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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이 경주(慶州)에 있다? 없다? <제2편>
<반도 경주(慶州) 황룡사 구층목탑 ‘터’라고 주장하는 곳/ 출처 : 다음 >
<경주(慶州) 황룡사(皇龍寺)구층탑(九層塔) 복원 추정(推定)도라고 함 / 출처 : 다음>
● 역사서(歷史書)로 보나, 그 지형지리(地形地理)로 보나, 방향(方向)으로 보나, 기후(氣候)와 풍토(風土)와 풍속(風俗)등 여러 가지를 비교(比較), 검토(檢討)해 봐도 반도(半島) 동남(東南) 모퉁이 경상도(慶尙道) 땅에 《옛 진한(秦韓)➠진한(辰韓)➠신라(新羅)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할 수 없다.》 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반도(半島) 대한민국(大韓民國) 땅에서는, 그곳이 엣 조선(朝鮮)➠삼한(三韓)➠삼국(三國)의 땅이라고 법석을 떨면서, 유적지(遺蹟地)라고 주장(主張)한다.》 그런데 유적지(遺蹟地)라고 하는 곳을 보면 : 지세(地勢)를 포함(包含)한 모든 것들이 전혀 부합(符合)될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반도(半島)땅에서는 미친 척, 모르는 척, 무조건(無條件) 유적지(遺蹟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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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국사기(三國史記) : 善德王.十四年.三月,創造皇龍寺塔,從慈藏之請也. : 선덕왕(善德王) 14년, 3월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이 창건되었는데, 왕(王)이 자장(慈藏)의 청에 따른 것이다.
(8) 《삼국유사(三國遺事) :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貞觀十年丙申.慈藏法師西學.乃於五臺感文殊授法.文殊又云.汝國王是天竺刹利種王.預受佛記.故別有因緣.不同東夷共工之族. : 신라(新羅) 제27대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째인 정관(貞觀) 10년 병신(서기 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불법을 전수받았다. 문수보살이 또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 왕은 바로 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다. 그러므로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의 공공(共工) 족과는 다르다. 然以山川崎嶮.故人性麤悖.多信邪見.而時或天神降禍.然有多聞比丘,在於國中.是以君臣安泰,萬庶和平矣.言已不現.藏知是大聖變化.泣血而退. : 삼국유사(三國遺事) :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 그렇지만 산천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성격이 거칠어 사납고, 미신을 많이 믿어서, 때때로 하늘의 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들이 편안하고 백성이 평화로운 것이다.” 그리고는 말을 끝내자 곧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보살의 화신임을 알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갔다.》
《經由中國太和池邊.忽有神人出問.胡爲至此.藏答曰.求菩提故.神人禮拜.又問.汝國有何留難. : 법사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 물었다. “어찌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는가?” 자장이 대답하였다. “깨달음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신인이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는가?” 藏曰.我國北連靺鞨.南接倭人.麗濟二國.迭犯封陲.鄰寇縱橫.是爲民梗.神人云.今汝國以女爲王.有德而無威.故鄰國謀之.宜速歸本國.藏問歸鄕將何爲利益乎. : 자장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나라의 도적들이 맘대로 돌아다닙니다.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구려. 그래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빨리 돌아가야만 하오.” 그래서 자장이 다시 물어보았다. “고국에 돌아가서 어떤 이로운 일을 해야 합니까?” 神曰.皇龍寺護法龍.是吾長子.受梵王之命.來護是寺.歸本國成九層塔於寺中.鄰國降伏.九韓來貢.王祚永安矣. : 신이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용(護法龍)은 바로 나의 맏아들이오.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가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소이다. 고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할 것이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할 것이며,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建塔之後. 設八關會,赦罪人.則外賊不能爲害.更爲我於京畿南岸置一精廬.共資予福.予亦報之德矣.言已遂奉玉而獻之.忽隱不現.[寺中記云.於終南山圓香禪師處.受建塔因由] : 탑을 세운 후에는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여 풀어주면, 외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나를 위해 서울 인근 남쪽 언덕에 절 하나를 지어 내 복을 빌어준다면, 나 또한 그 은덕을 보답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드디어 옥을 받들어 바친 후에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절의 기록에,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가 있는 곳에서 탑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➊ 《我國北連靺鞨.南接倭人.麗濟二國.迭犯封陲.鄰寇縱橫.是爲民梗. :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왜국과 접(接)해 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도적들이 맘대로 돌아다닙니다.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가시나무)이다.》라고 하였는데,
반도(半島) 동남(東南) 모퉁이 땅에서 : 「반도(半島)란 삼면(三面)이 바다(海), 한 면(面)이 땅(陸地)과 연결(連結)되어있는 지형(地形)을 말한다.」 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 말갈(靺鞨)은 어디에 있었으며, 왜국(倭國)은 어디에서, 신라(新羅) 땅과 접(接)해 있었는가? 하는 문제(問題)다.
