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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행전 20;17-32, 모든 사람에게 기업이 있게 하시는 예수님 2025. 2. 9.
오늘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아주 열정적으로 모든 인내와 헌신과 부르신 뜻에 따라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두 사건을 먼저 기록합니다. 하나는 떡을 떼고 사도들의 증거를 듣기 위하여 주의 첫 날에 드로아에서 제자들을 만난 것인데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물게 되는데 떡을 떼는 안식 후 첫 날에 늦게까지 말씀을 듣다가 유두고 라는 청년이 3층에서 떨어졌습니다. 3층에서 떨어지니까? 20;9에 죽었느니라. 이미 죽었고 끝이 났습니다. 매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사람 위에 엎드려 기도를 했더니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항상 은혜가운데 또 다른 시험이 있습니다. 그 시험은 어느 때는 은혜의 장소와 현장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을 이겨내고 극복이 되어야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두고가 그랬습니다.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밀레도로 향하여 배를 탔습니다.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이 맨 먼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합니다. 청한 이유는 항상 바울의 심령과 마음속에 있는 교회이었기 때문입니다. 온 몸을 바쳐서 설립한 교회이기 때문에 만나서 무엇인가를 부탁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왜 에베소 교회를 세웠고, 어떻게 왜 지도자들을 세웠으며 왜 어떻게 주님의 백성들을 섬겼는가를 말씀한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삶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안식과 쉼을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다 안식하고 쉼을 원합니다. 몸과 마음이 먼저 이것을 감지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쉬지 않고 맡겨진 사역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안식과 쉼이 필요가 없었나요? 빌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바울은 죽고 사는 삶의 모든 부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시작과 끝이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안식과 쉼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환경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고, 그 환경을 지배하며 살았는데 이것이 그의 안식과 쉼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청하여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앞부분입니다.
행20;16-24절,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 이러라.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런데 보지는 않았지만 13절에 스스로 바울이 걸어서 가기로 정했습니다. 걸어가는 길은 32km 정도입니다. 배를 타면 금방 갈 수 있지만 32km 계속 걸어서 갔습니다. 왜요?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제자 삼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향하여 가는 모든 과정과 만남이 행복했고 기뻤습니다. 왜요? 주님 안에서의 안식과 쉼이었기 때문입니다. 14절 이후에 바울은 배를 타고 내리고를 반복하면서 마침내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왜 걷고 배를 타고 내리고를 반복할까요? 항구도시를 이어가면서 철학으로 발전된 도시에 대하여 주님의 마음과 뜻을 품고 어떻게 이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6절부터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라. 여러분, 급히 감이라. 어느 때는 느긋하게 걸어서 사람을 만나고, 어느 때는 급히 움직였습니다. 급히 가지만 급히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월 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하늘나라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해롭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케도니아로 돌아서 가고, 또 돌아서 간 이유 때문에 많은 시간이 지체와 지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에베소를 거치지 않고 드로아로 갔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에베소는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현장입니다. 많은 제자들을 세웠습니다. 장로들을 세웠는데 그 장로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냈습니다. 직접 에베소를 가면 좋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기 때문에 에베소에서 48km 정도 되는 밀레도로 장로들을 청했고 은혜를 나눕니다. 18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만나서 교제가 이루어지고,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떠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래서 고별설교를 했습니다. 19-20.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무엇보다도 바울은 이전의 일과 지금까지의 일들을 회상합니다. 에베소의 그 두란노에서 열정적으로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나누었던 내용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겸손과 모든 눈물이었습니다. 교만하지 않았고 늘 겸손했습니다. 모든 눈물로 영혼에 대한 기도를 했습니다. 유대인의 간교 때문에 너무 어렵고 어느 때는 매도 맞고 쫓겨난 일도 있었지만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람들에게, 군중들 앞에서, 때로는 각 집과 개인을 찾아다니면서 전하고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상기 시켰고 확인을 했습니다. 왜요? 장로들에게 주님을 한 번 더 증인된 삶을 감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을까요? 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고, 부탁을 하고, 설교를 할까요? 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했나요? 지금부터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32절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변하지 않는 기업입니다. 기본적인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기업이 무엇입니까? 축복이고 확증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도중 밀레도에서 그가 3년 동안 사역하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놓고 당부하는 고별 설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습니다. 하지만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기 위하여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장로들에게 남겼습니다. 모든 믿음의 일꾼들을 향하여 던진 강력한 메시지이었습니다. 생명을 던져가면서 까지 부르신 소명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무엇으로 축복과 확증과 은혜의 기업을 이어가게 했나요?
