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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하여 1
"예수만이 길인가?"
글 / 최 성 웅
서울 도심의 전철역이나 대로변을 지나갈 때면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하며 전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때로는 시끄럽게 소리치거나 귀찮게 쫓아다니면서 강요하듯이 예수를 믿으라고 하기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기나 천당 가고 싶으면 조용히 믿을 것이지 왜 남한테까지 강요하며 저리 시끄럽게 구는가 말이다. 나도 그렇게 짜증내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사실 기독교인이 된 지금도 그런 길거리 전도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그래도 그런 전도를 통해서도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가졌던 거부감은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협박(?)까지 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공격적인 전도 방식 자체에도 있었지만 더욱 역겨웠던 것은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 간다는 그 독선적인 논리였다. '천국에 가려면 착하게 사세요' 또는 '살아서 선행을 베풀면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라는 식의 논리라면 그래도 수긍이 갈 만할 텐데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논리는 너무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천국 가고 싶으면 교회에 나오라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자기네 종교를 선전하고 싶다고 해도 천국을 자기네들이 마치 독점하고 있는 듯한 식의 태도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러면 부처님을 믿고 착하게 사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가나? 나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인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말이 안 되는 소리가 기독교인 즉 크리스천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니 어떻게 하겠는가?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신이시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영원하신 분임을 인정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고 자신의 구원자이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믿는 자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믿지만 예수님을 메시아 즉 구세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이들 종교는 예수님을 통하지 아니하는 다른 방식 예컨대 일정한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종교들도 천국으로 가는 길에 무신론자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끼워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종교든 자기의 교리에 따라 행할 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해야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종교를 믿지 않는 다른 일반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어떤 신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는 어떤 종교에서든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긴 무신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되는 것이니 무신론자에게 천국이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신론자였던 나는 왜 그리도 '예수 믿고 천국에 가라'는 말이 역겨웠을까?
그것은 아마도 두 가지 심리적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아무리 신을 부정한다고 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기 마련인데 그 두려움이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칭 무신론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해도 막상 애처로운 죽음을 보면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보자'고 하거나 상가 집에 가서는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등의 말을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는 것인데.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범신론적인 세계관이 의식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어서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명절이나 기일에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특정한 신을 믿는 것도 아니면서 죽은 조상의 혼백이 저 세상에서 제사 밥을 먹기 위해 올 것이라고 가정하는 사고가 어떻게 보면 대단히 모순되지만 관습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 말은 무신론자이지만 실제 의식은 사후 세계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범신론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연히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하늘나라 즉 천국이 '예수를 믿어야' 간다는 식의 논리로 갑자기 차단 당하는 느낌이 들게 되니 어찌 반발심이 아니 생기겠는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예수를 믿고'라는 대목 때문일 것이다. 즉 천국에 가는 기준으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살생을 하지 않아야 한다'든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어떤 행위를 기준으로 내세운다면 쉽게 이해가 갔을 것이다. 적어도 그 행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면 그것을 행한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은 누구나 공평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은 기독교 신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인데 이는 매우 공평치 못한 기준이며 너무나 노골적인 종교적 선전 문구라고 여겨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기독교 신자라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그리 정의롭지도 못하고 속물 같은 인간도 많은 것 같은데 어찌 그런 인간들은 천국에 가고 그들보다 더 좋은 사람들은 종교가 다르거나 없다는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없냐는 말이다. 정말 역겨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처음 교회에 몇 번 나갈 때만 해도 '예수 믿고 천국에 가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선전 문구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저 착하고 선하게 살라고 좋은 말만 하셨고 그리 살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리라고 생각했다. 설마 '자신을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는 독선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은 예수님 본인이 직접하신 말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그리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 전할 뿐이었다.
