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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소니 이성순) (앞줄 왼쪽이 1944년도 일제말엽의 김두한 청년)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라는 말은 가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류가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부터 집단 패싸움(전투)이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첨단 산업사회를 이루고 사는 오늘날의 폭력배들의 집단 패싸움은 각목과 파이프 그리고 식칼 정도의 무기에 불과 하지만, 수 천 년 전 인류의 패싸움은 창, 장도(칼), 활, 철편 등 상상만 해도 머리칼이 곤두서는 무기를 가지고 패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으로 포장하지만 내용은 엄연한 패싸움이다. 그것도 요즘의 폭력단들처럼 수 십 명 정도의 패싸움이 아니었다. 한 쪽 패거리가 보통 수 천 명이 기본이었으니 쌍방 수 천 명, 수 만 명이 엉겨 붙어 집단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보는 것의 수 백 배 이상의 끔찍한 참상이었을 것이다. 창과 칼이 총과 포탄으로 바뀌었을 뿐, 이 시각에도 중동의 시리아에서는 독재정권의 군대와 반란군과의 치열한 패싸움이 전개 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패싸움의 역사인 것이다. 간혹, 인터넷에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 사자들이 영역다툼을 한답시고 패싸움을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경우는 없었다.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아야하는 상대를 배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인간들이 패싸움을 하면 아예 상대를 요절을 낸다. 따지고 보면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21세기 첨단문명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폭력단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세계 도처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공산국가이고 국가 통제사회인 중국의 흑사회는 나라가 큰 만큼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 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폭력단이 없는 나라는 싱가폴, 쿠바, 북한등과 여타의 소국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라가 작고 국가적 통제장치가 비합법적 폭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의 조폭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고 본다. 언론에 보도된 것으로도 그 양태가 다양하다. 힘없고 가난한 공장의 비정규직원들 혹은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들을 때려서 내 쫒는 용역 폭력부터 한 지역의 유흥산업을 쥐고 흔드는 조직까지, 엄연히 민주주의 국가이고 법치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법 보다 주먹이 한 발 앞서는 사회풍토를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각종 골목 조폭에서부터 각 분야에 힘을 앞세운 폭력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폭력 조직에 속해 있거나 힘깨나 쓰는 불량배들은 좌우로 눈을 부라리며 거리를 활보하고 서민들은 애써 외면하며 다닌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의 30% 이상이 각종 학교 폭력의 피해 경험이 있다는 통계가 있었다. 심지어는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사는 이웃 간에 폭력이 일어나다 못해 칼부림이 있고 살인이 일어난다.
지극히 평범한 시민인 나도 때로는 폭력을 상상한다. 보통 보다 월등한 힘의 우위를 상상하는 것이다. 술에 취해 만만한 이웃이나 상인들을 괴롭히는 이른바 주폭이라는 불량배들의 면상을 라이트 스르레이트로 번개 같이 때려서 길거리에 주저앉히는 상상을 한다. 문신을 내 보이며 불량을 떠는 사우나 휴게실 불량배의 턱을 야무지게 어퍼컷 펀치로 올려붙여 혼쭐을 내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사소한 접촉 사고가 났다고 길거리에서 상대방 운전자의 멱살을 함부로 잡으려는 불량배의 턱을 번개 같이 발등으로 차 올려 길거리에 주저앉히는 상상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어찌 현실이 될 것인가. 