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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넘어 사랑으로
요한복음 5:39-4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7가지 성령의 은사’(롬 12:6-8)와 ‘9가지 성령의 열매’(갈 5:22-23)라는 식으로 성령의 의미를 숫자로 기억한다. 아마 그 내용을 더 잘 이해하려는 의도인데, 정작 그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성령강림절기에 성령을 뜨거운 가슴으로, 몸으로 기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엇 그제 헬무트 콜 독일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년 동안 절반은 서독에서, 절반은 통일독일에서 각각 8년 동안 총리를 하였다. 내가 독일에 있던 당시 콜은 인기가 뚝 떨어져, 점점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겨우 구 동독인의 지지로 총리직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했다. ‘The USA have Bill Cliton, Stevie Wonder, Bob Hope, Jonny Cash. We have Helmut Kohl, no Wonder, no Hope, no Cash.’
미국은 빌 클린톤과 스티브 원더(기적), 밥 호프(희망), 자니 캐시(현금)를 가졌다. 우리는 헬무트 콜을 가졌고, 어떠한 기적도, 희망도, 현찰도 없다.
그는 말년에 인기가 떨어지고,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01년에는 빛 알레르기 때문에 아내가 자살하였다. 얼마 전 든든한 유럽통합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는 것에 대해 독일이 현금을 쌓아두고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가 만 87세로 세상을 떠나자 독일은 물론, 유럽과 온 세상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칭송하고 나섰다. 정말 그는 현대사에서 위대한 인물이었다. 뒤늦게 돌아보니 그는 ‘no Wonder, no Hope, no Cash’가 아닌, 기적과 희망과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사람이다.
헬무트 콜은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다. 독일의 양대 교회를 존중하고, 거룩한 전통을 신뢰한 사람이다. 독일교회는 그가 총리로 있을 때 과도한 통일세 부담으로 급격한 교인 이탈을 겪었으나, 개신교회든 가톨릭교회든 신뢰감과 존중 가운데 독일사회와 함께 그 위기를 극복해 냈다.
좋은 지도자는 당장 인기가 있고 없고, 높고 낮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인기는 하루아침에도 오르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신실함과 확고한 비전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뜨거운 가슴을 주신다. 늘 성령의 도우심으로 한결같은 희망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1)
대체로 본문을 가리켜 ‘성경을 상고하라’는 제목으로 소개한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4가지 증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증거(32, 37-38)이고, 둘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33-35)이고, 셋째는 예수께서 하신 일이 곧 증거(36)이다.
그리고 넷째는 오늘 본문인 성경의 증거(39-40)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
여기에서 성경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경전(타나크)인데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 없이 신약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구약을 부정하는 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본문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유대인들은 병든 자를 고치신 자비의 기적에는 아랑곳 않고,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쳤냐고 트집 잡는다. 무조건 반대하면서 오실 메시야를 바르게 알지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유대인의 무지와 불신앙을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
유대인들은 율법의 규정에 대해,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중요시했지만, 정작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더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 맹목(盲目)적이었다. 그러나 참 목적에 대해서는 눈이 멀었던 까닭에 하나님의 계획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메시야의 민족이면서도 그들 가운데 오신 메시야를 분별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하는가? 성경을 100번 통독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하루에 한 가지라도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려는 사람이다. 그가 참 믿음의 사람이다.
행여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자기 생각 속에, 교회의 판단 속에 가두어 두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게 달콤한 메시지에는 귀를 기울이면서도, 나를 고치고 세상을 바꾸어내라는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자들을 보면 성경이 핵심이었다. 구약에서 요시야 임금이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가 그랬다.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웨슬리 모두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존 웨슬리는 ‘하루의 시작을 성경으로 시작하고, 하루의 마감은 일기로 끝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평생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습관이 “이론의 종교를 은총의 종교로, 머리의 종교를 가슴의 종교로, 입술의 종교를 삶의 종교로, 의인의 종교를 죄인의 종교로” 바꾸어 냈다. 좋은 습관, 거룩한 습관이 나를 바꾸고, 세상의 좋은 질서를 만들어 낸다.