➋ 이런 ‘개(犬)’ 같은 경우가 있으니, 열도(列島) 애들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반도(半島)침탈(侵奪)의 명분(名分)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수천(數千)리 이상(以上)【둘레】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땅에서, 누구와 접(接)하고 있었다는 얘기냐? 북(北)쪽 한 곳만이 육지(陸地)로 연결되어 있고, 그곳은 죽으나 사나 고구려(高句驪) 땅이었다. 말갈(靺鞨)이 고구려(高句驪)냐? 《고구려(高句驪)속에 복속(服屬)된 말갈(靺鞨)이 있는 것이지, 말갈(靺鞨)속에 고구려(高句驪)가 있었던 게 아니다.》
이때 말갈(靺鞨)은 이미 고구려(高句驪)에 의해 정복(征服)당한 종족(種族)으로, 고구려(高句驪)는 이들을 무장(武裝)시켜, 고구려(高句驪) 군대(軍隊)에 편입(編入)시켜, 공격(攻擊)과 방어(防禦)의 최전선(最前線)에 투입(投入)하였다. 말갈(靺鞨)이 고구려(高句驪)의 일원(一員)이 될 수 있을지언정, 고구려(高句驪)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驪)와 말갈(靺鞨)의 관계(關係)>는, 21세기 지금(只今)도, 대륙(大陸) 서남방(西南方) 애들에게 이용(利用)당하고 있고, 이는 곧 조선사(朝鮮史)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라고 자칭(自稱)하는 반도인(半島人) 스스로, 부추기고, 원인(原因)을 제공(提供)키도 하며, 진행형(進行形)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너무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분들만 모여 사는 곳이다. 순진(純眞)하다는 것이, 좋은 뜻만 있는 게 아니다. 무지(無知)와 통(通)하는 말이다!!!!!!!!!!!!
< 6세기(世紀) 전기(前期)의 조선(朝鮮)> : 《열도(列島)애들의 교육(敎育)용 역사지도(歷史地圖) : 임나(任那)를 봐라!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사이에 그려 놓고 있잖은가! 반도인(半島人)들은 너무 순진(純眞)?한 분들만 모여 사는 곳이다. : 출처 : 우리역사의 비밀》
➌ 위 원문(原文)에는 : <북(北)쪽에 말갈(靺鞨)과 잇닿아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구려(高句驪)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이냐? 강조(强調)하는 말이지만, 고구려(高句驪)의 한 일원(一員)으로 ‘말갈(靺鞨)’이 있었을 뿐이다. 왜냐, 정복(征服)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➍ 구한(九韓)이 누군가? 바로 구이(九夷)가 아니더냐! 구이(九夷)란 동방(東方)에서 사는 아홉 종족(種族)을 가리키는 말이며, <동방(東方)이란 총령(葱嶺)의 동(東)쪽 지방을 총칭(總稱)>하는 말인데, 왜 그곳이 반도(半島) 땅이 되어야 하는가? 『동방(東方) 땅에 반도(半島)는, 수백(數百)개도 더 들어갈 수 있으나, 반도(半島)는 너무나 비좁아, 동방(東方) 땅이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해도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善德王議於群臣.群臣曰. : 정관 17년 계묘(서기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 승복과 폐백 등을 가지고 귀국해서 탑을 세울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였다. 請工匠於百濟.然後方可.乃以寶帛請於百濟.匠名阿非知.受命而來.經營木石.伊干龍春幹蠱.率小匠二百人. : “백제에게 장인들을 청한 이후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장인을 부탁하였다. 아비지(阿非知)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는 나무와 돌을 다듬었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이, 이 공사를 주관하여 200여 명의 장인들을 통솔하였다. 初立刹柱之日.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匠乃心疑停手.忽大地震動.晦冥之中.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乃之其柱.僧與壯士皆隱不現.匠於是改悔.