현실에는 법적 제한이 있고 소시민의 사정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수 십 년 전에 타계한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불과 50대 중반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일찍 타계 하였다. 타고난 건강을 지닌 그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하직한 것은 정치적 핍박의 이유가 컸다. 국회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 각료들에게 똥을 퍼부은 것이다. 갖가지 폭력으로 인하여 세상이 어지러울 때 김두한 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인물을 회고해 보는 일은 마냥 부질없는 짓은 아니다. 그의 호방함. 약자들을 향한 인정과 포용성. 늘 좌중을 활발하게 만드는 뛰어난 언변과 밝은 성품. 그리고 뛰어난 지도력의 인물이 바로 김두한 이라는 인물 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인물을 시공을 초월하여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소시민들의 대리만족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김두한의 경우를 보면 대기만성(大器晩成)은 헛소리에 불과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두한은 그의 나이 불과 18세에 서울의 중심 종로거리를 평정 하였다. 1935년 경 일제 치하에서의 일이다. 당시 종로를 틀어쥐고 있었던 7년 년 상의 구마적(고희경)을 밤 열시에 평화극장 뒤 터에서 단 둘이 대결하여 단 15초 만에 드롭킥과 오른손 펀치로 넉 다운 시키고 종로를 평정한 것이다. 고희경은 포악한 성정의 인물이었다. 힘과 주먹을 앞세운 그에게 종로거리에서 얻어맞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거리의 건달들과 상인들은 다 그를 싫어하였다. 다만 매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가 김두한에게 혼쭐이 난 후로는 종로를 떠나 만주로 도피 하자 모두가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서운 거리의 독재자가 물러나고 포용성 있는 거리의 지도자 김두한의 시대가 도래 하자 거리의 모든 이들이 환영할 일이었다. 그만큼 그는 주변인들과 화합하고 소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결코 말 만 앞세우는 허세가 있는 얕은 인격의 인물이 아니었다. 맞대결 결투는 늘 신사적이었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것이었다. 패거리들뿐만 아니라 주변 상인들과도 늘 소통하면서 활발하게 지냈던 성품 이었다. 불통의 고회경 시대에서 소통의 김두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김두한은 18살 되던 해 이미 장대한 체격으로 성장 하였다. 6척(182cm)의 키에 27관(약 90kg)의 몸은 군살 없는 근육으로 뭉쳐 있었다. 오늘날의 라이트 헤비급 격투기 선수로서도 손색이 없는 신체조건이다. 그는 표범 같은 스피드와 유연한 순발력을 타고난 인물 이었다. 그런데다가 10대 초반부터 밥만 먹으면 철봉과 평행봉으로 신체를 단련하면서 샌드백 치기와 발차기 연습을 하였다. 그가 공부도 안하고 운동으로 세월을 보냈던 10대 성장기의 사정은 따로 있었지만 여기서 논설하기에는 그 사연이 너무도 길다고 하겠다. 김두한의 선친 김좌진 어른을 모시던 종로 5가의 설렁탕집 우래옥 주인노인의 애틋한 보살핌 속에서 잘 먹고 운동할 사정이 충분히 되었던 것이 당시의 간략한 그의 사정이었다.
김두한이 육성으로 회고(1970년대 초중반 라디오)한 방송을 들어보면 그가 비록 공부는 하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달변가이고 두뇌가 매우 영민하며 탁월한 설득력의 소유자란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근 현대사에 나름대로 한 획을 그었던 김두한은 이 땅에 유일무이한 소통하는 협객俠客이었다. 호방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를 조폭이나 깡패로 보지 않는다. 1930년대 미국 시카고의 유명한 깡패였던 알 카폰 같은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하고 있다. 182cm의 장신에 90kg이 넘은 장대한 근육질 체구에 고양이처럼 가벼운 스피드와 몸놀림. 겁이 없는 튼튼한 담력에 있어서 그와 견줄 이는 일제시대나 그 이후에도 없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질 낮은 깡패가 아니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 없이 관대한 진정한 남자였던 것이다. 당연히 노소를 막론하고 그를 따르던 이들이 많았다. 그는 타고난 포용력의 인물이었다. 자연스레 조직이 생겨났다. 약관 18세 부터의 일이다. 반면에 한반도 이북 제일의 싸움꾼 이라던 시라소니 이성순은 협객이라기보다 자객에 가까운 인물 이었다. 그는 결코 사람을 거느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흔히 김두한을 무리를 거느리는 수사자에, 시라소니를 홀로 다니며 살아가는 호랑이로 비유 하였다. 이 두사람의 걸출한 인물들이 한반도 남과 북을 대표하여 용호상박을 할 일촉측발의 상황이 있었다.
