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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화, 세계 신화와 만나다 ?___김원익
시시포스·사만이·동방삭의 수명연장 이야기
김원익
1.
『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태초에 인간의 수명은 평균 900살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아담은 903살, 셋은 912살, 에노스는 905살, 게난은 910살, 마할랄렐은 895살, 야렛은 962살, 므두셀라는 969살, 라멕은 777살, 노아는 950살을 살았다니 하는 말이다. 365살에 산 채로 하늘로 불려갔다는 에녹도 수명대로 살았으면 900살은 거뜬히 넘겼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길었던 인간의 수명은 노아의 홍수 이후 급격히 줄어든다. 노아의 아들 셈은 대홍수 2년 후인 100세에 아들 아르박삿을 낳은 뒤 500년 동안 자식들을 낳아 600살 정도 살았지만, 그 후의 세대는 수명이 더 줄어들어 400살에서 200살 사이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서』는 원래 900살 가까웠던 인간의 수명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 인간의 타락 탓이라고 하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대홍수 이후에 일어난 환경파괴 탓이라고 주장한다. 대홍수 이후 지구를 감싸고 있던 방어막이 파괴되어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해로운 전파를 인간이 그대로 맞는 바람에 수명이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환경파괴가 극치에 이른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다시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평균수명이 70세라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벌써 100세 시대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쉽게 오르내리고 있다. 보험회사들도 앞다투어 100세를 겨냥한 상품을 공공연하게 선전하고 있다. 술집에서도 100살까지 살 것으로 예단하고 스스로 연장시킨 수명에 고무되어 즐겁게 노후를 설계하는 사람들의 달뜬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 중에는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얼른 가야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다. 내 어머님도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셨다. 어머님은 혼자 사셨던 고향집으로 찾아뵐 때마다 얼른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결국 여든 한 살이 되시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소원대로 아침 안개처럼 훌쩍 떠나셨다. 그러나 인간은 거의 누구나 오래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 어렴풋이 죽음을 의식하던 어린 시절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엄청난 장수를 누린 <창세기>의 할아버지들이 한없이 부러웠던 것도 아마 내 무의식 속에 꽁꽁 숨어있던 그 욕망 때문이었으리라. 주일학교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한 것도 아마 그래야 그 할아버지들처럼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2.
그리스 신화에도 오래 살고픈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시시포스이다. 시시포스는 영어로는 시지푸스라고 하며 불어로는 시지프라고 하는데 까뮈의 책 『시지프 신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시시포스는 코린토스의 왕이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딸을 찾아 헤매던 아소포스가 코린토스에 들르자 시시포스는 그에게 메마른 성채에 샘이 솟게 해주는 조건으로 딸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시시포스의 고자질에 분노한 제우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 그를 지하세계로 끌고 오도록 했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기지를 발휘해서 타나토스를 제압한 뒤 쇠사슬로 묶어버렸다. 죽음의 신이 활동을 못하게 되자 세상에서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았다. 세상의 질서가 흐트러질 것을 우려한 제우스가 서둘러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해주도록 했다. 그러자 사슬에서 풀려난 타나토스가 제일 먼저 지하세계로 데려왔던 혼령이 바로 시시포스였다.
그러나 교활한 시시포스는 타나토스에 잡혀 지하세계로 끌려가기 전 아내에게 미리 자신의 장례를 치루지 말고 시신을 저자거리에 버려두라고 단단히 일렀다. 자신이 시킨 대로만 하면 다시 살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후 타나토스에 의해 지하세계로 잡혀간 시시포스는 하데스에게 지상을 가리키며 자신의 시신을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둔 아내를 원망하며 사흘만 말미를 주면 아내를 혼내주고 자신의 시신도 장례를 치루고 돌아오겠다고 간청했다. 그를 불쌍하게 생각한 하데스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건만 지상으로 돌아간 시시포스는 지하세계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제우스는 결국 자신의 전령 헤르메스를 지상으로 보내 시시포스를 지하세계로 끌고 와 끔찍한 형벌을 내렸다. 그때부터 시시포스는 지하세계의 어떤 높은 산기슭에서 커다랗고 둥근 바위 하나를 그 산 정상까지 굴려 올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낑낑대며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자마자 바위는 다시 산 밑으로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면 시시포스는 터벅터벅 산 밑으로 내려와 다시 바위를 정상으로 굴려야했으며, 시시포스가 정상에 다시 힘들여 올린 바위는 다시 밑으로 떨어져 그의 노역은 절대 끝이 나지 않은 채 영원히 계속되어야 했다.
