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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 서유기② 삼장법사와 아이들: 세상 유일의 ‘밴드’ 구도의 본질은 방랑! 유목적 삶이 윤리를 만든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지옥으로 가는 길에는 호의가 가득하다 … 수행자가 마주치는 마지막 함정은 자신을 결박하는 이 세상의 ‘친절함’
중국의 그림자극 <서유기-손오공과 백골마녀편>에 나오는 손오공의 날렵하고 장난스러운 모습.
삼장법사와 그의 밴드는 위아래가 없고, 감정의 잉여가 없다. 먼 길을 갈 수 있는 복원의 동력이 여기서 나온다. 이 밴드는 최선을 다해 공덕을 이루되 아무런 보답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공덕은 그 자체가 이미 보답이란 것을 구도의 여정 속에서 깨닫기 때문이다.
# 장면 1 손오공이 도적들을 때려죽이자 삼장법사가 몹시 화가 났다. 손수 도적들을 묻어주고 경을 읽어준다. 그리고 나서 축문을 읽는데, 그게 참 엉뚱하다. 저승에 가거들랑 자신은 고소하지 말아달란다.
“그놈은 손가이고 저는 진가이니, 우리는 성도 다릅니다. 억울한 일에는 그 일을 만든 원수놈이 있게 마련이고 빚에는 채권자가 있는 것이니, 제발, 제발, 이 불경 가지러 가는 승려는 고소하지 마십시오.”
저팔계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선 아주 깨끗이 빠져나가시네요. 저 양반이 때릴 때는 저희 둘도 없었다고요.” 그 말에 삼장법사는 또 흙을 한 줌 집더니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호걸님들, 고발하실 때는 손오공만 고발하십시오. 저팔계랑 사오정과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솔출판사 <서유기> 6권, 170쪽)
# 장면 2 은각대왕이라는 요괴를 만났을 때, 손오공의 꾀에 빠져 순찰을 나간 저팔계. 7∼8리 정도 가더니 쇠스랑을 집어던지고 머리를 돌려 온갖 손짓발짓을 다 해가며 욕을 해댄다. “물러터진 늙다리 중놈(삼장법사)! 심술궂은 필마온(손오공)! 줏대 없는 사오정! 자기들은 모두 거기 앉아 편히 쉬면서, 길을 찾으라고 이 몸만 부려먹어? (…) 이런 빌어먹을! 어디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4권, 51쪽)
경남 남해시 금산 보리암의 손오공 바위. 바위의 옆모습이 손오공과 흡사하고, 보리암 역시 영험이 많은 기도처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 ‘못 말리는 밴드’ 스승은 제자를 고발하고, 제자들은 스승 알기를 ‘개코같이’ 여기며 또 자기들끼리 헐뜯고 놀리기 일쑤다.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없다. 덕분에 <서유기>는 대(大) 장편임에도 지루할 틈이 없다. 한 권을 읽고 나면 그 다음이 궁금해서 절로 책을 펴들게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의문이 솟구친다. 아니, 이런 ‘아사리판 난장’ 팀이 어떻게 10만8천 리를 간다는 거지? 알다시피, <서유기>는 ‘구법(求法)의 서사’다. 위대한 당나라의 성승(聖僧) 삼장법사가 석가여래를 뵙고 대승경전을 얻기 위하여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서천으로 가는 대장정이다.
