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아라, 시산의 날개야. 날자, 날아보자.
안 철 수
문학동인 ‘시와산문’은 내게 글을 쓸 수 있게 늘 옆에서 지켜봐 주고 다독여주고 채찍질하는 파수꾼이자 조력자였다. 1996년, 우연히 퇴근길에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문예대학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고 늘 마음속으로만 간직해오던 글쓰기에 대하여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 몇 차례 상을 받은 게 고작인 글쓰기의 문외한이 감히 ‘문예대학’이란 곳을 도전해보려 한다는 것이 좀 민망했지만, 체계적인 글쓰기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좀 더 강했던 것 같다. 무작정 등록을 하고 정해진 날짜에 강의를 듣는 장소로 갔다. 수강생은 30여 명,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강생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 책임감으로 종강까지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책임감이 어깨를 무겁게 하기보다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매주 습작을 쓰고 복사하여 수강생들과 윤독하며 교수님께 지도를 받으며 글쓰기 토대를 마련했다.
그해 유월에는 담양에 있는 가사 문학의 산실인 면앙정, 송강정, 환벽당, 명옥헌, 소쇄원 등을 돌아보며 옛 문인들의 정취를 느꼈고, 순천에서 활동 중인 여러 선배 문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 무렵 서점에 들락거리며 여러 시인의 시집을 닥치는 대로 구매해 읽으며 시 공부에 빠져 지냈다.
문예대학 수강을 마치고 좀 더 글쓰기에 전념하려면 동아리 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선배 문인들의 조언에 따라 그래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동아리를 알아보던 중, 허근 선생님의 안내로 문학동인 ‘시와산문’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문예대학 4기 졸업생 10명이 한꺼번에 문학동인 ‘시와산문’에 입회하게 되었다. 기존 회원 13명이 있던 시산 동인이 23명으로 불어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96년 11월이었다.
‘시와산문’에 입회하여 동인지 7집에 습작으로 썼던 ‘사랑 노래’ 연작시 3편을 부끄럽지만 등재했다. 매월 월례회 때는 선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글쓰기 과외처럼 느껴져 늦은 밤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인들과 함께했다. 그러면서 글쓰기에 재미를 느꼈고, PC 통신 문학동아리 활동도 병행하며 글쓰기에 미쳐 지낸 것 같다. 글쓰기에 미쳐 지내다 보니 ‘올해의 좋은 시’ 책자도 발간에 맞춰 서점으로 달려가 구매하기도 하고 ‘신춘문예 당선시집’도 빠트리지 않고 사서 읽게 되었다. 월례회 모임에서는 회원들과 시를 돌려 읽으며, 내 시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 습작을 쓰고 읽고 또 읽어보고, 다듬기를 수십 번 거듭하며 시 한 편을 쓰게 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 시 공부를 꽤 많이 했던 것 같다.
1997년에는 재능기부로 순천 문인협회 시화전 행사에 우리 ‘시와산문’ 회원들의 시화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고, 1998년에는 서울에 있는 ‘시문학’ 출판사를 허근 선생님과 동행, 방문하여 김규화 출향 시인을 탐방하고 탐방기를 쓰기도 했다. 1999년에는 신출내기 애송이였던 내가 제7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어 4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2002년에는 계간지 ‘문학 시대’에서 주관하는 밀레니엄 신춘 특별공모에 시 ‘신기루를 보다’외 9편을 응모하여 추천되는 기쁨도 맛보게 되었다. 허근 순천문인협회 회장을 도와 사무국장직을 수행한 덕에 2007년에는 순천 예총 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2011년에는 ‘시와산문’동인들의 모습들을 연필로 그려 <연필로 그리는 세상> 개인전을 열고 동인들에게 선물로 전해주기도 했다. 이런 모든 일이 문학동인 ‘시와산문’과 함께한 덕분이다. 어찌 잊겠는가. 크고 작은 일들이 또렷이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우리 문학동인 ‘시와산문’이 2015년부터 시화전을 격년제로 열기로 하고 ‘시가 내려앉은 풍경’시화전을 연향도서관 전시실에서 전시한 것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손수건에 담은 시 향기’시화전을, 2019년에는 ‘시향, 도판에 머물다’ 시화전을 열었고, 2021년 코로나 시국에는 리마인드 시화전으로 ‘시향에 머물다’를 정원지원센터 특별 전시실에서 열었고, 2023년 올해는 이옥재 선생님의 멋진 캘리그라피에 한국화로 삽화를 그려 ‘쉼, 틈새에서 느낌표를 찾다’라는 제목을 달고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날, 시화전 작품을 제작하며 더불어 합죽선 부채에 수묵담채화 그림을 그려 동인들께 나눠주며 침체한 동인들의 마음을 붙잡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문학동인 ‘시와산문’은 내 글쓰기 여정에 햇볕이었고 그늘이었고 바람막이였고 이유였고 결과였다. 내 글쓰기에 자양분이고 전부였다. 동인들과 만남이 늘 즐거웠고, 동인들과 함께한 일들에 보람을 느꼈고 아픔을 함께했고 슬픔을 함께 나눴다. 문학동인 ‘시와산문’과 이십칠 년을 함께했다. 그동안 ‘시와산문’에 머물며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오랫동안 함께한 인연과 잠시 스쳐 간 인연이 육십여 명이다. 그 인연들이 내게는 모두 소중했다.
분명, 지금 ‘시와산문’이 위기를 맞고 있다. 그 많던 회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열 명 정도의 회원이 초대회장을 지냈던 정운기 선생님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상처 입은 날개를 다독여 고치고 다시 들썩이며 동인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 건물을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작은 틈 때문에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맞대고 지혜롭게 이 난국을 이겨내야 한다. 그동안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위기가 ‘시산’을 수렁으로 밀어 넣을 때마다 우리 동인들은 슬기롭게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 걷고 달리고 날아오르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 어둠이 걷히고 나면 우리 동인들의 날개가 다시 돋아나 푸른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게 될 것이다.
첫댓글 원고가 늦었지만 망설이다 제출합니다.
페이지를 다시 수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안겨줘 미안한 마음입니다.
순서는 정운기 회장님 '나의 시산' 글 다음에 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