3.
우리나라의 제주도 무속 신화 중에는 <사만이 본풀이>라는 게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사만이는 결혼하여 자식들도 많았지만 살림이 늘 곤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먹을 것이 궁해지자 사만의 아내는 자신의 기다란 머리칼을 남편에게 잘라주며 시장에 가서 팔아 쌀을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머리칼을 세 냥에 판 사만이는 아내의 부탁을 까맣게 잊은 채 시장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사냥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어느 장사치의 말에 홀려 머리칼을 판 세 냥을 몽땅 주고 조총을 한 자루 사고 말았다.
아내가 쌀을 사오지 않은 자신을 타박하자 사만이는 이제는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호언장담하며 다음 날부터 조총을 들고 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러나 매일 숲 속을 열심히 돌아다녔어도 웬일인지 꿩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스름한 저녁 때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장마 때문에 땅 속에서 들어난 해골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런데 해골이 갑자기 인간의 말을 하며 그에게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지켜주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했다. 마음씨 착한 사만이가 딱한 생각이 들어 해골을 수습해서 가져와 곳간에 고이 모셔두었는데 그 이후로 사만이는 사냥으로 큰돈을 벌더니 이내 거부가 되었다.
한참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밤 사만이가 찾아오자 해골은 그에게 자신을 원래 발견했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를 물으니 사만이 수명이 서른 살인데 곧 그의 서른 번째 생일 날 저승차사가 와서 사만이를 데려가면 이제 자신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그런다는 것이다. 사만이가 저승차사의 호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애걸하자 해골은 못이기는 체 하며 그 방법을 알려주었다. 해골은 사만이에게 서른 번째 생일날 저녁에 저승차사가 오는 삼거리 길목에 진수성찬을 차린 상을 펴놓고 짚신 세 켤레, 삼베 띠 세 개, 장삼 세 벌을 그 옆에 두고 백 보 떨어진 채 엎드려 있으라 하고, 사만이 부인에게는 따로 집에서 액막이 큰굿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사만이가 서른 번째 생일날 저녁 해골이 가르쳐준 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삼거리 길 근처에 엎드려 있는데, 과연 자정이 되자 하늘에서 저승차사 세 명이 횡 하니 삼거리로 내려왔다. 저승차사들은 삼거리에 놓인 잘 차려진 상을 보더니, 마침 무척 시장했던 터라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이어 새 장삼을 입고 새 띠를 매고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는 남의 음식을 공짜로 먹으면 목에 걸리는 법이라고 하면서 그 음식을 차린 주인공이 누군지 살펴보다가 바로 사만이임을 알아내고 깜짝 놀랐다. 당황한 저승차사들이 엉겁결에 사만이 집에 가보니 그의 아내가 액막이 큰굿을 하고 있어 차마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낭패한 저승차사들은 하늘로 올라가 염라대왕의 질책이 두려워 인간의 수명이 적힌 명부를 꺼내 사만이의 수명을 찾아 삼십三十의 열십자에 살짝 획을 하나 그어 감쪽같이 천千으로 고쳐 그의 수명을 삼천으로 늘려 주었다.
4.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 이야기는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동방삭이 서른 살이 되자 저승차사가 그를 지하세계로 데려 갔다. 그런데 지하세계에서 동방삭은 저승 명부를 맡던 호적차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수명인 삼십三十의 열십자十 위에 살짝 획 하나를 그어 삼천三千으로 늘려 놓았다. 잠시 뒤 돌아 온 호적담당 저승차사는 명부를 살펴보더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3천 년 뒤에 다시 저승으로 돌아오라며 동방삭을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동방삭은 3천년이 지나도 지하세계로 돌아오질 않았다. 저승차사가 아무리 그를 찾아다녀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지하세계에서 염라대왕이 동방삭 문제로 골머리를 앓자 어떤 저승차사 하나가가 삼 년 안에 그를 잡아 오겠다면서 지상으로 떠났다.