길은 멀고 험한데 가는 곳마다 요괴들이 길을 막는다. 그때마다 하늘과 바다를 오가는 대전투가 벌어진다. 그럼, 이들은 왜 그토록 경전 얻기를 소원하는가? 중생구제라는 원대한 비전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서다. 즉,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여정에 동참한 것이다. 헌데, 앞서 보다시피 이 거룩한 여정은 유머로 가득하다. 네 명은 잠시도 쉬지 않고 토닥거린다. 어찌된 영문인지 삼장법사는 늘 저팔계를 ‘편애한다’. 손오공은 그게 아니꼽다. 그래서 손오공과 저팔계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그나마 사오정이 무던한 탓에 팀워크가 간신히 유지된다. 그러다 보니 주제는 ‘구법의 여정’인데 실제로는 포복절도의 시트콤이 연출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한편 즐거우면서도 한편 당혹스럽다. ‘구도의 길이 이렇게 웃겨도 되나?’ 하고. 하지만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왜 우리는 목표가 원대하면 비장하고 엄숙해야 한다고 간주하는 걸까? 비장하고 엄숙하다는 건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는 의미인데, 그건 단거리에서나 효과적일 뿐 장거리를 뛸 때의 자세는 아니다. 장거리를 뛰려면 가능한 한 힘을 빼야 하고, 힘을 빼는 데는 유머가 최고다. 아니, 힘을 빼야 유머가 생성된다. 힘을 뺀다는 건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삼장법사는 나약하고 찌질하다. 하지만 구법에 관한 한 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손오공은 성질이 불 같지만 인정도 참 많다. 저팔계의 탐욕과 어리석음, 사오정의 줏대 없음 역시 아주 소중한 덕목이다. 왜냐고? 그게 바로 우리 중생들의 ‘꼬라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기상천외한 상황들이 연출되기 마련이다. 웃음이 터지는 건 바로 이때다. 그렇게 본다면 구법과 유머는 모순되기는커녕 ‘찰떡궁합’인 셈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아주 못말리는 밴드 하나가 탄생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들! 그럼 이 밴드의 멤버들을 하나씩 분석해보자.
돌원숭이, 멋진 원숭이왕, 제천대성. 이것이 손오공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지난호에서 보았듯이, 이들 이름에는 인류가 밟아온 마음의 행로가 담겨 있다. 소유와 증식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어떻게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가? 이것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기본화두라면 밴드 속에서 손오공의 특이성은 무엇일까? 일단 손오공은 오행의 관점에서 보면 금(金)이다. 단단하고 정미로운 기운을 의미한다. 돌과 쇠, 보석과 칼 등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상극의 원리상 금을 극하는 건 화(火)다(화극금). 손오공은 화의 기운도 엄청나다. 내단수련도 최고경지까지 갔지만 하늘궁전에서 대소동을 피울 때 태상노군의 팔괘로에서 49일 동안 단련되는 바람에 ‘심장과 간은 금으로, 허파는 은, 머리는 구리, 등은 쇠로 변하고’, ‘불 같은 눈에 금빛 눈동자’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손오공은 불에 잘 달궈진 금인 것이다.
기질적 속성으로 보자면, 금은 ‘숙살지기(肅殺之氣:죽이는 기운)’이고, 화는 정염의 기운이다. 그래서 손오공은 인간이 겪는 번뇌의 원천인 ‘탐진치(貪瞋癡)’ 가운데 ‘진(瞋)’ 심을 대표한다. 진심은 ‘분노’다. 분노는 정의감과 의리 등을 주관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주체성과 리더십, 책임감 등의 원천이지만 지나치면 지배욕과 공격 본능으로 나아가게 된다.
손오공이 바로 그런 경우다. 처음 원숭이왕이 된 이후, 그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제국이 확장될수록 교만도 더더욱 높아져 마침내 옥황상제 앞에서도 ‘고개만 까딱’할 정도로 기고만장이다. 하늘을 뒤집어놓은 것도 이 욕망을 멈추지 못해서다. 오행산에 무려 500년을 갇혀 있었으면서도 그 성질은 죽지 않았다. 삼장법사가 구해주자마자 노상에서 만난 강도들을 순식간에 박살내버린다.
일본에서 인기를 끈 ‘마스크플레이 뮤지컬’ 형식인 <손오공 대모험>의 한 장면.