畢成其塔. :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는 날에 아비지가 꿈에 자기 나라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의구심이 생겨서 공사를 멈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면서 깜깜해졌는데, 그 어둠 속에서 어떤 노승 한 명과 장사 한 명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더니, 승려와 장사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비지는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 당시(當時)의 신라(新羅)사정(事情)을 알 수 있는 내용(內容)이다. 제대로 된 장인(丈人)이 없어, 백제(百濟)에서 구해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당시(當時) 백제(百濟)는 구층탑(九層塔)같은 건물(建物)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는 얘기와 무엇이 다른가! 신라(新羅)는 소국(小國)이라서, 백제(百濟)를 따라, 외국(外國)에 사신(使臣)을 보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다.
《刹柱記云.鐵盤已上高四十二尺,己下一百八十三尺.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分安於柱中.幷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以副池龍之請.[大和寺在阿曲縣南.今蔚州.亦藏師所創也.] :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철 기반 위 높이는 42자이고 그 아래는 183자이다.”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大和寺)의 탑에 나누어 모셨는데, 연못에서 나온 용의 부탁에 따른 것이었다.[대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로 역시 자장법사가 창건하였다.] 樹塔之後.天地開泰.三韓爲一.豈非塔之靈蔭乎.後高麗王將謀伐羅. : 탑을 세운 뒤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훗날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 하다가 말하였다. 乃曰新羅有三寶.不可犯也.何謂也.皇龍丈六,幷九層塔,與眞平王賜玉帶.遂寢其謀.周有九鼎.楚人不敢北窺.此之類也. :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가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경우이다. 讚曰.鬼拱神扶壓帝京.輝煌金碧動飛甍.登臨何啻九韓伏.始覺乾坤特地平. :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귀신의 도움으로 황제의 수도를 위압하니, 휘황찬란한 금색과 청색 날아오를 듯한 용마루라. 이곳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겠나. 비로소 천지가 유달리 태평함을 깨달았다네.》
➊ 이건 또 무슨 말인가? 《樹塔之後.天地開泰.三韓爲一.豈非塔之靈蔭乎. : 탑을 세운 뒤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하였는데,
황룡사(皇龍寺)구층탑(九層塔)은 :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 19년 을사. <서력(西曆) 645년>에 탑이 처음으로 완성(完成)되었다고 하였으며, 15년 후, 660년 백제(百濟)가 당(唐)에 의해 멸망(滅亡)하고, 그 뒤 8년 후 668년에 고구려(高句驪)도 당(唐)에 의해 망한다. 삼한(三韓)통일(統一)이란 말은,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조작(造作)일 뿐이다. 당(唐)의 군대(軍隊)에 의해, 두 나라가 정복(征服)당했으며, 신라(新羅)는 조연(助演)만을 맡았을 뿐이었다.
어떻게 신라(新羅)가 삼한통일(三韓統一)을 했다는 말인가?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면 : 수(隋)는 2백만 군대(軍隊)를 동원(動員)했고, 당(唐)은 시시때때로 수만(數萬)에서 수십만(數十萬)의 군대(軍隊)를 동원(動員)하여, 수십(數十)년 동안이나 고구려(高句驪)를 침탈(侵奪)했고, 백제(百濟)침탈(侵奪)때도 수십만(數十萬)을 동원(動員)했으며, 부흥(復興)운동(運動)때는, 사십(四十)만(萬) 군대(軍隊)를 동원(動員)했다고 한다. 당황(唐皇)의 명령(命令)으로 김춘추(金春秋)가, 일개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지원(支援)병을 이끈 것이 아닌가? 겨우 몇 만(萬)의 군대(軍隊)를 지원(支援)한 것이 삼한(三韓)통일(統一)이냐?