해방 이듬 해 여름의 일이다. 해방 전부터 종로 우미관 일대에서 부하들과 함께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던 김두한은 해방을 맞이하여 그에게 떨어진 일이 많았다. 선친인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에 깊이 경도 된 자객에게 피살 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던 김두한은 좌우 혼란 시기에 공산좌익척결에 앞장서기 시작 하던 때였다. 그의 활약상은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감명 시키기에 충분 하여 그에게 많은 힘이 돼 주었다. 그는 하루 놀고 하루 쉬는 건달세계를 떠나 정치의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 날 저녁에, 하루의 일과를 기분 좋게 마친 김두한과 그 부하들은 종로 2가 우미관 옆 맥주홀에서 기분 좋게 맥주를 나눠 마시며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어느덧 여름 저녁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마 아홉시쯤 되었을 것이다. 맥주홀의 문에 열리며 범상치 않은 사내 하나가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북한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시라소니였다. 170cm를 조금 넘는 키에 단단한 몸집 그리고 유난히 팔이 긴 사내였다. 평안북도 출신인 시라소니는 해방정국에서 남한으로 내려와 명동의 동향들을 만나러 다니다가 명동의 실력자였던 이화룡에게서 김두한의 얘기를 전해들었다. 시라소니는 1914년생 이라는 말도 있고 18년생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김두한은 1918년 생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려나 출생신고를 하기에 따라서 나이가 늘었다 줄었다 하던 시대였는데 김두한이 서나살 밑 이었던 것은 사실 이라고 한다.
시라소니는 김두한 패거리로 꽉 차있는 실내로 들어서서 무심한 표정으로 김두한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다가 서더니 불문곡직 김두한을 향해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물었다.
“네레, 김두한 이가?”
대뜸 낮선 사내로부터 시비조의 반말을 들은 김두한은 술김에도 매우 황당 하였다고 한다. 일순 대꾸 없이 김두한의 눈매가 비수처럼 날카로워지며 시라소니를 쏘아 보았다. 시라소니는 웬만한 장정들도 오금을 저린다는 김두한의 매서운 눈빛에는 아랑곳없이 시비를 이어 나갔다.
“네레 그렇게 쎄니? 나하고 한 번 붙어 보갔서?”
시라소니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김두한을 향해 무심한 듯 던지는 말에 좌중은 순간 물을 끼얹은듯 얼어붙었다. 시라소니가 뿜어내는 기세에 눌린 것이다. 김두한이 표정을 풀지 않고 빠르게 물었다. 김두한은 원래 청산유수 달변에 목소리가 힘이 있는 인물 이었다.
“누구요?”
시라소니가 무심한 듯 억양 없이 되받았다.
"내레 시라소니야!"
북한 전역은 물론 만주벌판에서 대도시 상해까지 평판이 자자했던 시라소니의 명성을 김두한도 이미 듣고 있었다. 그 자신, 조선 땅 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다고 판다하고 젊은 혈기로 만주로 진출하려다 일본국의 예비검속 때문에 좌절된 일이 있지 않았던가. 그 짧은 시간에 비록 학식은 없으나 타고난 머리가 비상했던 김두한은 번개 같은 판단과 결단을 하였다. 서로가 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당시 나이 29세 남짓에 김두한은 이미 전설의 주먹이었고 결코 추락할 수 없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시라소니는 그제서야 남한으로 내려 왔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천 상 주먹 잽이 이니 남한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단번에 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누구에게나 지지 않을 자신과 배짱이 있었고 실력이 있었다. 서울 중심에서 김두한에게 도전하여 그를 이길 수만 있다면 그의 입지는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될 것이었다. 반면에 김두한은 건국을 앞두고 건달세계를 떠나 이미 정치적 활동에 발을 들여 놓은 입장 이었다. 단순한 주먹 잽이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싸움이라면 져 본 적이 없는 김두한이지만 시라소니를 이겨도 별로 얻을 것이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미 술을 거나하게 마셔 근육의 긴장이 풀어진 상태이다. 