손오공은 분노와 정염의 화신 삼장법사가 노발대발하자 ‘마음에 일어나는 불길을 억누르지’ 못해 한껏 대들고 퍼부은 다음 근두운을 타고 홱 가버린다. 관음보살이 특별히 ‘긴고테’ 모자와 ‘긴고아주’라는 주문을 마련해둔 것도 그 때문이다. 머리가 깨지는 고통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인 것. 이로써 보건대, 자존심과 정의감, 분노와 주체성, 지배욕과 교만, 이것들은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그래서 삼장법사와는 상극이다. 삼장법사는 저팔계의 꼼수는 봐줄지언정 손오공의 폭력 성향은 용서하지 못한다. 해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우는 것도 손오공이지만 가장 많은 사고를 치는 것 역시 손오공이다.
근데 참 묘하다. 상극은 상생으로 통하는 것일까. 아니면 미운정이 고운정보다 더 깊은 것일까. 갈등이 심화될수록 삼장법사에 대한 그의 사랑은 깊어만 간다. 처음 쫓겨날 때의 장면이다. 추방명령서를 써서 손오공에게 주며, “이 원숭이놈아! 이걸 증거로 삼아라. 다시는 너를 제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다시 너를 보게 된다면 나는 바로 아비지옥으로 떨어질 거다!” 떠나는 손오공. 마지막으로 절을 하겠다고 하자, 삼장법사는 몸을 획 돌리며 말한다. “나는 착한 중이라, 너같이 나쁜 놈의 절은 받지 않겠다.” 그러자 손오공은 털 세 가닥을 뽑아 손오공 셋을 만들어 삼장법사 주위를 에워쌌다. 그렇게 사방에서 절을 올리니 삼장법사는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어 결국 절 하나는 받게 되었다.(3권, 218쪽) 그리고는 사오정에게 사부님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한 후, 눈물을 흘리며 한참을 머뭇거리다 떠나간다.
성질부릴 땐 언제고 이 애틋한 애정표현은 또 뭔가. 이뿐 아니다. 팀이 위기에 빠져 저팔계가 다시 손오공을 찾으러 갔을 때도 ‘이 어르신이 몸은 수렴동으로 돌아왔지만 마음만은 경전을 얻으러 가는 스님을 따르고 있다’며 한없는 그리움을 털어놓고, 한창 요괴들을 물리치다가도 삼장법사가 겪을 고뇌를 떠올리고는 창자가 끊어질 듯 가슴이 아파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기도 한다.
또 한번은 홍해아라는 요괴와 싸우다 잠깐 기절한 적이 있었다. 저팔계가 안마를 해주자 기가 뚫렸는데, 깨어나자마자 “사부님!”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사오정의 말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손오공의 마음엔 오직 사부님뿐’이다. 이쯤 되면 가히 불꽃 같은 정염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참 대책 없는 캐릭터다. 좋아하자니 언제 성질이 폭발할지 모르겠고, 미워하자니 저토록 정염이 넘치고…. 삼장법사의 마음도 이러했으리라.
저팔계는 고로장의 데릴사위 노릇을 하다 삼장법사의 제자가 된다. 출신성분은 꽤 그럴 듯하다. 일찍이 신선을 만나 수행을 하여 하늘 궁전에서 은하수를 관장하는 천봉원수에 봉해진다. 하지만 서왕모가 개최한 반도대회 때 월궁 항아를 보고 홀딱 반해서 추태를 부리다 곤장 200대를 맞고 쫓겨났다. 돼지의 태를 잘못 타고 나는 바람에 외모가 이 지경이 되었다. ‘큰 입에 사냥개 같은 이빨, 억센 갈기와 부채 같은 귀’ 등등.
‘목모’ 저팔계, 탐욕은 나의 운명!
중국 국립인형극단인 ‘목우피영 예술원’의 정통 인형극 <손오공 대모험>의 한 장면.