저승차사는 지상에서 동방삭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도무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개천의 징검다리에 앉아 커다란 숯덩이를 흐르는 냇물에 씻고 있었다. 마침 그곳은 동방삭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다. 동방삭이 그곳을 지나가면서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 사시사철 한 자리에 주저앉아 숯을 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루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뭐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저승차사는 시치미를 뚝 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숯을 오래 씻으면 배꽃처럼 하얗게 된다기에 씻고 있지요.” 그 말을 듣고 동방삭이 비아냥거리며 소리쳤다. “미친놈!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그러자 저승차사가, “아, 네가 바로 동방삭이로구나!” 하면서 쇠몽둥이로 그의 뒤통수를 탁 쳐서 실신시킨 뒤 지하세계로 데려갔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에서 내려오는 동방삭 이야기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어느 날 저승차사가 지상으로 동방삭을 잡으러 왔다. 그러나 동방삭은 그가 저승에 있을 때 천상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옥황상제로부터 삼천갑자를 살도록 은총을 받았다고 속여 저승차사를 돌려보냈다. 지하세계로 돌아온 저승차사는 인간의 명부를 살펴보고 동방삭의 수명이 육십 세 밖에 되지 않은 것을 발견한 뒤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그를 다시 잡으러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방삭은 저승차사에게 등창을 앓던 종기 자국을 보여주며 옥황상제가 자신에게 삼천갑자를 살도록 은총을 베푼 표식이라고 속여 그를 따돌렸다. 결국 저승차사는 옥황상제를 알현하고 동방삭에게 은총을 베풀었는지 알아보았으나 모두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자신의 거짓이 들통이 난 것을 감지한 동방삭은 경기도 용인으로 숨어들었다. 첩보를 입수한 저승차사가 그가 숨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저승차사는 생각 끝에 숯을 지게로 한 짐 져다가 개울가에 앉아서 물로 매일 닦았다. 어느 날 동방삭이 개울 근처를 지나다가 냇물이 검은 것을 이상히 여겨 상류 쪽으로 가보니, 어떤 사람이 열심히 물로 숯을 닦고 있었다. 그가 그 행동을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묻자 그 사람은 이렇게 닦고 있으면 아무리 검은 숯이라도 언젠가는 희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동방삭은 어이가 없어 하며 자신이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물로 닦아 희게 만들겠다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가 신분이 들통이 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저승차사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이 개울을 숯내, 또는 탄천炭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국의 탄천이라고 이름 붙은 내력에는 이처럼 동방삭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사만이와 동방삭의 서사가 서로 뒤섞여 만들어진 이야기도 내려온다. 사만이는 저승차사의 도움으로 삼천 년을 산 뒤에도 동방삭처럼 자신을 잡으러 온 저승차사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이름이 암시하듯 사만 살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만이는 지상에서 사만 살 이상은 살 수 없는지라 이번에는 염라대왕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꼭 잡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저승차사가 꾀를 내어 개울가에서 숯을 닦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사만이가 그를 이상하게 여기며 뭐하냐고 물으니 검은 숯을 물로 계속 씻어서 희게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만이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엉겁결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바람에 저승차사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내가 사만 년을 살았어도 검은 숯을 씻어서 희게 만든다는 말은 처음 듣는구나!”
5.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는 교활한 면에서 동방삭을 빼닮았다. 두 인물은 기발한 꾀를 써서 죽음의 신들을 감쪽같이 속인다. 이에 비해 사만이는 죽은 해골의 소원을 들어주어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시시포스나 동방삭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그러나 시시포스, 사만이, 동방삭 이야기는 모두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울러 세 이야기는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려고 발버둥 쳐도 결국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암시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인간이여, 너 자신을 알라!”
김원익 / 문학박사, 신화 연구가. 역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의 『아르고호의 모험』, 평역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저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공저), 『신화, 세상에 답하다』, 『신화, 인간을 말하다』, 『신들의 전쟁』이 있다.