당(唐)이 신라(新羅)였다면, 삼한통일(三韓統一)이란 말은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된다.
➋《讚曰.鬼拱神扶壓帝京.輝煌金碧動飛甍.登臨何啻九韓伏.始覺乾坤特地平. : 찬미한다. 귀신의 도움으로 황제의 수도를 위압하니, 휘황찬란한 금색과 청색 날아오를 듯한 용마루라. 이곳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겠나. 비로소 천지가 유달리 태평함을 깨달았다네.》하였다면 : 『신라(新羅)는 황제(皇帝)의 나라로, 귀신(鬼神)의 도움으로, 구한(九韓)도 통일(統一)시켰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신라(新羅)인들이 선덕왕(善德王)을 황고(皇姑)라고 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또 당(唐)나라의 일개 제후(諸侯)였다는 이야기는 또 뭔가?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新羅第二十七代.女王爲主.雖有道無威.九韓侵勞.若龍宮南皇龍寺建九層塔.則鄰國之災可鎭.第一層日本.第二層中華.第三層吳越.第四層托羅.第五層鷹遊.第六層靺鞨.第七層丹國.第八層女狄.第九層穢貊. : 또 해동(海東)의 명현인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서 이르기를, “신라 제27대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다. 비록 도는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구한이 침략하였다. 만일 용궁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이다.”》
➊ 구한(九韓)은, 곧 구이(九夷)다. 구한(九韓)이란 : <일본(日本),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托羅), 응유(鷹遊), 말갈(靺鞨),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穢貊)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동방(東方)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그 이전(以前)에는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라고 했고,
ⓑ《현토(玄兎)·낙랑(樂浪)·고려(高驪)·만칙(滿飭)·부유(鳧臾:부여)·색가(索家)·동도(東屠)·왜인(倭人)·천비(天鄙)》라고 했으며,
ⓒ《견이(畎夷)·우이(嵎夷: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남이(藍夷:風夷)·양이(暘夷:陽夷)》라고 하였는데, 이는 시대적(時代的)으로, 사가(史家)들 간(間)에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칭(異稱)일 뿐이다.
➋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 의하면 : 이들은 모두 반도(半島) 땅이나, 인접(隣接)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라(新羅)를 침략(侵略)하고, 약탈(掠奪)하니, 신라(新羅)의 걱정이 아니었겠는가? 위의 나라(國) 또는 종족(種族)들을 보라.
ⓐ 대륙(大陸)의 서남방(西南方)과 동남방(東南方)에 있었다는 <왜(倭)=일본(日本)>! 이 자(者)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신라(新羅)를 노략질했다고 하니, 백번 이해(理解)할 수 있다.
ⓑ 대륙(大陸)의 <천자국(天子國)=황제국(皇帝國)이었다는 중화(中華)>! 어이없는 일이다. 자신(自身)들이 상국(上國)으로 모시며, 자나 깨나 도움을 받고, 군대(軍隊)를 구걸(求乞)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哀乞伏乞)했잖은가! 은인(恩人)의 나라를 타도(打倒)대상(對象)으로 삼는다? 이건 백번(百番),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일이며, 사실(事實)이라면 신라(新羅)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 대륙(大陸)의 남방(南方)에 있었던 <오월(吳越)>! 바다건너 천리(千里)는 떨어져 있는 오월(吳越)과 신라(新羅)는, 상호(相互)간에 도움을 주고받고 했을지언정, 침략(侵略)한 예(例)는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없었다. 오월(吳越) 땅의 진실(眞實)은 : 이곳은 백제(百濟)의 땅이었다는 거다. 강좌(江左)의 땅! 백제(百濟)의 고토(故土)다…!
ⓓ <탁라(乇羅)와 응유(鷹遊)>! 탁라(乇羅)는 제주도(濟州島)의 옛 이름이라 하고, 응유(鷹遊)라는 나라나 종족(種族)은, 아직까지도 그 실체(實體)를 모르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탐라(耽羅)와 응유(鷹遊)를 함께 묶는다면 : 탐라와 백제(百濟)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문헌(文獻)적 증거 또는 고증(考證)이 없다. ‘응(鷹)이란 해동청(海東靑)=매=송골매를 뜻한다.’