1-1. 바울은 겸손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겸손으로 기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19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모든 겸손입니다. 항상 너희들 가운데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과 장로들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바울에게서 말씀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행실과 삶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아는 바니. you know 라는 말을 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을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 여러분, 여지(餘地)를 아십니까? 남을 餘와 땅地입니다. 약간의 남아있는 공간입니다. 여지는 내 안의 빈자리로 상대가 편히 들어올 수 있는 공간입니다. 어떻게 해야 餘地가 있게 되나요? 바울은 다툼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참고 기다리고 기도하므로 餘地를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餘地가 있고 에베소교인들을 품어준 餘地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높이 올리고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십니까? you know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왜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을 할까요? 왜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 방황할까요? 신앙의 깊은 경험과 체험이 없고,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지만 이것만으로 이유가 될까요? 바울은 확실한 신앙인의 정체성을 제시합니다. 바로 모든 겸손과 모든 눈물입니다. 유대인의 온갖 모함과 악한 계교에도 불구하고 시련과 도전 속에서 주의 종으로 흐트러짐 없이 자신에게 당할 불이익이나 고충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신앙과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헬라인에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수많은 신들을 섬겨왔던 그들의 과거를 완전히 뒤집어 놓고 너희의 믿음은 틀렸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헬라와 유럽을 관통하는 바울의 선교는 목숨을 내어 놓는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바탕이 무엇입니까? 모든 겸손과 모든 눈물이었습니다. 이 겸손과 모든 눈물로 누구를 섬겼습니까? 에베소 교우들을 섬겼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섬긴 것이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교인들을 겸손과 눈물로 섬겼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주님을 섬겼습니까? 에베소 교인들을 주님과 같이, 주님처럼, 주님으로 생각하고 섬겼습니다. 무엇으로요? 겸손과 눈물로! 왜 겸손과 눈물입니까? 주님을 향한 철저한 자기부인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상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한 영혼의 실족을 안타까워하고, 그 영혼에게 중보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나와 교회와 삶이 기업이 되고, 기업이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요? 그 것은 겸손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겸손으로 교회를 섬기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주님을 섬긴 것이 되고 이것이 나에게 기업으로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겸손으로 주님과 만남을 주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은혜가 풍성한 기업으로 이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1-2. 눈물로 섬겼는데 그 눈물이 기업이 유지되고 이어가게 했습니다. 축복과 기업은 눈물 때문에 주어집니다. 바울은 모든 눈물로 에베소의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31절,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모든 눈물로 섬겼고 모든 눈물로 훈계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눈물이 무엇입니까? 말랐던 영혼이 살아나는 능력이고 떠나갔던 영혼들이 되돌아오는 은혜입니다. 뒤 돌아 서는 신앙고백이며,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서의 하소연이고 간청입니다. 기적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바울은 삼년동안 쉬지 않고 이런 눈물로 섬겼고 눈물로 훈계를 했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왜요? 기업을 위해서요. 여러분, 가족과 이웃과 내 자신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해 보셨나요? 사업장과 나의 내일과 미래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시나요? 37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바울은 헤어질 무렵 다시 한 번 에베소 장로들과 눈물의 기도를 드립니다. 서로 목을 껴안고 눈물 흘리며 흐느끼는 장로들을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피할 수 없는 길과 피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눈물로 기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가는 것도 주님의 뜻이고 환란과 결박도 주님의 뜻입니다. 성령이 미리 알려준 것은 준비하고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준비하고 예비하는 것이 피해 가는 것이 아니고 늦추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당당하게 한발 한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결심하고 출발하는데 로마까지 가야 한다. 그 길은 환란과 결박이 있는 길이고, 이 사실은 피할 수 없는 행로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 합니다. 이 길이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바울도 알고 에베소 장로들도 모두 알았습니다. 그래서 37절의 눈물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납니다. 여러분, 아이들처럼 안 가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 가면 울 일이 있을까요? 환란과 결박과 죽음이 기다리는 그 길을 내가 안 가면, 안 가고 포기하면 울 일이 없습니다. 왜 눈물이 납니까? 알면서 피할 수 없이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눈물이 납니다. 피하고 싶은 데 갈 수 밖에 없는 길이기 때문에 눈물로 갑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를 인생에서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원치 않은데 결국은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포기하기로 결정을 하면 안타까워 할 일도, 애타할 일도, 울 일도 없습니다. 