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지훈의 대표시 5편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촟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들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용(雙龍) 대신에 두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파초우 (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 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고사(古寺) 1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萬里)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