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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절 제3주일)
살과 뼈로 만나는 부활
행3:36~48; 요일3:1~3; 눅24:36~48
더 없이 아름다운 부활시기입니다. 요즘 호수공원에서 자주 조깅을 하는데, 요즘 호수공원은 그야말로 생명의 잔치입니다. 호수공원에서 이번 봄에 가장 먼저 초록 잎을 내었던 귀룽나무에서 나는 꽃향기는 아찔합니다. 이제는 제일 늦게 잎을 내는 메타세콰이어까지 모든 나무들이 연초록 잎을 가득 채웠습니다. 화사하게 피었던 벚꽃은 바람에 날려 떨어지면서 꽃잎으로 주위를 온통 하얗게 덮어 큰 벚꽃 나무 근처는 거의 비현실적인 세상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꽃이 어디 벚꽃뿐이겠습니까? 햐얀 조팝나무에서부터 땅 아래 작은 별처럼 피어있는 봄맞이꽃, 꽃마리 꽃까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습니다.
어느 날 토머스 머튼이 저녁 식사 후에 코발트색 하늘 아래 과수원 길을 혼자 거닐다가, 온 세상과 하늘은 멋진 음악으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이 에덴동산에 이렇게 가깝게 있어 본 적이 없다고 썼던 어느 날 일기 대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냥 자연이 아름답다는 수사적 묘사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에덴동산은, 비현실적인 무릉도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온전한 현실을 가장 온전하게 살아가는 순간을 말하는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생각과 상상으로 사는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장 깊게 만나는 세상입니다. 자신의 온전한 바탕을 알아차리고 존재 자체를 활짝 꽃피우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가상적인, 비현실적인 세상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살아내야 할 온전한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덴동산은 아무런 고통도 없고 유혹이 없는 무풍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첫 번 에덴에서도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마귀의 유혹을 받습니까? 가령 우리가 요즘 같은 자연 속에서 즐기고 있으면, 마귀는 틀림없이,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네가 지금 이깟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냐? 네가 그런 정도로 한가하니? 당장 네 앞에 놓인 문제들, 너의 걱정거리들은 어떻할래?” 그래서 우리는 곧 “현타”를 맞는 거죠. (그런데 이 현타의 뜻을 찾아보니까, “일상의 깨달음과 반성의 순간”을 현타 즉, 현실자각타임이라고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잘못하면 현타는 계속 “걱정 모드”로 살라는 마귀의 속삭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악마가 가장 싫어는 것이 뭘까 생각해 보면, 우리가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에서 몽실몽실 희망이 올라오면 그걸 제일 싫어하고 혐오하고 분개합니다. 성장을 향한 우리의 지향에는 치를 떱니다. 또 우리가 쾌활한 마음으로 평안히 있는 꼴을 못 보지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온갖 걱정근심으로 짓눌리게 하는 것이 마귀의 제일 과제입니다. 근데 거의 대부분 마귀는 자기 일에서 큰 성취를 맛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에덴을 살려면 마귀의 유혹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네가 그럼 그렇지 뭐!” “지금까지 많이 해봤잖아, 뭘 더 해?” “그래, 이제 알았니? 넌 어쩔 수 없어!” “그냥 그대로 살아!” 이런 마귀의 속삭임이 끊임없이 올라올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굴복하면 마귀는 쾌재를 부르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게 마귀의 속삭임인지, 어떤 것이 성령의 속삭임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귀는 우리가 희망을 갖고, 성장하고, 우리의 의식이 확장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의 영역은 점점 축소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이란 우리의 삶의 희망을 갖고, 우리의 의식이 점점 확장하여, 우리의 시야가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가 부활을 믿고 경험하지 못하게 온갖 지식을 다 늘어놓고, 특별히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적인 지식을 들어서, 부활신앙을 막고 있습니다.
부활은 자신 안에 어떤 한 면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길을 나서 자신의 여정을 가는 것입니다. 남에게 운전대를 맞기지 않고 스스로 운전하여 자신의 독특한 이 땅에서의 여정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누구도 가는 길을 다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따라 가다보면, 스스로 운전하여 미끄러운 얼음 위를 운전하여 가다보면 서서히 어떤 변화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자신 안에 차가웠던 얼음이 녹으면서 그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amazing grace로 변하여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 안에 차가웠던 얼음이 변하여 “놀라운 은총”이 되는 순간입니다.
놀라운 은혜, 나 같이 가엾은 사람을 구원하신 그 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나는 한 때 길을 잃었지만 지금은 찾았고, 눈멀었었지만 지금은 보고 있다네.
내 마음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은혜였고, 나의 두려움을 풀어놓은 것도 은혜였다네. 내가 처음 믿게 된 순간, 나타난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하던가.
많은 위험과 수고와 올가미를 통과하여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다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은혜였고, 그 은혜는 우리를 집으로 인도할 것이라네.