김원익
1.
『성서』의 <창세기>에 의하면 태초에 인간의 수명은 평균 900살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아담은 903살, 셋은 912살, 에노스는 905살, 게난은 910살, 마할랄렐은 895살, 야렛은 962살, 므두셀라는 969살, 라멕은 777살, 노아는 950살을 살았다니 하는 말이다. 365살에 산 채로 하늘로 불려갔다는 에녹도 수명대로 살았으면 900살은 거뜬히 넘겼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길었던 인간의 수명은 노아의 홍수 이후 급격히 줄어든다. 노아의 아들 셈은 대홍수 2년 후인 100세에 아들 아르박삿을 낳은 뒤 500년 동안 자식들을 낳아 600살 정도 살았지만, 그 후의 세대는 수명이 더 줄어들어 400살에서 200살 사이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서』는 원래 900살 가까웠던 인간의 수명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 인간의 타락 탓이라고 하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대홍수 이후에 일어난 환경파괴 탓이라고 주장한다. 대홍수 이후 지구를 감싸고 있던 방어막이 파괴되어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해로운 전파를 인간이 그대로 맞는 바람에 수명이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환경파괴가 극치에 이른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다시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평균수명이 70세라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벌써 100세 시대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쉽게 오르내리고 있다. 보험회사들도 앞다투어 100세를 겨냥한 상품을 공공연하게 선전하고 있다. 술집에서도 100살까지 살 것으로 예단하고 스스로 연장시킨 수명에 고무되어 즐겁게 노후를 설계하는 사람들의 달뜬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 중에는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얼른 가야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다. 내 어머님도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셨다. 어머님은 혼자 사셨던 고향집으로 찾아뵐 때마다 얼른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결국 여든 한 살이 되시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소원대로 아침 안개처럼 훌쩍 떠나셨다. 그러나 인간은 거의 누구나 오래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 어렴풋이 죽음을 의식하던 어린 시절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엄청난 장수를 누린 <창세기>의 할아버지들이 한없이 부러웠던 것도 아마 내 무의식 속에 꽁꽁 숨어있던 그 욕망 때문이었으리라. 주일학교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한 것도 아마 그래야 그 할아버지들처럼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2.
그리스 신화에도 오래 살고픈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시시포스이다. 시시포스는 영어로는 시지푸스라고 하며 불어로는 시지프라고 하는데 까뮈의 책 『시지프 신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시시포스는 코린토스의 왕이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납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딸을 찾아 헤매던 아소포스가 코린토스에 들르자 시시포스는 그에게 메마른 성채에 샘이 솟게 해주는 조건으로 딸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시시포스의 고자질에 분노한 제우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내 그를 지하세계로 끌고 오도록 했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기지를 발휘해서 타나토스를 제압한 뒤 쇠사슬로 묶어버렸다. 죽음의 신이 활동을 못하게 되자 세상에서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았다. 세상의 질서가 흐트러질 것을 우려한 제우스가 서둘러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해주도록 했다. 그러자 사슬에서 풀려난 타나토스가 제일 먼저 지하세계로 데려왔던 혼령이 바로 시시포스였다.
그러나 교활한 시시포스는 타나토스에 잡혀 지하세계로 끌려가기 전 아내에게 미리 자신의 장례를 치루지 말고 시신을 저자거리에 버려두라고 단단히 일렀다. 자신이 시킨 대로만 하면 다시 살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후 타나토스에 의해 지하세계로 잡혀간 시시포스는 하데스에게 지상을 가리키며 자신의 시신을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둔 아내를 원망하며 사흘만 말미를 주면 아내를 혼내주고 자신의 시신도 장례를 치루고 돌아오겠다고 간청했다. 그를 불쌍하게 생각한 하데스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건만 지상으로 돌아간 시시포스는 지하세계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제우스는 결국 자신의 전령 헤르메스를 지상으로 보내 시시포스를 지하세계로 끌고 와 끔찍한 형벌을 내렸다. 그때부터 시시포스는 지하세계의 어떤 높은 산기슭에서 커다랗고 둥근 바위 하나를 그 산 정상까지 굴려 올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낑낑대며 바위를 정상에 올려놓자마자 바위는 다시 산 밑으로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면 시시포스는 터벅터벅 산 밑으로 내려와 다시 바위를 정상으로 굴려야했으며, 시시포스가 정상에 다시 힘들여 올린 바위는 다시 밑으로 떨어져 그의 노역은 절대 끝이 나지 않은 채 영원히 계속되어야 했다.
