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과 신숙주는 세종 시절 집현전 학자로 친한 친구였다. 한글 창에 때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달랐다. 성삼문은 단종에 충성했고, 신숙주는 세종에 충성했다.
성삼문의 충의 개념은 세종의 유지와 정통성이다. 그러나 신숙주의 충은 세종의 유지를 받았지만 그것은 그때의 상황이고, 정통성은 없지만 능력 면에서는 수양이 낫다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충성은 본질에 대한 충성이고, 신숙주의 충성은 상황에 대한 충성이다. 당시 상황에 충성한 신숙주는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본질에 충성한 성삼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상황이 이긴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달랐다.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본질에 대한 가치가 더 높게 평가되고 결국 숙종 때 성삼문은 복권이 되었고 충문공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성삼문은 만고의 충신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신숙주에게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다. 본질이 이긴 것이다.
이처럼 옳고 그름을 정하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다. 본질을 중심으로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고, 상황을 중심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의 죽음은 가장 위대한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본질에도, 상황에도 합당한 죽음이다. 그분의 죽음은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본질로서의 죽음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서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구원과 축복, 그리고 성화가 전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