요한복음 3장 15절과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저(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에 말씀하신 것으로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에는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예수)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의 천국이 각기 따로 존재할 리는 없을 것이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막연한 하늘 나라가 별도로 존재할 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그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매우 숨막히는 선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의 말이 진실이거나 거짓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는 이런 숨막히는 선택의 압박을 선배 교인, 목사의 설교, 그리고 성경을 통해 여러 차례 느끼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기독교 계열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는데 그 동안은 그냥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 보내왔다. 그런데 갑자기 믿지는 않아도 성인(聖人)으로는 존경하던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현듯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라는 압박감을 받게 되었다. 그가 행한 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강한 도전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뚜렷하게 거부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실상 모두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예수님을 선지자나 성인 정도로 인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도 예수님을 한 선지자로는 인정하기도 하고 무신론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인으로 인정한다. 예수께서 설파한 가르침 중에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 즉 사랑이나 용서, 자비 등 좋은 말이 많이 있고, 그 분이 악하게 살았다는 증거도 없거니와 오히려 선하게 살았는데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을 그대로 받으셨으니 그것으로 그런 명예를 인정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를 그의 말 그대로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그를 통하지 않으면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에는 참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 이상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그의 기적을 여러 가지의 마술 테크닉으로 설명하려고도 하고 그의 병 고침을 인도에서 치료법을 배워 와서 써먹었다고 해설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그의 부활을 집단적 정신 착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시도도 소설 '다빈치 코드'처럼 작자의 상상에 근거한 가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 모든 가설은 결국 예수님의 말을 거부하고 싶은 인간의 자기 합리화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좋은 말이 많으니 그것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기는 어려우니 그냥 그를 '좋은 사람' 정도로 만들어서 심리적 불편함을 면해 보려는 그런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당대에 이미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를 시험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를 좋은 스승으로만 한정하려는 사람들 등 각종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심리가 어떠한지 알고 계셨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결론은 항상 단호하다. '나를 믿고 따르라'는 것뿐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존재 의미는 없기 때문에 그것을 믿느냐 마느냐 둘 중의 하나만 길이지 그 외의 길은 없다는 말이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믿기 시작한 것은 간단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서 였다. 그것은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한 설교에서 힌트를 얻어 생각해 본 것이다. 나의 간증에서 밝힌 바 있지만 쉽게 말해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희대의 사기꾼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여야 한다'는 가정을 놓고 이것의 진위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기꾼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에 처형 당할 정도의 고통을 왜 사서 하겠는가? 과대망상증 환자라면 어떻게 그를 좇는 제자들이 목숨까지 바치며 따르겠는가? 사기꾼이나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라면 그의 말은 사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논리적 전개였다. 사실 이런 식의 논리는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즉 사기꾼이나 과대망상증 환자의 말이 아니니 한번 진지하게 들어보자는 초기 마음을 여는 단계에서 의미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논리로 내 마음이 곧 바로 예수님을 백 퍼센트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커져 갔다.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고 그를 통해서 만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행한 기적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전한 말씀 즉 가르침의 내용이며 셋째는 그의 부활이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3년 동안 숱한 기적을 보이셨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해도 수많은 불치병 환자의 치유에서부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 등 그야말로 무수히 많은 화려한 초자연적 권능을 보이셨다. 요한복음 마지막 구절에는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되어 있으니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기적까지 고려한다면 얼마나 많은 기적이 행해졌겠는가.
예수님은 왜 이런 기적을 행하셨을까? 기적을 보여줌으로 떼돈을 번 것도 아니고 권력을 장악한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 때문에 애써 그 많은 기적을 보이셨는가 말이다. 물론 아픈 사람이 불쌍해서 고쳐주었고 배고픈 청중들이 애처로워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눈먼 사람을 고쳐준다고 그들이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며 수천 명 청중들에게 한 끼 식사를 주었다고 그들이 영원히 배 부른 것도 아님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당시에 행한 기적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이벤트였을 뿐이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주고 싶은 것은 그런 제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한 것을 주고 싶으셨다. 따라서 그 기적들은 영원한 것을 주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촉매제였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행한 기적들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증표로 행해진 것이다.
성경에서도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보이신 것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리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3장 2절에는 "그(니고데모)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되어 있다. 요한복음 4장 47절부터 54절까지 내용을 보면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리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되어 있다.
기적이 어쩌다 한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필요하면 언제든지 일어난다는 것은 신의 능력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 즉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세의 기적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인간인 선지자를 통해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이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이다. 모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며 백성들에게 말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는 식으로 시작한다. 모세 뿐만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이 특별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이를 전하기도 하였지만 그들 자신에 대해서는 피조물인 인간 이상이 아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달리 규정하신다. 요한복음 5장 19절부터 29절에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잘 나와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상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에 대한 규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고 아들은 예수님이시다. 그 이전의 선지자들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표현이다. 이것은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실질적 의미이다. 다시 말해 상징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의 실질적인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하셨기 때문에 당시의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는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되어있다.
