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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13,26-33
복 음 : 요한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의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저는 때때로 예비자 교리 시간에 숙제를 하나 냅니다.
집에 십자고상이나 성모상으로 기도 공간을 만들어 보라고 말입니다.
내가 사는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꾸미는지는 중요합니다.
내가 사는 공간은 나의 내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로 반론을 펼칠지도 모릅니다.
‘술주정뱅이는 수도원에 가도 수도원이 술집이 되지만,
수도사는 술집에 가도 술집이 수도원이 된다.’
곧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말도 맞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우리가 머무는 장소도 중요합니다.
어떤 곳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내면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러 하느님께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곳이기에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자리에 가려면 하느님 나라와 닮은 장소에 자주 머물러야 합니다.
안젤름 그륀 신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저는 오늘 저녁 마음의 문을 닫고
침묵의 내적 공간에 아무도 들이지 않으렵니다.
그 안에는 당신만 계십니다.
오늘의 문제나 걱정거리, 미래의 불안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오직 저와 당신만 그 안에 머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자 합니다.
잠시 예수님과 함께 ‘침묵의 내적 공간’에 머물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웁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살기 위해,
‘평범해서는 안 된다.’, ‘특별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함이 삶 안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이를 위한 에너지 소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남과 다르게 살기 위해 특별한 ‘나’를 찾지만,
사실 ‘나’라는 그 자체로 특별하고 다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도 충분히 다르고 특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굳이 가식이나 위선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과 경쟁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힘 빼고 ‘나’로 살면서 즐거우면 됩니다.
어렸을 때 미술 시간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크레파스가 나빠서, 도화지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원래 못 그린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크레파스나 도화지가 있어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미술 시간이 가장 싫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못 하는 것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남들보다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것도 있기에 충분히 괜찮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힘센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스승의 떠남과 베드로의 배반 예고(13장)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 떠나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에 영적,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런 제자를 향해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게 됩니다(요한 14,6 참조).
주님의 사랑 외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고 마음이 산란해지곤 합니다.
그때 세상은 여러 가지 화려한 길과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특별한 ‘나’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특별한 ‘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조금 다를 뿐입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특별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뒤를 묵묵히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으로 특별한 ‘나’가 될 것입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과
‘세 번 부인하게 될 베드로에 대한 예고’ 다음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함께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7,33)고 말씀하셨건만,
이를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그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알게 됩니다.
‘앎’은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참된 앎’은 그것을 실행할 때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라고 시작한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였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놓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무는 친교를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쫓겨남도 없고, 멸망함도 없는 참된 거처를 가지게 된다.
곧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In Io. Evang. Tract. 67,2).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믿음과 사랑 안에서 준비하는 삶은,
단지 미래의 보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그 거처를 짓는 행위이다.
주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라고 약속하신다.
그분이 곧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이렇게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는 더 이상 죽음 안에 있지 않고,
그분과 함께 거처하게 된다.”(In Ioannis Evangelium, lib. 9).
곧, 우리의 거처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완성된다.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 진리는 교회의 신앙,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나는 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이다. 나를 알지 않고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와 함께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In Io. Evang. Tract. 69,2).
즉, 예수님은 단순히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시며,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교회는 이 진리를 끊임없이 선포해 왔다. 교회 헌장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간다.”(14항).
우리가 아버지께 도달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로써 길을 걷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가 말하듯이,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그리스도는 이 길과 진리와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신다.
우리는 종종 제자들처럼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느낀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 길, 진리, 생명으로 오셨다.
우리의 불안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길을 생명으로 이끄시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5월의 첫날입니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5월은 ‘성모 성월’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5월에 성모님께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당에도 5월에는 행사가 많습니다.
5월 2일은 성모의 밤, 5월 3일은 생활 성가 대회, 5월 10일은 Mather’s day,
5월 16일은 다문화 미사, 5월 17일은 청소년 음악회,
5월 23일은 꾸르실료 재교육, 5월 24일은 견진성사가 있습니다.
시편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바라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모여 사는 것”
이런 말도 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농부가 여름에 땀을 흘리는 것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는 것도 물때가 맞아야 합니다.
물때가 맞지 않으면 그물을 던져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물때가 맞으면 힘이 들어도 힘차게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멋진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입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들은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어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죽음도, 권세도, 칼도, 박해도, 굶주림도, 천신도, 악신도’
사도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 진리, 생명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산에 오를 때 먼저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작은 표시는 큰 힘이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땀과 노력입니다.
역사는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이며 문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 사랑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군중들의 모욕이 있었고, 제자들의 배신이 있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부활의 길이었고, 희망의 길이었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을 알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습니다.
원리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런 가치와 척도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진리는 때로 독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광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독점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됩니다.
알은 깨어지는 아픔을 거쳐야만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명예, 성공을 추구하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항해하는 배를 안내하는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밝은 빛으로 안내할 뿐입니다.
밤길을 안내하는 등대도 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등대는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등대가 밝히는 빛을 따라서 암초를 피하고,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평생 3가지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대에게 가장 값진 시간은 언제인가?"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톨스토이'는 정답까지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은 지금 마주한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구도 앞으로 어떤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때그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선행을 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런 삶이 모여서 영원한 생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충실히 살아온 삶의 흔적!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거룩한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대침묵 속에 피정이 진행되니,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가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선물처럼 주어진 여유로움에 감사하며,
정말 오랜만에 제 발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비롯해서 몸 전체는 매일 뽀득뽀득 씻고 관리를 하는 편이지만,
잘 보이지도 않고, 늘 가려져 있는 발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정말이지 발에게 미안했습니다. 보기가 흉할 정도였습니다.
