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4월7일 한보 청문회
1997년 4월 7일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한보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정태수 한보 총회장이 TV 생중계가 진행중인 가운데, 여야 특위위원-보도진 등에 둘러싸인 채 의원 신문에 답변하고 있다.
한보특위가 7일 구치소에서 한보 총회장을 시작으로 한달 가까운 청문회 무대의 막을 올렸다.
정 총회장을 상대로 한 이날 청문회에서 여야 의원들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리스트’와 한보의 지난 92년 대선자금 지원설, 각종 특혜대출 및 정·관계 커넥션 등 한보 비리의 ‘몸통’ 캐기에 주력했다.
여야는 청문회에 앞서 구수회의를 갖고 ‘공략’ 대책을 최종 점검하는 등 긴박한 움직임을 보였다.
청문회는 당초 9시 정각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신한국당이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의 자격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지체돼 20분 늦게 시작됐다.
한보 대출비리사건에 대한 국정조사특위의 구치소 청문회가 시작된 7일 시민들의 눈과 귀는 청문회를 생중계하는 TV와 라디오에 쏠렸다.
이날 역과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등에 설치된 TV 앞에는수십여명씩의 시민들이 모여들었으며 각 회사 사무실에도 직장인들이 잠시 일손을 놓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지난 88년의 5공(共) 청문회에 이어 9년 만에 생중계된 이번 청문회를 지켜봤다.
시민들은 그러나 이날 증인으로 나선 한보
그룹 정태수(鄭泰守) 총회장이 “모른다”거나 “기억나지 않는다”,“현재 재판중에 있으므로 답변을 거부한다”는 등의 회피성 증언으로 일관하자 실망과 분노를 나타냈다.
이들은 또 여야 특위위원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송곳’ 질문보다 자기 당 지도부의 연루설을 부인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의원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모습마저 보이자 ‘청문회 무용론(無用論)’까지 내놓았다.
한편 서울구치소측은 이날 1백여 명의 보도진에 몰려왔음에도불구하고 기자들에게 편의시설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 등 무성의한 태도을 보였다.
구치소측은 기자들을 위해 전화 두 대와 팩시밀리 한 대를 설치했으나 팩시밀리가 자주 고장을 일으켜 보도진의 애를태우기도 했다.
▶2012년거침없던 전설의 리포터 마이크 월리스 별세
▶2009년노무현 전 대통령, 박연차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문
▶2004년‘의사-간호사 상호존중 선언식’, 프라자호텔에서 개최
▶2004년일본 후쿠오카법원, 고이즈미총리 야스쿠니참배 첫 위헌 판결
▶2000년고 최석채 선생, `언론자유영웅(Press Freedom Heroes)` 선정
▶1999년한나라당 서상목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1998년규제개혁위원회 설치
▶1996년박찬호 메이저리그 첫 승
👉🏿 `코리아 특급` 박찬호가 1996년 4월 7일 메이저리그 첫 승리를 기록했다. 도미 3년째를 맞는 박찬호는 이날 시카고 리글리구장서 벌어진 시카고 커브스와의 원정경기서 2회 구원등판,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승리투수가 됐다. 이 경기서 다저스는 박의 구원 역투에 힘입어 3대1로 승리, 최근 4연패의 늪에서 헤어났다.
다저스 선발투수진이 부진을 보이며 선발진 합류가 기대됐던 박은 이날 갑작스럽게 등판했다. 선발투수인 에이스 라몬 마르티네스가 2회초 공격서 예기치 않은 부상을 당해 채 몸을 풀 시간도 없이 2회말부터 마운드를 지킨 것.
박찬호는 이날 18명의 타자를 맞아 삼진7개 볼넷4개 피안타3개를 각각 기록했으며 96시즌 3게임(6이닝)에 나서 1승무패에 방어율 1.50을 마크했다.
▶1990년미국의 흑인 목사.민권운동가 애버내시 사망
▶1982년영국 포클랜드 주변을 전쟁구역으로 선포
▶1982년미국 베일러의대, 인간유전자 복제성공 발표
▶1980년미국 이란과 단교 선언
👉🏿 1979년 2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반미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것이 첫 계기였다. 이란 이슬람혁명 9개월 뒤인 1979년 11월 4일 이란의 강경 반미 성향의 대학생들이 주테헤란 미 대사관을 급습해 미국 외교관과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삼아 444일간 억류했다.
미국은 이들을 구하려고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작전을 폈으나 실패했다. 미 대사관을 점거한 대학생들은 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체류하던 모하마드-레자 팔레비 왕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1980년 미국은 이란과 단교하고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이란 시아파와 미국의 기나긴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유례없는 자국 대사관 점거·인질 사건에 굴욕을 당한 미국이 당시 수니파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해 이란과 8년 전쟁(1980∼1988년)을 사주했을 만큼 이 사건은 중동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이란과 1981년 내정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고 주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알제 합의'를 맺고 인질 사태를 해결한다. 억류 기간 미국인 사망자는 없었다.