은하수를 관장하던 인물이라 오행적으로 보면 수(水) 기운을 타고났다. 수는 목(木)을 낳는다. 그래서 저팔계를 ‘목모(木母)’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기가 넘치면 신장의 ‘정(精, 신진대사를 조절하는 물질적 원천)’이 넘쳐 성욕조절이 어렵다. 그래서 여자를 보면 욕정이 꿈틀거려 일단 침부터 흘린다. 밥통이 크고 창자가 짧아서 늘 허기에 시달린다. 식욕과 성욕, 즉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인 ‘탐(貪)심에 살고 탐심에 죽는’ 인물이다.
그래도 깨달음의 뜻은 저버리지 않아 관음보살한테 계를 받은 이후 ‘오훈(마늘·달래·무릇·김장파·세파)’과 ‘삼염(기러기·개·뱀장어)’을 끊었다. 그래서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킨다는 뜻에서 ‘팔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 하지만 그럼 뭣하는가. 한끼에 ‘네다섯 말의 밥’을 먹어야 하고, 간식으로 ‘구운 떡 백 개’를 먹어야 하는 걸. 이런 처지니 길을 가는 내내 온갖 추태와 진상을 다 떤다. 처음 밴드를 갖추었을 때 관음보살이 이들의 진정성을 테스트하는 사건이 있었다. 하룻밤을 묵기 위해 한 부잣집에 들어갔더니 마흔다섯 살 된 과부가 세 딸(진진·애애·린린)과 함께 살고 있었다. 과부는 이들에게 평생 쓰고도 남을 재물이 있으니 세 딸의 짝이 되어달라고 한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은 일체 흔들림이 없건만, 유독 저팔계만 음탕한 생각에 몸을 비비 꼬고 난리다.
과부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후 술래잡기를 하면서 세 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자, 이 멍텅구리는 밤새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앞으로 오다가 문을 차고, 뒤로 가다가 벽돌담을 건드리고, 우당탕탕 넘어지며 들이박아 주둥이가 시퍼렇게 부어 올랐지요. 결국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며’ 따님들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으니 과부인 어머니라도 어떻겠느냐고 한다. 오 마이 갓! 결국 속옷바람으로 나무에 매달려 온갖 고초와 망신을 다 겪는다. 이때 혼지검이 난 탓에 성욕은 좀 잦아들었으나 식욕만은 도무지 제어가 안 되어 가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킨다. 게다가 그걸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잔머리’를 굴린다. 그 과정에서 손오공과 삼장법사를 이간질하는 게 다반사다. 또 번번히 깨지면서도 틈만 나면 손오공한테 대들고 엉긴다. 심지어 요괴와 대적할 적에도 자기가 공을 세우려고 손오공을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식탐에다 여색을 밝히는 건 기본이고, 게으르고 비열하고 덜떨어지고…. 저팔계의 악덕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몹시 의아했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구법의 길을 갈 수 있는가 하고. 하지만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것이 바로 중생의 실상이 아닌가. 이런 중생도 구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승이라 할 수 있을 터, 저팔계도 갈 수 있다면 대체 누군들 가지못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울컥!’ 하고 감동이 밀려왔다. 온갖 추태를 저지르고 갖은 망신을 다 겪으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라. 탐욕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구도 또한 ‘원초적 본능’이다! 그런 점에서 저팔계야말로 ‘민중의 영웅’이 아닐는지.
“푸른 듯 푸르지도 않고/ 검은 듯 검지도 않은/ 침침한 낯빛…/ 맨발에 힘줄 솟은 근육질 몸/ 눈빛은 번쩍번쩍/ 부뚜막 밑의 한 쌍 등불 같네/ 입은 쭉 찢어져/ 백정 집의 화로 같네/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는 칼날을 걸어놓은 듯하고/ 시뻘건 머리를 어지럽게 풀어헤쳤네/ 한번 내지르는 소리 뇌성벽력 같고/ 두 다리로 파도 차는 모습 몰아치는 바람 같네”(1권, 245∼246쪽) 유사하에서 사오정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손오공은 원숭이, 저팔계는 돼지, 그런데 사오정은 도무지 정체성이 모호하다. 어찌 보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험상궂고 추악하게 느껴진다.