매일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달리다시피 살아오다 보니 발바닥은 굳은살이 깊이 박히고,
뭐 한번 제대로 발라준 적이 없다 보니 부르트고 갈라져서 참 보기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로구나.
백방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닌 흔적이로구나, 하는 마음에 기뻤습니다.
한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였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들과 농사짓는 농부들이셨는데,
영성체 때 펼친 손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일에 손이 너무나 거칠고 투박했습니다.
사고를 당했던지 손가락 한두 개가 없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워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오신 흔적이요, 박수 받으셔야 마땅한 훈장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노동절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송 영진 모세 신부
1)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시며 ‘목수’이셨다는 것은(마르 6,3),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과 인간들을 고치려고,
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오신 ‘하느님의 목수’이십니다.
그래서 목수라는 직업은 예수님의 사명에 직결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그 당시 목수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메시아’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직업이 농부라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농부들이 하는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하느님은 생명체들을 만드신 분이고,
그 생명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에 관해서 말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하느님은 우리에게 씨앗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고,
그 열매를 풍성하게 늘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씨앗을
잘 심고 가꾸고 돌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6-9)
신앙인은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협력자입니다.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은
그 자체로 ‘선’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선’과 ‘사랑’의 반대쪽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아담’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그곳을 관리하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대한 전권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오염시키거나 파괴할 권한은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일으키는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의 반대쪽에 있는 ‘악한 일’이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쟁을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파괴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서,
또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4)
복음서에는 ‘농부’이신 하느님과 ‘목수’이신 예수님에 이어서,
사도들이 ‘어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사람 낚는 어부’ 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 라는 뜻입니다.
<‘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사람 낚는(구원하는) 어부’로 변화되었는데,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부르심에 응답할 때 자신들의 직업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었습니다.(사도 18,3)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사도가 된 후에도
직업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선교활동을 위한 활동비를 벌기 위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원래 직업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
또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입니다.
“믿음의 여정”
아버지께 가는 “하늘 길”이신 예수님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며,
내가 있는 곳으로 너희들을 데려 가겠노라.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되겠노라.”(요한14,2ㄴ-3)
하늘 길 예수님의 위 말씀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오늘은 5월1일 성모성월 첫날입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저절로 아름다운 성가 244장이 떠오릅니다.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에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하는 신록의 계절, 신록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오늘 5월1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미사를 봉헌하지만,
교회는 <노동자 성 요셉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했습니다.
또 올해부터는 나라에서도 종전의 <근로자의 날>에서
처음으로 <노동절>이라 부르며 법정공휴일로 지냅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의 5월 기도지향도 참 각별합니다.
그렇게 많은 식량들이 낭비되고 있는 반면,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강조하신 교황은,
‘모두가 양식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가톨릭 신자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니 참 중요한 5월이요, 성모성월 계절의 여왕 5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이 자랑스럽고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참으로 마리아 성모님의 마음과 믿음을 닮아야할 5월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믿음이요, 인간 품위의 기초가 믿음입니다.
<노화의 여정>이기보다는 <성화의 여정>, <믿음의 여정>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세월과 더불어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영혼은 날로 믿음의 성장과 더불어 거룩해 지는 성화의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고별담화의 일부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 가게 됨을 분명히 알리면서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유다의 배신 예고와 함께 예수님의 이별 예고, 또 베드로의 부인 예고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이 몹시 산란해 졌음을 직감하신 예수님의 위로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런저런 불안과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향한 위로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복음에는 “믿음”이란 명사가 전혀 없고 “믿는다”라는 동사만 사용되는데
예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기본적 자세를 가리킵니다.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응답, 굳건한 신뢰, 내적 평화와 마음의 안정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일치된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깨지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흔들립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에 믿음의 무기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습니다.
<인자무적>이자 <신자무적>입니다.
바로 5월 성모성월 믿음의 중심에 마리아 성모님과 더불어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늘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 길입니다.
바로 바오로가 안티오키아 설교에서 강조하는 분도 이런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주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의 예고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 길이자 하늘 문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오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참 장엄합니다.
참으로 구원에 이르는,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 길은
예수님 자신뿐임을 천명하십니다.
다음 구절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자 요약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바로 이런 하늘 길이신 예수님을 잊어, 잃어 방황이요 표류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진리와 생명의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임을 확인합니다.
끝없는 탐욕과 AI가 대세인 시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길 잃은 미아가 되지 않도록
진리와 생명의 하늘 길이신 예수님과 믿음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해 주십니다.
요셉 수도원 정문에서 주차장까지 신록으로 빛나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사이 하늘 길을 걸을 때마다 되뇌는 자작 고백 시입니다.
아무리 인용해도 늘 좋고 새롭습니다.
“하늘 님,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늘 길
하늘 향해 쭉쭉 뻗은
하늘의 사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사열 받으며
하늘 보고, 하늘 기운 숨쉬며
하늘 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공주)되어
하늘 님
예수님 따라
가슴 펴고, 힘차게, 나는 듯 걷는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아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승화 시몬 신부
누군가가 먼저 걸어간 길은
또 다른 누군가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자연스럽게 잡초로 무성해져 사라져버리지만
누군가가 걸어가고
또 다른 누군가가 걸어가는 길은
그 길에서 얻는 가치 때문에 계속 이어집니다.
당장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용기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미 그 길을 걸었고
또 돌아와 그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심어 집니다.
그러한 희망으로 그 길은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걸어가죠.
예수님은 인간의 나약함을 아셨기에
사람이 되어 오셨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수난을 감수하고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사랑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길이 가지는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향한 희망이 커지는 만큼
그분이 걸어가신 슬픔의 길이 사랑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희망으로 오늘도 걸어가며
우리가 걷는 길에 사랑의 꽃들이 피어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