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중학교 3학년때 사진(완주중 29회 동창회장 제공)
문수스님 영정뒤로 중학교 3학년때 학급단체사진
도반 석문스님,문수스님 행장소개
도영큰스님 법어
보림사,보림백모차(병차)(초의선사가 자랑한 차)-조선시대 스님들의 대표적 약용차,복원- 명전 임충성(2009년 봄)
헌다(문수스님께 보림백모차를 헌다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명전 임충성
고향 봉동 초등학교 동창들과 중학교 동창들이 중심이 되었고,문수스님 도반 적문스님(행장소개),도영큰스님(법문),추모위원장 이길용회장님,지역주민,차분한 가운데 의인 문수스님 추모제가 진행되었다.오전내내 내린비는 꽃비가되어 추모제 몇시간전에 단비가 그치고,행사를 준비한 분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냄니다.보림백모차를 달여 헌다 하도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문수스님과 함께 25년전 해인사 운동장에서 축구시합 하던 지난 시간들이 한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스님 벌써 25년이라는 시간이 허공속에 남아있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출신 스님들은 스님이 남겨놓고 떠난 죽비를 가슴에 않고 더 정진에 몰두하고 상구보리를 이루기 위해
정진 할 것입니다.중생에게 회향하기 위해 더 철저하게 수행할 것입니다.
스님은 한국불교사에 큰 이정표를 남기시고 우리 곁으로 문수보살로 오셨습니다.
스님 장하십니다.전세계 불자들에게 추앙 받을 것입니다.스님은 이제 문수보살로 제 곁에 오셨습니다.
나무 문수보살! 스님이 자랑스럽습니다.불교가 들어온 이래,이차돈 순교이후 스님이 가장 큰역사를 쓰셨습니다.
수경스님은 마음이 터져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초발심 수행자로 돌아가겠다고 어느 눈오는 날 양지바른 곳에서
스님을 만나겠다고 승적도 반납하고 본래 무일물로 가셨습니다.마지막으로 그렇게 외치고 떠나셨습니다.
수경스님은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마지막으로 몸부림치다.
불가의 큰스승 한분이 이렇게 떠나야 하는지 현실이 그렇습니다,나무문수보살!
나무문수보살! 나무문수보살!
사찰 답사 다닐때마다 스님 허공속에서 자주 만나야죠,스님이 걸었던 해인사 홍류동이 보고 싶습니다.가야산 정상을 향해 걸었던 그 길이 그립습니다.하얀 눈이 가야산과 해인사에 눈꽃으로 남아있습니다.
언론과 방송국은 스님 소식 전하는 것이 무엇이 겁나는지 눈을 감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저들의 행태를 지켜보시겠죠,기독교인 집안에서 출가의 길을 가셨던 문수스님,
기독교인 집안에서 이렇게 문수보살로 우리곁에 남으셨으니 얼마나 장합니까?
스님이 부모님 묘소를 찾을 때 항상 작은 아버지를 만나고 다시 오마고 스님을 기다리는 작은 아버지는 스님의 소신공양 소식을 이제사 듣고 눈물을 흐리셨습니다.꼭 다시 온다고 했는데 하시며 함께 울었습니다.
스님 형님도 스님을 잃고 많이 힘들 것 입니다.
스님은 해인사 창건이래 가장 장한 스님으로 우리 곁에 돌아오셨습니다.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문수보살로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스님도반 석문스님은 지금도 잠못 이루고 스님 떠난 빈자리가 너무 커서 말을 잃었습니다.웃음을 잃었습니다.그렇지만 스님 도반들은 이제 스님을 문수보살로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비겁하고 겁쟁이들은 문수스님을 문수보살로 받들어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 곁으로 문수보살로 오셨습니다.슬퍼하지만 아니하겠습니다.
스님 고향 동봉에서는 의인문수스님으로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비겁자들만 살아 남아서 스님을 추모합니다.
문수스님을 추모하며
차에 취한들 세상이 무엇이라 하리요, 차에 취하여 구름이 달가듯이
문수는 도에 취하여 소신공양으로 부처한테 돌아가고,내게는 문수보살로 다가 왔다네
문수야 니 장하다,보림백모차 한사발 달여서 올리나니 이 민족 구원하거라.
명전 임충성
첫댓글 극락왕생하소서....
문수스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 문수보살이여! 한줄기 빛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
나무문수보살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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