물론 사오정 역시 원래부터 저 지경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기운 왕성하여 영웅호걸로 이름을 날리다가 진인을 만나 도의 경지에 올라’ 마침내 하늘궁전에서 권렴대장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근데 어쩌다 유사하의 요괴가 되었지? 서왕모의 반도대회 때 옥파리 하나를 깨뜨려 옥황상제의 진노를 산 탓이란다. 아니, 그게 그렇게 큰 죄야? 실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상의 세속적 기준일 뿐이다. 하늘에서는 단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다. 잠깐 마음을 놓는 순간 천지의 운행과 어긋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오정은 ‘탐진치’ 가운데 ‘치(痴)심’, 곧 어리석음의 전형이다.
화과산에서 태어난 못된 원숭이 손오공(왼쪽 위)이 천궁에 올라 말썽을 피우는 장면을 그린 상상도.
‘본투비’ 매니저 사오정의 조율 본능
치심은 일종의 무지몽매다. 그래서 자신이 뭘 원하는 지 잘 모른다. 그래서 배부르면 강 속에 웅크려 자고, 배고프면 물결을 헤치고 나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 그리고는 또 자책에 시달린다. ‘이레마다 한 번씩 검이 날아와 옆구리를 백 번도 넘게 찌르고 돌아가는 고통’을 받는다. 요컨대, 무지와 악행, 그리고 자책-이것이 치심의 기본요소다. 탐심과 진심에 비하면 수동적인 번뇌에 해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구법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자 그의 치심은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 밴드에서 그는 막내다. 손오공이 전투를, 저팔계가 짐을 담당한다면, 사오정은 말고삐를 잡고 삼장법사를 호위한다. 밴드로 치면 베이스기타에 해당한다고 할까. 그래서 존재감은 별로 없다. 요괴들과 맞서 싸울 때도 늘 후방을 지키는 게 고작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가 존재감이 크면 곤란하다. 손오공과 저팔계만으로도 시끄럽기 짝이 없는데, 거기에 사오정까지 설쳐대면 이 밴드는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리라. 그래서 사오정은 늘 두 형의 싸움을 중재하는 매니저 역할을 한다. 홍해아를 만나 위기에 빠졌을 때의 한 장면이다.
“얘들아, 우리도 여기서 흩어져야겠다.”(손오공) “옳은 말씀! 일찌감치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찾아갔다면 얼마나 좋았겠소?”(저팔계)
사오정이 이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온 몸이 마비되었다.
“형님들, 도대체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전생에 죄를 지었는데 고맙게도 관세음보살의 권면과 교화를 받아…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부님을 호위하고 서천으로 가서 부처님을 뵙고 경전을 구하는 공덕을 쌓아 죗값을 치르기로 한 거잖아요? 그런데 오늘 이곳까지 와서 하루아침에 모든 걸 포기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가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관음보살의 선과를 어기고, 우리 자신의 덕행을 망치고, 우리가 시작만 하고 끝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호, 이렇게 기특할 수가. 이러자 성질 더러운 큰형과 철딱서니 없는 둘째 형도 마음을 고쳐먹는다. 삼장법사―이 ‘충만한 신체’를 보라! 오호, 그야말로 ‘본투비(born-to-be:타고 난)’ 매니저다. 하지만 매니저가 빛나려면 손오공과 저팔계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오정은 결코 리더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설치고 날쳐야 사오정이 치심을 떨치고 일어나 은근과 끈기를 통해 팀을 조율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원초적으로 ‘밴드적 존재’다. 마지막으로 삼장법사. 스승이자 리더이지만 별 활약이 없다. 일단 세상물정에 어둡고 분별력, 판단력 모두 제로다. 요괴들이 속임수를 쓰면 100% 넘어간다. 난관에 봉착하면 일단 징징거리거나 운다. 저팔계의 이간질에 쉽게 놀아나서 제자들을 분열시킨다.
