들의 묘소는 경남 창원군 진송면 다구리에 있으며, 같은 비가 경남 진주시 촉수루 뒷편에 하나 더 있다.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사찰이 창건된 시기나 기단이 2층인 점, 2층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1개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
법수사의 옛 터에 자리한 이 당간지주는 직사각형의 돌기둥 2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간결하며 단아한 모습으로, 당간지주의 계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본 떠 새겼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은 모서리에만 기둥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의 경사는 비교적 느리게 흐르고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희미하게 위로 들려 있다.
전체적인 양식이나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성주 성산관은 성주목의 동헌으로 쓰이던 건물로 처음에는 지금의 성주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효종 8년(1657)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으며, 고종 8년(1871)에 크게 고쳐지었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에, 지붕의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오른쪽에 2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이 건물을 앞에서 바라보면 주춧돌이 높게 기둥 모양으로 나열되고, 마루바닥이 땅에서 높게 올라와 있는 것이 특색이다. 흔히 고상식이라 부르는 이런 구조는 마루를 주로 이용하는 남쪽 지역에서 땅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짓는 것이다. 상주의 양진당에도 같은 구조가 남아 있어 서로 비교가 된다.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 조선 전기의 문신 송희규(1494∼1558)가 세운 곳으로 명종 6년(1551)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비가 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잔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율곡, 한석봉, 채번암의 친필을 한 점씩 소장하고 있었으나 한석봉의 글은 1970년 도난 당했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7칸이고 평면은 ㅁ자형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다른 연장(자귀)으로 나무를 다듬은 점이 특이한 건물이다.
일제시대 때에는 독립청원장서를 복사했던 곳이라고 하며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이 장서를 건네주기 위해 모임을 갖았던 장소로, 3·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48호 면 적 982㎡
조선 중종 11년(1516)에 세운 것을 현종 5년(1664) 여희림의 자손 여효회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7칸·옆면 1칸 규모의 월회당,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전사청,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교직사와 솟을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여씨향약 강당인 동시에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를 써서 송준필·김창숙·여상윤 등이 서명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곳이기도 하다.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59호 면 적 1,415㎡ 이 서당의 기원은 1799년(정조 23) 우졸 홍우범이 모옥 3칸을 세워 죽림재라 하고 향학의 장으로 삼았던 데에 있다. 1806년(순조 6) 그 후손들이 서당을 확장하여 대방재라 개칭하고 누구나 배울 수 있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 후 운영을 계승한 홍우범의 조카 홍영이 서실부족으로 문중의 뜻을 얻어 1860년(철종 11)에 다른 곳에 서당을 신축하여 도산서당이라 하였다. 한편 1872년(고종 9)에 기존의 대방재를 개축하였는데, 이때 성산이씨 원석 이문승이 입계하였으며, 이름을 고쳐 고산숙이라 하였다.
이 서당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실시하여 평등교육의 단초를 열었으며 많은 인재들을 양성함으로써 국가 및 지역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이 크다.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105호 면 적 169,493㎡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해발 955m의 독용산 정상에 있는 산성으로, 둘레가 7.7㎞에 이른다. 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계곡을 포함하여 산정을 두른 형태를 포곡식이라 하는데, 영남지방의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전쟁의 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성이기도 하다.
조선 숙종 원년(1675)에 동·서·남·북에 7개의 포루, 아치형 동문, 수구문, 남소문을 다시 고쳐 쌓았으며, 동·서 군량고를 두어 인근 지역의 군량미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 군기고가 발견되어 쇠도끼, 쇠창, 쇠 화살, 갑옷들이 출토되었으며, 지금은 웅장하던 성곽의 일부와 아취형의 동문만 남아있다.
1.성주참외 가야산의 깨끗한 물과 낙동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에서 친환경농업으로 재배한 성주참외는 맛과 향이 천하일품으로 일본, 홍콩, 말레이시아 등지에 수출하여 그 명성이 해외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성주지역의 특산물입니다.
2.성주수박 가야산의 맑은 물과 기름진 토양에서 재배되어 과육이 치밀하고 당도가 높은 성주수박은 한번만 먹어보면 영원히 그 맛을 잊지 못하는 여름철을 대표하는 과채류입니다.
3.사과 과수원에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한방영양제(당귀, 계피, 감초, 마늘, 생강, 인삼, 현미, 식초, 막걸리 등)와 토착미생물로 재배되어 맛과 향이 뛰어나 먹을수록 감칠맛이 나며 농심이 가득한 한방사과입니다.
4.배
일교차가 심한 해발 300m이상의 고지에서 생산되며 석세포가 적고 과육이 많아 당도가 높고 즙이 풍부합니다.
한방영양제(당귀, 계피, 감초, 마늘, 생강, 인삼, 현미식초, 막걸리 등)를 이용해 재배하므로 가야산 한방배만의 향이 가득한 감칠맛을 드실수 있습니다.
5.참외 초롱
참외를 형상화한 호롱은 성주군 관광기념품 공모 입선작으로 지역의 특산물인 참외와 전통적인 학문을 소중히 여겨 명현거유를 끊임없이 배출한 선비의 고장임(주경야독)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또한 옛날 호롱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재잘대며 하얗게 밤을 지새우던 잊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을 떠오르게하는 작품으로 오늘날에는 스스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숭고한 사랑의 참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6.태호(항아리)
생명의 신비로운 탄생을 기원하며... 본도자기는 오늘날 자녀가 없는 가정에 둘 경우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원하게 되며, 자녀가 장성한 가정에서는 자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수호신 역할을 하게 됩니다.
7.성주포동(돼지고기)
(자랑거리)
가야산
소 재 지 수륜면 백운리 가천면 마수리, 신계리, 법전리
가야산은 성주의 남서쪽 경계지역에 있는 산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 경상북도 성주군에 걸쳐있는 명산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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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르멜산 성모 재속회 2012년 야외 월모임은
성주수도원 방문으로......
많은 관심과 따뜻한 사랑의 바람이
성주 수도원으로
향하기를 바램하며....
주소 정정: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학리 63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