▶1980년경찰, `수사권 독립`으로 검찰과 마찰
▶1979년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국 가맹을 승인
▶1976년독립운동가 오광심 별세
▶1976년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수상에 화국봉 임명
▶1976년등소평 `천안문 사태`의 배후자로 지목돼 세번째 실각
▶1973년핀란드, 남북한 동시승인 발표
▶1969년시인 신동엽 사망
▶1965년미국, 위험천만 파워보트 경주
▶1961년미국 유엔(UN) 감시하 총선 통한원칙을 재확인
▶1961년유엔(UN) 총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비난의안 채택
▶1957년한국신문편집인협회 발족, 한국신문윤리강령 선포
▶1957년제1회 신문의 날
▶1957년캄보디아 시아누크 내각 성립
▶1956년스페인 프랑코 정부, 모로코 독립 승인
▶1956년이집트-이스라엘 가자지구서 교전
▶1953년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에 피선
▶1949년뮤지컬 `남태평양` 초연
👉🏿 South Pacific(남태평양)
조슈아 로건 감독이 1958년 만든 영화이다. 리처드 로저스가 작곡하고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대본과 작사를 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남태평양〉을 영화화했다. 뮤지컬 〈남태평양〉은 1949년 초연해 1925회 상연한 히트작이었고 조슈아 로건은 뮤지컬에서도 연출을 맡았었다. 영화는 남태평양의 어느 한 섬을 배경으로 프랑스인 에밀 드 베크와 여 간호장교인 넬리 포부시의 사랑을 중심으로 다룬다. 1950년대 미국영화 흥행 3위작으로 기록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둔 영화로 아카데미 음향상을 수상했다.
출연 : 로자노 브라지, 밋지 게이너, 존 커, 레이 왈스턴, 후아니타 홀, 프랑스 우옌
줄거리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조셉 케이블 소위가 남태평양의 한 섬에 도착한다. 그의 임무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섬에 들어가서 그들의 동정을 살펴 적당한 공격 시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그쪽 지리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프랑스인 에밀 드 베크의 도움이 필요하다.
한편 미해군 간호사로 이 섬에서 근무하고 있는 넬리 포부시는 장교 클럽에서 에밀 드 베크를 만나고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에밀 또한 넬리를 좋아하지만 부인과 사별하고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중년 남자인 그로선 넬리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에밀은 넬리에게 프랑스에서 사람을 죽이고 이곳까지 왔다는 고백을 한다. 넬리는 갈등하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점점 커져만 간다. 에밀의 현지 부인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에밀의 아이들을 본 넬리는 다시 고민을 하고 에밀을 마음속에서 지우기로 한다.
조셉은 에밀에게 군 작전을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에밀은 거절한다. 에밀의 거절을 들은 조셉은 루더 빌리스를 비롯한 병사들과 함께 발리 하이 섬으로 휴식을 취하러 간다. 조셉은 그곳에서 블러디 메리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딸인 리아트를 조셉에게 소개시켜준다. 조셉은 리아트와 사랑에 빠지고, 블러디 메리는 리아트를 조셉과 결혼시키려고 하지만 조셉은 거절한다. 넬리와 이별로 상처를 받은 에밀은 군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고 조셉과 에밀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섬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https://blog.naver.com/dudqja7372/221730760577
▶1948년세계보건기구(WHO) 발족
▶1947년미국 자동차왕 헨리 포드 사망
👉🏿 포드 자동차의 창설자이며 ‘자동차 왕’으로 불리운 헨리 포드가 뇌출혈로 1947년 4월 7일 사망했다. 83세였다. 포드는 16세에 기계공이 되어 1903년, 40세 때 포드 자동차를 설립했다.
1908년에는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T카’를 개발, 당시 미국에서 대당 1천달러 이하의 차가 전무한 상황에서 대당 850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해 자동차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T카’는 가격이 저렴했을 뿐만 아니라 견고성과 실용성에서도 뛰어났다.
‘T카’의 또 다른 특징은 간결한 설계와 튼튼한 차체구조였다. 4기통 20마력이라는 당시로서는 힘 좋은 엔진을 탑재했다. 운전조작이 용이하고 설계가 표준화되어 있어 초보자라도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T카’가 등장할 당시의 미국은 대기업 시대의 도래와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포드는 ‘기업은 저가격과 고임금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경영이념을 평생 유지했다.
▶1945년일본전함 `대화` 오키나와 근해서 침몰
▶1939년미국 영화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출생
▶1939년이탈리아, 알바니아 점령
▶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다.
👉🏿 매년 4월 7일은 ‘신문의 날’ 이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신문 ‘독립신문’ 의 창간일인 1896년 4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처음 제정돼 지금까지 기념해오고 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발족되고 ‘한국신문윤리강령’ 이 선포된 날도 1957년의 이날이므로 우리나라 언론인들에게는 뜻깊은 날이 아닐 수 없다.
독립신문 발간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였다. 서재필이 발의하고 온건개화파가 나서 신문발간을 서두르자 정부도 창간자금 4400원과 사옥, 심지어 생계비까지 지원하며 독려했다. 창간 후에도 지방관청과 각급 학교에 구독을 권장하며 부수확장을 도왔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 크기로 4면 발행이었다. 1∼3면은 순한글판, 4면은 영문판(The Independent)이었다. 초대 사장 겸 주필은 서재필이 맡았고 직원은 고원(告員) 또는 탐보원(探報員)으로 불린 기자 2∼3명을 포함, 10명 안팎이었다. 신문값은 동전 1푼,
즉 동전 한 닢으로 출발했다.
300부로 시작한 발행부수도 한때 3000부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재정자립을 이루지 못한 신문사에 파국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정부의 부패와 러시아의 이권침탈 비판에 앞장서자 정부가 사옥을 회수하고 친러 수구파가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899년 12월 4일, 3년 8개월 만에 종간됐다.
▶ 1795년 4월 7일.
프랑스에서 미터(m)가 길이의 단위로 채택되다.
https://youtu.be/HG2FE-gleC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