참, 이렇게 무능하기도 힘들다. 실제의 현장법사는 팔방미인이라 가는 곳마다 찬사를 받았다는데, 작품 속의 이 ‘짝퉁’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한편으로 따져보면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현장법사는 ‘고독한 솔로’였지만 삼장법사는 ‘밴드’로 움직인다. 밴드로 움직이려면 힘이 한쪽으로 쏠려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실제 현장법사의 출중한 능력을 세 제자가 나눠가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삼장법사는 ‘저런’ 수준이 될 수밖에. 엉뚱한 논리 같지만, 능력과 힘에도 질량불변의 법칙이 있는 셈이다.
더 중요한 사항 하나. 어떤 조직이건 리더는 좀 ‘빈’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멤버들이 개성을 펼칠 수 있다. 특히 이 제자들은 요괴시절에 지은 죄가 많아서 무수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 또 그들이 지닌 기예―손오공의 72가지 변신술, 저팔계의 36가지 변신술, 사오정의 항요장 등―는 일종의 테크닉이지 도(道)가 아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면 자신의 기량을 부지런히 발휘해야 한다. 아낌없이 쓰고 또 씀으로써 ‘탐진치’의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 헌데, 여기다 삼장법사까지 맹활약을 펼친다면 그땐 구법이 아니라 무협이 되어버린다. 특히 이 밴드의 핵심 키워드는 삼장법사의 속도다.
“형님, (서천) 뇌음사까지는 얼마나 멀어요?”(사오정) “10만8천 리야. 아직 십 분의 일도 못 왔어.”(손오공) “형님, 몇 년이나 걸어야 도착할 수 있을까요?”(저팔계) “이 길은 두 동생들이라면 열흘 정도면 갈 수 있지. 나라면 하루에 쉰 번 가는 것도 어렵지 않아. 해 떨어지기도 전에 말이야. 사부님이라면… 아휴! 생각도 말아야지.”(손오공) “오공아, 언제쯤이면 도착할 수 있겠냐?”(삼장법사) “사부님이 어릴 때부터 노인네가 될 때까지, 아니 늙은 다음 다시 어려지고, 그게 수천 번 된다 해도 거기 도착하긴 어려워요. 다만 사부님께서 지성으로 깨달으시고 한마음으로 돌아보신다면, 그곳이 바로 영취산(서천)일 겁니다.” (3권, 115쪽) 그렇다! 한없이 멀고 아득하지만 마음 한번 바꾸는 순간 즉각 도달할 수 있는 곳, 거기가 바로 서천이다. 해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오직 삼장법사의 속도로만 가야 한다. 그래야만 81난을 오롯이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요괴들이 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먼 길을 가야 하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요괴한테 수시로 속아넘어간다. 그럴 때마다 참 한심해 보이지만 거기엔 아주 깊은 뜻이 있다. 설령 속아서 목숨을 잃을지언정 자비심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달라이라마가 ‘적이야말로 내 자비심의 대상’이라고 했던 것처럼, 삼장법사 또한 이렇게 말하리라. “대체 요괴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이 대책 없는 자비심은 늘 밴드를 위험에 빠뜨리지만 그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손오공의 분노가 점점 다스려진다. 손오공은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힘 조절이 안 되는 인물이다. 그걸 극복하려면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워서 힘을 빼야 한다. 결과적으로 삼장법사의 무능력(혹은 자비심)이 그 기회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이라 할 수 있는 현장법사의 사리가 모셔진 흥교사. 가운데 큰 탑이 현장의 사리탑이다.
