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k9TVzw3bDk?si=1wdhkfw1AR_UOeE6
베르디 레퀴엠, NBC Symphony Orchestra-Arturo Toscanini: conductor-Live-Carnegie Hall-1951
베르디가 진혼 미사곡을 작곡하게 된 경위는 이탈리아 낭만주의의 두 거장, 로시니와 만조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1868년 아탈리아 오페라의 선구자 로시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베르디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진혼 미사곡을 작곡할 것을 밀라노의 악보 출판사 리코르디에 제안하여 Messa a ossini 작곡에 몰두한다.
이 곡은 당대 명성이 높은 13명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각 부분별로 작곡하여 1869년에 완성된 공동 작품으로서 베르디는 맨 마지막 부분인 'Liverame'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로시니 사망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이 작품은 연주상의 난해함과 베르디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휘자였던 마리아니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연주되지 못하였다. 베르디는 격분하였지만 연주회는 성사되지 못하였고 그는 다시 오페라 작곡에 몰두하여 Aida를 완성하게 된다.
1. Requiem & Kyrie(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주여 시온에서 찬미함이 진정 마땅하오니,예루살렘에서 당신께 서원이 바쳐지리이다/주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모든 이가 당신에게 오리이다/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 Dies irae (분노의 날)
진노와 심판의 날이 임하면/다윗과 시빌의 예언따라/하늘과 땅이 모두 재가 되리라/모든 선과 악을 기리시려/천상에서 심판관이 내려오실 때/인간들의 가슴은 공포로 찢어지리
놀라운 나팔소리가/세상의 모든 무덤 위에 올리며/모든 이를 보좌앞에 모으리라/심판주께 답변하러/모든 피조물이 깨어날 때/죽음이 엄습하고 만물은 진동하리
보라! 모든 행위 기록들이/엄밀하게 책에 적혔으니/그 장부따라 심판하시리/심판주께서 좌정하실 때/모든 숨겨진 행위가 드러나리니/죄지은 자 벌받지 않는 일없으리라
어린 인간은 무엇을 탄원하며/누가 나를 위해 중재할까?/자비가 필요한 그때는 언제일까?
위엄과 공포의 왕/값없이 우리를 구하시니 긍휼의 근원이시여/그때에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체를 입으신/자비로운 예수, 구원때에 나를 기억하시고/나를 버리고 떠나지 마소서/나를 찾으시려 힘들고 피곤하셨으며/ 나로 인하여 십자가에 고난당하시니/그런 은혜를 어찌 헛되게 할까?/공정하신 심판주여/심판의 그날 전에/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죄로 인해 슬퍼하며/부끄러움으로 고통스러워 하니/신음하고 간청하나이다/주여, 죄를 사하소서/죄많은 여인을 사하여 준 것 같이/죽어가는 도둑이 용서를 받은 것 같이/내게도 희망을 주셨도다/나의 기도와 탄식은 보잘 것 없으니/인자하신 주의 은총으로/영원한 불에서 나를 구하소서/나를 염소떼 속에 두지마시고/택하신 양들 중에 자리주시고/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높이소서
사악한 자들을 깨뜨리어/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심판하실 때/나를 부르사, 주의 성자들로 둘러싸소서/내가 무릎꿇고 진심으로 복종하나이다!/재가 되도록 뉘우침을 보소서!/나의 종말을 돌보소서!
눈물과 슬픔의 그날이 오면!/땅의 먼지로부터 일어난/심판받을 자들이 주앞에 나아오리/천주여 자비로써 그들을 사하소서/긍휼의 주 예수여 축복하사/ 그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아멘.
3. Offertorio (봉헌문)
영광의 왕, 주 예수, 그리스도/죽은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지옥의 형벌과/ 깊은 구렁에서 구하소서/사자의 입으로부터 그들을 구하소서/지옥이 그들을 삼키지 않게 하시고/그들이 어둠속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그리고 성 미카엘의 인도에 따라/일찍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거룩한 빛의 세계로 그들을 이끄소서/주여, 찬양과 기도의 제물을 드리니/오늘 우리가 추도하는 영혼들을 위해/받아주소서/주여, 일찍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처럼/그들을 사망을 지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지옥의 형벌로부터 신자들의 영혼을 구하시어/그들을 사망을 지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4. 거룩하시다
5. 신의 어링양
6. 영원한 빛을
7. 나를 용서하소서
https://youtu.be/FRx0eO-EXLM?si=BJedADlH_EvX20Nf
Orchestra e Coro dell'Arena di Verona. Riccardo Muti, cond. Verona. August 1980
한 동안 Aida 공연에 몰두하던 베르디는 진혼 미사곡 전곡을 완성 하기로 결심 하고 로시니를 위해 작곡했던 'Livera me'를 중심으로 하여 전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873년 5월에 그가 매우 존경하던 도 다른 인물인 만조니가 89를 일기로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와 더불어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우리들의 최고의 영예가 사라졌다." 그의 죽음에 너무 상심한 나머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뒤늦게 그의 묘소를 방문하기 위해 밀라노로 향하게 된다. 리코르디를 통해 베르디는 밀라노 시장에게 만조니 사망 1주년 추모행사를 위한 진혼 미사곡을 작곡할 의사를 전했다. 그는 시 당국에서 초연에 드는 비용을 지불한다면 악보를 인쇄하는데 드는 비용을 자신이 부담할 것을 제의했고 시장은 그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1874년 4월 진혼 미사곡을 완성한 베르디는 최고의 음향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밀라노의 San Marco 성당을 연주장소로 선택했고 120명의 합창단, 100명의 관현악단과 함게 연습을 했다. 베르디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연주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3일 후 베르디는 La Scala에서 두번째 공연을 했다.