ⓔ 대륙(大陸)의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말갈(靺鞨)과 단국(丹國)>! 말갈(靺鞨)은 고구려(高句驪)의 한 부족(部族)이 되었으므로, 연합(聯合)하여, 신라(新羅)를 수시로 쳤으니, 이해(理解)할 수 있다. 그러나 단(丹)을 글란(契丹)이라고 하는 것에는 문제(問題)가 있다. 글란(契丹)을 단국(丹國)이라고 한 예(例)가 없기 때문이다. 글란(契丹)이라고 한다면, 서토(西土)에서 흉노(匈奴)에게 쫓겨 겨우 총령(葱嶺)을 넘었고, 돌궐(突厥)에게 밀려, 고구려(高句驪)에 수만(數萬)가구가 의탁(依託)할 때다. 이름만 있었을 뿐, 이때까지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종족(種族)이었다.
ⓕ 북(北)쪽의 오랑캐라는 적(狄), <여적(女狄)>! 여적(女狄)은 누구인가? 고구려(高句驪)를 뜻한다면 왜 여적(女狄)인가?
ⓖ 대륙(大陸)북방(北方)! 북적(北狄)의 대표(代表)였다는 <예(濊)와 맥(貊)>! 예(濊)의 땅에 부여(扶餘)가 있었고, 맥(貊)은 북호(北胡)이며, 고구려(高句驪)에 이미 복속(服屬)된 자(者)들이다. 이들이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패권(霸權)다툼에, 유방(劉邦)편을 들어, 강맹(强猛)한 기병(騎兵)을 보내, 항우(項羽)를 쳤다. 선덕왕(善德王) 때, 이미 예(濊)니 맥(貊)이니 하는 부족(部族), 종족(種族)은 고구려(高句驪)에 동화(同化)되어, 고구려(高句驪)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타도(打倒)대상(對象)이라고? 고구려(高句驪)를 지칭(指稱)한다면 당연(當然)한 일일 것이다.
➠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때는 : <고구려(高句驪)와 말갈(靺鞨)과 백제(百濟)와 왜(倭)>가 신라(新羅)의 위협(威脅)이 되었을 뿐, 나머지 나라(國) 또는 부족(部族), 종족(種族)들과는 전혀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라를 간수(看守)조차도 못해, 당(唐)에게 애걸복걸(哀乞伏乞), 구걸(求乞)하던 반도(半島) 신라(新羅)가 감히 구한(九韓)을 항복(降伏)시키려 했다는 말 자체(自體)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위에서 말한 대로, 이들 모두를 굴복(屈伏)시켜야 했다면 : 《신라(新羅)의 선덕왕(善德王)은 ‘여황(女皇)=여제(女帝)’였어야만, 가능(可能)한 이야기며, 신라(新羅)는 <천자국(天子國)=황제국(皇帝國)>이어야 하며, 반도(半島) 땅이 아닌,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동방(東方) 구이(九夷) 곧 구한(九韓)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조공(朝貢)하고, 신하(臣下)됨을 자청(自請)하게 되는 것이다.》
《又按國史及寺中古記.眞興王癸酉創寺後.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塔初成.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聖曆元年戊戌六月霹靂. : 또 국사(國史)와 절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진흥왕 계유년(서기 553)에 절을 창건한 후에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서기 645)에 탑이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32대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오른 지 7년째인 성력(聖曆) 원년 무술(서기 698) 6월에 벼락을 맞았다. [寺中古記云.聖德王代.誤也.聖德王代無戊戌. : 절의 옛 기록에서는 성덕왕(聖德王) 시대라고 하였지만 잘못된 것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重成.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第二霹靂.同代第三重修. : 제33대 성덕왕 대인 경신년(서기 720)에 다시 세워 완성하였다. 제48대 경문왕 무자년(서기 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고 그 임금 때에 세 번째로 다시 지었다.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第三霹靂.現宗十三年辛酉.第四重成.又靖宗二年乙亥.第四霹靂.又文宗甲辰年.第五重成. : 우리 고려 광종(光宗)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째인 계축년(서기 953)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 신유(서기 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지었다. 또 정종 2년 을해(서기 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고 문종 갑진년(서기 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又憲宗末年乙亥.第五霹靂.肅宗丙子.第六重成.又高宗十六年戌戌冬月.西山兵火.塔寺丈六殿宇皆災. : 또 현종 말년 을해(서기 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았고 숙종 원년 병자(서기 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그런데 고종 25년 무술(서기 1238) 겨울에 몽고의 침략으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탔다. 》고 하였다. <끝>.
