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설립
선생은 가도가도 드넓은 벌판만이 이어지는 땅, 바람 찬 간도 땅에 이주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였다. 선생은 이회영, 이시영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개척을 시작하였다. 우선 동지들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였다(간도에서 벼농사는 한인들이 처음 시작하였다). 이들은 우리의 옛 땅,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선조들의 웅대한 기개가 어린 곳에서 1,000여년이 지나 다시금 조국광복의 꿈을 심어갔던 것이다. 경학사는 단순히 이주민의 자치단체만은 아니었다. 이주민이 경제적 안정과 법적 지위 보장 등에 힘쓰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군사교육을 통해 조국광복의 전위대(前衛隊)를 이루는 독립군 양성에 착수하였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민단(1912)과 한족회(1919)로 변천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를 이루어 갔고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며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다.
3.1독립운동의 함성이 전세계의 잠자는 양심을 두드리던 1919년(3.1독립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터키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교훈이 되었다.)한족회는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군정서 독판을 맡아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서로군정서는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