초연 전일부터 밀라노에 머물렀던 독일의 지휘자이자 바그너 숭배자인 뷜로우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일 밀라노의 San Marco 성당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그 자신이 지휘하는 기괴한 진혼 미사곡 -염치없이 로시니의 불멸성을 소멸시키고 이탈리아의 예술적 기호를 파괴하는 작품-연주회가 열릴 것이다. 교회 음악의 옷을 입은 베르디의 최후의 오페라는 또한 3일 연속 La Scala에서 연주될 것이다....."
다음 날 신문에, 그는 다시 "뷜로우는 San Marco 성당에서 어제 장관을 이룬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베르디의 교회 음악을 듣기 위해 밀라노로 모인 외국인들 가운데 결코 함께 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뷜로우의 이러한 혹평은 오히려 베르디의 진혼 미사곡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당대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전통을 고수하던 브람스는 진혼 미사곡의 증보를 연구한 후 "뷜로우는 스스로 바보가 되었다. 이것은 천재의 작품이다."라고 단언했다. 뷜로우는 몇 년 후에야 자신의 진정을 토로하면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베르디에게 사과의 편지까지 썼다. 그러한 가운데 빌로우의 청중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베르디의 명성은 유럽 각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곡은 한마디로 '극적인 교회 음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베르디 자신은 결코 이 곡을 오페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일면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초연 한 달 전 리코르디에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당신이 원하던 대로 쉬울지는 모르겠지만 표현과 악보에 있어서 쉽지 않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 미사곡을 오페라를 부르는 방식으로 부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저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극작용 음악에 적합하지만 이 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악구와 다이나믹은 결코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진혼 미사곡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자유롭게 나타냈으며 그의 관심은 사후세계에 대하여 너그럽게 감수하는 마음이나 즐거운 기대감 등에 있지 않았다. 베르디는 작곡 당시 모짜르트, 케루비니, 베를리오즈의 진혼 미사곡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의 작품보다 훨씬 현실감 있게 최후의 날의 공포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베르디는 진혼미사곡의 가사에서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고 참회하는 인류의 모습을 발견하여 이러한 광경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르디의 진혼 미사곡은 단순히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미사곡이 아닌,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는 미사곡이다.
베르디의 레퀴엠
그는 그의 생애를 통해 로시니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의 데뷔 곡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서곡이었다. 게다가 그는 1868년 로시니의 사망을 접한 베르디는 그의 1주기를 기하여서 여러 유명 작곡가가 참여해 만든 레퀴엠을 연주하여 그를 기리자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위원회가 구성되고 곡의 전반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각기 악장들을 배분 받아서 곡을 쓴 후에 발표하기로 하여서 이듬해 1주기에는 이미 대부분의 준비가 이루어졌었다. 베르디는 그 중 마지막 곡인 Libera me를 맡아 썼다. 모든 준비가 다 이루어져서 연주만을 남겨놓고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연주자 사정으로 인하여 초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악보만을 봉헌하려한 것조차도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1873년 아이다를 다시 상연해 올리기 위해서 연습하고 있을 때 그는 I promessi sposi의 작가인 만포니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레퀴엠을 이미 작곡해 보았던 베르디는 만포니를 위해서도 그의 기념일에 연주할 곡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만포니는 베르디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만쪼니의 1주기 기념일에 연주할 레퀴엠을 써서 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를 위해서 그 시대에 유럽에서 행해지는 레퀴엠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자신이 쓸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유행하던 형식에서 조금 탈피하여서 독창과 중창의 비중을 한결 높여서 레퀴엠을 완성하였다. 그 중에 어느 악장은 악장 전체가 독창과 중창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그가 로시니 레퀴엠을 기획하고 작곡한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상관 관계는 최근의 로시니 레퀴엠 전곡이 발견됨으로서 증명되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 쓴 편지에서 그가 만쪼니의 1주기 기념일에 연주할 레퀴엠을 써서 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베르디의 이 레퀴엠 미사에 대한 계획은 만쪼니가 죽기 직전부터, 그가 편지로 리코르다에게 알리기 수개월전에 이미 구상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이 곡은 밀라노의 산 마르꼬 성당에서 1874년 5월에 초연 되었다. 이 연주에서는 당시 이태리의 대표작인 성악가들과 라 스칼라에서 뽑은 110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120명의 합창단원에 의해 베르디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그 연주는 아주 특이하게 오케스트라의 합창단이 가로로 양편으로 자리 잡고 연주되었다. 그 후에 라 스칼라에서 일반 연주회의 형태로 공연되어졌으며, 그것을 만쪼니는 카톨릭 신자였지만 베르디는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 곡은 연주회의 형태를 띠고 많은 연주가 이루어져서 베르디가 자신이 직접 지휘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빈번한 연주를 한 곡으로 기록되어졌다. 베르디는 레퀴엠 이외도 스타바트 마테르, 네 개의 성가곡(Quattro Pezzi Sacri)등을 남겼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ofFBG5KzTMY?si=QFfPT3iwo453OxfJ
Verdi Requiem / Calgary Philharmonic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