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인의 사랑이 만든 절, 길상사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삼각산 자락에는 길상사가 있다.
1997년에 창건된, 젊은 사찰이다.
원래는 군사정권 시절 이름난 요정이었다.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기생 출신 김영한(1916~1999)이 시주해 사찰이 됐다.
길상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영한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양반가의 자제였으나 조실부모했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15살에 결혼했지만 이듬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자유를 찾아 기생이 됐다.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궁중 아악과 가무를 배우며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신현보)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했다.
해관이 투옥되자 귀국해 그가 갇힌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 면회를 시도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그곳에 머물게 됐다.
은인인 해관을 만나기 위해 다시 기생이 됐다.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 나간 첫날, 김영한(당시 20세)은 시인 백석(당시 24세)과 기생과 손님으로 만났다.
당시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였다.
백석은 사랑의 징표로 ‘자야(子夜)’라는 아명을 지어줬다.
자야는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달빛과 다듬이 소리로 그려낸,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시절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을 졸업했고,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 교사로 재직했다.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권번 출신 여성과 지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김영한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백석은 홀로 떠났다.
그때 남긴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했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후 김영한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과에 입학했다.
백석의 삶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졸업 후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펴냈다.
김영한은 사업적 수완도 뛰어났다.
현재의 길상사 자리에 있던 한식당 청암정을 사들여 고급 요정 대원각을 만들었다.
대지 2만㎡(7,000평), 한옥 40여 채 규모였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법정 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시주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대원각의 가치는 1000억 원이 넘었다.
법정 스님은 처음에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김영한은 약 10년 동안 끊임없이 간청했고, 결국 법정 스님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화는 ‘불길한 것을 깨뜨리고 길상한 것을 이루는 꽃’이라는 뜻이다.
대원각은 길상사로 다시 태어났다.
1999년 김영한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길상사 뒤뜰에 뿌려졌다.
사람들이 “아깝지 않느냐”고 묻자, 김영한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1000억 원이라는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가지려 애쓰지 않는 삶이다.
김영한에게는 백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무소유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 마을버스02번을 타고 길상사에 내린다.
일주문에 들어선다.
사찰에서 일주문은 세속과 진리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다.
‘삼각산 길상사’라 적힌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문밖과 문안은 전혀 다른 세상인 듯 구분된다.
깔끔하게 늘어선 한옥과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수많은 나무들 속에서 깊은 자연의 별서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단청을 하지 않은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 극락전이 나타난다.
관음전 왼쪽에는 1.8m 크기의 화강암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관세음보살상인데, 성모 마리아를 닮았다.
생각에 잠긴 듯 살짝 감은 눈과 목 주변의 둥근 띠는 미륵반가사유상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른다.
고풍스러운 다리를 건너면 작은 사당이 보인다.
사당 앞에는 공덕비 하나가 서 있다.
시주자 길상화 김영한의 공덕비다.
작은 오두막 같은 집들이 곳곳에 있는데,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의 처소라고 한다.
계곡 맨 위 조금 비탈진 곳에 법정 스님이 머물다 입적한 진영각이 있다.
진영각 내부에는 스님의 영정과 스님이 남긴 수많은 저서, 평소 쓰던 검박한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누더기처럼 해진 법복은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보여준다.
길상사를 창건한 뒤에도 법정 스님은 강원도의 오두막에서 지내며, 봄과 가을 정기법회 때만 이곳으로 돌아와 법문을 했다.
폐암 판정을 받은 법정 스님은 2010년 길상사에서, 수많은 신도와 승려들의 애도 속에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진영각 담장 아래에는 스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일주문 쪽으로 내려오다 맨 오른편으로 향하면 7층 석탑이 보인다.
사자 네 마리가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두 마리는 입을 다물고 두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김영한과 법정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기증한 탑으로,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한 종교 간 교류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길상사에서는 생각이 깊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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