3.
우리나라의 제주도 무속 신화 중에는 <사만이 본풀이>라는 게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사만이는 결혼하여 자식들도 많았지만 살림이 늘 곤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먹을 것이 궁해지자 사만의 아내는 자신의 기다란 머리칼을 남편에게 잘라주며 시장에 가서 팔아 쌀을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머리칼을 세 냥에 판 사만이는 아내의 부탁을 까맣게 잊은 채 시장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사냥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어느 장사치의 말에 홀려 머리칼을 판 세 냥을 몽땅 주고 조총을 한 자루 사고 말았다.
아내가 쌀을 사오지 않은 자신을 타박하자 사만이는 이제는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호언장담하며 다음 날부터 조총을 들고 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러나 매일 숲 속을 열심히 돌아다녔어도 웬일인지 꿩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스름한 저녁 때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장마 때문에 땅 속에서 들어난 해골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런데 해골이 갑자기 인간의 말을 하며 그에게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지켜주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했다. 마음씨 착한 사만이가 딱한 생각이 들어 해골을 수습해서 가져와 곳간에 고이 모셔두었는데 그 이후로 사만이는 사냥으로 큰돈을 벌더니 이내 거부가 되었다.
한참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밤 사만이가 찾아오자 해골은 그에게 자신을 원래 발견했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를 물으니 사만이 수명이 서른 살인데 곧 그의 서른 번째 생일 날 저승차사가 와서 사만이를 데려가면 이제 자신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그런다는 것이다. 사만이가 저승차사의 호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애걸하자 해골은 못이기는 체 하며 그 방법을 알려주었다. 해골은 사만이에게 서른 번째 생일날 저녁에 저승차사가 오는 삼거리 길목에 진수성찬을 차린 상을 펴놓고 짚신 세 켤레, 삼베 띠 세 개, 장삼 세 벌을 그 옆에 두고 백 보 떨어진 채 엎드려 있으라 하고, 사만이 부인에게는 따로 집에서 액막이 큰굿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사만이가 서른 번째 생일날 저녁 해골이 가르쳐준 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삼거리 길 근처에 엎드려 있는데, 과연 자정이 되자 하늘에서 저승차사 세 명이 횡 하니 삼거리로 내려왔다. 저승차사들은 삼거리에 놓인 잘 차려진 상을 보더니, 마침 무척 시장했던 터라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이어 새 장삼을 입고 새 띠를 매고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는 남의 음식을 공짜로 먹으면 목에 걸리는 법이라고 하면서 그 음식을 차린 주인공이 누군지 살펴보다가 바로 사만이임을 알아내고 깜짝 놀랐다. 당황한 저승차사들이 엉겁결에 사만이 집에 가보니 그의 아내가 액막이 큰굿을 하고 있어 차마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낭패한 저승차사들은 하늘로 올라가 염라대왕의 질책이 두려워 인간의 수명이 적힌 명부를 꺼내 사만이의 수명을 찾아 삼십三十의 열십자에 살짝 획을 하나 그어 감쪽같이 천千으로 고쳐 그의 수명을 삼천으로 늘려 주었다.
4.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 이야기는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동방삭이 서른 살이 되자 저승차사가 그를 지하세계로 데려 갔다. 그런데 지하세계에서 동방삭은 저승 명부를 맡던 호적차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수명인 삼십三十의 열십자十 위에 살짝 획 하나를 그어 삼천三千으로 늘려 놓았다. 잠시 뒤 돌아 온 호적담당 저승차사는 명부를 살펴보더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3천 년 뒤에 다시 저승으로 돌아오라며 동방삭을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동방삭은 3천년이 지나도 지하세계로 돌아오질 않았다. 저승차사가 아무리 그를 찾아다녀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지하세계에서 염라대왕이 동방삭 문제로 골머리를 앓자 어떤 저승차사 하나가가 삼 년 안에 그를 잡아 오겠다면서 지상으로 떠났다.