삼장법사를 움직이는 건 오직 깨달음과 중생구제
또 그는 절대 성욕에 휘둘리지 않는다. 삼장법사가 미녀로 변신한 전갈요괴에게 납치되었다. 밤새 유혹을 받고 나서 손오공이 구하러 갔다. “오공이 왔느냐? 빨리 내 목숨을 구해다오.” “밤새 재미 좀 보셨나요?” 삼장법사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런 짓은 안 한다. 한밤중까지 나한테 귀찮게 달라붙었지만 나는 허리띠를 풀지도 않았고 침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저팔계가 물었다. “그 짓을 했던가요?” 손오공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하지 않았더라. 늙다리 사부님이 요괴에게 희롱을 당했지만 침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하시더라.” 역시! 감탄하는 저팔계.
이것이 이 밴드의 저력이다. 모든 조직이 해체될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하나 있다. 지도자의 탐심―주로 재물욕과 성욕―이 노출될 때다. 하지만 삼장법사는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왜? 그는 이미 출생의 비밀을 푸는 과정에서 완벽히 출가한 존재다. 다시 사랑과 성욕에 미혹될 이유가 없다. 그를 움직이는 건 오직 깨달음과 중생구제뿐이다. 솔직히 그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다만 그것이 서쪽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숭산 스님의 화두)
또 하나 삼장법사가 제자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오래 앉아 있는 것. 거지국에서 세 명의 도사와 겨룰 때의 일이다. 도사들이 삼장법사 일행에게 좌선으로 승부를 겨루자고 한다. 늘 기고만장하던 손오공이 이때만큼은 신음소리를 낸다.
“형님, 어째서 아무 말이 없으시오.”(저팔계) “동생, 사실대로 말해주지. 하늘을 때려부수고 우물을 휘저어놓으며, 바다와 강을 뒤집어놓고, 산을 떠메고 달을 부리며, 별을 옮기는 것 같은 교묘한 재주를 부리는 일은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머리를 베어 뇌를 저며내고, 배를 가르고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갖가지 짓거리도 겁나지 않아. 다만 좌선을 한다면 틀림없이 질 거야. 내게 그런 참을성이 어디 있겠어? 나를 쇠기둥에 묶어놔도 아래위로 비벼대며 난리를 치지, 가만 앉아 있을 리가 없어.”
손오공으로선 최고의 위기에 봉착한 셈이다. 그때 삼장법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좌선은 내가 할 수 있다.” “그거 잘됐네요! 잘됐어요! 몇 시간이나 앉아 계실 수 있나요?” “내가 어렸을 때… 생사의 기로에서도 이삼 년은 앉아 있을 수가 있었단다.”(5권, 178쪽) 오, 놀라워라~ 삼장법사가 맹활약을 한 건 이때가 거의 유일하다. 요괴들이 삼장법사를 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십세(十世)를 돌며 수행을 한 몸이라 ‘원양(元陽: 생명 활동에서 힘의 근원이 되는 양기)’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살’을 먹으면 불로장생을 얻을 수 있단다. 그런 점에서 삼장법사는 ‘텅 빈’ 듯 하지만 한없이 ‘충만한’ 신체인 것. 즉, 천지만물을 생육시키는 우주적 흐름과 연동되어 있는 것. 즉, 그에게는 어떤 결핍도 간극도 없다. 요괴들은 그의 살을 ‘먹음’으로써 이 충만함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힘과 개성이 마주치면 좀 시끄럽긴 하지만 늘 활력이 넘친다. 그리고 이때 윤리가 탄생한다. 서로를 긴밀하게 또 부드럽게 엮어주는 힘의 배치로서의 윤리! 그렇다! 이 밴드를 움직이는 건 도덕이나 법이 아니라 윤리다. 법이 감시와 처벌을 통해 작동하고, 도덕이 인정욕망의 발로라면 윤리는 철저히 ‘자기배려’에 기초한다. 즉, 자신의 내적인 명령이 핵심인 것. 부귀에 대한 탐욕은 결국 정착으로 이어져
강령 하나: 위계는 없다! 손오공이 앞장서고 저팔계는 짐을 지고 사오정은 삼장법사를 엄호한다. 각각의 소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명령과 복종의 위계를 갖지는 않는다. 이들의 화법이 그 증거다. 손오공은 자신들의 수호신격인 관음보살, 심지어 옥황상제와 석가여래한테까지도 거침없이 대들고 개긴다. 그러니 삼장법사한테야 말해 무엇하리. 저팔계의 불평과 투덜거림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삼장법사 역시 마찬가지다. 권위에 대한 집착은커녕 자신의 약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드러낸다. 한마디로 예의범절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다.
