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공후사(先公後私)
사(私)보다 공(公)을 앞세움이란 뜻으로, 사사로운 일이나 이익보다 공익을 앞세움을 이르는 말이다.
先 : 먼저 선(儿/4)
公 : 공평할 공(八/2)
後 : 뒤 후(彳/6)
私 : 사사 사(禾/2)
(유의어)
지공무사(至公無私)
공사(公事)를 먼저 하고(先公) 개인적인 일을 뒤에 한다(後私)는 당연한 이 성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이다.
이 정신에 투철한 공직자들이 대부분이라 믿지만 국민들은 이것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구두선(口頭禪)이란 것을 안다.
지위고하 막론하고 수시로 튀어 나오는 부정비리, 자기들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이익 다툼 등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쉬운 글자로 이루어진 이 성어도 유래가 깊다. 기원전 403년~221년,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시절 인상여(藺相如)라는 충신이 있었다.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이 잘린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가까운 친구 문경지교(刎頸之交) 고사의 주인공이다. 인상여는 왕의 신임을 얻기 전까지는 한 대신의 식객에 지나지 않았다.
강국 진(秦)나라가 탐을 내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온전히 지킨데다가 민지(澠池)라는 곳에서 진과 조 두 왕의 회동이 있었을 때 수치를 당할 뻔한 문왕을 지켜낸 후로 상경(上卿)이란 지위를 얻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나라를 위해 피땀을 흘린 명장 염파(廉頗)는 세치 혀로 벼락출세하는 인상여가 아니꼬웠다. 그래서 염파는 만나면 치욕을 안겨 주리라 공언했고 전해들은 인상여는 피해 다녔다.
측근들이 불평을 늘어놓자 말했다. ‘내가 진왕도 맞섰는데 염장군을 두려워 하겠는가? 우리 두 사람이 있어 진이 넘보지 못한다.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以先國家之急而 後私讎也/ 이선국가지급이 후사수야)에 피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죄를 청하며 깊이 사죄했고 깊은 우정은 후세까지 기리게 됐다.
이렇듯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지켜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온 고사에 비해 오늘날에는 더 강조하여 ‘사(私)를 죽이고 공(公)을 받든다’며 멸사봉공(滅私奉公)까지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지만 믿음을 잃어 사익을 치장하는 말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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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후사(先公後私)
이 성어는 사(私)보다 공(公)을 앞세움이란 뜻으로, 어떤 일을 할때 사적인 욕심이나 편리함을 생각하기보다는 공적인 일을 우선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하기 쉬운 말로 선공후사(先公後私)라 해서 여러 사람을 위하는 일을 먼저 하고 내 일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한다고들 말은 하지만, 인간처럼 이기적인 사회에서 선공후사란 말이 쉽지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온 과거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가 이만큼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대의(大義)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인물들이 있었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전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이야기다.
조(趙)나라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환관 우두머리인 무현(繆賢)의 사인(舍人)이었다. 이때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和氏璧)을 손에 넣었는데, 진(秦)나라 소공(昭公)이 이를 알고 진나라 성 열다섯 개와 바꾸자고 요청했다.
화씨벽을 주자니 진나라 성을 받지 못할 것 같고, 화씨벽을 주지 않자니 진나라가 쳐 들어올까 걱정이었는데 인상여가 이를 해결하였으며, 진나라 소왕(素王)과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과의 회담(會談)에서도 진(秦)나라 소왕(素王)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에 귀국하여 혜문왕이 인상여를 상경(上卿)을 삼으니 지위가 염파(廉頗)보다 높았다.
그러자 염파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나라 장군이 되어 성의 요새나 들에서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상여는 겨우 혀와 입만을 놀렸을 뿐인데 지위가 나 보다 높다. 또 인상여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니, 나는 부끄워서 차마 그의 밑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했다. “내가 인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리라.”
인상여가 그 소릴 듣고 염파 장군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조회 때 마다 늘 병을 핑계 삼아 염파와 더불어 서열을 다투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출하다가 염파를 바라보면 즉시 피하니 인상여의 사인들이 다 그러한 인상여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고 인상여에게 항의하며 떠나고자 한다고 하자 인상여는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그대들은 염 장군과 진나라 왕 가운데 누가 더 무섭소?” “염 장군이 진나라 왕에 못 미칩니다.”
인상여가 말했다.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그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 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 싸우면 결국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장군을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以先國家之急而後私讎也) 때문이오.”
염파는 이 말을 듣고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와 사과하고 서로 화해하여 죽음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벗(刎頸之交)의 교유관계를 맺었다.
맹자(孟子)는 인의(仁義)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백성들에게는 가족 봉양에 필요한 일정한 전지(田地)를 배분하고, 관리에게는 각자의 봉록에 합당한 전지를 배분한 뒤, 일정한 세금을 징수하여 국고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이때 맹자는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적 토지제도로 소개하였다. 사방 1리(里)의 토지 즉 9백묘(畝)를 우물 정(井)자로 아홉 등분하여 여덟 집에서 백묘(百畝)를 사전(私田)으로 받아서 경작하고, 가운데 땅은 공전(公田)으로 공동 경작하여 조세로 바치게 했던 제도이다.
이 때 여덟 집에서 모두 함께 공전을 가꾸어, 공전의 일을 끝마친 다음에 감히 사전의 일을 다스린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공후사(先公後私)이다.
다시 공(公)을 군자라고 하고, 사(私)를 야인이라고 설명하면서, 선공후사(先公後私)는 군자와 야인을 차별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친목계든 어떤 모임이든 나라든지 여러 사람을 이끌어 나가려면 선공후사(先公後私)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야 한다.
공변될 공(公)은 물건을 둘로 나누는 모양의 팔(八) 밑에 물건을 팔로 감싸 안는 모양을 그린 내 것 사(厶)가 붙은 것으로서 ‘내 것을 나누다’라는 의미, 즉 타인을 위해 내 것을 나누고 희생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벼 화(禾)에 사(厶)가 붙은 사사로울 사(私)는 볏단을 팔로 감싸 안는 것 즉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천하려면 욕을 먹고 손해를 보는 것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 때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어느 쪽이 남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일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만이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교훈이 과연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