2)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 그들은 율법을 귀중히 여기고, 탐구하였다. 6세에 율법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12세부터는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하여, 13세에 성인식(바 미쯔바)을 한 후 율법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 훌륭한 율법학자들과 성경에 정통한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더 강하게 부정하고, 적대시하였다. 성경해석을 놓고 정면으로 부딪쳤고, 예수님의 소수의견을 배척하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기 신학그룹의 입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 논거를 찾았다. 자기 신앙방식을 변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정작 율법학자와 서기관 등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정곡을 찌르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
그들이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 ‘자신들의 열심’, ‘자신들의 공동체’를 사랑하였다. 성경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신들에게 성경을 맞추었다. 그들은 겸손하게 배우려고 하기 보다는, 성경을 인용하여 자기 입장을 옹호하고, 남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들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성경을 문자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문자를 넘어서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비난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문자주의에 빠져 사랑의 행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려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이 세운 자리에서 영광을 찾았다.
지금도 이단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단의 특징은 무엇인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제 맘대로 해석하고, 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한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
이단은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고, 두려움을 사로잡고, 위선을 대변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진실한 구원의 길을 알려면 성경을 배우는 일에 힘써야한다고 하신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믿음은 ‘아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성경에서 알다는 ‘야다’인데,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신념, 신뢰,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다.
믿음은 알고, 확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알고 확신한 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행하며 산다.
그런데 믿음이 좋다, 신앙이 든든하다면서 자기 유리한 대로 말을 바꾸고, 경우에 따라 소신도 달라지는 경우가 참 많이 있다. 성경의 권위를 자기 권위의 토대로 삼는 목사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 결과 엉뚱한 행동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
예수님은 나를 향해 네 믿음의 본질에 대해 물으신다. 과연 너는 어떠냐? 성경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3)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받들고 있는 모세와 모세의 율법이 너희를 고발 할 것이라고 하신다. 모세를 믿은 그들은 모세를 절대시할 뿐, 모세가 가리킨 메시야에 대해서는 무심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존중히 여겼지만, 돌에 새긴 문자주의에 머물 뿐,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지 못하였다. 모세와 율법을 떠받들기는 했지만, 정말 믿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 안에 담긴 메시야 예언도,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
유대인들은 모세와 율법을 높이고 믿는다고 했지만, 결정적으로 모세와 율법이 가리키는 오실 메시야를 믿지 못했다. 이것이 유대인의 실패이다. 그들은 모세란 영웅주의에 갇혔고, 율법이란 문자주의에 갇혔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예수님을 불신하고, 적대시하였다. 그들의 잘못된 믿음이 장애물이 되었다. 그 결과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그 속에 하나님 사랑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믿음인 모세가 그들을 고발한다. 율법이 그들의 고발자이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청문회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요즘 청문회를 보면서 종종 상상력이 발동하였다. 나를 청문회의 자리에 세워보는 것이다. 만약 목사를 청빙할 때도 청문회를 한다면, 나는 합격할 수 있을까? 속속들이 다 드러날 만큼 나는 자신이 있는가? 목사뿐이랴. 권사를 세울 때에도, 장로를 세울 때에도 청문회를 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의 말씀처럼 과연 나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무조건 통과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유대인처럼 전통주의, 문자주의, 형식주의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문자를 넘어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참 믿음은 문자주의, 형식주의, 전통주의를 넘어선다. 믿음은 비문에 새기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한다. 그러니 성경을 사랑하며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라.
지난 수요기도회에서 세 분이 ‘나 만의 톨레레게’에 대해 증언하였다. 감동적이었다. 어떤 분은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전 ‘굿모닝 큐티’를 찾아 읽는다거나, 심지어 그것을 베껴 썼다고 하였다. 참 신선하고, 진지하여 감동적이었다.
이제 ‘굿모닝 큐티’를 마치고 이번에는 혼자 말씀 순서에 따라 예배할 수 있는 ‘굿모닝 하나님!’을 연재한다. 홀로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묵상, 대화, 기도, 곧 예배하도록 한 것이다. 새벽 시간에 나와 앉아야 한다는 불편한 요구가 아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거룩한 습관을 지닌 성령의 사람, 행복한 성경의 사람으로 나가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언제 어디서나 좋은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