➊ 경주(慶州)의 황룡사(皇龍寺)구층탑(九層塔)은 여러 번에 걸쳐 새로 지었다는 이야기다. 서력(西曆) 645년(선덕왕)에 처음 탑(塔)이 세워졌는데,
서력(西曆) 698년(32대 효소왕 7년) 6월에 벼락을 맞아, 서력(西曆) 720년(33대 성덕왕 때) 다시 세웠다.
서력(西曆) 868년(48대 경문왕) 6월, 벼락을 맞아, 세 번째로 다시 지었고,
서력(西曆) 953년, 고려(高麗) 광종(光宗), 5년 10월에 또 벼락을 맞아, 서력(西曆) 1,021년(현종(顯宗)13년에 네 번째 다시 짓고,
서력(西曆) 1,035년 고려(高麗) 정종(定宗) 2년에 또 벼락을 맞아, 서력(西曆) 1, 064년 문종(文宗)때, 다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고 하였다.
➋ 무려 다섯 차례나 벼락을 맞아, 다시 세웠다면 : 그 건축물(建築物)이 당초(當初)의 것과 같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證據)할 수 있겠는가? 그저 두리 뭉실 말하고 있을 뿐, 그 실체(實體)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의 건축물(建築物)이, 수백(數百)년의 시차(時差)를 두고, 다시 지어졌다면, 시대적(時代的) 상황(狀況)과 불교(佛敎)의 변천(變遷), 장인(匠人)의 솜씨 등으로 인하여, 당초(當初)의 것과 똑같이 만들어졌을 것이란 이야기는 후대인(後代人)들의 자위(自慰)일 뿐이다.
➌《又高宗十六年戌戌冬月.西山兵火.塔寺丈六殿宇皆災. : 그런데 고종 25년 무술(서기 1238) 겨울에, 서산(西山)병화(兵火)로 인하여,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탔다.》고 하였는데,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고종(高宗) 무술 25년(1238) : 《蒙 兵, 至 東 京, 燒 皇 龍 寺 塔 : 몽고 군사가 동경(東京 경북 경주)에 들이닥쳐 황룡사탑(皇龍寺塔)을 불살랐다.》고 하였고, 《 고려사(高麗史) : 高麗史23卷-高宗-25-1238 : 蒙 兵 至 東 京 燒 黃 龍 寺 塔. : 몽고(蒙古)병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황룡사탑에 불을 질렀다.》고 하였다. 사서(史書)에 그렇게 기록(記錄)하고 있으니, ‘맞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나, 반도(半島)에 있는 이름 있는 사찰(寺刹)들의 내력(來歷)을 보면 : <몽고(蒙古)침략(侵略)·왜란(倭亂)·호란(胡亂)때 소실(燒失)되었다는 것이 대부분(大部分)이다.>
<몽고(蒙古)병(兵)+왜(倭)+호(胡)>는, “반도(半島)에 있는 사찰(寺刹)을 모두 없애라”는 특명(特命)을 받고 출정(出征), 침략(侵略)한 것이냐? 하는 문제(問題)를 제기(提起)가 있을 수 있다. 침략(侵略)자들이 반도(半島)왕조(王朝)의 항복(降伏)을 받고자, 수많은 군대(軍隊)를 이끌고 와서, 성(城)을 파괴(破壞)하고 도성(都城)이나 진지(陣地)를 불살랐다면 모르되, 『조선군(朝鮮軍)과 싸우기도 바쁜 판에, 심심산골 인적(人跡)도 드문 곳에 있는, 사찰(寺刹)만을 골라 불태웠다』는 이야기는…우리들을 비참(悲慘)하게 만든다. 오죽하면 저런 이야기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만들어야 했을까?