저승차사는 지상에서 동방삭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도무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개천의 징검다리에 앉아 커다란 숯덩이를 흐르는 냇물에 씻고 있었다. 마침 그곳은 동방삭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이었다. 동방삭이 그곳을 지나가면서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 사시사철 한 자리에 주저앉아 숯을 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루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뭐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저승차사는 시치미를 뚝 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숯을 오래 씻으면 배꽃처럼 하얗게 된다기에 씻고 있지요.” 그 말을 듣고 동방삭이 비아냥거리며 소리쳤다. “미친놈!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그러자 저승차사가, “아, 네가 바로 동방삭이로구나!” 하면서 쇠몽둥이로 그의 뒤통수를 탁 쳐서 실신시킨 뒤 지하세계로 데려갔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에서 내려오는 동방삭 이야기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어느 날 저승차사가 지상으로 동방삭을 잡으러 왔다. 그러나 동방삭은 그가 저승에 있을 때 천상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옥황상제로부터 삼천갑자를 살도록 은총을 받았다고 속여 저승차사를 돌려보냈다. 지하세계로 돌아온 저승차사는 인간의 명부를 살펴보고 동방삭의 수명이 육십 세 밖에 되지 않은 것을 발견한 뒤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그를 다시 잡으러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방삭은 저승차사에게 등창을 앓던 종기 자국을 보여주며 옥황상제가 자신에게 삼천갑자를 살도록 은총을 베푼 표식이라고 속여 그를 따돌렸다. 결국 저승차사는 옥황상제를 알현하고 동방삭에게 은총을 베풀었는지 알아보았으나 모두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자신의 거짓이 들통이 난 것을 감지한 동방삭은 경기도 용인으로 숨어들었다. 첩보를 입수한 저승차사가 그가 숨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저승차사는 생각 끝에 숯을 지게로 한 짐 져다가 개울가에 앉아서 물로 매일 닦았다. 어느 날 동방삭이 개울 근처를 지나다가 냇물이 검은 것을 이상히 여겨 상류 쪽으로 가보니, 어떤 사람이 열심히 물로 숯을 닦고 있었다. 그가 그 행동을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묻자 그 사람은 이렇게 닦고 있으면 아무리 검은 숯이라도 언젠가는 희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동방삭은 어이가 없어 하며 자신이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물로 닦아 희게 만들겠다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가 신분이 들통이 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저승차사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이 개울을 숯내, 또는 탄천炭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국의 탄천이라고 이름 붙은 내력에는 이처럼 동방삭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사만이와 동방삭의 서사가 서로 뒤섞여 만들어진 이야기도 내려온다. 사만이는 저승차사의 도움으로 삼천 년을 산 뒤에도 동방삭처럼 자신을 잡으러 온 저승차사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이름이 암시하듯 사만 살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만이는 지상에서 사만 살 이상은 살 수 없는지라 이번에는 염라대왕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꼭 잡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저승차사가 꾀를 내어 개울가에서 숯을 닦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사만이가 그를 이상하게 여기며 뭐하냐고 물으니 검은 숯을 물로 계속 씻어서 희게 만들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만이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엉겁결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바람에 저승차사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내가 사만 년을 살았어도 검은 숯을 씻어서 희게 만든다는 말은 처음 듣는구나!”
5.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는 교활한 면에서 동방삭을 빼닮았다. 두 인물은 기발한 꾀를 써서 죽음의 신들을 감쪽같이 속인다. 이에 비해 사만이는 죽은 해골의 소원을 들어주어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시시포스나 동방삭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그러나 시시포스, 사만이, 동방삭 이야기는 모두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울러 세 이야기는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려고 발버둥 쳐도 결국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암시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인간이여, 너 자신을 알라!”
김원익 / 문학박사, 신화 연구가. 역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의 『아르고호의 모험』, 평역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저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양 문화』(공저), 『신화, 세상에 답하다』, 『신화, 인간을 말하다』, 『신들의 전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