언제 눈물이 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을 때 눈물이 나고 통곡을 합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 날을 울기도 합니다. 38절에 로마로 가는 그 길은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도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았습니다. 알면서 전송을 합니다.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까지 그를 전송합니다. 그런데 전송하다의 헬라어는 프로펨포 입니다. 그냥 작별했다는 뜻이 아니고 죽음을 잘 준비해서 보냈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기다리는 로마의 길을 에베소 교회와 부르심을 받은 장로들과 바울이 갈 수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생 떼 같은 양떼를 남겨 놓고 가는 바울의 심정이 그의 설교 속에 절절합니다. 어미와 아비의 심정입니다. 헤아림이 드십니까? 28-3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도 바울은 장차 에베소 교회가 어떤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순간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장로들에게 애절한 사연을 남기며 교회와 교우들을 잘 살필 것을 말하고 떠났습니다. 죽음을 향한 그 길을 교인들을 대표한 장로들이 준비해서 보내드렸습니다. 안 가면 그만일 텐데, 그런데 그 길은 주님께서 주신 꿈이고 비전이기 때문에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의 과정에 역설이 있습니다. 정말로 하기 싫고 가기 싫은 일과 길들 때문에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안 하면 안 되는, 안 가면 안 되는 예수님의 눈물이 그렇습니다. 안 가면 안 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눈물의 예레미야가 그렇습니다. 싫어도 울면서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이고, 아나돗은 유배된 사람들의 유배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배자의 후손인데, 21살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대인기피증 때문에 청중 앞에 서는 것이 싫었습니다. 렘1;1-6,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 일 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 성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레미야는 말을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나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중앙 정부 관리들과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싫었을까요? 얼마나 울면서 갔으면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까? 싫지만 울면서 라도 가는 길이 있습니다. 바울의 눈물은 복음과 기업이 있게 하는 눈물이었습니다.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의 이 설교 때문에 또 다시 무릎을 꿇고 모두 다 크게 울었습니다. 하지만 이 눈물은 복음을 위한 눈물이었지만 또한 행복과 승리를 약속하는 메시지이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면, 행복과 승리의 기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언제나 복된 약속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피할 수 없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롬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러분, 바울은 저주를 받고 끊어질지라도 유대인과 형제자매 친척들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형제와 친척을 향한 바울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아픔이 회복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걷는 그 길이 비록 눈물 골짜기이고, 피하고 싶은 길이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일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순종을 하면 그 길목에서 수많은 생명의 열매들을 얻게 됩니다. 시온의 대로를 열고 기업을 이어가게 합니다. 눈물은 자녀와 형제자매와 이웃을 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눈물의 열정과 간절함으로 주의 뜻을 이루시고 기업을 이어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밤낮으로 각 사람을 말씀으로 가르쳐서 기업을 이어가게 했고, 가르침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31절에 삼년을 밤낮 쉬지 않고 훈계했습니다. NIV 성경은 훈계를 warning 으로 기록합니다. 20절에도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바울이 전하여 가르친 핵심 내용은 21절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NIV 성경을 보면 20절에 바울이 전한 것은 preach로, 가르치는 것은 teach로, 21절에 증언은 declare로 훈계는 warning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단어들의 공통점은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위험에 빠지지 않으면서 믿음과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수많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때는 설교로, 어느 때는 훈계로, 어느 때는 대중연설과 어느 때는 경고까지 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여러분, 낟알을 다 뜯기고 만신창이로 들판에 버려진 지푸라기를 봅니다. 하지만 그 지푸라기가 새의 부리에 물리면 보금자리가 되고 농부의 손에 잡히면 새끼줄이 됩니다. 지푸라기처럼 뜯기고 떨어져서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버림을 받고 의욕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만은 그래도, 그래도, 삶에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바닥과 손의 마디, 마디가 새끼줄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둥지가 되어 주더라도, 굽이굽이 휘몰아치는 고통이 있어도,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그래서 멀고 쓰라릴지라도, 더하여 끊어진 길일지라도 주저앉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올 곧게 뻗은 나무보다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을 때가 있고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 굽어진 강줄기가 더 정다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인내가 무엇입니까? 여지를 만들 아름다움입니다. 여지를 만들어야 하는 최고의 배움입니다. 여러분,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참느냐, 참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큰 숨 쉬고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한 번의 인내이고, 반성하는 것이 두 번째의 인내이고, 결과를 보는 것이 세 번째의 인내입니다.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프리칭, 티칭, 디 클레어링, 워닝이 되는 주의 가르침과 함께 기업을 이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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