놀라운 은혜, 나 같이 비참한 사람을 구원하신 그 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나는 한 때 길을 잃었지만 지금은 찾았고, 눈멀었었지만 지금은 보고 있다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에덴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숨겨진 바탕”입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것이지만 여러분의 것임도 기억하십시오. 부활을 교리로만 믿지 말고, 부활을 살기 위해 애쓰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숨겨진 사랑의 바탕이 여러분을 지지하고 있음을, 아니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숨 쉬며 살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부활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방에 들어서자 모여 있던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히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만져보라고 하면서, 자신이 유령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몸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상상이나 환영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 진짜 몸을 가진 분을 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실재, 부활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부활 기사는 우리의 생각과 논리를 넘어섭니다. 잠가놓은 문을 통과해서 갑자기 방에 들오시고, 또 계시다가 갑자기 사라지시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예수님임을 알아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서마다 부활기사도 서로 다르게 기술됩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유령과 같은 몸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지고 있는 실재이심을 강조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살과 뼈를 가지신 분이고, 그래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시공을 뛰어넘어 움직이시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만 제자들이 알아차리는 다른 부활 기사들과는 좀 결이 다릅니다. 과연 오늘 누가복음의 부활기사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아마도 초대교회에서도 부활의 현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가현설 같은 주장도 나왔던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본디부터 사람이 아니고 신이었던 분이라서 그분의 육체가 십자가에 달릴 때도 그분은 고통을 받지 않으셨고, 부활 때도 그냥 가짜 육신이 보인 것이고, 그분의 진짜 육신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아마 이런 주장에 반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그분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잡거나 만질 수 있는 그런 분이셨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현실성입니다. 부활은 망상이나 상상이 아닌 리얼리티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오늘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한 설교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부활의 능력이 지금 성전 미문의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부활은 <에게이렌>,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부활은 놀라운 은총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놀라운 은총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것으로, 나의 살과 뼈 같은 현실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 멀고 내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이런 우리에게 다가와 한 마디 속삭이면 게임이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마귀의 속삭임을 뒤로 하고 이 놀라운 은총을 현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있던 일인가 계속 묻는다고 해서 답을 얻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마귀의 책략에 휘말릴 뿐입니다. 부활이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증거들은 우리 삶에 아주 널려 있을테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서 부활의 은총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길을 잃었지만, 이제는 그 길을 찾았고, 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는 두려움에서 풀려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위험과 수고와 함정을 넘어 지금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은총이 지금 자신 안에서 자신을 자신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던 것입니다. wretch, 그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그 비참한 사람이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현실을 살아가게 됩니다. 허황된 미망에서 벗어나, 탐욕과 욕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는 것이지요. 생각과 상상 속에서, 과거의 상처에 묶여, 마귀의 속삭임에 현혹되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그 독특하고 고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지, 부활하신 분의 살과 뼈가 얼마나 리얼한 것이지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너희 가운데 평화가 있으라”고 선언하십니다. 두려워 떨고 기가 꺾여 위축된 제자들에게 이런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현실이며 실재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진정한 현실이라면, 우리의 삶은 이런 평화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평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평화가 아무런 위협도 없고 아무런 해함도 없는 무풍지대에서의 평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위협이 득실거리고 해함이 있고 불안의 요소들이 꿈틀대는 곳입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요소들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해주는 평화는 우리 가장 깊은 곳에 진정한 현실로 존재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을 때, 우리를 위협하고 해하는 모든 것들에게 우리가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만져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아마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손과 발에는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보았던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도마에게 그 상처를 만져보고 의심을 떨쳐 버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과 뼈를 가지신, 부활하신 예수님도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처가 말끔히 사라진, 깨끗한 손과 발이 아니라,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몸을 가지고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안셀름 그륀이 말한 것처럼, 그 상처는 거룩히 변용되어 지금 우리의 상처를 끌어안고 계십니다.
부활 앞에서 이제 우리의 상처는 힘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지 못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마귀의 속삭임이 통하지 않습니다. 상처는 과거의 실패가 아니라 부활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노리치의 줄리앙이 말했던 “우리의 상처는 우리의 영광”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충분히 안정되고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에 성경의 말씀들이 지시하는 진정한 의미들을 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말씀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지시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겉으로 드러나는 문자의 의미를 넘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회복하는 “놀라운 은총”을 선물로 줍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믿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 이것이 우리 각자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마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 부활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 나 같은 가엾은 사람을 구원하신 그 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나는 한 때 길을 잃었지만 지금은 찾았고, 눈멀었었지만 지금은 보고 있다네.”
오늘 공동기도에서 함께 기도했습니다만, 윌리엄 블레이크가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고 들에 핀 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라고 노래했던 그 경험이 은총의 경험이자, 에덴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한 알의 모래와 한 송이의 꽃은 분명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현실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생각 속에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 있습니다. 시몬 베이유가 말한 “세상의 아름다움은 물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의 다정한 미소입니다.”라는 말이 그런 말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로 돌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살과 뼈를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손과 발을, 여러분의 살림살이를, 여러분이 하는 청소와 설거지를, 자녀들의 뒤치다꺼리들을, 여러분의 각박한 현실을 예수님의 살과 뼈로 만나십시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일을 어중간하게 끝내시는 법이 없다. 하느님은 우리를 조각조각 덧대어 성화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평범한 삶 위에 특별한 존재를 덧씌워 우리를 사제나 성인으로 만드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온 삶과 온 존재를 취하시어 초자연적 수준으로 끌어올리시고, 그 삶을 내면으로부터 온전히 변형시키시며, 겉으로는 평범한 것으로 남겨놓으신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 망상으로 가득한 우리의 현실 속에 부활의 주님이 들어오셔서 평화를 전해주시고 상처난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진짜의 삶을 살도록 은총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