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책 '베스트 뜨리'

평상시에 우리는 박테리아를 산 채로 먹고 발암 물질들에 침해당하며 지방질과 혈당때문에 애를 먹고 산성 물질에 침식당한다.
우리가 병들어 죽어 가는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주 병에 걸리거나 쉽게 죽지 않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즉, 이 세상에는 어떤 미지의 힘이 있어 최악의 상황에서까지도 사람들의 육체적 건강을 지켜 주고 더욱 더 건강해지도록 북돋워 준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환자들 중 가장 극적이었던 예를 말해 보겠다.
열네 살의 소년이 있었다. 그는 재활 센터에 입원하기 위한 사전 절차로서 나의 진료가 필요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여덟살 나던 해 11월에 돌아가셨다.
아홉 살 되던 해 11월에는 자전거 사고를 당해 두개골 파열과 심한 뇌진탕을 일으켰다.
그리고 열한 살 되던 해 11월에는 차에 치여 골반에 금이 갔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사고를 일으키기 쉽다는 사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대다수가 사고에 대해 자기 자신을 잘 방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도 단순한 일이 아니다.
내가 아홉살 나던 해 겨울이었다.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서 돌아오던 나는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 순간 달려오던 차가 급정거 했다. 나의 머리는 앞 범퍼 아래, 몸뚱이는 양 바퀴 사이의 차체 밑에 들어갔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차 밑으로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친곳은 없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 사고는 대단할 것이 없다. 혹자는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다른 경우와 비교해 보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차에 살짝 부딪쳤을 때, 차를 몰고 가다가 어둠속에서 보행자나 자전거를 탄 사람을 칠 뻔했을때,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앞차의 불과 1~2인치 뒤에서 멎었을때, 넘어져서 나무에 부딪칠 뻔 했을때, 누가 골프채를 휘둘렀는데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을때 등등.
이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무슨 행운의 별 아래 태어난 것일까?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기 바란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신의 삶에서 재난이 반복적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으며 실제로 일어난 사고보다 일어날뻔한 사고의 수가 훨씬 많다는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것은 내가 의식하고 있고 또 어떤것은 그 놀라운 본질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은혜를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스쳐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은총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온다.
사람들이 부모로부터의 애정 결핍이라는 외상을 극복하고 인간적으로 부모보다 훨씬 나은 사랑을 베푸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은총 때문이다.
은총이 내려 주는 평화에는 책임과 의무와 임무가 뒤따른다.
충분한 자격을 갖춘 하사관들이 장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신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진정한 정신적 건강에 수반되는 권능에 맛들이지 못하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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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그토록 기분이 좋은 까닭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힘 있는 자리에 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자기 가족이 지금까지 그녀에게 가해 온 여러가지 비현실적인 요구와 잘못된 의사소통 방식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주도적 입장에 섰기 때문임도 지적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인식을 다른 상황에도 적용할 때 언제나 '주도적 입장'에 서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런 좋은 기분을 더 자주 더 많이 맛볼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두려운 감정을 갖기 시작하면서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러려면 언제나 생각을 해야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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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치료를 통해 충분히 성숙해진 사람은 이 무자비하고 힘든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감정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게 되었음을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슬픔도 이겨낼 수 있다.
자기 안에 갇히는것은 대단히 따분한 일이지만 바깥세계를 향해서 관심과 정력을 돌리는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현명한 사람은 고민을 하는것이 효과가 있을때에만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해도 효과가 없을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밤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걱정과 안달, 짜증은 자신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도저히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일의 실패나 불행한 결혼 생활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게 하는것은 비개인적이며 원대한 희망에 집중하는 태도다.
어려움에 처했을때 걱정의 원인이 아닌 다른일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것은 대단히 큰 은혜다.
폭넓은 관심이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열정에 있다.

'당신들이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위한 교육을 펴면서 왜 교육비를 국가가 부담하는가'
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들은 기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는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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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공화국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공(public)개념인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람들은 사회를 규정하면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공익을 추구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소수 사익추구 집단에 의해 다수가 지배되고 있는 사회인가로 구분했고 또 그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전자의 개념은 '공화국'이고 후자의 개념은 '전제국'이다.)
사회를 누가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은 3차적인 관심사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데모크라시가 중우정치로 변질되는 위험을 알아 차리고 있었다.
로마시대 법에서 공법과 사법이 나눠졌던 것도 그만큼 공 개념이 중요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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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하건데, 한국의 민중들도 프랑스 민중들이 향유하고 있는 제반 혜택의 절반 정도만 획득한다면 '삶의 질'을 알차게 높일 수 있고 소외감을 내던지고 문화를 창조하며 살 수 있으리라고 본다. 요컨데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문제이다.
그리하여 남을 바라보던 삶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과 대화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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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생각해 보자.
연금과 실업수당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 교육비 걱정없고 의료비 걱정 없는 것만으로도 생활상의 큰 시름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보장의 확충 의지, 그리고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사회보장비와 세금을 많이 내도록 하는 제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프랑스는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낮은 소득 수준이었을 때에도 사회보장은 탄탄했다.
프랑스의 완벽한 무료 공교육 제도는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주어야 한다는 공화국 이념의 반영이다.
의료의 공공성과 함께 교육의 공공성 주장에는 좌우파 간에 차이가 없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교육받을 권리를 배제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사회 발전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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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영혼 피폐의 경험은 나에게 아주 값진 교훈을 주었다.
사회구성원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억울하게 굴종시키고 급기야 영혼마저 피폐케 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투쟁 의식을 더욱 강고히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간에 20%의 젊은 여성이 '향락업소'로 나서야되는, 이 지독한 모순과 불평등과 불의로 가득한 사회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우선 내 영혼이 내 육체에 침을 뱉을 것이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우리의 싸움은 결국 이 탐욕과의 싸움이다. 가진 자들의 탐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심과도............
지식을 가진 자들도 대부분 그 지식을 사회 개선과 변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보단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유리한 자리 매김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마지막 매듭글)
교사의 일상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바로 이 나라의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와 시장주의 때문이다. 국가주의 교육의 마름 노릇에 충실한 교장이 학교 현장에서는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면서 교사들을 관리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식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고,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직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 풍조에 아이들까지 물들어 있다.
어느모로 보나 교사들에게 자조와 냉소에 빠지도록 만드는 사회 환경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동안 공화국 교육을 제대로 펴지 않은 선배 교사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나는 전교조 교사들을 신뢰한다. 그 신뢰가 가없는 것은 그만큼 이사회의 희망찾기에서 전교조 교사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공화국 교육을 관철시키는 것은,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것은, 아이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교사 자신의 건강한 자아 실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유족하진 않더라도 교사는 생존이 담보되고 있다.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자아 실현을 통해 자유인, 해방자가 될 때 그만큼 이사회의 진보는 담보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붕괴되어 가는 교실에서 몇 번씩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얼굴을 돌아볼 교사에게 그람시의 말을 전하면서 나의 간절한 심정이 담긴 글을 마친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