하지만 그래서 솔직하고 자유롭다. 위계가 엄격하면 상하층 모두 그걸 지키느라 신체가 경직된다. 하지만 이 밴드는 아주 유연하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을 추방할 때는 그렇게 단호한 척했지만 다시 와서 자신을 구해주자 “착한 제자야, 애썼구나!” 하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슬쩍 받아준다. 제자들 역시 죽기살기로 으르렁대다가도 금방 희희덕거린다. 위아래가 없고, 감정의 잉여가 없다 보니 복원력이 아주 뛰어난 것이다. 먼 길을 갈 수 있는 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령 둘: 대가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요괴를 무찔러야만 길을 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전투는 구도의 여정이자 그 요괴로 인해 고통받는 중생의 고난을 해결해주는 보살행이기도 하다. 헌데, 이런 공덕을 쌓고 나면 꼭 뒤따르는 일이 있다. 엄청난 보답이 그것이다. 황금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나라를 통째로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어떤 것도 수락하지 않는다. 대가를 받는 순간 이미 공덕은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므로.
‘일보 전진에 백 보 후퇴’의 길인 것. 중생의 번뇌는 대개 원한과 자책이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하면 남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괴롭히거나 한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 공덕을 이루되 아무런 보답을 받지 않는 것이다. 너무 야박하다고? 그렇지 않다. 공덕은 그 자체가 이미 보답이다. 몸은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답이 필요 없다. 강령 셋: 머무르지 않는다. 후반부에 가면 요괴보다 더 무서운 게 이 보답과 선물공세였다.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에 삼장법사 일행을 붙들어 몇 날 며칠이고 잔치를 베푼다. 저팔계만 신이 났다. 허구한 날 이렇게 먹어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삼장법사는 마음이 급하다. 그래서 다시 행장을 꾸리면 저팔계는 투덜거리고 사람들은 다시 붙든다. 이런 실랑이를 수도 없이 해야만 겨우 길을 나설 수 있다.
이로써 보건대 결국 부귀에 대한 탐욕은 정착으로 이어진다. 좋은 집에 머물러 지속적으로 이 욕망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곧 정착이다. 정착하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은 다시 정착의 빌미가 된다. 구도란 이 욕망을 가로지르는 동선이다. 실제의 현장법사도 인도에서 돌아온 이후 자신을 측근에 두려는 황제들과 ‘밀당’을 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지옥으로 가는 길엔 호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나왔을까. 나를 적대시하는 이들은 나를 궁극적으로 분발시킨다. 하지만 나에게 무한한 호의를 베푸는 이들은 나를 하나의 고정된 영역에 묶어두고자 한다. 내 안에 있는 능력을 독점하고 싶어서다. 수행자들이 최후에 마주치는 함정이 여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장법사와 아이들은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저팔계만이 매번 우왕좌왕하지만 그 역시 정착해서 부귀를 누리기보다는 스승과 도반을 따라가기를 선택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구도는 유목이다! 구도와 유목이 마주칠 때, 그때 비로소 윤리가 탄생한다. 정착민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고귀하고 유쾌한! 강렬하고 유연한!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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