두 번째는 심판자인데 하나님이 심판의 권한을 모두 예수님께 맡기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심판자는 다른 말로 구세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께 주어진 심판의 권한을 유보하고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기독교에서는 죄의 사면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을 말한다.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누가 심판하며 누가 죄를 사면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권한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것인가? 바로 예수님께 주었다는 것이다. 실제 예수님은 사역 과정에서 여러 차례 직접 죄를 사하는 말씀을 하신다. 마태복음 9장 2절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되어있고 6절에는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세 번째는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람으로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은 그대로 사람의 몸을 갖고 계시며 인간이라는 뜻이다. 실제 예수님은 보통의 인간과 똑같이 감정, 지성, 의지를 지녔으며 육신의 제약을 받으셨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이 세상 (사람)을 심판 (구원) 하기 위한 것이 그 분의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외에 성경의 어느 선지자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심판자로 말하지 않는다. 아니, 성경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가운데 어느 누가 감히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석가모니도 내가 알기로는 스스로 크게 깨닫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신이라고 하거나 세상을 심판하는 자로 말하지는 않은 걸로 안다. 도대체 제 정신의 인간이라면 누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이야기하겠는가? 미친 인간이 아니라면 그는 정말 그 분인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누구인지를 말씀하신 것 외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주된 내용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야 하는 거룩한 삶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형식적 행위로만 지키려 했던 당시의 세태를 신랄히 비판하시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실천을 강조하셨다. 나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거룩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깨달음이 커가면 커갈수록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고 그것을 통해 내 마음의 더러운 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이 진정으로 선한 사람에게서 악한 행동이 나올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악한 사람에게서도 선한 행동은 나올 수 있다. 후자의 경우를 기만 또는 가식이라고 한다. 사람은 마음을 항상 선하게 갖기가 쉽지 않아 때로는 악한 마음이 생겨 악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고 반성하면 그 악한 행동은 용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악한 마음을 품고 선한 채 행동하는 경우는 결코 반성의 기회를 찾기 힘들다. 누구도 비난치 않을 것이며 자기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예수님은 그래서 마음을 보신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죽어서 천국에 갈 정도로 충분히 착하고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한번 비교해 보기 바란다. 다음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에서 발췌한 것이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어의 속된 말)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무엇이든지 나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악한 사기꾼의 말이거나 정신 나간 미친 인간의 횡설수설일 수가 없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한 완전한 거룩함이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었고 그가 묘사하는 하늘 나라는 이미 있었던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 자체로 충분히 자신의 말이 진리임을 증명하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아름답게 전했다고 해도 자신의 예언대로 행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다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경험한 제자들이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예수님과 함께한 3년간의 생활은 일장춘몽에 불과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당시 유대인들이 말한 '신성모독'에 대한 마땅한 벌이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예언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화목제로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죄 사함의 대가로 지불된 것인지 그 진위를 가르는 것은 바로 부활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말하며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로 가르침을 설파하였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끝이 났다면 그 분은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뛰어난 선지자(기적을 일으켰으니)였으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좀 과다하게 설정하는 바람에 그 교만 때문에 죽음에까지 이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신성모독죄로 형벌을 받기 전에 도망 가서 조용히 사는 것이 상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함으로 자신이 죽기 전에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최종적 믿음을 확고히 하게 해 주었고 그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만방에 전파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2천년이 지난 오늘날의 나에게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확정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형벌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죄를 지었다가 그 죄를 사면 받게 될 때는 아무런 벌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벌을 어떤 형태로든 받은 다음 그 벌을 가볍게 덜어주는 형태로 사면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죄인 경우에는 형을 살고 있다가 잔형을 면제해주는 감형의 형태로 사면이 이루어지지 유죄가 무죄와 동일하게 취급되는 경우는 법의 형평상 있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죄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그 말씀대로 살지 않은 죄를 아무리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일단 그 죄를 지었다면 그에 대한 일정한 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자신들의 죄에 대한 벌을 피하기 위해 양이나 소와 같은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 형벌을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대신 짊어지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그렇게 약속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데 그 어떤 형벌도 받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게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는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우리가 무슨 수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형벌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설사 지금부터 회개하고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대로 산다고 해도 이전 나의 죄에 대한 벌은 피할 수 없지 아니한가? 그러니 차라리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질서상 우리는 천국과 이 세상을 넘나들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생은 죽어서 영이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심판하는 날 새로운 육신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보이신 부활은 영이 인간의 눈에 보인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이었다.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 보임으로써 육신으로의 부활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은 죽어서 영이 천국에 가는 것 이상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그대로 보여줌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마지막 확신을 갖게 해 주셨다.
나는 예수님의 기적, 설교 그리고 부활의 내용을 성경을 통해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갔다. 혹자는 예수님의 말씀 중 몇 가지 내용을 유명인의 명언들처럼 좋은 문구로 사용은 하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나 부활은 신화 정도로 여긴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기적을 행하지 않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센세이셔널한 기적을 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아무리 수려한 연설을 한다고 말만 가지고 사람들이 따랐겠는가?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그런 기적도 보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그 자리에서 미친 놈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이 있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복음을 전할 정도로 믿음이 설 수 있었을까? 기적과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도 사실이고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것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제대로 된 길인 것이다.
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나 "예수 믿고 천국에 가세요"라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리하신 것이니 진정으로 그런 한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전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협박이나 위협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차피 믿음은 인간인 우리가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이루어질 것이니 우리는 다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리라.
P.S.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선언하면 믿는 것일까? 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점점 확신하게 되면서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원에 대한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