기록(記錄)마다 이름이 다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황룡사탑(皇龍寺塔)이고, 고려사(高麗史)는 황룡사탑(黃龍寺塔)이라고 하였는데, 어찌됐든, 몽고(蒙古)의 3차 침략(侵略)때, 몽고(蒙古) 병(兵)이 불을 질러, 소실(燒失)되었다고 해설(解說)하고 있다. 황룡사(皇龍寺)와 황룡사(黃龍寺)! 어떤 이름이 올바른 것인가? 이것부터 정의(定義)해야 되지 않을까!
➠ 삼국유사(三國遺事) 원문(原文)에는 : 서산(西山)병화(兵火) : 『서(西)쪽에 있는 산(山) 또는 서산(西山)에, 전쟁(戰爭)으로 화재가 발생했다.』는 말인데, 왜 몽고(蒙古)침략(侵略)때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 황룡사(皇龍寺)가 있는 곳이 경주(慶州)의 서산(西山)에 있었는가? 모를 일이다.
●《반도(半島) 신라왕조(新羅王朝)란 존재(存在)할 수 없다.》 이것은 나라의 환경적(環境的)요인(要因)인 : 지세(地勢)·기후(氣候)·토산물(土産物)·풍속(風俗)·특이(特異)지형(地形)·방위(方位)등 많은 조건(條件)들이, 반도(半島) 땅에서 설명(說明)할 수 없으며, 신라(新羅)는 대륙(大陸) 땅을 포용(包容)할 수 있으나, 반도(半島) 땅은 신라(新羅)를 넣을 곳이 없다.
● 반도(半島)삼국(三國)【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이라는 주장(主張)이나, 설(說)은 : 대륙조선(大陸朝鮮)을 해체(解體)하고, 그 흔적(痕迹)을 반도(半島)로 이동(移動)하여, 왜(倭)가 열도(列島)에서 2,600년 황기(皇紀)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고자 만든 모조품(模造品)일 뿐이다.
● 만약(萬若), 일제(日帝)가 과대(過大)한 욕심(欲心)을 부리지 않고, 미국(美國)과의 충돌(衝突)이 없었다면, 21세기(世紀) 반도(半島) 땅은, 열도(列島)에 속(屬)한 2개의 현(縣)이 존재(存在)하고 있을 것이다. 과장(誇張)된 이야기일까?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모든 국민(國民)들과 대통령(大統領)과 정치인(政治人), 모든 관료(官僚)들! 정신(精神)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변(周邊)의 강대국(强大國)들은, 자신(自身)들의 국가(國家)이익(利益)이 우선(于先)이지, 반도(半島)가 우선이 아니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문제(問題)는 알고, 실천(實踐)하는 것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016년 03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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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일절을 맞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더 고취시켜야 한다는 것에는 대찬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씨알이 안 먹히는 이유가 바로 : 일부 정치인들과 관료들, 그리고 청와대의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 말만 했다고 하면 <국민들을 두편이나 세편으로 나누어 싸울 일만 만들어 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미국의 거짓말이라는 책을 보면 : <최악의 지도자는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자>라고 한다고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그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고대의 조선왕조의 하나였던 "신라"를 보면 :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은데, 가장 최악의 경우가 큰나라에게 구걸하는 모습이죠.