더구나 싸움에는 분노나 증오 혹은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기가 살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인데 그는 시라소니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이 모든 복합적 판단을 하는데 불과 십여초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별안간 팽팽한 긴장을 깨뜨리는 호탕한 웃음이 김두한의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왔다. 홀안이 다 들썩거리게 호탕한 웃음이었다. 김두한은 육중한 몸을 일으켜 시라소니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 형이 시라소니요? 아 하하하! 반갑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나 김두한이오. 이리좌석으로 올라오시오. 내 앞으로 형으로 생각하고 모시겠소. 김두한은 시라소니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좌석 옆에 앉혔다. 시라소니 이성순도 당황하지 않고 한바탕 김두한 일행들과 인사를 교환한 후에 마음이 다 누그러진 시라소니는 김두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임자(평안도 지방에서 손 아래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가 날 이렇게 대해 주니 고맙구만. 내레 죽던 살던 임자를 꺽어 보갔다고 이렇게 불쑥 찾아 왔디만 임자는 진정한 사내이고 오야붕 이구만. 내 앞으로 임자를 동생으로 생각할 테니까니 서로잘 지내 보자우.”
그 날 이후로 시라소니 이성순이 종로로 나와 김두한에게 찝쩍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김두한의 일상과 그의 일상이 달랐으므로 다시 만날 기회도 없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일체 김두한에 대한 뒷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만큼 깔끔한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때, 김두한이 시라소니의 도발에 객기와 체면을 앞세워 싸움을 벌였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 둘의 싸움실력이나 타고난 맷집으로 봐서 두 사람은 중인환시리에 만신창이가 됐을 것이 자명한 것이었다. 그 후에 두 사람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얼굴이 형편없이 부어터진 거리의 싸움꾼 이미지만 남는 것이다.
남과 북이 갑자기 또 긴장국면에 들어섰다. 남 북 간의 비방이 또 시작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가. 1972년 2월 초에 서부전선에 배속되어 야간 경계근무에 나서니 남과 북 양쪽에서 고성능 스피커를 산등성이에 설치해 놓고 상호 비방전이 요란 하였다. 우리 병사들이 철책경계를 설 바에야 그들 병사들도 경계근무를 설 것이었다. 날은 우라지게 춥고 배는 고픈데 남과 북의 고성능 스피커는 인정사정없이 병사들의 귀청이 찢어지라고 큰 소리로 도발하고 있었다. 신경이 곤두서다 못해 신경과민에 걸릴 지경이었다. 남과 북의 선무방송은 양쪽 병사들을 선무하기는커녕 심신의 고통만 주는 것이었다. 엄동설한 칼바람 속에서는 선무방송이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 내내 우리 병사들은 내복과 방한복을 벗지 않았다. 전방소대의 열악한 환경에 목욕시설이 있을 리 만무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너무 추었던 것이다. 해충들은 따뜻한 내복 안에서 기어 다니며 창궐하고 있었다. 우리 병사들이 겨울 내내 해충들과 동거하다가 혹한의 겨울이 물러가고 봄볕이 내려 쪼이는 3월 하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겨울내복을 벗어 던지고 목욕을 하고나서 옷을 갈아입었던 것이다.
북한을 흔히 동토의 왕국이라고 한다. 동토(凍土)를 녹이는 것은 햇볕 밖에 달리 수단이 없다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판단이었고 나는 그 정책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족: 김두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전 통일부 부총리이며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던 권오기는 김두한을 이렇게 평가 하였다.
"체격이 장대하여 다소 위압감은 있지만 결코 야비한 인물이 아니고 신사적 이었다. 김두한 선생은 시원시원하고 상대에게 예의를 지킬 줄 아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다음은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서 박정권의 각료들에게 똥물을 뿌리기 직전에 발언대에서 발언한 내용의 녹취록이다. 그는 똥물이 든 보자기를 발언대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이렇게 일갈 하였다.
“이병철이 사카린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