이런 나라를 오늘날 우리들의 직계 선대라고 지껄이는 일부 인사들을 보면 : 이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정말 무엇이 들어있을까? 생각해 본적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럽습니다. 신라왕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나라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나라를 모델로 하는 대한민국의 일부 지식인들을 보면 : 황당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죠. 식민사학자들의 말대로, 낟동강 서쪽지방에 임나일본부가 수백년 영위하였다면 이곳은 왜+(신라+백제인)들의 혼혈들로 채워져 있을 겁니다. 말이 수백년이지.....그러면 경상도 일부 지식인들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왜와의 혼혈들이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겁니다. 결코 헛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반도인들 중에서 친일파가 많다? 식민사학자들의 역사해설을 따르다보면 : 결국 반도인들은 왜와의 혼혈로 만들어지게 되어 있죠. 이 자들의 노림수가 바로 이것일 겁니다. 대한민국은 소국이며, 약소국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 <강자에게는 아부를 잘하고, 약자에게는 가차없는 힘을 발휘하는 그런 나라>죠. 이러한 기질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일제"들입니다. 이 자들이 열도 가면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가지만 너희들은 앞으로 50년을 피터지게 싸우게 되리라>했다는 거 아닙니까?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우리는 지금까지도 피 터지게 싸우고 있고, 날밤 새고 있죠.> 결국 국민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녕 하십니까 ?
옛 글에 이르기를, 백성들을 정도[正道]로 이끌어 대도[大道]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했습니다.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옛 성현[聖賢]의 말씀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는 정도[正道]와 대도[大道]를 떠난지 이미 오래 되었지요.
대의[大義]도 없고 대덕[大德]도 없으며, 나라의 바탕이 되는 근본[根本] 조차도 확립되어 있지 않으니, 무엇으로 국가와 국민을 편안히 할 수 있겠습니까 ?
자기 선조들이 물려준 역사[歷史]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성현[聖賢]의 학문[學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정사[政事]를 논한다는 것은 한국의 국민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불행 입니다.
동방과 중국을 통털어 불탑 중에서는 제일을 자랑했던 황룡사와 구층탑은, 마지막으로 몽고의 병화에 불탄 것이 아니라, 지금도 대륙 용궁[龍宮]의 남[南]쪽에 원형을 간직하고 높이 서 있습니다.
황룡사 또한 원형을 간직하고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반도 사관은, 일만년 대륙의 조선사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대로, 사서의 중요한 많은 부분의 원문들이 왜곡 조작되어 있습니다.
그 많던 성곽도 없어져 버렸다고 하면 그만이고, 고찰과 불탑도 병란으로 소실 되었다고 하면 그만 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동안 배워오고 알고 있는 신라의 고적 중에서, 월성,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문무 대왕릉, 황룡사, 분황사 신라의 천단, 이러한 역사의 중요한 사실들은, 모두 대륙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거짓의 역사, 왜곡의 역사를 가르치고 주장하는 것은, 그 누구의 말대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은 짓일 뿐 입니다.
한때는 국민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수 많은 조선사 역사의 후예들이 천하에 넘쳐나고 있는데, 어찌 역사를 숨길 수 있겠습니까 ?
대륙에서 버젓이 조선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자기 선조들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리고 있는데, 반도 조선이라는 말을 그들이 듣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경멸과 조소뿐일 것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조선조 대신들의 말을 상기해 보면, 우리의 역사가 어떠한 것인가를 한눈에 알 수 있는데도, 반도에서 우리의 역사가 전개되었다고 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과 선조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짓이 아니고 그 무엇 이겠습니까 ?
신라의 전모가 곧 모두 들어날 것 입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면 : 이 정권 들어서 역사학계도 함께 보수화내지 우향화하여 식민사학을 공고히 하는데 박차를 가하는 것 같습니다. 보수라는 탈을 쓴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는, 우익이라는 탈을 쓴 친일파가 득실거리는.......공교육이라는 미명하여 저질러지는 식민사학의 세뇌! 이런 것들이 고착화 내지, 고착화하려 필사적으로 덤며드는 것 같아, 매우 씁슬합니다. 이 나라가 언제까지 식민지화 근성에서 벗어날지.....언제나 사대근성에서 벗어날 지 정말 답답합니다. 하소연입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문무님의 황룡사9층탑에 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역사를 연구하는데 사서와 문헌으로 검증하고 증거한다는 것은 우리시대의 좋은 연구방법이기도 하지만 유물로서 증거하는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에밀레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또는 어찌하여 한반도 경주땅에 오게 되었는지는 앞으로 언젠가는 밝햐지겠지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